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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몽골제국의 분열

by 마리산인1324 2007. 2. 11.
몽골제국의 분열

2006/12/18 18:51

http://blog.naver.com/inkisong76/32214481

 

 

 

몽골제국의 분열

 

바투의 유럽원정이 한창이던 1241년 12월 11일 칭기스칸의 세번째 아들이자 몽골의 2대 대칸 우구데이(Ogodei)가 사망한다. 우구데이칸의 죽음은 유럽의 왕국들을 몽골기병대의 잔혹한 말발굽에서 구해냈고, 거대한 몽골제국에 칭기스칸의 사망 이상의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칭기스칸으로부터 우구데이칸으로 이어지는 권력승계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혈족이 칭기스칸의 선택을 존중했으며, 신임 대칸에게도 신의와 복종을 아무 꺼리낌 없이 맹세했다. (심지어 장자가문의 수장 바투나, 차남 차가다이 조차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우구데이칸의 권력을 계승하는 상황은 그 전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먼저 대칸이 미리 정해놓은 후계자였던 삼남 쿠추(Kuchu)는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1236년 남송과의 전투중 사망) 이후 우구데이는 쿠추의 장자인 시레문(Siremun)을 선택하고 죽었으나, 우구데이가 죽고 섭정을 맡은 나이만족의 왕녀이자 그의 과부 카툰 투르게네는 자신의 아들인 구육이 대칸이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투르게네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섭정기간을 연장시키게 된다.




3대 대칸 구육



투르게네는 우구데이의 훌륭한 수족이었던 친카이와 야율초재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야율초재를 무슬림인 압둘 라흐만(Abd ar-Rahman)으로 교체시켰고, 야율초재는 분에 못이겨 카라코룸에서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1244년 6월). 이어 투르게네는 우구데이가 임명한 지방관들을 해임시키거나 주살하는등 자신의 뜻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숙청해 나간다.

비록 투르게네가 차가다이의 비호아래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그녀의 기반 자체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칭기스칸의 막내아우 테무게 옷치긴은 그녀의 통치 초기부터 공공연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며, 유럽에서 구육의 군대가 돌아와서 충돌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테무게 옷치긴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중심이었던 카라코룸 근방까지 들어오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것은 킵착의 칸으로서 실질적으로 제국 최고의 실력자이자 구육의 개인적인 적이었던 바투의 증오였다. 그는 유럽원정당시 구육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앙숙으로 돌변했으며, 투르게네가 구육을 대칸으로 선출하는 쿠릴타이를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방해하고 지연시켰다. 마침내 회의가 소집된 상황에서도 그는 병을 핑계로 불참하였다.


조치가의 군주이자 킵착의 칸 바투



1246년 오르콘의 상류에서 바투를 제외한 칭기스칸 혈족의 왕자들과 각 지역의 유력자들이 모였다. 이중에는 그루지야의 왕위계승자였던 다비드 나린(David Narin), 러시아 대공 야로슬라브, 아르메니아의 국왕 헤툼1세의 동생인 원수 셈파드(Sempad), 소아시아의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 4세(Qilich Arslan IV), 심지어 바그다드 칼리프의 사절단도 있었다.

이렇게 열린 쿠릴타이에서 황후 투르게네의 소원대로 그녀의 아들 구육은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구육자신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으나 오만했으며 독단적이었다. 그는 로마의 교황을 위협하는 서신을 보내는가 하면, 자신의 어머니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작은할아버지 테무게 옷치긴을 조사하고, 그의 측근들을 임의로 처벌했다. 차가다이가문의 후계문제에도 관여하여 후계자였던 카라 훌레구(Qara Hulegu)를 축출하고, 개인적인 친구였던 차가다이의 차남 이수 뭉케(Yisu Monke)로 갈아치운다. 또한 킵착의 칸 바투와 분란을 일으켜 제국을 거대한 내전의 소용돌이 입구까지 끌어들였으나 43세의 나이로 1248년 베쉬발릭에서 급사함으로서 가까스로 무마되었다.

이처럼 칭기스칸의 몽골 대 제국은 3대 구육칸의 등극시기에 이르러서 서서히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 분열의 양상은 더욱 심화되어, 그가 죽은 이후 몽골의 대칸은 몽골제국 맹주로서의 절대권력을 차츰 잃어가게 되었고, 칭기스칸 혈족의 지파들은 차츰 독자적인 세력권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몽골제국의 3대 대칸 구육의 치세는 2년을 넘기지 못했다. 구육칸은 특유의 독단과 오만으로 같은 칭기스칸 혈족들 중 많은 수를 적으로 돌려놓은채 사망한다. 칭기스칸 가문의 최고 연장자였던 칭기스칸의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을 비롯하여, 차가다이의 손자 카라 훌레구도 자신의 후계권을 빼앗은 구육에대한 복수심에 불타있었고, 제국의 재상이었던 친카이 또한 구육에게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킵착의 칸이자 몽골제국의 숨은 실력자였던 바투였다. 구육칸의 사후 섭정을 맡게 된 그의 메르키트 출신의 황후 오굴 카이미쉬는 이러한 잠정적인 적들을 주변에 산재시킨채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굴 카이미쉬는 대칸의 자리를 어떻게든 우구데이계 왕자들, 즉 구육의 조카인 시레문, 아니면 그녀의 아들인 호자(Khoja)에게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소망은 바투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무산되고야 만다.

바투는 구육에대한 원한을 잊지 못하고, 우구데이계를 대칸의 자리에서 밀어내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그는 톨루이의 과부이자 톨루이가의 지도자였던 케레이트의 왕칸 토오릴의 조카 소르칵타니와 합세한다. 이 왕비는 케레이트족 출신답게 네스토리우스교도였으며, 한 가문의 지도자에 걸맞는 매우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바투와 손을 잡고 톨루이의 장자인 뭉케를 대칸으로 지명하도록 바투를 설득하였다. 바투는 결국 뭉케를 선택했고 1250년 이식쿨 북쪽에서 소집된 쿠릴타이에서 뭉케의 선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차가다이와 우구데이 가문의 대표들은 그런 바투의 강요에 불복하고, 쿠릴타이가 열렸던 알락막 거영지를 떠나버린다. 이후에도 바투는 여러번의 쿠릴타이를 소집했으나 두 유력가문의 대표자들은 쿠릴타이 참석 자체를 거부했다.

바투는 더이상 차가다이와 우구데이 가문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인 베르케에게 쿠릴타이를 단독으로 맡겨버렸다. 베르케는 우구데이가의 사람들과 차가다이 울루스의 수령 이수 뭉케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뭉케를 대칸으로 선언해 버린다(1251년 7월). 이렇게 해서 제국의 권위는 명백히 우구데이가에서 톨루이가로 넘어가 버렸다.




바투는 뭉케의 대칸즉위를 결정적으로 도왔고, 그 댓가로 독립적인 권세를 구축했다.
심지어 바투 사망전까지 뭉케칸의 시대는 뭉케 - 바투의 공동통치기간으로 보는 학자도 존재한다.


이러한 정권교체가 비교적 큰 충돌없이 이루어진 것은 뭉케에 비해 우구데이가의 왕자들은 정통성 이외에는 어느것 하나 비교할 여지가 없을만큼 평범했다는 점. 그리고 뭉케의 뒤를 밀어준 바투가 가진 칭기스칸 혈족내에서의 위치와 영향력이 막강했다는 점을 들 수있다. 그러나 톨루이가가 우구데이가의 권좌를 차지한 것은 우구데이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정통성에대한 위반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쿠릴타이가 끝날무렵 우구데이가의 왕자들은 뭉케를 기습적으로 붙잡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이 되고, 현장에서 사로잡힌 우구데이가의 측근들과 고문들은 그자리에서 처형되었으며 왕자들은 뭉케에 의해 구금된다.

몽골제국의 제 4대 대칸 뭉케는 즉위 직후부터 피의 숙청을 시작한다. 우구데이계의 주요인사들은 차례로 처형되었고, 이 과정에서 구육칸 치세에 제국 제상을 지낸 친카이는 우구데이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살해당한다. 구육의 황후이자 섭정이었던 오굴 카이미쉬는 옷을 벗겨 심문하고 자루에 넣어져 물에 빠져 죽었다. 시레문은 뭉케의 동생 쿠빌라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참수당했으며, 구육의 어린아들 호자는 변방으로 추방되었다. 우구데이의 아들인 카다안과 손자 카이두는 자진해서 항복한 것을 인정받아 숙청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나중에 카이두는 우구데이의 정통성을 빌미로 들고 일어서 뭉케의 후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된다. 우구데이의 편에 섰던 차가다이 울루스의 이수 뭉케 역시 살해됐으며, 차가다이의 손자이자 유럽원정에서 바투와 대립한 부리는 바투에게 넘겨져 처형됐다. 차가다이 울루스의 수장은 원래 후계자였던 카라 훌레구에게로 넘어갔다.




구육 - 뭉케 칸 시기의 몽골제국 판도. 이 시기 바투의 킵착칸국은 거의 독립된 상태였다.


이렇게 뭉케의 대칸 등극 시기에 발생한 정권교체와 숙청의 피바람은 이후 칭기스칸 혈족 지파들간에 지울수 없는 골을 만들었다. 뭉케의 대칸 등극에 가장 큰 공신인 바투는 이 시기부터 발하쉬호 서쪽에서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었고, 우구데이 가문은 뭉케의 힘에는 굴복하였으나, 뒤로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칭기스칸 이후 가장 뛰어난 대칸으로 평가받는 뭉케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은 그의 치세중에 각각의 칸국들로 사분오열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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