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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조선창업, 과연 한반도의 자생적 산물인가(윤은숙, 교수신문 070205)

by 마리산인1324 2007. 2. 11.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2750

 

 

 

이성계는 고려계 몽골군벌- 조선개국사 재검토

학술동향_조선창업, 과연 한반도의 자생적 산물인가.
2007년 02월 05일 (월) 15:16:56 윤은숙 강원대 몽골사 editor@kyosu.net

원이 망해가며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백년간의 그들의 조상과 그들은 몽·원제국 옷치긴 분봉왕 휘하의 엄연한 몽골국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삼척에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에 옷치긴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남경 등지를 지배하는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 몽골족이 아니고는 좀처럼 잘 주지 않는 고위 군관직이다. 13-14세기 동북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지역의 유목·농경·수렵·어로라는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몽·원 제국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남달리 독립적인 세력을 강고히 형성할 수 있었다.
 

실은 1260년 이후 쿠빌라이 대칸이 실권자로 대두하기 이전의 고려는 옷치긴 왕가의 권역으로 팍스몽골리카 체제 속에서 자리매김 됐었다 하겠다. 그 후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에 쐐기를 박으면서, 옷치긴 왕가와 막대한 해상무역 이권이 달린 태평양의 제해권 쟁탈전을 치열하게 벌였다. 동해안과 연해주 및 타타르해협은 모두 원대 수타타르 여진의 주요 활동무대로서 이성계군벌의 그것과 서로 중첩되기도 한다. 그래서 최첨단 팍스몽골리카 체제의 무기와 조직, 전략과 전술을 확보한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 출신 이성계는, 몽골의 유목무력과 고구려·발해 이래의 산악전력 및 수전-해전력에 모두 능숙했던 터라 한반도 내의 전투에만 익숙했던 당시의 다른 고려 장수들의 군사집단보다 더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해, 몽골잔여세력이나 홍건군 및 왜구를 퇴치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고려 내에서 자파 군사력을 급속히 확장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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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 강원대 · 몽골사

 

 
필자는 강원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蒙·元帝國期 옷치긴家의 東北滿洲 支配 - 中央政府와의 關係 推移를 중심으로’를 썼다. 주요논문으로는 ‘칭기스칸 동도제왕의 분봉지와 그 발전’, ‘한·몽 말 문화 연구 試論’,‘몽·한 태교 관습 비교연구 시론’ 등이 있다.
4세기 말 몽골고원으로 패퇴한 북원은 중원 재진입을 노리고 있었고, 지금의 남경에서 명을 건립한 주원장은 원의 잔당들이나 북원 세력의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새 질서 탄생에 주력해야 했다. 고려는 이런 정세변화를 주시하면서 북원과 명에 대한 이중외교노선을 추구했다. 이들의 삼각균형은 북원의 기본 무력인 나가추가 명에 투항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중원 경영을 위한 요동지역의 군사거점을 상실한 북원은 이후 마침내 몽골스텝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명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요동 진출을 모색했고 그 일환으로 1387년 12월 철령위 설치를 시도했다. 나가추라는 완충지대를 상실해서 명의 군사적 위협에 직접 노출된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의 무인세력들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권문세족 출신인 최영과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상이하고, 장기전과정에서 탈고려 난민들을 수습해 세력화해낸 배경을 가진 이성계는 최영의 요동정벌에 흔쾌히 동참키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는 1387년 나가추 항복이후 1388년 4월의 토구스 테무르칸 북원정권의 궤멸 소식과 몽골 지배계층의 투항 도미노 등으로 소멸해가는 북원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무모한 요동정벌이 자파의 세력 유지-강화에도 무익함을 간파하고는, 1388년 5월에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결행했다. 이성계는 원·명 혁명과정에서 자신의 군벌모태인 원과 결별-독립하면서 재빨리 도리어 고려국내의 친원파에 칼을 돌려대며 신흥 명과 손을 잡아 내부 탈권투쟁에서 자파의 승리를 담보해갈 대외관계노선을 선택했다.

옷치긴 왕가 최후 주자 아자스리의 1388년 11월 투항 후인 1389년 5월 우량카이 3위의 설치 및 1392년 이성계의 조선조 창업은 명에게서 독립적인 왕가 경영을 보장받고 성립된 상호관계의 소산이라는 점에서도 서로 그 궤를 같이 한다.
 

 몽ㆍ원 제국이 죽어 넘어진 시신위에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2대 제국이 태어나는데, 하나는 1368년의 주원장의 명나라고 다른 하나는 1392년의 이성계의 조선국이다. 앞의 경우는 외세 몽골을 농민봉기로 몰아낸 한족 농민 봉기 영수가 도리어 일정한 수준에서 신흥 강남 지주세력과 결합해 세운 나라고, 뒤의 것은 외세 몽골의 옷치긴 왕가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출신인 이성계가 여말의 신흥사대부와 제 나름으로 손잡고 창업한 국가다.

 

앞의 경우는 자주적이고 뒤의 것은 예속적이라고도 비판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그래서 옷치긴 왕가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의 외형적 표방에도 불구하고 옷치긴 왕가 여진계 몽골군벌들처럼 실은 몽골로 집약-응축된 ‘팍스몽골리카체제의 중심’인 북방 유목 제국적 전통을 독자적으로 견지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성계가 자체 쇄신을 요구하는 당시 고려의 시대적 배경을 무대로 삼아 창업한 조선조는, 스키토·시베리안 북방민족사적 정통성을 의연히 담보해낸 신왕조라고 재평가해볼 수 있다.

 

윤은숙 / 강원대 · 몽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