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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동방의 영웅 칭기즈칸

by 마리산인1324 2007. 2. 11.

 

http://tong.nate.com/lydia98k/26524770

 

 

 

동방의 영웅 칭기즈칸

 

 

1.칭기즈칸의 생애와 업적...

 

  칭기즈칸의 본명은 테무친으로 1155년에 오논강 상부지역에서 테어났다. 하지만 1162,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의 왕인 테무친을 잡았을 때 태어나서 이름을 테무친으로 삼았다. 테무친은 태어날 때 한손에 핏덩어리를 쥐고 있었기에 주위사람들이 몽골을 통일할 인물로 점지하였다. 원래 영웅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고 시련과 고난이 있기 마련이듯 테무친 역시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에게 독살 당한 것이다 그 후 그의 아버지를 따르던 물들은 키릴투크를 따라나서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테무친의 나이가 너무 어려 부족민들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어머니 호엘룬과 그의 동생들만 데리고 도망을 쳤다. 그 후 호엘룬은 메르키트의 칠르게 보코의 아내였다 에수게이에게 납치되어 아내가 되었었는데 그걸 빌미로 그의 이복동생들은 테무친을 메르키트 자식이라고 놀려 화가난 테무친은 이복동생중 한명을 활로 쏘아 죽인다.그 후 테무친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타이추트족(키릴투크의 부족)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쳐해 있었다. 그 때 키릴투크의 시종인 소르간 시라의 도움으로 구사 일생되어 도망을 쳤다. 그 후 몽고제국의 최고의 가신이 되는 보루츠와 안다(의형제)가 되고 아내 보르테를 맞아들인다.. 하지만 메르키트부족이 쳐들어와 보르테를 납치해 가버린다. 이에 테무친은 절망하는데 호엘룬이 에수게이의 안다였던 커레이트족의 토릴칸을 찾아가라 조언한다. 토릴칸을 찾아간 테무친은 토릴칸이 자무카를 끌어 들인다면 군사 4만을 내어 준다고 하자 순순히 허락한다. 그 이유는 테무친과 자무카는 3번이나 안다의 연을 맺은 인물이 었기 때문이다. 자무카를 찾아간 테무친은 그의 부족 잘라이르의 진영을 보고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무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자무카도 순순히 그의 부탁을 들어 정병2만을 보내어 테무친을 도와 준다. 약6만대군을 이끌고 메르키트를 치니 메르키트는 버티지 못하고 대패하였고 테무친은 보르테를 구한다. 하지만 또다른 가족간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고 만다. 보르테가 임신을 한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째든 보르테를 구한 테무친은 자신의 부족민을 이끌고 자무카에게로가 그에게 의탁한다. 그리고 상인들을 이용해 자신에게 항복하면 배신자도 받아준다고 한다. 그러자 많은 부족민들이 그의 그늘로 들어왔고 자무카의 부족민 부다 테무친의 부족민이 더 많은 실정이었다. 그 에 자무카는 테무친에게 자신을 떠나 독립해라 하고 테무친은 부족민을 이끌고 자무카를 떠난다. 이에 테무친의 부족에서는 테무친을 칸으로 추대한다. 그리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칭기즈칸에 오른다. 이에 자무카는 테무친이 자신보다 먼저 칸에 자리에 오른 것을 질투 하여 13개 부족을 연합하여 테무친을 쳐 승리한다. 세월이 흘러 테무친의 부족은 다시 부흥하여 자무카 테무친 토릴칸 3개 부족으로 몽골 고원을 통치하는 구조가 되었다. 하지만 자무카 동생의 죽음으로 또다시12개 부족을 연합 테무친을 친다 이번에는 테무친이 토릴칸과 연합하여 오히려 승리 자무카는 패망하여 토릴칸에게 의탁한다. 나머지 11개 부족도 거의 멸망하다시피 하여 고원은 테무친과 토릴칸 2개의 강력한 부족만이 남았다. 하지만 토릴칸은 늙었기 때문에 테무친에게 모든 것을 넘겨 주려 하였지만 그의 아들 쉠김이 반대 테무친을 기습하여 승기를 잡아 테무친은 커레이트 족에게 대패하여 동쪽으로 후퇴를 한다. 하지만 또 다시 기운을 차린 테무친은 커레이트를 공격 커레이트를 멸망시키고 쉠김을 죽인다. 자무카는 나이만에게 의탁하고 토릴칸은 나이만에게 죽는다. 테무친은 고원을 통일하기로 마음먹고 나이만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만은 서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군사는 50만에 육박했는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러나 나이만의 왕인 타양칸은 왕비인 퀴베르에게 놀아나는 존재임을 안 테무친은 10만대군을 일으켜 나이만을 공략 지도부의 무능력으로 50만대군은 힘함번 쓰보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그후 테무친은 역사상 처음으로 고원을 통일하게 되고 쿠릴타이(고원 최대의 회의 기구)를 개죄 대칸의 자리에 오른다. 이 때 삼림족이 반란을 하고 3번의 원정으로 힘들게 진압하게된다. 그 후 금나라 황제인 장종이 죽자 칭기즈칸은 금을 치기위해 군사를 모으고 후방의 안전과 금의 반격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라(서하)를 공략 항복을 받아낸다. 그러자 그 서쪽에 있던 위그르가 복속을 자청하고 항복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10만 대군을 이끌고 서하를 우회하여 금나라를 공격한다. 그 거대하고 강하던 금나라도 만리장성이 돌파되자마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00년간 한족에 동화되어 힘을 잃은 것은 물론 부패 한인들의 불만 지도부의 분열등이 그 원인이었다(모든 북망민족이 망하게 된 원인) 칭기즈칸의 기병대는 순식간의 금나라의 대부분의 영토를 정복 수도를 둘러싸고 금나라는 항복하게 된다. 이에 칭기즈칸은 만족하고 군대를 고원으로 물린다. 하지만 금나라는 수도를 버리고 남하 변경으로 천도한다. 이에 칭기즈칸은 군대를 보내 도발한다. 그 때 호라즘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안 칭기즈칸은 그나라에 600명의 상인사신단을 보내 교역하고자 하였으나 호라즘의 이날축 성주가600명의 상인들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에 칭기즈칸은 분노하고 군대를 이끌로 호라즘을 치게된다. 호라즘은 아랍인들의 나라로 그 왕을 술탄이라고 칭하고 신을 알라라 칭하는 중아아시아의 최대 강국이었다. 하지만 그 왕인 술탄이 무능력하고 겁이 많아 전쟁은 칭기즈칸의 몽고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되었다. 이에 수도와 최고의 도시가 함략되자 술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죽는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군대도 피해가 켰다. 징기즈칸이 가장 아끼던 손자와 사위가 죽고 장자 주치가 호라즘의 영토 정복과정에서 징기즈칸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칭기즈칸이 다음 대칸의 후계자로 주치가 아닌 오고타이를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징기즈칸은 주치에게 계속하여 소환명령을 내리지만 주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뒤 주치는 나이만과 메르키트의 잔당이 쏜 독화살을 맞고 킵차크고원에서 죽어 징기즈칸에게로 돌어갔다. 칭기즈칸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하다 귀환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맹장 제베(뛰어난 활솜씨를 가진 인물로 고려인으로 추정되었다. 원래 칭기즈칸의 적이었다 칭기즈칸의 빰에 독화살을 쏘아 인연을 맺은 인물로 칭기즈칸에게 귀순한후 최고의 용맹과 지략의로 칭기즈칸을 보좌한다. 고려을 공략하다 김윤후에게 죽은 살리타이가 이때 제베의 부장이었다)를 잃게 된다. 그러자 칭기즈칸 자신도 죽음을 생각하게된다. 그때 서하가 배신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칭기즈칸은 고령으로 전쟁에 친정하였다 그러나 원정하던 도중 낙마로 부상을 당하고 유언으로 제국을 나누어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게된다.

첫째 주치가에게는 킵차크고원을 포함한 알타이 서쪽을 지배하게하고 국호는 킵차크한국이라하였다. 둘째 차가타이가에게는 남부 호라즘과 위그르 서요를 지배하게 하고 차가타이한국으로 명명하였다. 셋째 오고타이가에게는 나이만의 영지만 알타이 서쪽의 기슭 즉 중가리아 대평원을 주고 오고타이란국이라 이름지었고 마지막으로 막내 톨루이가에게는 트란속사니아 남부와 서쪽의 호라산 일대를 주어 일한국으로 명명 했다. 그 후 칭기즈칸은 죽어 브르칸산으로 그의 시체를 옮겼다. 하지만 정말 부르칸산에 묻혔는지는 모른다.


 

 

2.칭키즈칸의 몽고 제국

 

   칭기즈칸의 몽고제국의 정식 명칭은 에케 몽골 울르스 이고 수도는 울란바토르 황제의 칭호는 대칸 혹은 카한이라고 했으며 대칸에 오르는 길은 후계자로 점찍어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쿠릴타이라는 몽골 고원의 관습에 의해 만장일치제로 대칸이 된다. 몽고 제국의 영토는 인도, 고려, 일본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영토 남시베리아. 터키등 동 유럽 까지였다. 그 큰 영토를 다스리는 방법은 현지인이 다스리고 다루가치나 자루가치등은 보내 감시 간섭 명령등을 하였다. 그리고 역참제도를 마련 정복지의 정보를 신속하게 정단 보고 받았다. 법은 대야사라는 법을 사용 하였는데 이 대야사에는 전쟁에 관한 법과 여자에 관한 법 물에 관한법 등이 많이 계시되어 있다. 그리고 군대제도는 호장을 사용하였다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 전쟁의 군대 대부분은 기마대로서 이는 칭기즈칸이 대 제국을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국교로는 라마교를 받아들였지만 모든종교의 활동이 가능했다(그러나 빈약함)하지만 전쟁의 시기, 중용한 일의 성패, 길흉등 나라안의 중요한 일은 무당이 다른 종교를 대신하여 무당의 권위가 대칸에 맞먹을 정도로 높은 나라다. 경제의 대부분은 목축이다. 그렇기에 정복지의 대부분의 지역에 있는 성을 파괴하여 가축을 기르기 용이 하게 하였다. 하지만 상업도 많이 발전 하였기에 아랍상인들이 세금만 내고 제국 어디든 상업을 할 수도 있었다.(이 아랍상인들은 몽고제국에 많은 공을 기여하였다. 사신단이 되어 호라즘을 방문, 칭기즈칸에 대한 소문을 뿌리기도 하고 다른 지역의 정보를 물어다 주기도 하였다.)

  인재등용은 가문보다는 능력위주로 하였다. 비참한 노예도 재상이 될수 있엇다. 실제로 금나라의 신하였다가 칭기즈칸의 무장의 노예가 된 아율초재라는 인물은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제2대칸 오고타이칸대에 재상이라는 고원2번째 자리에 오르게 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배신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적 포함)은 모두 받아 들여 인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비단길을 통한 서역으로의 정복 활동으로 인해 중국의 많은 문물들이 아랍과 유럽등지로 이동하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3.칭기즈칸 사후 

 

  칭기즈칸이 서하원정 후 죽자 제국은 한번의 위기를 맞이 하였다. 바로 제2대칸의 선출이었다. 물론 칭기즈칸의 생에 셋째인 오고타이를 다음 대칸으로 지명했기에 오고타이가 오르면 되었지만 몽골의 고원 관습상 막내인 톨루이가 대칸에 올라야 했기에 문제는 커졌다. 뿐만아니라 쿠릴타이를 통해 대칸이 선출되어야 했는데 그 쿠릴타이를 열 수있는 사람이 톨루이 뿐이 었기에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2년간 그 결과 2년간 몽고제국의 대칸이 선출되지 못하고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이에 톨루이의 측근들은 유언은 무시하고 대칸에 자리에 올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둘째 차가타이의 권유로 쿠릴타이를 열어 오고타이는 대칸의 자리에 선출되어 올랐다. 대칸의 자리에 오른 오고타이는 금나라를 완전히 멸하고 싶어 직접 친정(이 당시 몽고제국은 대칸이 무조건 전쟁에 나서 지휘해야 했음)하여 금을 치고 고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승리에 기뻐 오고타이는 술로 세월을 보냈는데 형 차가티이의 충고로 다시 원정 준비를 하였다. 이 때 재상이었던 아율초재가 오고타이에게 러시아 원정을 하라고 하고 오고타이는 제국(4한국 포함)모든 장수들을 불러 의논한다. 이에 고려, 남송, 러시아3곳을 원정하기로 하고 고원 처음으로 오고타이가 원정을 친정하지 않고 수도에 남아 성을 세웠다(몽고는 성을 세우지 않음. 징기즈칸의 유언이기도 함)고려는 김윤후의 손에 죽은 살리타이의 부장이 그 원정을 계속하고 남송은 오고타이의 셋째 고추가 러시아 원정은 주치의 둘째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나머지 징기즈칸의 손자들이 이원정을 떠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방의 나라들이 몽고의 공격을 받게 된것이다. 이 원정은 고려 남송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러시아 만은 성공적으로 일을 마쳤는데 원정군을 러시아 뿐만아니라 터키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을 모조리 쓰어 버렸고 서유럽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사촌간의 불화가 터져 그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다. 오고타이는 형제간의 불화를 직접 체험한 인물로 사촌들간의 불화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에 원정군을 소환 서 유럽은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엇다. 그 후 오고타이가 사망하나 바투를 비롯한 추치가의 후손 톨루이의 후손은 그 장례식에 참석 하지 못하고 만다. 이때 쿠릴타이를 열 인물은 주치가의 장손(첫째가 죽어 둘째 바투가 장손역을 대신하였다) 바투뿐이었는데 오고타이 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은 바투의 러시아 원정군을 두려워해 수도로 오는 것을 저지하고 약간의 부족장들만 모아 임시 쿠릴타이를 개최 오고타이의 장남인 쿠유크를 대칸에 선출한다. 이에 바투는 그것은 가짜라고 선언하고 군사력으로 쿠유크의 오고타이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을 위협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에서 쿠유크가 죽고 바투는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정병을 이끌고와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새로이 구릴타이를 개죄 톨루이의 장남 몽케를 대칸에 선출한다(바투자신이 대칸에 올라야 하나 아버지 주치의 유언으로 대칸에 오르지 않음) 이에 몽케는 대칸에 오르고 일한국과 킵차크한국의 관계는 더욱 우호적이 되어갔다. 몽케는 전쟁을 치러 축소된 대칸의 위엄과 제국의 권위를 세웠다. 하지만 몽케는 얼마 안돼 죽고 그뒤를 그의 동생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몽케때 세력을 모으던 오고타이한국과 차가타이한국 그리고 쿠빌라이의 막내동생도 대칸의 자리가 탐이나 군대를 일으키게된다. 쿠빌라이는 남송원정군을 고원으로 보내 그들을 군사력으로 제압 대칸이 된후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고 황제의 칭호를 섰으며 국호를 원으로 고쳤다. 그때부터 제국이 완전이 금이가 원제국과 4한국이 서로 대립 연합한다.

 

 

4.원제국과 4한국의 관계

  원제국과 4한국은 몽고제국에서 나온 같은 핏줄이었다. 하지만 원제국과 4한국의 관계는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원제국의 황제 쿠빌라이는 킵차크한국 일한국의 원조로 나머지 두 한국인 차가타이한국과 오고타이 한국을 누를 수있었다. 왜 원제국과 4한국의 관계과 이렇게 되었냐하면 징기즈칸이 살아 있을 때부터 그러한 기미를 보였다 바로 징기즈칸의 4아들 중 주치와 차가타이의 갈등으로 킵차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이 이러한 갈등을 보였다. 주치가 장자이기 때문에 대칸에 올라야 하는데 차가타이의 반대로 대칸의 자리가 오고타이에게로 넘어갔기에 그의 후손들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오고타이한국과 일한국의 관계도 비슷하다. 그럼 원은 왜 일한국과 킵차크한국과 연맹한 것일까는 원제국의 대칸 즉 몽고제국의 대칸이 바로 일한국의 후손이기 때문이다(톨루이의 둘째 아들) 또 킵차크한국과 일한국이 서로 연맹한 이유는 원제국의 대칸이 일한국에서 나오도록 킵차크 한국의 군사적 도움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3개의 제국이 연맹하여 원을 다스렸다. 한마디로 원의 권략이 4한국을 다스리지 못하고 4한국이 독립된 권한을 가져 제국이 운영되게 된 곳이다.  

 

5.몽고제국이 망하게 된 원인.

 


  몽고제국이 망하게 된 원인은 여러게 있지만 가장큰 원인은 지배층의 분영과 대립이었다. 몽고제국의 지배층은 황금씨족으로 징기즈칸의 후손들이다. 징기즈칸은 자신이 죽고난 후 권력을 다툴까 큰 영토를 5개로 나누어 4개를 자식에게 1개를 대칸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 제국의 단합은 없어지고 4개의 한국에서 대칸이 되기위해 전쟁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칸의 명령이 4한국에 미치지 못하고 4한국이 독립된 권한을 가지게 된것이다. 이로 인해 제국이 완전 분열되어 버려 강력한 임을 잃어 원제국이 망하고 나아가 몽고제국 자체가 망해버렸다.

  다른 하나는 한족을 너무 무시 하였다. 비록 인재는 능력위주로 사용하였으나 그 외의 백성들 특히 한족(남송)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징기즈칸때에 부터 농경민은 우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경민은 전투력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징기즈칸은 자신의 후손들중 한족에 동화되어 성을 짓고 살거나 문자를 배우는 등 고원의 것을 버리는 사람이 없기를 재차 강조하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또 다른 것으로는 제국이 너무커 명령체제가 전달이 잘되지 않고 전쟁때마다 많은 사람을 죽여 나라를 다스릴 인재나 백성의 수가 부족했던 것도 그이유중 하나이다.


 

 

6.평가

 

   사인에 대해서는 서정 참가를 거부하였던 서하를 응징하려다 낙마로 부상하여 중국 육반산 남쪽 땅에서 죽었다는 설, 서하의 수도 닝샤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 시장강 부근에서 병사하였다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업적으로는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비단길을 다시 열고, 마르코 폴로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아시아를 왕래할 수 있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동서양의 문화교류는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위구르문화를 사랑하여 아들들에게 위구르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국자로 채용하였다. 이 문자를 바탕으로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다. 1206년에 만든 법전은 상당한 권위를 지닌 것이었으며 몽골법과 통치방식은 초기 러시아 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록 여러 문화를 파괴하였지만, 종교나 소수 민족 문제 등에는 관대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될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그를 비난하지만, 몽골에서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추앙하고 있다.

 

 

7.참고 사이트


참고자료. http://100.paran.com/search.php?kid=18816800

출처 : Tong - lydia98k님의 세계사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