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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대원제국

by 마리산인1324 2007. 2. 11.
대원 제국

2006/12/18 18:54

http://blog.naver.com/inkisong76/32214574

 

 

대원제국

 

 

몽골제국의 4대 대칸 뭉케는 그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공동통치자였던 바투의 사망 이후 몽골제국의 유일한 군주로서 절대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칭기스칸 이후 최고의 대칸이라는 칭호가 무색치 않을만큼 훌륭하게 제국을 통치했고, 칭기스칸 혈족의 각 울루스들은 자의든 타의든 대칸의 권위에 복종했다. 그러나 뭉케는 열망하던 남중국 정복을 실현 시키지 못한채, 남송 원정중 이질에 걸려 사망한다(1259년 8월).

대칸 뭉케에게는 세 아우가 남아있었다. 쿠빌라이(Qubilai), 훌레구(Hulagu), 아릭 부케(Arigh Boke)가 그들이었는데, 이중 훌레구는 페르시아에 있었으므로 계승권을 주장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결국 다음의 대칸 계승권은 하북지방의 총독이었던 쿠빌라이와 몽골본토의 총독인 아릭 부케간의 대결구도로 성립된다.



  
쿠빌라이칸과 그의 황후

 

이 계승권자 두명중 형인 쿠빌라이가 아릭 부케를 앞질렀다. 뭉케 사후 하북에서 남송 원정군의 지휘권까지 물려받은(물론 임시였지만) 쿠빌라이는 남송의 대신 가사도(賈似道)와 서둘러 정전협정을 맺고 자신의 친위군과 더불어 몽골과 하북의 경계에 있는 자신의 본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1260년 6월 그의 군대에 의해 대칸으로 선언되었다.

칭기스칸 가문의 법에 따르면 쿠빌라이의 이 선언은 완전한 무효였다. 대칸의 선출은 전통적으로 몽골리아에서만 열릴 수 있는 쿠릴타이에서 미리 소집된 칭기스칸 혈족의 각 울루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선언되어야만 했다. 쿠빌라이의 이런 성급한 선언에 분개한 아릭 부케는 자신도 대칸의 칭호를 선언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결국 아릭 부케는 뭉케의 재상이던 케레이트 출신의 볼가이에 의해 카라코룸에서 대칸으로 선언된다. 이렇듯 몽골제국의 전통적인 쿠릴타이에 의한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선언된 두명의 대칸은 몽골제국 건국이후 최초의 계승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이 전쟁의 여파는 몽골제국에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히게 된다.

계승전쟁은 쿠빌라이에게 굉장히 유리했다. 그는 뭉케가 조직한 남송원정군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고, 풍요로운 중국의 지배자였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로 빠르게 진군하여 1260년 말에는 카라코룸을 비롯한 몽골 본토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아릭 부케를 멀리 쫓아내었다. 쿠빌라이는 카라코룸의 점령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카라코룸에는 소수의 수비대만 남겨놓은 채 자신의 속령인 중국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의 추격을 염려하여 자신을 지지하던 차가다이의 왕자 알루구(Alughu)에게 의탁한 아릭 부케는 이런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알레구와 그의 또다른 지지자인 우구데이의 왕자 카이두를 앞세워 1261년 초 카라코룸을 탈환한다. 쿠빌라이의 이런 안이한 실수로 인해 쉽게 끝날 수 있었던 계승전쟁은 혼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262년 말까지 팽팽하게 이어지던 두 계승자들의 군세는 아릭 부케의 지지자 알레구의 변절로 인해 쿠빌라이 쪽으로 급속히 기울게 된다. 혼란에 빠진 아릭 부케의 군세를 몰아내고 쿠빌라이는 카라코룸을 재탈환 했고, 아릭 부케는 동 - 서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두 적들의 사이에 끼인 형국이 되고 말았다. 결국 계승전쟁이 발발한지 4년째 되는 1264년 초에 아릭 부케는 더이상의 싸울 힘을 상실하였고,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후 아릭 부케는 사면되었으나 그의 측근들[--전 제국 재상이었던 볼가이를 포함해서--]은 모두 처형당했다. 아릭 부케도 사면이 되기는 하였으나 쿠빌라이에 의해 사실상의 포로로서 잡혀 있게 된다.

계승전쟁의 승자로서 당당히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였지만 몽골사회에서 그는 아직도 전통적 절차를 무시하고 대권을 잡은 군주로 낙인찍혀 있었다. 거기에 중국문명에 심취해있던 쿠빌라이의 성향은 아직도 몽골의 전통적 질서를 고수하는 많은 몽골인들의 불만을 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릭 부케는 몽골의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수호자로 인식되어갔고, 이를 계승하려는(단순 명분이지만) 움직임이 우구데이가의 울루스에서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다.

 


쿠빌라이칸 시절의 판도. 쿠빌라이의 치세부터 몽골제국은 거의 완전히 분열된다.

 

 

아릭 부케와의 계승전쟁에서 승리하고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는 이전대의 대칸들에 비해 약점이 많았던 대칸이었다. 그는 몽골제국 최초로 내전을 통해 대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으며 그 즉위 과정도 정통성이 실추되는 면모를 보였다. 그보다 더 큰 약점은 그가 중국의 문화에 과도하게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정복하고 옛 중국의 22개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하기를 원했다. 쿠빌라이는 천자를 갈망했고, 제국의 중심을 카라코룸에서 옛 북경 근처의 대도로 옮겨버렸다. 이는 몽골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건이었다.

몽골인들에게 몽골리아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곳은 그들의 발원지이며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생활의 터전이자 영혼의 고향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몽골인들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라시아 곳곳으로 퍼져나간 칭기스칸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몽골제국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칭기스칸 혈족의 가장 중요한 회의인 쿠릴타이도 전통적으로 반드시 몽골리아에서만 열리게 되어있었다. 더욱이 몽골리아지방은 칭기스칸에게 톨루이가가 상속받은 그들의 울루스이기도 했다. 이러한 몽골리아의 카라코룸에서 정복지에 불과한 중국의 대도로 제국의 중심을 옮겨버린 쿠빌라이에 대해 몽골의 전통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몽골인들은 심한 거부감을 느꼈고, 이는 쿠빌라이의 반대세력이 결집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칭기스칸의 정통 계승자 가문이었던 우구데이가는 1251년 뭉케의 집권 이래 거의 몰락해버린 상태였다. 같은 칭기스칸의 혈족 지파인 조치가, 차가다이가는 각각 킵착의 옛 영토와 투르키스탄에서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한 상태였고, 톨루이가는 훌레구가 중동과 아프카니스탄을 쿠빌라이가 몽골리아와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우구데이가 만이 변변한 세력 없이 이밀의 울루스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릭 부케의 편에 섰었던 우구데이가의 수장 카이두는 이렇게 몰락한 자신의 가문을 부흥시키고자 했고 그 희생양으로 차가다이가와 쿠빌라이를 선택했다.

1267년에 자신이 역량을 총 동원하여 투르키스탄을 침공한 카이두는 2년만에 차가다이가의 계승자인 바락(Baraq)을 패배시키고 그들에게서 트란스옥시아나만을 남긴채, 일리와 카쉬가리아를 포함한 투르키스탄의 실질적 통치권을 빼앗는다. 차가다이가의 후계자들 또한 자신에게 신속하게끔 하므로서 중앙아시아의 주인으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한다. 카이두는 곧 카간을 칭하고 몽골 전통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킵착의 칸이었던 뭉케 테무르(Mongke Temur)와 동맹을 맺고, 쿠빌라이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며 급기야 카라코룸을 향해 진격한다.




카이두의 카쉬가리아 지배시절 주조된 주화



1275년 쿠빌라이는 자신의 넷째아들 노무칸(Nomuqan)에게 군대를 맡기고 서몽골방면의 전선으로 출정시킨다. 노무칸은 여러 왕족들을 참모로서 데려갔는데, 그중에는 툭 테무르(Tugh Temur)와 뭉케의 아들인 시리기(Sirigi)가 있었는데, 이들은 내심 쿠빌라이에 불만을 품은 인물들이었다. 몽골리아 서남부의 알말릭에 도착한 이들은 1276년 결국 노무칸을 배신하고 그를 사로잡아 뭉케 테무르에게 넘겨버린다. 그리고 차가다이의 둘째아들인 사르반(Sarban)까지 합류시켜 카이두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린다.

이듬해인 1277년 카이두는 앞서 투항한 세명의 왕자들을 앞세워 알말릭에서 카라코룸으로 진격하였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쿠빌라이는 대송전선에 있던 자신의 가장 우수한 장군 바얀을 소환하였다. 바얀은 즉각 출정하여 오르콘 유역에서 시리기를 패퇴시키고, 이어 이르티쉬와 탄누 울라에서 세 왕자의 군대를 연달아 격파한다. 바얀의 기세에 눌려버린 세 왕자는 결국 자중지란을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툭 테무르가 살해되고, 시리기는 난전끝에 사르반에게 붙잡혀 버렸다. 사르반도 시리기와의 난전으로 인해 세력의 대부분을 잃고 결국 시리기를 넘기는 조건으로 바얀에게 투항해버린다. 1278년에는 킵착에 잡혀있던 노무칸마저 석방됨으로서 카이두를 중심으로 결성된 반 쿠빌라이 동맹은 구성원들의 무능함에 의해 첫번째 실패를 맛보게 된다.

 


카간의 즉위식 - 일 칸국 <Jami' al-Tawarikh ('Universal History' of Rashid al-din)>

 

그러나 카이두의 본진은 여전히 건재했을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그의 영향력은 한층 더 공고해진 상태였다. 10여년간의 침묵끝에 카이두는 1287년 칭기스칸 아우들의 자손들을 회유하여 쿠빌라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카사르(칭기스칸의 큰아우)의 손자인 식투르(Shiktur), 카치운(둘째아우)의 후손인 카다안(Qada'an), 그리고 테무게 옷치긴(막내아우)의 후손인 나얀(Nayan)이 있었다. 이들의 영지는 동몽골과 만주지역이었으므로 쿠빌라이는 동서로 적과 맞서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쿠빌라이는 카이두의 중앙아시아군이 동몽골 - 만주군과의 합류에 성공하면  자신이 매우 위험해 질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빌라이는 먼저 바얀에게 명을내려 서몽골방면의 카이두를 최대한 붙잡아 놓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의 친위군과 칭기스칸의 장군이었던 보오르추의 손자 이수 테무르(Yisu emur)를 데리고 만주로 향했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정복한 풍요로운 중국의 이점을 적극 활용한다. 그는 주요 전장이 될 요하의 하류에 양쯔강 하류에서 해로로 운송한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비축한다. 그리고 한족으로 구성된 수많은 보병군단을 조직하여 이를 적극 활용한다. 쿠빌라이의 유목+농경의 혼성군과 나얀, 식투르, 카다안의 유목기병군단의 전투는 매우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쿠빌라이는 7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네 마리의 코끼리가 끄는 지휘탑에서 직접 전투를 이끌었다. 치열한 전투의 결과는 수적으로 월등했던 쿠빌라이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나얀은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1288). 카다안은 쿠빌라이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테무르 울제이투(Temur Oljeitu)에게 격파당하고 케룰렌강 북쪽으로 도망갔다. 식투르도 앞의 전투의 결과를 보고 받고 쿠빌라이에게 투항함으로서 극동의 반 쿠빌라이 세력은 일소되었다.


元 成宗 Temur Oljeitu(1295 ~ 1307)

 

카이두는 극동의 동맹세력을 모두 잃었지만 역시 그 자신은 잃은것이 별로 없었다. 서몽골 방면에서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한 카이두의 군대는 항가이 산맥을 넘어 쿠빌라이의 손자 캄말라(Qammala)를 격파하고 카라코룸 북쪽 케룰렌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1289년 쿠빌라이는 서몽골의 전선에 친정할것을 천명하였고, 카이두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전군을 투르키스탄으로 물려버렸다. 이후 카이두는 산발적으로 카라코룸을 위협했지만 번번히 바얀에 의해 좌절당했고, 1293년에는 반격당하여 크게 패하기도 했다. 이 이후 바얀은 쿠빌라이에 의해 소환되어 제국의 재상으로 임명 된다.

1294년 쿠빌라이가 죽은 이후에도 카이두는 반 쿠빌라이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차가다이가의 후계자 두와(Duwa)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몽골리아의 카라코룸을 향해 진군했고, 쿠빌라이의 뒤를 이은 테무르 울제이투의 사위인 쾨르기즈를 붙잡아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나 1301년 카라코룸에서 벌어진 큰 전투에서 울제이투 황제의 조카 콰이산(Qaishan)에게 패한 카이두는 후퇴중 병사한다. 이후 카이두의 의지는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차파르(Chapar)에 의해 계승되나 끊임없는 전쟁에 염증을 느낀 두와에게 설득당하여 결국 1303년사신을 통해 쿠빌라이가의 제국 지배권을 인정하게 된다. 이후 차파르는 두와와 그의 아들 케벡을 상대로 투르키스탄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다 패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므로서 반 쿠빌라이의 지도세력이었던 우구데이가는 영원이 몰락하게 된다.

1303년 우구데이가의 실질적인 항복으로 몽골제국의 내분은 일단락 된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1303년 우구데이가의 항복과 몰락은 단순히 톨루이계 쿠빌라이가의 직접적인 견제세력이 사라진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건이다. 몽골 전통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지녔던 우구데이가의 몰락으로 대칸의 계승자인 쿠빌라이가 중국문화에 동화되어가는것을 견제할 직접적인 세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몽골제국과 창업자 칭기스칸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쿠빌라이의 계승자들은 제국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축이었던 몽골의 전통과 문화 대신 중국 제왕조의 정통성과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로서 쿠빌라이일족의 원 제국과 각 칸국들의 문화적 연결고리는 파괴되어 버렸고, 이 시기 이후 원 제국과 각 칸국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각 지역문화로 대체시키며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몽골제국인 쿠빌라이의 원제국 개창과 그 계승자들의 중국화로 인해 문화적으로 분열되었다.

 

 

명목상으로 쿠빌라이의 후손들은 원 제국의 황제와 더불어 몽골제국의 지배자인 대칸을 계승하여 각 칸국들에게 종주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시대부터 이루어진 문화적 분열양상은 점점 더 가속화 되어 몽골제국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몽골제국의 분열은 정치적인 이유 또는 전쟁으로 인한 국경으로서의 분열이 아닌 문화적인 문제로 인한 문화적 경계로서의 분열이었다. 칭기스칸 이후 인류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제국은 각 지역의 주요 문화에 동화되어버린 몽골인들 자신에 의해 문화적인 차이로 분열되고 말았다.

 

 

1. 쿠빌라이가의 대외원정

칭기스칸이후 최고의 대칸으로 칭송받는 몽골제국 4대 대칸 뭉케는 대초원의 유목민들이 상고시대 이래 가졌던 오랜 숙원을 성취하고자 열망했다. 풍요로운 중국대륙의 완전한 정복은 대초원에서 발원한 모든 유목왕조들이 꿈꾸던 이상이었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 이전에 유라시아의 초원을 호령했던 흉노, 선비, 위구르, 돌궐, 거란, 여진같은 유목왕조중 그 누구도 중국대륙의 완전한 정복을 이루지 못했다. 유라시아를 제패한 칭기스칸의 상승군대조차 이미 무기력해진 남송왕조의 저항을 쉽사리 분쇄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대칸 뭉케는 1253년 열린 쿠릴타이에서 동생 훌레구에게 시리아 정복을 명령하는 동시에 남쪽 한인왕조의 절멸과 중국대륙의 완전한 정복을 천명하였다. 이 남송원정에 중국문화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그 자신의 미래를 중국에서 찾고자 했었던 쿠빌라이도 형인 대칸 뭉케를 따라 참전하게 된다.



 

 

 

뭉케는 남송에 대한 몽골군의 총력전을 원했고, 1252년 쿠빌라이는 칭기스칸의 위대한 장군인 수베에테이의 아들인 우량카다이(Uriyanqadai)과 자신의 군세를 이끌고 송 제국의 측면으로 향했다. 섬서와 사천을 지나 운남에 있던 타이(Thai, 泰族)인들의 왕조인 대리(大理)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우량카다이는 티벳 남부를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1257년 우량카다이는 안남(安南, 베트남)의 칭왕조를 공격하여 하노이를 약탈하였고 국왕 칭타이동(陳太宗)은 1년만에 몽골에 신속함으로서 왕조를 보전하였다.

1259년 8월 대칸 뭉케는 합주(合州, 오늘날의 合川) 공성전중 걸린 이질로 사망하였다. 양쯔강 중류의 무주(武州, 오늘날의 武昌)를 포위하고 있던 쿠빌라이와 호남으로 진격하던 우량카다이는 급히 철군을 시작하였고, 곧이어 대칸계승에 전념하고자한 쿠빌라이의 정전제의로 남송은 숨돌릴 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계승전쟁의 승리로 대칸의 지위를 굳힌 쿠빌라이는 곧장 대송전선으로 향했다. 당시의 송 제국의 조정은 가사도(賈似道)의 농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있었고, 쿠빌라이는 바얀(Bayan)과 수베에테이의 손자인 아주(Aju)라는 두 명장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1268년 아주가 이끄는 원정군은 호북의 요충지 양양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한다. 5년을 끌었던 이 유명한 공성전은 수많은 영웅적 일화와 설화의 무대였다. 여문환의 끈질긴 수비는 몽골군의 의지를 수없이 꺽었고, 쿠빌라이는 엄청난 물량을 동원하여 양양 공성전에 임했다. 5년간의 치열한 공성전은 1272년 위구르인 아릭 카야(Ariq Qaya)의 요청으로 훌레구가 보내준 두명의 무슬림 기술자, 모술(Mosul)의 알라 웃 딘(Ala ad-Din)과 힐라(Hilla)의 이스마일(Isma'il)과 그들이 만든 만쟈니크(回回砲)에 의해 종결지어졌다. 흑색화약을 사용하는 페르시아산 투석기의 강력한 포격은 견고한 양양성의 성벽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1273년 2월 번성이 함락되면서 전세는 급격히 몽골군으로 기울였고, 송 조정과 몽골군 양쪽에서 심하게 압박을 받던 여문환은 번성이 함락된지 한달만에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양양성이 함락되면서 호북의 송군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아주와 바얀은 안휘성과 강소성을 연달아 제패하면서 남송의 수도인 항주로 치달아 도종의 뒤를 이은 다섯살짜리 황제인 공제(恭帝)를 사로잡아 대도로 보냈다.  이후에도 남쪽의 한족들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장세걸을 비롯한 송의 마지막 영웅들은 어린 황제 병(昺)을 데리고 해외로의 도피를 도모했으나 1279년 광주 애산도 근처에서 몽골함대의 공격을 받아 수몰되고 말았다.

중국 전역은 역사이래 최초로 유목민 정복자에게 완전히 정복당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고, 중국 한족에게 최악의 치욕을 안겨준 최초의 영예는 몽골리아 대초원에서 떠돌던 회색늑대의 아들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중국문화에 정복된 상태였던 쿠빌라이는 중국의 정복자인 그 자신이 중국의 진정한 천자가 되기를 갈망했다. 대원(大元)이라는 이름을 선택하여 중국 제왕조들의 정통성을 잇고자 했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골제국의 중심을 중국대륙으로 옮겨서 그의 제국이 진정한 중국의 제국이 되기를 원했다. 그가 중국의 합법적인 지배자가 된 후에 나타나는 대외원정의 성격을 비추어 보면 쿠빌라이칸은 더이상 몽골제국의 대칸이 아니라 중국 원 왕조의 세조(世祖)로 내비치게 된다.

 

 

쿠빌라이가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채택한 것은 元史의 기록에 따르면 지원(至元) 8년 11월 즉 1271년이다. 그러나 르네 그루쎄는 그의 저작 “L’Empire des stepps”에서 元朝 시작을 1280년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남송의 마지막 왕인 위왕(衛王)이 죽은 1279년 이듬해부터를 원의 공식 개시 연도로 본 것이다. 쿠빌라이가 大元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전에도 기술한 내용과 같이 이전 중국 제왕조들의 정통성을 잇겠다는 강건한 의지의 표시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쿠빌라이는 자신의 중국문화에 대한 선호성향과 중국의 전통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계승한 몽골제국 대칸의 권위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元 世祖 Qubilai Khan <1260~1294>

 

쿠빌라이는 중국의 천자 이전에 칭기스칸이 가지고 있었던 위대한 대칸의 권위를 상속한 몽골제국의 진정한 대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또는 중국의 천자로서 군림하는 이중정책을 추구하였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다른 독립적인 칸국들의 복종을 일관되게 주장하였고, 자신의 권위에 불복하는 우구데이가 - 차가다이가문을 응징하기위하여 그들과의 전쟁에 남은 일생을 모두 투자하였다. 그의 눈에 아우 훌레구가 지배하는 페르시아의 칸국은 단순히 ‘일칸(il qan)’ 즉 종속된 칸들, 자신이 거느리는 고위직 총독에 불과했다. 쿠빌라이는 죽는 순간까지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일관되게 칭기스칸의 계승자로서 활동했고, 칭기스칸의 계승자로 남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쿠빌라이는 역대의 그 누구보다 열의에 차있는 중국의 天子였다.




쿠빌라이가 만주의 반란군과 전쟁중 직접 탑승한 지휘탑



중국문헌에 기록되어있는 쿠빌라이(世祖)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긍정적이며 그에게 정중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가 없다. 몽골인과 그들의 야만성에 대한 한족사가들의 경멸과 분노는 곳곳에 상적해 있었다. 처음으로 유목제국에게 전 국토를 내어 준 치욕은 중화사상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한족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다. 그들이 본 쿠빌라이는 잔인한 몽골의 오랑캐가 아니라 열정적이고 뛰어난 중국 天子의 모습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제왕조들의 충실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그는 이미 멸망한 송의 각 기구들과 행정요원들을 보전하였고, 그들을 회유하기위해 노력했다. 그에 의 해 중국 전역의 역참이 활성화되었고, 대운하가 완성되어 전 중국의 물류체계가 신속하게 변화하였다. 그는 북송의 왕안석이 개창했다가 곧 폐지된 농민구휼제를 부활시키고, 공적부조를 확충하여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쿠빌라이의 조치들은 중국의 전통과 매우 유사하여 한족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으며, 쿠빌라이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깊히 심취해있던 불교가 그에게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결과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그의 일련의 조치들은 마르코 폴로의 진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쿠빌라이칸 치하의 중국에서는 가난한 가정에 쌀과 기장이 정기적으로 배급되며, 쿠빌라이칸 자신도 자신의 사재로 매일 대도의 빈민 3만명을 먹였다’ 라고 진술했다.

 





쿠빌라이는 역대 중국왕조들의 대외정책도 계승한다. 그는 大元의 국호를 채택하자마자 주변에 있는, 역대 중국왕조들이 위성국으로 간주해온 국가들에게 신하의 예를 요구하였다. 뭉케의 치세에도 치열하게 저항하던 고려는 쿠빌라이대에 이르러 최씨정권이 붕괴됨과 동시에 완전히 복속되었고, 충렬왕(忠烈王, 1236~1308) 때부터는 大元의 부마국으로 전락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자였던 호죠 도키무네(北條時宗, 1251~1284)는 쿠빌라이의 요구를 묵살해버렸고, 이에 분노한 쿠빌라이는 1274년 고려를 위협하여 150척에 이르는 함대를 파견했으며, 쓰시마와 이키를 초토화 시키고, 큐슈의 하카타만에 상륙하나 왜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회군하기에 이른다. 1281년 몽골인 45,000명과 고려인 - 한인 120,000명으로 구성된 대 함대를 재차 파견하나 1281년 8월 15일의 지독한 태풍[=일본인들은 神風이라 부른다=]으로 인한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대패한다. 1280년 인도차이나참파(占婆)왕국[=인도차이나 중남부, 현 남부베트남지역. 인도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의 인드라바르만 4세(Indravarman IV)는 쿠빌라이의 권위에 복종하고자 했으나 백성들은 중국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수이게투가 지휘하는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수이게투는 참파의 수도 비자야(Vijaya)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참파군의 지독한 게릴라전을 견디지 못하고 철군해 버린다. 1285년에 쿠빌라이는 대규모 인도차이나 원정군을 조직하여 파견하였는데, 지휘관이었던 토곤(Toghon)과 수이게투는 안남의 수도인 하노이까지 점령을 하나 고수하지 못하였고, 토곤은 하노이 외곽의 델타지역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중국으로 쫓겨났고, 수이게투는 예안(義安)근방에서 안남 게릴라군에게 기습당하여 살해되었다. 1287년도에 원정군을 파견하나 점령한 하노이를 고수하지 못하고 또다시 철군하고 만다. 이후 쿠빌라이의 계승자 테무르 황제는 1294년 안남과 참파의 국왕에게 종주권을 인정받고 무력침공의 의지를 거두게 된다. 인도차이나의 또다른 왕국인 파간왕국역시 쿠빌라이의 원정군에게 약탈당하고 신속했으며, 테무르황제 시기에는 캄보디아와 타이의 두 왕국, 차앙마이(Chiangmai)와 수호타이(Sukhotai)도 종속국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1293년에 파견된 3만의 자바원정대는 자바에서 가장 강력했던 케디리(Kediri)의 왕을 마자파히트에서 격파하고 수도 다하(Daha)를 탈취했으나, 라덴 비자야(Raden Vijaya)의 필사적인 저항에 눌려 배를 타고 회군해버렸다. 라덴 비자야는 이후 자바에서 마자파히트 제국을 세웠다.

이처럼 쿠빌라이가의 大元은 주변국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이 전대의 몽골제국이 보여주는 철저한 약탈과 파괴, 정복지 지배층에 대한 학살과 공포정치의 형태를 보이지 않으며 정복보다는 복속시켜 신하국으로 삼는 전형적인 중국왕조의 형태를 답습한다. 물론 인도차이나와 자바섬의 열대 밀림이라는 생소한 지형과 무더위, 풍토병, 그리고 토착민들의 끈질긴 게릴라전에 몽골군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면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수많은 원정 중 토착세력을 완전히 정복하거나 파괴한 사례가 없다는 것은, 쿠빌라이가 추구한 원정이 단순한 정복원정이 아니라 그들을 복속시켜 元朝가 이전 중국 왕조들이 누렸던 종주국의 지위를 재확인하기위한 수단으로서의 원정의 성격이 짙다 하겠다.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쿠빌라이는 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중국의 天子로서 군림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의 치세 중에 보이는 활동의 대부분은 중국의 天子로서 중국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쿠빌라이의 정책은 다른 독립적인 칸국들과 몽골인들의 불만을 샀으며, 점차적으로 몽골인들을 소외시켜나갔고, 쿠빌라이의 재능을 완전하게 물려받지 못한 이후 후계자들이 쿠빌라이의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 몽골제국과 몽골인들의 붕괴와 몰락을 촉진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