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종교전쟁
![]() ![]() 2006/12/18 18:49 |
몽골제국의 종교전쟁
칭기스칸의 후예들은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당대최고의 문명권이었던 이슬람 문명권을 초토화 시켜버린다. 화려했던 이슬람제국들은 칭키스칸과 몽골제국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바그다드는 그 전 시대의 영화를 다시는 누리지 못했다.
화려했던 이슬람제국의 중심지었던 페르시아지방을 몰락시킨 인물은 일칸국의 대칸 훌레구. 만일 그의 장군 키트 부카가 제린(Zerin)근방의 아인 잘루트(Ain Jalut)에서 맘룩조의 바이바르스(BaiBars)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이슬람제국은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졌을것이다.
13세기 중반 무슬림의 부활에 가장 큰 공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훌레구와 같은 칭기스칸의 후예, 킵착칸국의 대칸 베르케(Berke)였다. 베르케는 훌레구에대해 공공연히 적대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무슬림들의 모든 도시를 약탈하였으며, 친척들과 상의하지 않고 칼리프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나는 알라의 도움을 받아 그에게 그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 Rashid ad-Din, Defremery pp.351-353 )
1259년 중국의 대칸 뭉케가 죽고,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간의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훌레구는 평소 가깝던 쿠빌라이를 지지할 수있는 힘을 비축해 놓아야 했다.(훌레구는 이미 중국의 패권에는 관심이 없을 정도로 부유했고, 평소 쿠빌라이와 절친했다.) 거기에 수시로 적대감을 표출했던 킵착칸국의 대칸 베르케의 존재로 인해 위협을 느낀 훌레구는 시리아 - 팔레스타인 방면군을 2만명으로 감축시키게 된다. 여기에 프랑크인과 몽골군과의 맹약이 깨어지면서 (아크레의 호족인 시돈(Sidon)백작 율리안(Julien)의 공격에 의한 키트 부카의 조카 사망과 그에따른 몽골군의 시돈 공격) 시리아 - 팔레스타인 방면의 몽골군의 위세는 눈에띄게 약화되었고, 이는 곧 카이로의 맘룩조 술탄들의 자신감을 일깨웠다.
여기에 희대의 명장 아미르 바이바르스의 존재로 인해 몽골군은 아인잘루트에서 크게 패하고, 키트 부카는 장렬히 전사한다. 이로인해 몽골의 무슬림 정복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아이윱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신생 이슬람 제국인 맘룩조는 몽골의 침략에서 안전해 질 수있었다.
1260년 맘룩조의 새로운 술탄이 된 바이바르스(1260 ~ 1277)는 킵착칸국과의 공조를 원했고, 훌레구를 경멸한 베르케는 그런 바이바르스의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1262년 겨울, 베르케는 훌레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일칸국과 킵착칸국의 전면전 양상을 보였다. 여기에 다시 차카다이 칸국이 가세하면서 기독교와 무슬림의 반목은 칭기스칸의 용맹한 혈육들끼리의 대결을 불러왔던 것이다.
결국 이런 종교적 차이에 의한 반목은 몽골제국의 내전을 일으켰고, 이로써 몽골제국의 끝없이 이어질것같았던 정복의 역사는 종지부를 짓게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훌레구의 기독교 선호와 그에 의해 내전이 일어났음에도 [--훌레구의 기독교 보호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훌레구 자신은 네스토리우스 교도가 아니었으며, 훌레구는 불교와 무슬림에도 관대한 편이었고, 페르시아 학문의 확실한 후원자였다. 바그다드의 파괴와 칼리프 압살은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욱 컸다고 보여진다 --] 일칸국은 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국가로 변모한다.
화려했던 이슬람제국의 중심지었던 페르시아지방을 몰락시킨 인물은 일칸국의 대칸 훌레구. 만일 그의 장군 키트 부카가 제린(Zerin)근방의 아인 잘루트(Ain Jalut)에서 맘룩조의 바이바르스(BaiBars)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이슬람제국은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졌을것이다.
13세기 중반 무슬림의 부활에 가장 큰 공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훌레구와 같은 칭기스칸의 후예, 킵착칸국의 대칸 베르케(Berke)였다. 베르케는 훌레구에대해 공공연히 적대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무슬림들의 모든 도시를 약탈하였으며, 친척들과 상의하지 않고 칼리프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나는 알라의 도움을 받아 그에게 그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 Rashid ad-Din, Defremery pp.351-353 )
1259년 중국의 대칸 뭉케가 죽고,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간의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훌레구는 평소 가깝던 쿠빌라이를 지지할 수있는 힘을 비축해 놓아야 했다.(훌레구는 이미 중국의 패권에는 관심이 없을 정도로 부유했고, 평소 쿠빌라이와 절친했다.) 거기에 수시로 적대감을 표출했던 킵착칸국의 대칸 베르케의 존재로 인해 위협을 느낀 훌레구는 시리아 - 팔레스타인 방면군을 2만명으로 감축시키게 된다. 여기에 프랑크인과 몽골군과의 맹약이 깨어지면서 (아크레의 호족인 시돈(Sidon)백작 율리안(Julien)의 공격에 의한 키트 부카의 조카 사망과 그에따른 몽골군의 시돈 공격) 시리아 - 팔레스타인 방면의 몽골군의 위세는 눈에띄게 약화되었고, 이는 곧 카이로의 맘룩조 술탄들의 자신감을 일깨웠다.
여기에 희대의 명장 아미르 바이바르스의 존재로 인해 몽골군은 아인잘루트에서 크게 패하고, 키트 부카는 장렬히 전사한다. 이로인해 몽골의 무슬림 정복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아이윱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신생 이슬람 제국인 맘룩조는 몽골의 침략에서 안전해 질 수있었다.
1260년 맘룩조의 새로운 술탄이 된 바이바르스(1260 ~ 1277)는 킵착칸국과의 공조를 원했고, 훌레구를 경멸한 베르케는 그런 바이바르스의 제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1262년 겨울, 베르케는 훌레구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일칸국과 킵착칸국의 전면전 양상을 보였다. 여기에 다시 차카다이 칸국이 가세하면서 기독교와 무슬림의 반목은 칭기스칸의 용맹한 혈육들끼리의 대결을 불러왔던 것이다.
결국 이런 종교적 차이에 의한 반목은 몽골제국의 내전을 일으켰고, 이로써 몽골제국의 끝없이 이어질것같았던 정복의 역사는 종지부를 짓게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훌레구의 기독교 선호와 그에 의해 내전이 일어났음에도 [--훌레구의 기독교 보호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훌레구 자신은 네스토리우스 교도가 아니었으며, 훌레구는 불교와 무슬림에도 관대한 편이었고, 페르시아 학문의 확실한 후원자였다. 바그다드의 파괴와 칼리프 압살은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욱 컸다고 보여진다 --] 일칸국은 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이슬람국가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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