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칸
2006/12/18 18:50 |
바투 칸
칭기스칸의 장자인 조치(jochin, zochin 각각 주인, 방문자의 뜻..어원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다)는 칭기스칸의 유년시절 메르키트에 잠시 빼앗겼던 칭키스칸 4황자의 어머니 부르테의 전적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칭기스칸도 조치의 출생에대한 의문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지는 않았으나 심적 앙금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것으로 부자간의 골이 깊어졌다. 1221년 4월 아무다리아강 하류의 우르겐치 공성전을 끝으로 조치는 더이상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자신의 속령 내에 있는 우랄스크에 눌러앉아 버렸다.
이런 조치의 행동은 칭기스칸의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나 1227년 조치가 사망하므로서 칭기스칸 장남가문의 숙청은 피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보다 6개월 먼저 죽은 장남 조치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조치의 차남 바투(Batu)이다. 그는 칭기스칸에게 이르티쉬 서쪽의 평원에 대한 지배권을 하사받았는데. 이 지역은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여기에 바투는 스스로 원정한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까지 획득, 흑해 북쪽의 광활한 초원지대와 우랄분지, 러시아의 공국들과 옛 킵착, 불가르의 영토,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근방에 이르는 거대한 속령을 거느리게 된다.
바투의 측근에는 순수 몽골인들이 얼마 없었는데 이는 칭기스칸의 '유언'에 의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칭기스칸은 바투에게 순수 몽골인을 4000명 이상 할당하지 않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때문에 바투의 군대는 순수 몽골인이 아닌 몽골의 기치아래 모여든 킵착, 불가르, 오구즈등의 투르크 계통 유목민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킵착칸국이 어떻게 그토록 빨리 몽골적 요소를 지우고 투르크화 되었는지도 이로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비추어 볼때, 바투대에 이르러서도 조치가의 정통성은 지속적으로 의심을 받았고, 이는 장자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대칸의 일족에 대한 눈에 띄는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투는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대칸 일족의 '보여지는 실력자'가 아닌 '보이지않는 실력자'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고수한다.
칭기스칸의 공식적인 장자가문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맡은 (오르다(Orda)가 장자였으나 일족에서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바투는 장자가문의 지위를 이용하여 몽골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그가 대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것은 그가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얼마만큼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는가라고하는 질문의 답변이 될 것이다. 그런 조심스런 행동으로 인해 바투는 칭기스칸 가문의 '조정자', '원로'로서 지위를 굳건히 하게 된다.
칭기스칸 일족 지파의 대표들이 모두 참여한 1237 ~ 1241년의 유럽원정은 순전히 바투 개인의 이익을 위한 원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시 바투의 용의주도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것이 마땅하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명분보다는 실리를 취하는 방향을 선호했고, 유럽원정역시 이와 같은 선상에 있었다.공식적인 총 사령관은 바투 본인이었고 전략적 지시는 수베테이가 맡았으나 이역시 바투의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오스트리아 근방까지 진출한 몽골의 대군이 얻어낸 정복의 수확은 바투가 독식하게 되었고, 이때 복속된 러시아의 공국들과 그밖의 많은 민족들은 200년 이상을 바투가문에 신속하게 된다.
장자지파의 수장으로서 바투의 영향력은 후계계승에도 보이지 않는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우구데이가의 훌륭한 지지자였으나 1250 ~ 1251년 바투는 그동안 지지하던 우구데이가를 몰락시키고 톨루이가를 옹립하기도 한다. 바투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다양하고 서로 상반된다. 사인 칸(Sain Qhan) 즉 '훌륭한 칸'이라 불리었으며 칭기스칸의 혈족들에게는 최고 중재자로 역할했다. 또한 그의 칸국은 Golden Horde, 즉 황금씨족이라 불릴만큼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기독교권에서 그는 악마의 화신 그 자체로 평가될만큼 잔혹하고 강력한 철권을 휘둘렀다.
정통성을 잃은 칭기스칸의 장자가문의 수장이었던 바투,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몰락했어야 했던 가문을 거대한 칸국으로 재 탄생 시킨 원동력이었다.
칭기스칸의 유언에 의해 몽골제국 2대 대칸의 자리는 칭기스칸의 셋째아들 우구데이(OgoDei)에게 넘어갔다. 장자 가문이었던 조치(jochin)가는 그 전부터 혈통의 정통성을 의심받았고 있었고, 정작 조치 본인은 칭기스칸 사망 이전에 숨을 거뒀기에 당시 조치가의 수장이었던 바투는 우구데이의 승계를 문제 삼을 수 없었다. 둘째 차가다이도 자신에게 주어진 속령에 만족하였기때문에 불만이 없었고, 넷째 톨루이는 불만을 표출하기는 커녕 우구데이 승계 전까지의 공백기간동안 옷치긴(Otchigin, 화로의 수호자), 즉 섭정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내었다.
우구데이 대칸은 화려한 영웅적 군주는 아니었으나 대범하고 공정한 군주였다.
몽골제국의 두번째 대칸인 우구데이는 희대의 영웅이었던 아버지의 장점중 어느것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칭기스칸의 아들들중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훌륭한 감각을 지녔으며, 끈기가 있었다. 서툴고 게으르고 유쾌한 주정뱅이였지만 극단적으로 관대하고 대범했으며, 술을 마시고 자기 방식대로의 통치를 즐기기 위해 절대권력을 이용하였으나 도를 넘지 않았고, 이 전대의 야삭(몽골군대의 기강, 군율)과 야율초재, 친카이같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이용하였기에 제국의 사무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북중국, 페르시아, 남러시아의 정복(남러시아 정복은 실제로 1239년 유럽원정중 완성된다)을 완성한 우구데이는 유럽원정을 명령했고(1234년), 이에따라 칭기스칸 가문 모든 지파의 대표들이 유럽원정을 위해 모였으니, 명목상 최고사령관이었던 바투와 그 형제들인 오르다(Orda), 베르케(Berke), 샤이반(Shayban),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육(Guyug, 3대 대칸), 카다안(Qada'an)과 그의아들 카이두(Qaidu), 톨루이(1232년 요절)의 아들인 뭉케(Mongke, 4대 대칸), 차가다이의 아들인 바이다르(Baidar)와 그의 아들 부리(Buri)가 그들이었다. 여기에 실질적 지도자였던 역전의 노장 수베에테이까지 합세하여 구성된 15만의 몽골의 유럽원정군은 참가한 인물들의 면면만을 살펴 보더라도 몽골제국에 있어서 유럽원정이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몽골군이 사용하던 활
사료에 따라 약간의 연도차이가 존재하지만 유럽원정의 첫 전장은 1236년 킵착 대초원의 카마 불가르(Kama Bulgar)인들의 수도였던 볼가강 근방의 볼가르(Bolgar, 오늘날의 Uspenskoye)였다. 볼가르는 순식간에 약탈당했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237년 러시아공국들에 대한 침공은 그들의 영토적 분열들로 인해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리아잔(Riazan)과 콜롬나(Kolomna)의 왕공들이었던 유리(Yurii)와 로만(Roman)형제는 러시아에서 가장 강한 군주였던 대공 유리 2세(Erzherzog Yurii II)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각각 자신들의 속령지에서 살해되었으며, 리아잔과 콜롬나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 저녁 무렵이 되면서 도시안에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사람조차 없었다."
- Povest o razoreni Ryazani Batyem 中
대공 유리 2세또한 몰로가(Mologa) 하류에서 벌어진 시타(Sita)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그 자신 또한 살해당한다. 이후 1240년까지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지역이 정복되었고, 키예프는 거의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공국 갈리치(Galich, 또는 Galicia)또한 철저히 유린당하고 대공 다니엘은 헝가리로 피신한다.
러시아 원정중 몽골 왕자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한다. 유럽원정의 총 사령관이었던 바투의 우월한 지위에 분개한 우구데이의 아들구육과 차가다이의 손자 부리가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우구데이는 구육과 부리를 불복종의 죄로 소환했고, 이어 톨루이의 아들 뭉케도 원정군에서 이탈하였으나 바투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부터 생겨난 바투와 구육-부리간의 불화, 바투와 뭉케간의 우정은 훗날 몽골 대칸 계승문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독일과 폴란드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튜튼기사단도 몽골기병의 맹공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1240년 겨울, 얼어붙은 비스툴라 강을 건너 바이다르와 카이두가 이끄는 몽골군의 일부가 폴란드 공격에 나섰다. 츠미엘니크(Chmielnik)에서 폴란드의 주력을 격파하고 크라코우(Cracow)까지 진격하자 폴란드의 볼레슬라브 4세(Boleslav IV)는 모라비아로 달아난다. 이어 바이다르는 라티보르(Ratibor)까지 진격하는데 이곳에서 실레지아 공 헨리(Henry)가 이끄는 폴란드군, 독일 십자군, 튜튼기사단으로 구성된 3만의 병력과 격돌하였다. 폴란드군과 독일 십자군은 전력상의 열세로 패주했고, 튜튼기사단은 전멸했다. 몽골군은 잔여병력을 추적하여 전멸시켰으며 헨리공도 왈슈타트에서 몽골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기세를 몰아 바이다르와 카이두는 모라비아마저 초토화 시켰고, 이후 신성 로마제국과 러시아를 위협하던 야겔로 왕조의 폴란드는 완전히 몰락한다.
바투가 이끄는 몽골 본대는 수베에테이의 지시아래 헝가리로 진격한다. 샤이반, 바투, 카디안이 지휘하는 3개의 분대로 나뉘어진 몽골군은 각각의 진로상에 있는 모든 영지를 약탈하고 파괴하며 페스트(Pest)에 집결한다. 헝가리 국왕 벨라 4세(Bela IV)는 서둘러 헝가리군을 집결시켰고, 모히(Mohi)남쪽에서 격돌하였으나 몽골군에 의해 격파당하였고, 헝가리군은 와해되어 버렸다. 다뉴브까지 진격한 몽골군은 헝가리 전 국토를 초토화 시켰으며 끝까지 저항한 몇개의 성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집단 처형과 주민학살이 이어졌다.
사요(Sajo)에서 벌어진 헝가리군과 몽골군간의 전투. 이 전투로 헝가리군의 주력 대부분이 와해된다.
이후 도망친 벨라 왕을 추적하기위해 오스트리아 근방까지 압박하던 몽골군은 1241년 대칸 우구데이의 사망으로 철수하게 된다. 대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앗틸라 이래 서방이 직면했던 최대의 위기를 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철수를 시작한 몽골군은 사로잡힌 포로들을 처형하고, 회군경로에 있는 불가리아를 비롯한 왈라치아, 몰다비아를 약탈하며 철수한다.
1236 ~ 1242년 6년간의 몽골 유럽원정을 통해 볼가강 서쪽 바투의 영지는 상당히 확대된다. 몽골의 전통에 의하여 본거지에서 가장 먼 영지를 하사받게 되는 장자가문의 계승자였던 바투는 유럽원정을 통해 얻은 막대한 영지를 손아귀에 넣는다. 드녜프르와 심지어 다뉴브 하구까지 장악한 바투는 이후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이름을 따서 '킵착의 칸'으로 불리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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