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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책]하워드 진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by 마리산인1324 2007. 1. 26.
 
 
 
 
마르크스, 아직은 죽지 않았지만...
 
하워드 진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식상한 마르크스의 자기 변호
 
김성준(supilzip)기자
 
▲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표지
ⓒ2005 당대
경제학 개론서로 널리 알려진 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서 마르크스는 유모랑 눈 맞은 망나니에 생활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한량으로 묘사된다.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나 맬서스 등 고전 경제학의 대부들은 이론의 오류가 지적되더라도 한없이 너그럽게 다뤄졌으나, 마르크스는 사생활을 둘러싼 소문까지 냉정하게 다뤄진 것이다. 노골적으로 불공정한 부크홀츠는 케인스를 인용해 심지어 <자본론>이 아무런 경제학적 유용성이 없는 책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마르크스에 대한 우파들의 통상적인 백안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냉전의 경험이 있는 우파들이 마르크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태도는 동구권의 붕괴 이후에 보다 노골화된 듯하다. 그들은 현실 사회주의의 재앙에 대해 마르크스가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파들은 현실 사회주의의 사망선고와 함께 마르크스의 이론에도 사망선고를 내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마치 자기실현적인 예언이자 주술처럼, "마르크스는 죽었다"는 말이 주류 학자들과 언론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됐다. 절정에 이른 것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1989)>으로, 이제 우파들은 '이제 자유시장경제 이상의 역사는 없다'라고까지 선언하게 됐다.

<미국 민중 저항사>라는 책으로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하워드 진은 마르크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이런 '마르크스 사망론'이 도는 것에 반기를 든다. 이미 여성운동가 엠마 골드만의 삶을 그린 희곡 <엠마>로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경험이 있는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제 동구권에서 세워진 '경찰국가'들이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고, 오늘에도 마르크스의 주장들이 유의미함을 보여주려 한다.

그를 위해 하워드 진은 마르크스가 저승에서 다시 돌아와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의 희곡을 준비했다.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가 바로 그것.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뉴욕에 돌아온 마르크스를 통해 하워드 진이 되살리고 싶었던 그의 '본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마르크스가 다시금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현실 사회주의의 독재에 대해 마르크스 자신이 책임이 없음을 알리는 게 우선일 것이다. 그래서 극에 등장하는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실 사회주의를 주도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권력욕을 위해 자신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의 연장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체제와 자신이 꿈꿔온 사회주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극중의 마르크스는 '파리꼬뮌'을 자신의 사회주의가 구현된 이상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라고 할 가난한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합법적인 정치 기구인 '파리꼬뮌'을 말이다.

문제의 근본을 파악하는 '래디컬리즘', 노동자들의 '자발성'을 역설하는 마르크스는 우리가 알던 '혁명가'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리꼬뮌' 외에 마르크스가 꿈꿔왔던 사회주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책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희곡이라는 형식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극중의 마르크스는 여전히 비참한 자본주의 치하 노동자의 현실에서 자기 정당화의 근거를 찾을 뿐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해결되지 않은 '여전한' 문제 때문에 그를 성찰했던 '마르크스'가 여전히 의의가 있다는 하워드 진의 주장은 납득할 수 있는 것이고 수없이 반복된 논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로 돌아가면 해결될 수 있을 문제인가?

누군가의 읽기는 틀렸고 어딘가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읽기가 있다는 주장은 또 다시 어떤 읽기를 '진정한' 것으로 추인할 것인가 하는 '권력투쟁'의 문제를 남긴다.

애초에 '진정한' 마르크스를 확정하고 그를 교조화하려는 시도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여전히 마르크스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하워드 진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확실히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마르크스가 설득력을 잃었다는 것은 '왜곡'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마르크스를 읽어왔던 '하나의 방식'이 설득력을 잃었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진정한'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새롭게' 읽어낼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안타깝게도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기술도, 자본주의의 여전한 문제도, 또 현실 사회주의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는 주장도 새로운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 직접 희곡의 주인공으로 마르크스를 내세웠다는 사실 외에는 우파들의 '마르크스 사망론'만큼이나 식상한 것이다. 여기엔 이 책의 집필계획이 동구권이 패망하고 우파들의 '마르크스 사망론'이 기승을 부리던 10여년 전에 이뤄졌다는 것도 작용할 것이다.

책의 편집도 다소 불만스럽다. 출판사는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모르겠으나 정상적인 편집이라면 60페이지도 안될 것 같은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는 본문과 맞먹는 분량의 부록이 추가되고, 또 행간을 늘리고 글자크기를 달리하는 편법을 통해 160페이지의 단행본이 되었다. 도저히 문고본 이상으로 만들 수 없는 책을 이렇게 만든 시도는 다분히 '비양심적'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모습을 되살리려는 하워드 진의 의도를 살리려는 듯, 부록에 마르크스의 아내인 예니의 편지를 실은 것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평이한 말로 쓰인 편지를 '경어'로 번역한 것일까?

아직도 부인은 남편에게 경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하긴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여성 운동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도 우리 나라의 번역에서는 연인에게 '경어'를 쓴다. 아직도 이런 것들이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의역인가? 이러는 걸 '남'이 알까 무섭다).
 
2005-09-19 오후 8:1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