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2006-09-18 오후 5: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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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국내에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소개된 하워드 진의 역작 <미국 민중사>(유강은 옮김, 시울 펴냄)가 최근 완역돼 나왔다. 잡지 <작은책>의 안건모 편집장이 <미국 민중사>를 읽고 서평을 보내왔다.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1996년에 창간된 잡지다.
2004년까지 버스운전사로 일했던 안건모 편집장도 이 <작은책>을 통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안 편집장은 "한미관계가 여전히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며 "<미국 민중사>는 지식인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도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맥아더는 '양키 지배'의 시작을 알린 점령군 사령관이었다."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는 자들은 '빨갱이'다."
진보와 극우가 아직도 논쟁을 벌이는 내용이다. 사실 맥아더가 점령군 사령관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45년 9월 9일 발표된 '태평양 방면 미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포고령 제1호'의 서문만 보더라도 미군대가 점령군인지 해방군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으로 제국(諸國) 군대 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 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일본국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한국의 극우 세력은 사실 어떤 증거를 들이대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자기들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전시작전통수권을 준다고 해도 "작통권 환수. 철회하라! 철회하라! 철회하라!" 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쓰는 사람들이니 오죽하랴. 솔직히 '맥아더 논쟁'만 해도 그렇다. 그들에게는 미군이 점령군인지 해방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민중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아무리 책을 안 읽는 사람도 이름 한 번은 들어봤을 듯한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다. 책방에서 선뜻 집어들기에는 좀 부담이 되는 두꺼운 책이다. 두 권짜리인 데다 한 권에 2만4800원! 책값도 비싸다. 그러나 책을 안 읽고 집에다 진열만 해 놓아도 괜히 마음이 뿌듯해질 만큼 꼭 사고 싶을 정도로 디자인이 멋지다.
이 <미국 민중사>는 2003년 판을 번역한 것인데, 지난 2001년에도 <미국 민중 저항사>라는 제목으로 1999년 판이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2003년 판은 1999년 판에 '2000년 선거와 테러와 전쟁하기'를 덧붙여 요즘 형편을 반영했다. 또 새 번역판은 기존 번역판에서 빠진 장 몇 개를 더 추가했다고 한다. 하워드 진의 대표작이 제 꼴을 갖추고 국내에 선을 보인 것이다.
노예주의 및 인종주의와 함께 시작한 미국의 역사
나는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을 뒤늦게야 알았다. 도끼를 휘두르고 활을 쏘는 '나쁜 인디언'을 물리치면서 서부를 개척하는 '서부 사나이'의 나라로, 또 영국에 살던 청교도들이 종교탄압을 피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102명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면서 역사가 시작된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서른이 넘어서야 미국이 인디언을 학살하면서 성장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이 <미국 민중사>는 미국에서 100만 권이 넘게 팔렸다고 하는데 많은 숫자는 아닌 것 같다. 미국 인구가 3억 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말이다. 당연히 안 팔리겠지. 자기들 선조의 역사가 이렇게 추잡하고 악독했다는 사실을 밝힌 책인데 좋아할 리 있겠나. 이 책을 읽다보면 그저 악독했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섬뜩한 모습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콜럼버스는 이렇게 묘사된다.
"1495년에 콜럼버스 일행은 노예사냥에 나서 순진무구한 아라와크족 남자, 여자, 어린이 1500명을 스페인인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배에 실었다. 이들 500명 가운데 200명이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콜럼버스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계속 잡아 보냅시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투자한 사람들에게 배당금을 돌려주기 위해 노예와 황금으로 배를 가득 채우려고 안달을 했다.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아이티의 시카오 지방에서 14살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 달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가져오면 목에 구리표식을 달아줬다. 구리표식을 달지 못한 인디언은 발견되는 즉시 두 팔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런 사실을 미국의 교과서는 감췄다. 미국 오리건 주의 역사 교과서 <미국의 정신>에는 똑같은 일화가 이렇게 실려 있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카리브 해의 원주민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들과 평화롭게 살 수는 없었다." 이런 서술에는 콜럼버스가 원주민과 평화롭게 살 수 없었던 이유는 숨겨져 있다. 도대체 자신을 노예로 삼고 살육하려는 적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살겠는가?
인디언도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인디언은 거칠고 지략이 있으며 반항을 했다. 이주한 영국인들과 달리 숲 속 생활에도 익숙했다." 결국 백인이 인디언 대신 찾은 노동력은 흑인이었다. 1800년대에 이르면 1000만 명에서 1500만 명의 흑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로 수송됐다. 이 숫자는 아프리카에서 원래 잡은 수의 3분의 1이라고 했다. 이렇게 미국의 역사는 노예주의와 인종주의로 시작되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미국 이야기
177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선언서를 공포한다. 영국의 통치로부터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인간의 자연권과 계약에 의한 통치의 원칙을 밝혔다. 그러나 이 독립선언서는 명백한 허점을 안고 있었다. 하워드 진은 증언한다. "일부 아메리카인(인디언, 흑인 노예, 여성)은 독립선언서에 표현된 이런 단합된 이해집단에서 분명히 제외됐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이 노예제와 노예무역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표현하면서도 죽는 날까지 수백 명의 노예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 미국 헌법이 남부 노예 소유주의 이해와 북부 화폐 소득자의 이해를 조정한 타협의 결과라는 사실도 하워드 진은 전한다. 이런 사정 탓에 이미 찰스 비어드는 이렇게 경고했다. "모든 정부는 중립적이지 않다. 정부는 지배집단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한다. 헌법은 이런 이해에 봉사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노예 폐지를 둘러싼 남북전쟁도 미국 교과서에 실린 것과는 다르다. 링컨은 알려진 바와 같이 노예 해방론자가 아니었다. 링컨은 "만약 한 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밖에 이 책은 미국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미국 모습과는 다른 진짜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 전형적인 침략국의 모습이다. 하지만 늘 이기는 것만은 아니었다. 1964~72년에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무기를 썼지만 패배했다. 그리고 쿠바에서도, 한국전쟁에서도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미국 민중사>를 노동자가 읽어야 하는 이유
하워드 진은 <미국 민중사>를 '미국 혐오 역사책'이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들은 미국과 미국 정부를 혼동하고 있다. 내가 '미국 정부'를 비판한 것을 '미국'을 비판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18세기 건국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설계되었다."
나는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어서 며칠 동안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봤다. 그걸 본 사람들이 물었다. "지금 <미국 민중사>는 봐서 뭘 하려고?" 내가 이 책을 보는 까닭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독재자들이 가르쳐 준 대로 잘못 배웠듯이 미국 지배자들이 쓴 대로 잘못 배운 미국 역사를 올바로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대한민국이 미국에 강하게 예속된 상태라는 걸 곱씹어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나 같은 평범한 노동자도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안건모/작은책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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