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이슬람침공2- 아인잘루트 몽골 북방
2006/12/18 17:13 |
몽골의 이슬람 세계 침공 <2>-아인 잘루트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사무엘상 18장 48~49절
훌라구가 대칸 뭉케로부터 명령받은 영역은 '아무다리야 유역부터 이집트의 끝' 까지였다. 이제 바그다드를 털어먹었으니 그 명령의 반은 실행한 셈이었다. 나머지 반을 실행하기 위해서 훌라구의 군대는 시리아로 향했다.
당시 시리아는 100여년전 십자군이 달려들었을 때와 거의 상황이 비슷했다. 준비는 거의 안돼있었고 각 도시의 지배자들은 제각기 놀았으며, 대책없이 무너지기 바빴다. 도대체 이마드 알 딘 장기와 누르 알 딘, 살라딘이 세워놓은 제국은 어디로 증발했냐고 무슬림들에게 따져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제국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느라 나름대로 바빴기에 몽골군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눈치빠른 몇몇 무슬림 영주들은 자신들의 약해빠진 힘으로는 훌라구에게 저항해봤자 시체만 늘릴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모술의 아타벡(대개 투르크에서 왕자들의 고문관 역할을 담당했으나, 하도 왕자나 왕족들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 많았기에 도시나 작은 지역의 지배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인 바드르 앗 딘 룰루는 나이가 80이 넘었음에도 재빨리 항복, 훌라구가 그의 군대를 이용할 수 있게 했으며, 파르스의 아타벡인 아부 바크르도 항복했다.
1243년 쾨세닥의 패배로 인해 몽골의 세력권에 들어온 룸셀주크의 군주들도 훌라구에게 항복했다. 나라는 하나인데 어째서 군주'들'이라고 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당시 룸셀주크의 술탄은 클르츠 아르슬란 4세와 케이카부스 2세가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이게 다 몽골때문이다.
아무튼 케이카부스 2세는 정치적 줄타기에 능하지 않았던 관계로 훌라구의 속을 긁어놓고 말았고,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과 같이 종교적 토론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짐에 따라(즉, 죽음이 임박해왔기에) 이제는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훌라구의 진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갔다. 자신의 초상화를 훌라구의 발 밑에 깔고는 엎어져서 싹싹 빌었고, 그 현명한 처사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남들이 뭐라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이다. 이후에도 이 둘은 서로 티격태격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룸셀주크를 그럭저럭 다스려 나간다. 잘 다스렸다고는 못하겠다.
1259년, 이제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을 혼내주러 갈 시간이란걸 안 훌라구는 군대를 나누었다. 선봉은 키트 부카가 맡았고, 우익은 바이주와 쉬크튀르, 좌익은 수쿤착이 담당했으며 중앙군은 훌라구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그들의 첫 먹잇감은 디야르바키르와 마이야파라킨의 지배자 알 카밀이었다.
그는 항복할 마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아니, 지금은 없었다. 원래는 그도 훌라구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그 충성을 집어치웠기에 그는 훌라구에게 패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처럼 먹지도 못하는 돈 잡고 있다가 저승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 돈을 들여 성벽을 보강하고, 병사를 모으고, 주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몽골군에게 대비한다.
훌라구는 바쁜 사람이었기에, 도시 하나하나 붙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들 요쉬무트와 장군 순타이 노얀이 달라붙어 공성을 했고, 알 카밀의 준비는 반쯤 맞아떨어져 공격은 무려 2년이나 끌었다. 물론 그동안의 외부의 도움은 없었다. 외부에서 그나마 강력한 세력이던 아이유브조의 군주 안 나시르 유수프는 어떻게 하면 호레즘의 술탄 무함마드처럼 도망을 잘 쳐볼수 있을까를 연구하는데 정력을 바치고 있었고, 다른 도시의 군주들은 먼 지중해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이 되자 마이야파라킨은 항복한다.
당연히도, 마이야파라킨의 주민은 대학살을 당했고, 알 카밀은 끌려나가 온몸이 칼로 천천히 잘려나가는 형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겠지만, 문제는 잘라낸 살을 알 카밀에게 억지로 먹였다는 것이다. 결국 알 카밀은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의 목은 경고의 표시로 다마스쿠스의 문에 걸리게 되었다.(물론 몽골군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다음의 이야기다)
몽골이 슬슬 무슬림 세계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준비를 하고 있는 13세기 중반, 아직까지 십자군이 남아있었다. 예루살렘도 빼앗긴 주제 거기서 뭘 더 볼게 있다고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되면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튼간에 맨날 무슬림 세력에게 밀려나기만 하던 아르메니아와 트리폴리와 안티오크는 이때가 바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1세와 그의 처남이자 트리폴리, 안티오크의 지배자 보에몽 6세는 몽골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군대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훌라구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을 탈환해 돌려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마이야파라킨을 떨어트린 훌라구는 북부 유프라테스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에데사나 하란을 무너뜨리고 본격적으로 시리아에 들어와 분탕질을 시작한다. 알 무이잠 투란 샤가 지키던 시리아의 큰 도시인 알레포에 맞딱뜨린 그들은 그러나 11세기 후반 안티오크나 예루살렘의 성벽을 공성이랍시고 맨몸으로 달려든 1차 십자군과는 급이 달랐다. 투석기 20대를 동원, 7일만에 성벽을 함락시키고 30일만에 성채도 함락시킨 그들은 실컷 약탈을 하고, 알레포의 대모스크와 일반 모스크들도 불탄다. 이때다 싶은 기독교도들도 실컷 난동을 부리고 약탈을 한다. 뭐, 설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안 나시르 유수프는 그의 연구를 끝마쳤다. 연구 결과는 '몽골군이 오기 전에 잽싸게 도망가자' 였다. 알레포가 함락당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마스쿠스에서 도망나와 이집트로 향한다. 문제는, 이집트는 카스피해와는 달리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아이유브 왕조와 거기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매우 싫어하는 맘루크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입구 가자에서 들어가서 죽을것인지 여기있다 죽을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명색이 시리아의 지배자라는 인간이 이따위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지배받는 사람들이 뭔가 열정적 조치를 취할리 없다. 하마는 싸워보지도 않고 함락되고, 고도(古都) 다마스쿠스 역시 조용히 항복한다. 키트 부카는 이후 열렬하게 뛰어다니며 시리아를 점령한다. 안 나시르 유수프는 햄릿마냥 고민하다가 사로잡힌다.
아무튼 케이카부스 2세는 정치적 줄타기에 능하지 않았던 관계로 훌라구의 속을 긁어놓고 말았고,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과 같이 종교적 토론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짐에 따라(즉, 죽음이 임박해왔기에) 이제는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훌라구의 진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갔다. 자신의 초상화를 훌라구의 발 밑에 깔고는 엎어져서 싹싹 빌었고, 그 현명한 처사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남들이 뭐라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이다. 이후에도 이 둘은 서로 티격태격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룸셀주크를 그럭저럭 다스려 나간다. 잘 다스렸다고는 못하겠다.
1259년, 이제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을 혼내주러 갈 시간이란걸 안 훌라구는 군대를 나누었다. 선봉은 키트 부카가 맡았고, 우익은 바이주와 쉬크튀르, 좌익은 수쿤착이 담당했으며 중앙군은 훌라구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그들의 첫 먹잇감은 디야르바키르와 마이야파라킨의 지배자 알 카밀이었다.
그는 항복할 마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아니, 지금은 없었다. 원래는 그도 훌라구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그 충성을 집어치웠기에 그는 훌라구에게 패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처럼 먹지도 못하는 돈 잡고 있다가 저승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 돈을 들여 성벽을 보강하고, 병사를 모으고, 주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몽골군에게 대비한다.
훌라구는 바쁜 사람이었기에, 도시 하나하나 붙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들 요쉬무트와 장군 순타이 노얀이 달라붙어 공성을 했고, 알 카밀의 준비는 반쯤 맞아떨어져 공격은 무려 2년이나 끌었다. 물론 그동안의 외부의 도움은 없었다. 외부에서 그나마 강력한 세력이던 아이유브조의 군주 안 나시르 유수프는 어떻게 하면 호레즘의 술탄 무함마드처럼 도망을 잘 쳐볼수 있을까를 연구하는데 정력을 바치고 있었고, 다른 도시의 군주들은 먼 지중해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이 되자 마이야파라킨은 항복한다.
당연히도, 마이야파라킨의 주민은 대학살을 당했고, 알 카밀은 끌려나가 온몸이 칼로 천천히 잘려나가는 형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겠지만, 문제는 잘라낸 살을 알 카밀에게 억지로 먹였다는 것이다. 결국 알 카밀은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의 목은 경고의 표시로 다마스쿠스의 문에 걸리게 되었다.(물론 몽골군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다음의 이야기다)
몽골이 슬슬 무슬림 세계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준비를 하고 있는 13세기 중반, 아직까지 십자군이 남아있었다. 예루살렘도 빼앗긴 주제 거기서 뭘 더 볼게 있다고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되면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튼간에 맨날 무슬림 세력에게 밀려나기만 하던 아르메니아와 트리폴리와 안티오크는 이때가 바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1세와 그의 처남이자 트리폴리, 안티오크의 지배자 보에몽 6세는 몽골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군대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훌라구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을 탈환해 돌려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마이야파라킨을 떨어트린 훌라구는 북부 유프라테스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에데사나 하란을 무너뜨리고 본격적으로 시리아에 들어와 분탕질을 시작한다. 알 무이잠 투란 샤가 지키던 시리아의 큰 도시인 알레포에 맞딱뜨린 그들은 그러나 11세기 후반 안티오크나 예루살렘의 성벽을 공성이랍시고 맨몸으로 달려든 1차 십자군과는 급이 달랐다. 투석기 20대를 동원, 7일만에 성벽을 함락시키고 30일만에 성채도 함락시킨 그들은 실컷 약탈을 하고, 알레포의 대모스크와 일반 모스크들도 불탄다. 이때다 싶은 기독교도들도 실컷 난동을 부리고 약탈을 한다. 뭐, 설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안 나시르 유수프는 그의 연구를 끝마쳤다. 연구 결과는 '몽골군이 오기 전에 잽싸게 도망가자' 였다. 알레포가 함락당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마스쿠스에서 도망나와 이집트로 향한다. 문제는, 이집트는 카스피해와는 달리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아이유브 왕조와 거기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매우 싫어하는 맘루크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입구 가자에서 들어가서 죽을것인지 여기있다 죽을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명색이 시리아의 지배자라는 인간이 이따위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지배받는 사람들이 뭔가 열정적 조치를 취할리 없다. 하마는 싸워보지도 않고 함락되고, 고도(古都) 다마스쿠스 역시 조용히 항복한다. 키트 부카는 이후 열렬하게 뛰어다니며 시리아를 점령한다. 안 나시르 유수프는 햄릿마냥 고민하다가 사로잡힌다.
안 나시르는 얼굴이 하얘져 벌벌 떨었으나(물론 그가 이랬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십중팔구 몽골인에게 잡히면 글을 읽는 사람들이나 나나 이럴것이 분명하다)키트 부카와 훌라구는 그가 항복하지 않은 도시의 성문을 열게 하는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고 목숨을 살려준다.
뭐, 무슬림들이 기독교도를 어느정도 인정해줬고, 살아가는데 파트너로 봤다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무슬림들이 오기 전에는 시리아의 지배자였다. 이제는 잘해봐야 이등국민이었다. 그런 상황을 몽골인이 타개해주었다.(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게다가 키트 부카나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교도거나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다. 유럽의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라면 일단 로마 카톨릭이 아니면 다 이단이기 때문에 상당히 불쾌할지도 모르겠지만, 동방의 기독교도들은 그것보다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정도 문제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훌라구가 다마스쿠스를 함락하자, 그들은 십자가를 앞에 내세우고 찬송을 부르며 거리를 순회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는데, 이들은 무슬림을 강제동원했고, 고무신 한짝도 주지 않았다. 문제가 조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를 파괴하고 교회를 짓기도 했고,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모스크에서도 기독교 의식을 행했다. 무슬림들은 이에 항의했지만, 훌라구는 가뿐히 무시했다.
훌라구는 시리아를 거의 완전정복했다. 기독교도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훌라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이집트에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맘루크들이 살라딘의 후예들인 아이유브 왕조를 완전히 밀어낸 뒤 장악하고 있었다. 살라딘의 후예들은 살라딘에게서 정치감각이나 신앙심 뭣 하나 제대로 물려받은게 없이 서로 투닥거리고 싸우기만 하다가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맘루크들은 그런 얼간이들보다는 좀 나은 축이었으나, 살라딘보다는 조금 못했다. 특히 이들은 관용이나, 자비나 그런 단어를 들으면 사전을 찾아보는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기가 막히게 잘했으니, 몽골군을 상대하는데에는 별 문제 없었다.
맘루크 기병의 훈련
이슬람 세계의 특수한 노예병 제도는 정말이지 웃기는 제도다. 쌩돈들여 노예를 사서 모은뒤 쌔빠지게 훈련을 시켜서 나중에는 그들에게 권력과 돈, 목숨마저도 빼앗기고 만다. 전투에서 쓸만하다는 이점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만 다루면 통치자 자신에게만 절대 충성한다는 이들 맘루크는 전투력 하나만은 발군이었다. 밥먹고 쌈질만 하니 당연히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1400년 이슬람 역사상, 이들이 자신들을 돈주고 산 통치자들을 학대하지 않거나 존중해준 경우는 거의 없다. 노예상인들은 그런 상황에 대한 A/S는 모른체했다.
뭐, 무슬림들이 기독교도를 어느정도 인정해줬고, 살아가는데 파트너로 봤다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무슬림들이 오기 전에는 시리아의 지배자였다. 이제는 잘해봐야 이등국민이었다. 그런 상황을 몽골인이 타개해주었다.(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게다가 키트 부카나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교도거나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다. 유럽의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라면 일단 로마 카톨릭이 아니면 다 이단이기 때문에 상당히 불쾌할지도 모르겠지만, 동방의 기독교도들은 그것보다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정도 문제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훌라구가 다마스쿠스를 함락하자, 그들은 십자가를 앞에 내세우고 찬송을 부르며 거리를 순회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는데, 이들은 무슬림을 강제동원했고, 고무신 한짝도 주지 않았다. 문제가 조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를 파괴하고 교회를 짓기도 했고,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모스크에서도 기독교 의식을 행했다. 무슬림들은 이에 항의했지만, 훌라구는 가뿐히 무시했다.
훌라구는 시리아를 거의 완전정복했다. 기독교도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훌라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이집트에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맘루크들이 살라딘의 후예들인 아이유브 왕조를 완전히 밀어낸 뒤 장악하고 있었다. 살라딘의 후예들은 살라딘에게서 정치감각이나 신앙심 뭣 하나 제대로 물려받은게 없이 서로 투닥거리고 싸우기만 하다가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맘루크들은 그런 얼간이들보다는 좀 나은 축이었으나, 살라딘보다는 조금 못했다. 특히 이들은 관용이나, 자비나 그런 단어를 들으면 사전을 찾아보는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기가 막히게 잘했으니, 몽골군을 상대하는데에는 별 문제 없었다.
이슬람 세계의 특수한 노예병 제도는 정말이지 웃기는 제도다. 쌩돈들여 노예를 사서 모은뒤 쌔빠지게 훈련을 시켜서 나중에는 그들에게 권력과 돈, 목숨마저도 빼앗기고 만다. 전투에서 쓸만하다는 이점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만 다루면 통치자 자신에게만 절대 충성한다는 이들 맘루크는 전투력 하나만은 발군이었다. 밥먹고 쌈질만 하니 당연히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1400년 이슬람 역사상, 이들이 자신들을 돈주고 산 통치자들을 학대하지 않거나 존중해준 경우는 거의 없다. 노예상인들은 그런 상황에 대한 A/S는 모른체했다.
아무튼간에,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지금까지 몽골이 상대한 어중이떠중이와는 수준이 달랐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밥먹고 싸움만 하는 인간들이었다. 자존심은 정말 강했고, 잔혹하기 짝이 없었고, 오로지 힘만 중시했다. 지들끼리도 서로 싸워대고 죽여대기가 다반사였으니까. 남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이런 거친놈들을 다스리던 술탄 쿠투즈(Qutuz)는 스스로도 거친 놈이었다. 게다가 그는 몽골에 대해 안좋은 추억이 있었다.
쿠투즈의 본명은 마흐무드 이븐 맘무드. 호레즘 술탄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 웃 딘 망구베르티의 조카였다. 즉, 평화로운 시기라면 그는 편안히 잘먹고 잘살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몽골군이 처들어와서 다 죽이고 때려부셨고, 그는 사이프 알 딘 쿠투즈라는 이름으로 팔려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른 거지같은 인간들을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고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팔자가 되어버렸다. 몽골군을 좋아할래야 좋아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훌라구가 사절을 보내 항복할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묻자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몽골군의 칼이 자신의 목 위로 떨어질 때에는 자신이 아무리 몽골을 싫어하든 말든간에 더럽게 아플것이고, 또 죽어버릴것이 분명했다. 그는 싸울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뒷일은 아무에게나 맡겨버리고 북아프리카로 도망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1259년 8월 11일. 대칸 뭉케가 남송 원정중 이질로 사망한다. 머나먼 중국에서는 후계자로 누가 될것인지 문제가 붙었고,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하겠다고 설쳐댔다. 훌라구도 머나먼 시리아에 박혀 이런 문제에서 멀어질 수는 없었다. 대칸에 오를 마음은 없었지만, 그는 쿠빌라이를 지지했고, 아릭 부케가 대칸이 되면 일어날 재수없는 사태를 우려했다. 쿠빌라이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이란으로 가야했다.
게다가 북방의 동족 킵차크 칸국과의 사이도 나빠져 있었다. 그가 기독교도를 좋아한것과 마찬가지로, 킵차크의 칸 베르케는 이슬람교도를 좋아했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수만의 대군을 이끄는 두 인간이 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고, 그나마도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베르케는 훌라구의 땅인 카프카스 지역을 침공한다. 이후 일칸국과 킵차크 칸국은 서로 망할때까지 싸워대고, 아무도 왜 처음 싸웠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훌라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프카스로 돌아갔다.
훌라구 홀로 맨몸으로 가서 무엇하겠는가? 그는 9클래스 소드마스터도 아니었고, 투명드래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도 화살 맞으면 죽고 칼 맞으면 죽을 것이다. 시리아는 키트 부카에게 2만 5천 가량의 병력만 맡기고 베르케를 막기 위해 가버렸다.
동방 기독교와 십자군들이 몽골군을 비교적 좋아했다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에만 있는건 아니었다. 남부 시리아 시돈에 있는 십자군은 몽골인을 야만인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무슬림도, 유태인도, 그리스인도, 동방 기독교도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굉장히 편리한 사고관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간에, 그들은 이런 신념에 의거하여 키트 부카의 몽골군을 공격했다. 키트 부카는 이를 십자군과 몽골의 동맹 파기로 받아들이고, 시돈의 얼간이들을 응징했다.
둘의 충돌을 동맹 파기로 받아들인건 키트 부카만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자신의 생존가능성을 저울질하던 쿠투즈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는 훌라구가 시리아를 떠났다는 말을 듣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몽골군과 싸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의 사절을 죽이는 것이다. 마침 쿠투즈에게는 이런 사절이 있었다. 사절들은 이런 목적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들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이걸 통해, 이집트의 거친 맘루크들과 시리아의 잔혹한 몽골인들이 한판 대대적으로 붙게 되리라는 것은 명확해졌다. 맘루크들은 1260년, 행동을 개시했다.
쿠투즈는 맘루크들의 강인함만 믿고 몽골군에게 달려들었다가는 강인함이고 나발이고 끝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는 몽골군과 맘루크, 전장(戰場)을 분석했다. 싸우는 곳은 시리아가 되어야 했다. 괜히 이집트에 끌어들여 싸웠다가는 자신들의 근거지가 파괴될 우려있었다. 시리아야 파괴가 되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든 알바 아니었다. 게다가 시리아에서 싸워 이기면 시리아를 먹을 수도 있었다. 시리아가 어떻게 되든 알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으면 좋은 법이다.
그가 고른 전장은 아인 잘루트였다. 갈보아 강과 잘루트 강, 주위의 늪과 갈보아 산은 몽골군의 기동성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몽골의 기동성을 저지하라. 이것이 맘루크군의 제 1 철칙이었다.
이런 거친놈들을 다스리던 술탄 쿠투즈(Qutuz)는 스스로도 거친 놈이었다. 게다가 그는 몽골에 대해 안좋은 추억이 있었다.
쿠투즈의 본명은 마흐무드 이븐 맘무드. 호레즘 술탄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 웃 딘 망구베르티의 조카였다. 즉, 평화로운 시기라면 그는 편안히 잘먹고 잘살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몽골군이 처들어와서 다 죽이고 때려부셨고, 그는 사이프 알 딘 쿠투즈라는 이름으로 팔려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른 거지같은 인간들을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고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팔자가 되어버렸다. 몽골군을 좋아할래야 좋아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훌라구가 사절을 보내 항복할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묻자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몽골군의 칼이 자신의 목 위로 떨어질 때에는 자신이 아무리 몽골을 싫어하든 말든간에 더럽게 아플것이고, 또 죽어버릴것이 분명했다. 그는 싸울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뒷일은 아무에게나 맡겨버리고 북아프리카로 도망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1259년 8월 11일. 대칸 뭉케가 남송 원정중 이질로 사망한다. 머나먼 중국에서는 후계자로 누가 될것인지 문제가 붙었고,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하겠다고 설쳐댔다. 훌라구도 머나먼 시리아에 박혀 이런 문제에서 멀어질 수는 없었다. 대칸에 오를 마음은 없었지만, 그는 쿠빌라이를 지지했고, 아릭 부케가 대칸이 되면 일어날 재수없는 사태를 우려했다. 쿠빌라이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이란으로 가야했다.
게다가 북방의 동족 킵차크 칸국과의 사이도 나빠져 있었다. 그가 기독교도를 좋아한것과 마찬가지로, 킵차크의 칸 베르케는 이슬람교도를 좋아했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수만의 대군을 이끄는 두 인간이 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고, 그나마도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베르케는 훌라구의 땅인 카프카스 지역을 침공한다. 이후 일칸국과 킵차크 칸국은 서로 망할때까지 싸워대고, 아무도 왜 처음 싸웠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훌라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프카스로 돌아갔다.
훌라구 홀로 맨몸으로 가서 무엇하겠는가? 그는 9클래스 소드마스터도 아니었고, 투명드래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도 화살 맞으면 죽고 칼 맞으면 죽을 것이다. 시리아는 키트 부카에게 2만 5천 가량의 병력만 맡기고 베르케를 막기 위해 가버렸다.
동방 기독교와 십자군들이 몽골군을 비교적 좋아했다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에만 있는건 아니었다. 남부 시리아 시돈에 있는 십자군은 몽골인을 야만인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무슬림도, 유태인도, 그리스인도, 동방 기독교도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굉장히 편리한 사고관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간에, 그들은 이런 신념에 의거하여 키트 부카의 몽골군을 공격했다. 키트 부카는 이를 십자군과 몽골의 동맹 파기로 받아들이고, 시돈의 얼간이들을 응징했다.
둘의 충돌을 동맹 파기로 받아들인건 키트 부카만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자신의 생존가능성을 저울질하던 쿠투즈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는 훌라구가 시리아를 떠났다는 말을 듣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몽골군과 싸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의 사절을 죽이는 것이다. 마침 쿠투즈에게는 이런 사절이 있었다. 사절들은 이런 목적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들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이걸 통해, 이집트의 거친 맘루크들과 시리아의 잔혹한 몽골인들이 한판 대대적으로 붙게 되리라는 것은 명확해졌다. 맘루크들은 1260년, 행동을 개시했다.
쿠투즈는 맘루크들의 강인함만 믿고 몽골군에게 달려들었다가는 강인함이고 나발이고 끝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는 몽골군과 맘루크, 전장(戰場)을 분석했다. 싸우는 곳은 시리아가 되어야 했다. 괜히 이집트에 끌어들여 싸웠다가는 자신들의 근거지가 파괴될 우려있었다. 시리아야 파괴가 되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든 알바 아니었다. 게다가 시리아에서 싸워 이기면 시리아를 먹을 수도 있었다. 시리아가 어떻게 되든 알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으면 좋은 법이다.
그가 고른 전장은 아인 잘루트였다. 갈보아 강과 잘루트 강, 주위의 늪과 갈보아 산은 몽골군의 기동성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몽골의 기동성을 저지하라. 이것이 맘루크군의 제 1 철칙이었다.
1260년 7월, 바이바르스(Baibars)가 이끄는 전위부대가 바이다라의 몽골군을 공격, 분쇄시켰다. 이름 뒤에 괄호가 쳐져있고 이름의 스펠링이 써 있다는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인물이 정말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바이바르스는 이번 이야기에서 쿠투즈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는 생긴게 건장했고, 목소리는 걸걸했으며, 눈동자에 하얀 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사람에게 호감을 주기보다는 '이 사람을 건드렸다간 요단강을 건널 가능성이 높겠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싼값에 팔려왔다.
바이바르스에 이어 쿠투즈의 본대가 시리아로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아크레의 십자군들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몽골을 싫어했기에, 맘루크군의 통과를 허용했다. 이때 키트 부카는 다마스쿠스에서 무슬림 반란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맘루크군이 기어나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 허연둥이들을 모조리 밟아버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군대를 준비했다.
1400년간의 이슬람 역사에서, 무슬림들은 숱한 전투를 치루었다. 시리아의 패권을 확립한 야르무크, 아나톨리아의 투르크화를 시작한 만지케르트나 마리오케팔론, 십자군을 격멸시키고 예루살렘을 되찾은 하틴, 이슬람 확장의 종지부를 찍은 2차 빈포위.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슬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는 이번에 벌어질 아인 잘루트 전투라고 생각한다.
1260년 9월 3일. 아인 잘루트(Ain Jalut). 이곳인 다윗이 골리앗을 쓰려뜨렸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원래 성서시대의 기록은 부정확한게 많아 답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지금은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
아인 잘루트 전투
쿠투즈의 군대는 대략 10만. 군대의 대부분이 보병이었다. 몽골군을 상대하는데 보병을 데리고 나오다니 정신이 나갔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보면 안다. 기병대의 대부분은 바이바르스가 이끌었다. 중앙부와 좌익, 우익 모두 보병 중심이었고, 기병대는 예비대로 바이바르스가 지휘했다.
몽골군 2만 5천이었는데, 그루지야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다른 동네 인간들 다 끌어모은 수치다. 전원이 기병.
바이바르스에 이어 쿠투즈의 본대가 시리아로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아크레의 십자군들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몽골을 싫어했기에, 맘루크군의 통과를 허용했다. 이때 키트 부카는 다마스쿠스에서 무슬림 반란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맘루크군이 기어나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 허연둥이들을 모조리 밟아버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군대를 준비했다.
1400년간의 이슬람 역사에서, 무슬림들은 숱한 전투를 치루었다. 시리아의 패권을 확립한 야르무크, 아나톨리아의 투르크화를 시작한 만지케르트나 마리오케팔론, 십자군을 격멸시키고 예루살렘을 되찾은 하틴, 이슬람 확장의 종지부를 찍은 2차 빈포위.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슬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는 이번에 벌어질 아인 잘루트 전투라고 생각한다.
1260년 9월 3일. 아인 잘루트(Ain Jalut). 이곳인 다윗이 골리앗을 쓰려뜨렸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원래 성서시대의 기록은 부정확한게 많아 답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지금은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
쿠투즈의 군대는 대략 10만. 군대의 대부분이 보병이었다. 몽골군을 상대하는데 보병을 데리고 나오다니 정신이 나갔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보면 안다. 기병대의 대부분은 바이바르스가 이끌었다. 중앙부와 좌익, 우익 모두 보병 중심이었고, 기병대는 예비대로 바이바르스가 지휘했다.
몽골군 2만 5천이었는데, 그루지야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다른 동네 인간들 다 끌어모은 수치다. 전원이 기병.
운명의 날 새벽, 몽골군 궁기병대가 중앙의 보병대를 향해 화살을 날림으로써 전투가 시작된다. 보병대가 약화되자 기병대가 달려들었고, 시리아의 일반 농민들이 주축이던 보병대는 무너지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쿠투즈는 이런 점을 미리 예상했다. 그는 몽골군이 궁기병의 공격 이후 적을 분쇄하는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으며, 이것이 안될 시에는 저 저주받을 치고 빠지기를 한다는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하다.
그는 중앙의 보병대를 뒤로 후퇴시켰다. 몽골군이 이를 추격하고 계속 공격하도록 유인했다. 몽골군이 수십년간 러시아인들, 폴란드인들, 독일인들, 중국인들, 페르시아인들, 아랍인들을 유린하던 전술을 이제는 몽골군이 그대로 당할 차례였다. 몽골 기병대가 계속 보병대를 추격하던 중, 그들은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중앙부의 보병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버티면서 계속 몽골군을 유인했고, 어느틈에 좌익과 우익의 맘루크군이 몽골군을 감쌌다. 예비대로 있던 바이바르스와 저 유명한 맘루크 기병대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수적인 우위에 힘입어, 몽골군을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키트 부카는 몽골의 자존심 넘치는 지휘관답게 도망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훌라구를 칭송했고, 끝까지 싸우다 결국 포로로 잡혔다. 쿠투즈는 그를 모욕했다. 키트 부카는 맘루크들이 신의없고 전투만 아니라 배신에도 능숙한 족속이라고 비난했다. 이 말이 사실이었기에, 쿠투즈는 분개했고 키트 부카는 죽음을 당했다. (사실을 말하면 항상 죽는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항상 사실이다) 9월 8일, 맘루크군은 환영의 인파속에 다마스쿠스에 입성한다. 다마스쿠스 성에 걸려있던 알 카밀의 목은 영묘에 안장된다.
이후 일칸군은 몇번 시리아를 침공하지만, 그때마다 맘루크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키트 부카의 예언(예언이라기보다는 저주였지만)은 맞아 떨어졌다. 아인 잘루트의 승리 이후 1년 뒤인 1260년, 전투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암살한다.
뭐, 그건 뒷일이다. 아무튼간에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려 이스라엘을 구했던 바로 그곳에서, 쿠투즈와 바이바르스, 그리고 맘루크들은 이슬람을 구했다. 이슬람은 이후 오스만이라는 세력과 함께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유럽인들은 동방에서 몽골인에게 당한 일을 왜 서방의 자신들에게 푸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일이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키트 부카는 몽골의 자존심 넘치는 지휘관답게 도망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훌라구를 칭송했고, 끝까지 싸우다 결국 포로로 잡혔다. 쿠투즈는 그를 모욕했다. 키트 부카는 맘루크들이 신의없고 전투만 아니라 배신에도 능숙한 족속이라고 비난했다. 이 말이 사실이었기에, 쿠투즈는 분개했고 키트 부카는 죽음을 당했다. (사실을 말하면 항상 죽는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항상 사실이다) 9월 8일, 맘루크군은 환영의 인파속에 다마스쿠스에 입성한다. 다마스쿠스 성에 걸려있던 알 카밀의 목은 영묘에 안장된다.
이후 일칸군은 몇번 시리아를 침공하지만, 그때마다 맘루크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키트 부카의 예언(예언이라기보다는 저주였지만)은 맞아 떨어졌다. 아인 잘루트의 승리 이후 1년 뒤인 1260년, 전투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암살한다.
뭐, 그건 뒷일이다. 아무튼간에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려 이스라엘을 구했던 바로 그곳에서, 쿠투즈와 바이바르스, 그리고 맘루크들은 이슬람을 구했다. 이슬람은 이후 오스만이라는 세력과 함께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유럽인들은 동방에서 몽골인에게 당한 일을 왜 서방의 자신들에게 푸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일이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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