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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하워드 진과의 대화(1992년)

by 마리산인1324 2007. 1. 26.

 

http://www.personweb.com/sub1/howord_zinn/index.html

 

 

 

[번역인터뷰]1992년, 하워드 진과의 대화

 






편집자 주)
최근 이라크전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북핵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 공군 폭격수의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반전운동가로 변신한 하워드 진의 인터뷰를 싣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인터리뷰-소리없는 프로파간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겠다.
이 인터뷰는 대안라디오(Alternative Radio)에서 감독 겸 제작자로 활동하는 데이비드 바사미언이라는 인물이 1992년 11월 11일, 하워드 진과 함께 나눈 대화록이다. 아래에는 원문에 충실하기 위해서 별도의 설명을 넣지 않았다. 다만 사진캡션과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몇 가지 인물, 사건 등에 대한 역자주를 달았으니 읽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인터뷰 마지막 부분이 잘렸는지 마무리가 시원스럽지 않다. 원문은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 http://www.zmag.org/zmag/articles/barzinn.htm

 

 

보스톤 대학 명예교수 하워드 진(80)은 미국에서 가장 독특한 역사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2차 대전 당시 폭격기 폭격수였던 그는 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civil right movement)'과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그의 독창적 저서 [미국민중사]는 대학교재로서 폭넓게 읽히고 있다. 그의 최근작은 [독립선언](인터뷰 당시-편집자주)이다.

 

Barsamian(이하 데이빗)> 당신의 성장기<주1>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진(이하 진)> 저는 주거단지가 아니라 브루클린의 슬럼가에서 자랐어요. 내 기억으론 뉴딜의 첫 번째 주택사업은 브룩클린의 윌리암스버그(Williamsburg)였을 겁니다. 부모님은 유럽에서 이주한 뒤 뉴욕 공장노동자로 생활했습니다. 노동계급가정이었지요. 양친은 노동자로 일하면서 만났습니다. 유태계 이민들이었는데,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시베리아 출신입니다. 언제나 이사를 해야했던 기억이 나네요. 학교도 한 군데 오래 다니지 못하고. 아버지는 늘 이직으로 시달리셨는데, 결국 실직상태가 되어 WPA<주2> 사업에 동원되었습니다. 난 언제나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죠. 우리가 살던 곳은 쾌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난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죠. 집보다 길거리를 더 좋아하고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내가 자랐던 방식이에요.

 

남들은 대학갈 무렵, 저는 조선소 노동자가 되었어요. 가족을 먹여살려야 했으니까. 전쟁 후에 이스트 사이드로 오게 되었죠. 공군에는 자원입대 했고 폭격수가 되었습니다. 참전하기 직전에 결혼했는데, 전쟁 후에는 쥐가 들락거리는 베드포드-스투베산트(Bedford-Stuyvesant)<주3>의 지하방에서 살았습니다. 릴리안 월 주거프로젝트의 혜택을 입게 되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저소득자를 위한 거주프로젝트 때문에 뉴욕의 이스트 사이드로 오게 되었죠. GI법안(GI Bill)<주4>덕에 대학으로 가게 되기까지 7년 동안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대학원 진학을 했고. 내 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두 딸은 간호학교에 입학했고.

 

데이빗> 집에서는 이디쉬(Yiddish)<주5>를 쓰나요?

진> 난 안 씁니다. 부모님은 서로 썼으니까 나도 알아는 듣습니다. 허나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영어로 말했지요.

 

데이빗> 당신은 언젠가 당신 아버지의 웨이터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어요. 아버지가 그 일<주6>을 오래 하셨다구요?

진> 아버지는 많은 유대식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17살 때 나도 그 일을 하게 했어요. 난 웨이터 일이 너무 싫었어요. 아버지 역시 그랬던 것 같고. 사람들은 아버지를 종종 “챌리 채플린”이라고 불렀습니다. 걸음걸이가 비슷했거든요. 아버지는 평발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오랫동안의 웨이터 생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버지는 매우 성실했습니다. 뉴딜시대 때 아버지는 루즈벨트의 열렬한 지지자였어요. 그 당시 실업자들이 대부분 그랬지요. 그때도 결혼식은 많이 있었지만 웨이터에게 돈을 주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WPA 지원으로 도랑 파는 일을 해야만 했지요. 결혼 전에 공장노동자였던 어머니가 결혼 후에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습니다.

 

데이빗> 집에서 책을 보거나 잡지를 볼 만한 조건은 안 되었겠군요?

진> 그렇죠. 집에는 책이나 잡지가 아예 없었습니다. 내가 처음 읽었던 책은 길거리에서 주웠던, 앞부분 몇 페이지가 떨어져나간 책이었어요. 하지만 뭐 상관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접할 수 있었던 소중한 책이니까요. <타잔과 오파의 보석>(Tarzan and the Jewels of Opar)이란 책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제목이지요. 집에 비록 책은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뉴욕포스트지가 창간할 때 있었던 사은행사, 그러니까 신문에 실린 쿠폰을 25센트와 함께 부치면 25권 짜리 찰스 디킨즈 선집을 차례대로 보내준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서슴지 않고 나를 위해 응모했습니다.

 

디킨즈는 나의 첫 작가였습니다. 물론 선집 가운데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예컨대 <피크위크 페이퍼>(The Pickwick Papers, 1836년) 같은, 있었어요. 난 순서대로 전부 다 읽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지요. 뉴욕포스트가 디킨즈의 소설을 순서대로 보내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이지요. 제일 처음 보내왔던 것은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1849년)였고 그 다음은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1837년), <돔비와 아들>(Dombey and Son, 1846년), 그리고 <블리크 하우스>(Bleak House, 1852) 였어요. 내가 13살 때 부모님이 타자기를 사주셨습니다. 비록 부모님은 타자기나 책에 대해서 무지하셨지만, 아들이 읽기와 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아셨으니까요. 그 후로 내가 아주 오랫동안 사용했던 ‘재생품 언더우드 No.5’를 거금 5달러나 들여서 사주셨어요.




데이빗> 2차 대전 폭격수 경험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강연이나 당신의 책에도 가끔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중에 유독 자주 언급되는 두 가지 작전이 있습니다. 체코슬라바키아 필센(Pilsen) 공습과 프랑스의 로얀(Royan)에 대한 폭격입니다. 그 두 가지 사건이 왜 그렇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나요?

진> 당시 그 두 작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죠. 공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던 많은 군인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는데... 공군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행 전에 브리핑을 받고는 브리핑대로 그 지역에 날아가서 폭탄을 떨어트리고 오면 끝입니다. 그곳이 어딘지, 누가 살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죠. 내가 마지막 출격을 했던 건, 독일에서의 작전이 거의 마무리되고 동유럽을 공격할 때였습니다. 헝가리와 필센을 폭격했던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전쟁 이후 그 공습에 관한 글을 봤던 기억을 합니다. 처칠의 회고록이었는데 필센 공습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는 그 뒤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필젠에서 온 부부 한쌍을 만났습니다. 주저주저하면서 말했죠. 예전에 필젠 폭격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들이 말하더군요. 그 폭격이 끝난 뒤 거리는 수 백, 수천 명의 시체로 뒤덮였다고.

 


진> 공군이 되어 3만 5천 피트 상공에서 폭격을 한다는 건 이런 겁니다. 비명도 안 들리고, 사람도 안 보이고, 피자국도 안 보이지요. 물론 토막난 시체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살육을 현대전이 저지르고 있는 셈이지요. 나는 그걸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군에서 내가 했던 일은 그런 것이었어요.

 

로얀폭격은 훨씬 더 쓰라린 경험입니다. 당시는 거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폭격임무는 없을 것이라고 들었는데, 연합군은 이미 프랑스를 회복했고 대부분의 독일을 점령했기 때문에 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들은 모두 몇 주 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기상나팔이 울렸습니다. 6시 폭격이 예정되어 있을 때나 울리던 시각이었죠. 영화에서처럼 침대에서 튀어나가 곧바로 비행기에 허겁지겁 올라타는 그런 건 아닙니다. 다섯 시간에 걸쳐 지리한 브리핑을 듣고, 장비를 점검하고, 전기보온비행복을 입어야 하고, 폭격브리핑, 조종사브리핑을 마쳐야 하며, 또 동그란 프라이를 먹어야할지 네모난 프라이를 먹어야할지도 고민하는 거, 그런 게 실제 폭격을 나가기 전에 해야할 일들이지요. 보르도 옆의 작은 해안마을을 폭격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습니다. 그 작은 마을의 이름은 로얀이었습니다. 누군가 지도상의 그 마을을 설명했을 때, 아무도 “도대체 왜 해야하죠?”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브리핑 때에는 질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라고 묻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부끄럽습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데, 왜 폭격을 해야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미 프랑스는 모두 연합군이 점령했는데 거길 다시 폭격해야 하는가 말이지요. 그 곳에서는 수천의 독일군이 전쟁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물론 누구를 해치거나 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모두 몰살시켰습니다.

 

모두 천 이백 개의 폭탄을 갖고 갔습니다. 2-3천 명의 독일군들 머리 위로 모두 1,200개의 대형폭탄을 떨어트렸습니다. 브리핑에서 들은 말은 그 폭격에서 우리가 투하할 폭탄은 여느 때의 폭격과는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보통의 폭탄이 아니라... 일종의 산탄형 폭탄인데, 개솔린 젤로 가득찬 긴 실린더형 폭탄이었죠. 우리에게 당시 그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린 개솔린 젤로 만들어진 폭탄은 지상에서 활활 타오르리라는 것쯤은 알았지요. 네이팜탄 말입니다. 그건 네이팜탄이었어요.

 


진> 종전 이후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조사를 했고, 로얀을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복원되었습니다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폐허가 된 도서관에 들어가 봤어요. 그리고는 그들이 그 폭격에 대해서 기록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폭격과 관련한 글도 쓴 적이 있는데... 그 폭격은 현대전의 우둔함을 상징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5분만 생각해봐도 당장에 그만둘 이 잔악한 짓을, 이 거대한 전쟁시스템은 군인들이 그 일을 하게끔 만듭니다. 우린 그 작은 도시를 파괴시켰고, 독일군 그리고 거기에 살던 프랑스 사람들을 말살했습니다. 어떤 글에서 나는 히로시마의 원폭과 내가 경험한 두 차례의 폭격을 비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을 나는 환영했는데, 그건 그때 내가 멀리 태평양지역으로 다시 가서 더 이상 폭격임무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데이빗> 1960년대 중반쯤 히로시마를 방문하셨죠. 그때 생존자들을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진> 그때는 정말 참담했습니다. 매년 8월에 약간의 미국인들이 히로시마를 방문합니다. 원폭투하를 기념하기 위한 국제적 모임 때문이지요. 우린 그때 생존자의 집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약간의 미국인, 프랑스인 그리고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방문단이었습니다. 마루에는 생존했던 일본인이 앉아있더군요. 우린 그를 부축해 일으켜서 방문객으로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습니다. 러시아 여성이 러시아의 전쟁고통을 설명하고 또 일본에 대한 조의를 표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했습니다만, 속으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솔직해지기로 했어요. 비록 일본을 폭격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폭격수였다는 말을 하기로 했습니다. 히로시마에서처럼 나는 무고한 사람들, 시민들을 폭격했노라고. 이제 막 내 차례가 되어서 일어나는 찰나, 내 눈에는 그리고 내 머리 속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 버렸어요. 눈 앞에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이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장님이거나 한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건 현실이었어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말문이 열리질 않았습니다. 그 뒤로 나는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았지만 그때와 같은 기분은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목이 메어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게 다였죠.

 

2. 부자와 백인들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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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1> 하워드 진은 1922년에 출생했다.
2
주2> 1935년 1월 미의회가 통과시킨 일종의 ‘공공근로사업’이었다. 노동자임금보다는 낮지만 실업수당보다는 두 배 가까운 임금으로 대량의 실업자들을 공공근로사업에 동원했다. 이 사업으로 2500개의 병원, 5900개의 학교, 1000여개 이상의 비행장, 13000여개 이상의 운동시설을 신축-보수되었다. 1935년부터 41년까지 이 사업에 투입된 재정은 모두 110억 달러에 달했다.
3
주3> 베드포드-스투베산트(Bedford-Stuyvesant) 지역은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역으로 주로 흑인들이 사는 곳이다. 미국이민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이 지역의 지지(地誌)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하시라.
http://www.nyc.gov/html/hpd/html/about-us/bed-stuy-walking-tour.html
4
주4> 정확한 명칭은 GI Bill of Rights이다. 미국은 2차대전 참전을 결정한 후, 종전 이후 발생할 대규모의 실업자와 귀환 군인들의 재취업-재교육을 위해서 이 법안을 입안했다. 대학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1944년 6월 22일 미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 따라서 퇴역 군인들은 대학, 전문학교, 각종 집업훈련원 등에서 재교육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모두 14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이 투입되었고 1956년 7월 25일 부로 공식 종료되었다. 이와 유사한 법안이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때도 만들어진 것을 보면, 가난한 청년들에게 재교육-취업이라는 미끼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세 살먹은 아이들도 알 수 있다. 물론 클린턴 같이 부유한 집안 자제들을 이같은 프로그램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음은 뻔했지만.
5
주5> 중부와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쓰기 시작했던 언어로, 헤브라이 문자로 표기
6
주6> 인터뷰 본문에는 ‘Bar Mitzvah’(son of commandments)라는 유태인들의 풍습이 나오는데, 아마도 하워드 진의 아버지는 결혼식날 열리는 이 ‘계율암송행사’의 진행을 담당하는 허드렛일을 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