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계가 탄생한 이후 광대한 문명들이 하도 많이 흥하고 망하고, 흥하고 망하고, 흥하고 망한 나머지, 은하계에서의 삶이란

(a) 뱃멀미-우주 멀미, 시간 멀미, 역사 멀미 혹은 기타 등등과 비슷하다.
(b) 멍청하다

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이지 굴뚝같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3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일칸국 만큼이나 이 말이 어울리는 국가도 드물다.
1260년 몽골군이 맘루크들에 의해 패배당한 뒤, 훌라구의 중동 점령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북쪽의 킵차크 칸이자 무슬림이었던 베르케는 훌라구를 상대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는데, 쿠투즈를 암살하고 맘루크들의 술탄이 된 바이바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라는 오래되고 신빙성 있는 격언에 따라 이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서쪽과 북쪽에서 훌라구를 압박해 들어왔다. 여기에 동방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차가타이 칸국의 군주들도 훌라구에게 적개심을 드러냄에 따라 훌라구는 삼면이 포위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예전같은 정복은커녕 앞으로 살아갈 날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하지만.

북쪽, 서쪽, 동쪽의 모든 원정과 전쟁이 좌절된 이후 그는 이란 지역의 약해빠진 공국들을 합병하기로 결정한다. 이전까지 훌라구의 권위를 인정했던 모술의 아타벡인 바드르 앗 딘이 죽자 재빨리 그의 공국을 합병했으며, 파르스의 아타벡 역시 몽골에 저항했다가 실패, 살해당하고 만다. 적어도 페르시아 지역의 영토는 몽땅 아우른 셈이었다.

훌라구와 그의 군대가 페르시아 지역의 찬란한 문명을 파괴하기는 했지만, 그는 또한 그 페르시아 문명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어차피 후원할 거면 도대체 왜 그렇게 때려 부순 건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덕분에 훌라구의 만년에는 주베이니(Juvayni)라는 역사가가 《세계 정복사》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주베이니가 쓴 세계정복사의 러시아어판. 사실상 그림의 떡. 페르시아어판보다야 낫겠지만


바그다드의 시아파 보호를 주장했던 나시룻딘 투시(Nasiruddin Tusi) 역시 훌라구와 아바카의 후원을 받았고, 마라케에 천문대를 짓도록 후원받는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이론을 반박하고 행성 운동 일정불변성의 원칙에 따라 투시 연성(Tusi-couple)이라는 이론을 주장한다. 그의 행성 이론은 후에 코페르니쿠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1974년 이란에서 발행된 나시룻딘 투시 사망 700주년 기념우표
 
 
1265년 2월 8일, 전 무슬림 세계의 공포였던 훌라구가 사망한다. 그리고 얼마후 기독교도인 황후 도쿠즈 카툰도 세상을 뜬다. 그러나 동방의 기독교도는 그와 그의 아내를 '제2의 콘스탄티누스와 헬레나' 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문제는 헬레나의 경우 콘스탄티누스의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는 사실이다. 일부러 무시한건지, 아니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콘스탄티누스의 아내가 별볼일 없는 인간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아바카 칸의 치세(1265~1284)


그의 아들인 아바카(Abaqa)는 아버지와 비슷하게 불교도였으며 기독교도를 좋아했고, 그에 비례하여 무슬림들을 싫어했다. 게다가 그는 한술 더 떠 맘루크들을 무찌르기 위해 서유럽의 기독교도들과 동맹을 맺을 생각을 했다. 그의 이러한 면은 네스토리우스교의 총대주교인 야발라하 3세(Yahballaha)의 임명에서도 보인다.

야발라하 3세는 몽골의 웅구트 부족 출신으로, 그 부족은 나름대로 잘 나간다면 잘 나간다고 할 수 있는 부족이었다. 순례차 페르시아에 도달한 그는 전임 대주교가 사망하자 총대주교에 덜컥 임명된다. 낙하산 인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성공적인 인사였다.

아바카는 그를 불러 어깨에 외투를 입혀주었고, 자신의 작은 옥좌를 내주었다. 일산과 함께 왕실 문장과 총대주교의 문장이 새긴 황금 도장을 하사함으로써 그의 즉위를 인정했다. 네스토리우스교의 최전성기라고 할만한 시대였다. 사실 최전성기라기보다는 꺼지기 전 촛불이 화려하게 타오르는 것이었지만.

북쪽에서는 베르케와 그의 조카인 노가이의 끝없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고, 베르케가 죽고 한숨 돌리나 싶더니만 차가타이 칸국의 칸 바라크가 이란 동부와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침공해 들어왔다. 이 사이에 끼어있던 헤라트의 케르트조의 군주인 샴스 웃 딘은 그의 조상들이 몽골 침입에서 지켜준 눈부신 외교술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따지고 보면 외교라기보다는 약아빠진 것이지만.

먼저 차가타이 칸의 군대가 들어오자 재빨리 항복한 그는 아바카가 다시 처들어오자 차가타이 칸의 병력을 쫓아내고 아바카의 편으로 붙는다. 이후 350여년 뒤, 아바카든 샴스 웃 딘이든 바라크든 누구든 들어본 바 없을 머나먼 동방의 조선이라는 나라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는데, 당시 조선의 군주가 이 외교술의 반(아니, 설령 약아빠진 짓이라도)만 따라했더라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뭐, 그러나 그 조선의 군주도 변명할 거리는 있겠다. 아바카는 샴스 웃 딘이 비록 자신에게 붙었다 할지라도 차가타이 칸의 편에 선 것을 잊지 않았으며, 결국 그를 독살하기에 이른다.

동방 문제가 해결되자 그는 다시 서방으로 달려가 맘루크조와 룸술탄국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시 룸술탄국의 군주 카이쿠스라우 3세는 바이바르스를 끌어들여 몽골인을 쫓아내게 했다. 바이바르스는 성공했지만 투르크인들에게 별다른 뒷수습을 해주지 않았으며, 투르크인들도 뒷수습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결국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는 역시 오래되고 정확한 격언에 따라 투르크인들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이처럼 정신없는 세월을 보낸 그는, 내내 바라던 서방과의 동맹에 나선다. 이루어진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대사건이었겠지만, 유럽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1273년 아바카의 사절은 유럽으로 넘어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과 리옹의 대주교, 영국의 에드워드 1세를 만난다. 살라딘한테 털릴대로 털리고 이제 바이바르스와 맘루크라는 어마어마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프레스터 존이나 사제왕 요한이 강림한 기분이 들어야 정상이었겠으나, 예상 외로 반응은 뜨뜻 미지근했다. 그레고리우스 10세와 유럽에서 세력을 떨치던 샤를 당주는 1204년의 헛꿈이나 꾸고 있었다. 굴러 들어온 복덩어리를 차내는 실력에 있어서는 당시 유럽은 단연코 세계 1위라고 할만했다.

나름대로는 환영받을 계획이라 생각했던 동맹제안이 무시 당하자 난감해진 아바카는 결국 혼자 행동을 개시한다. 1271년 1만여의 기병으로 알레포를 잠깐 건드려본 그는 1281년 5만의 몽골군에 3만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인들을 끌어들여 맘루크를 침공했다. 적어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서유럽인들보다는 기회를 잡을 줄 안다는 점에 있어 점수를 받을만 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줄을 잘못 탔다.
 
맘루크의 술탄 칼라운(바이바르스는 1277년, 정적을 죽이려는 독잔을 자신이 마셔버리는 멍청한 실수를 함으로써 그 사건 많은 생을 마감한다)은 10월 30일 홈스 부근에서 몽골 연합군을 다시 한번 격파함으로써 맘루크가 명실상부한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1282년 4월 1일, 아바카는 사망한다.

이처럼 일생 대부분을 전쟁과 지독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서유럽인들을 상대하느라 보낸 아바카는 일칸국의 내정을 다질 기회가 없었다. 뭐, 아바카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점은 대대로 일칸국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었다.


테구데르 칸의 치세(1282~1284)


테구데르(Tegüder)의 어머니는 기독교도였고(새삼스럽게 한마디. 몽골인은 일부다처제였고,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도 부인은 도쿠즈 카툰이 아니라 쿠투이 카툰이다) 그 자신도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칸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아흐메드라는 무슬림식 이름으로 바꾸고 기독교도와 불교도에 대한 탄압을 개시한다.

테구데르 자신은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었다. 아바카의 아들 아르군(Arghun)은 멀쩡히, 그것도 장성한 채로 살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바카의 동생인 그가 제위를 찬탈함에 따라 그의 정통성은 불안했다. 가뜩이나 무슬림 행세를 하는것도 배알이 꼴리던 차에 이러한 점은 그의 어마어마한 약점이 되었다.

일칸국(Ilkhanate)에서 일칸(Il Khan)이란, 대충 2급 칸, 정도 되겠다. 몽골리아와 중국에 있는 대칸 쿠빌라이의 밑에 있는 칸이라는 뜻이었고, 그런 명칭을 국명에 붙여놓은 나라도(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대칸 밑에 있기 마련이었다.

위에서 배알이 꼴린 몽골인들은 대칸에게 문제제기를 했다. 대칸이 이에 따지고들자 테구데르는 대충 얼버무리고서는 야발라하 3세와 그의 보좌주교 랍반 소마를 잡아다 괜한 화풀이를 시작했다.

칸의 자리에 올라서 한 일은 불평불만이나 듣고 상부에서 까이기나 하고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나 하는것밖에 없는 게 불쌍한 테구데르의 치세였다. 도대체 그럴거면 왜 한거냐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당장 죽더라도 권력의 맛을 보고 싶은 욕망은 강한지라, 그 욕망이 강한건 아르군도 마찬가지였다.

삼촌과 조카가 무슨 욕망을 가지던 말던, 많은 몽골인 특히 기독교도와 불교도들은 테구데르의 존재 자체에 진절머리를 내고 말았으며 죄다 아르군에게 달려가 그를 칸으로 옹립했다. 건국한지 몇년이나 되었다고 내전이 터지고 말았다. 실로 기동성을 중시하는 몽골인다운 처사라고 하겠다.

놀랍게도, 그리고 의아하게도 테구데르가 승리했다. 1284년 아르군은 전투에서 패해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던 인기마저 이미 바닥에 떨어진터라, 테구데르는 그의 군대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진작에 이랬다면 더 편하지 않았을까?


아르군 칸의 치세(1284~1291)


아르군 칸

그는 선왕의 이슬람화 경향에 반대, 다시 관직을 유태인과 기독교도로 채우기 시작한다. 또한 훌라구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소위 내정이라는, 아바카가 손도 대지 못했고 테구데르가 그런게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일칸국의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만했다. 약탈과 파괴, 잘해야 유목이나 양치기 밖에 모르던 몽골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약탈할 적군이 없자 페르시아 지역의 농민들, 더 쉽게 말하자면 자국인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페르시아 토착 관료와 귀족들은 사악한 쪽으로 발달되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그 대단한 두뇌를 굴려 몽골인들과 같이 무시무시한 세금을 때려 페르시아 농민들을 긁어먹기 시작한다. 이 상황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유태인 대신 사아드 웃 다울라(Sa'd ad-Daula)와 함께 내정개혁을 실시한다. 먼저 몽골 귀족들의 약탈을 금지하고,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라고 떠들던 군지휘자들을 주먹으로 두들겨 패서 입을 다물게 만들었으며 가혹한 세리들이 세금을 뜯어먹는 것도 규제했다. 그러고서는 징세 관련 직종을 모두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에게 넘겼다. 이러한 식으로 그는 지방 영주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어내려고 했다. 또한 그는 주민 대부분을 차지한 무슬림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법으로 해결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몽골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대체 자국민을 약탈하는게 뭐가 그리 자랑스럽고 중요한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마치 무슨 중요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마냥 마구 항의하고 나섰다. 또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들도 이제는 이교도가 그만 해먹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면서 있지도 않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아르군을 모함했다. 중앙집권화와 지방분권화의 대립, 무슬림과 기독교도 또는 유대교의 대립은 일칸국을 저 위대한 몽골제국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나라로 만들었다.

정작 무슬림들로부터 별별 비난을 다 들었지만, 아르군은 그의 선조들이 지키던 전통 신앙을 고수했다. 기독교도로 개종을 요구받자 그는 '나 역시 유일한 신인 영원한 푸른 하늘을 섬기고, 올바르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니 기독교도가 아닌가' 라면서 개종을 거부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보호는 끊기지 않았다.

아르군은 다시 한번 서구세력과의 동맹을 시도한다. 그는 유럽인들이 이집트를 치면 자신이 시리아를 칠 것이며, 그렇다면 무슬림들을 쫓아버릴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1287년 그는 네스토리우스교 고위 사제인 랍반 소마를 유럽으로 보냈다.

룸셀주크의 침입에 맞서 룸셀주크의 주인인 몽골인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비잔티움의 황제 안드로니쿠스 2세는 소마를 환대했고, 성 소피아 성당에서 예식을 하게 했다. 이탈리아로 간 그는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틈을 타 로마의 추기경들은 '로마 카톨릭 아니면 죄다 이단!' 이라는 그들의 간단명료한 논리에 따라 소마 주교를 거의 종교재판에서나 볼 법한 심문을 했다. 그는 그들에게 몽골의 칸은 유럽과의 동맹을 간절히 바란다고 확실히 증언했다.

이탈리아를 나와서 프랑스를 방문, 필리프 4세를 만나고 영국으로 가 에드워드 1세까지 만났음에도, 여전히 유럽은 몽골과 동맹을 맺으려 들지 않았다. 평소 무슬림이라며 이를 갈던 친구들이 어째서 당시에는 그리도 조용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랍반 소마의 여정은 그렇게 소득이 없이 끝났지만, 아르군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아르군은 서유럽인들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었지만 역시 유럽인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야 만다.

아르군 치세에도 여전히 북방의 킵차크의 칸이나 동방의 차가타이 가문의 군주들은 일칸국의 주적이었다. 그는 이 국경지대에 아들 가잔(Ghazan)을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아미르 나우루즈란 자를 부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총독도 아니고 부총독인 나우루즈가 반란을 일으켜 가잔을 잡을 뻔 하나 실패, 도망가고 만다.

1291년 3월 7일, 아르군 칸이 병으로 사망한다. 이미 1주일 전에 그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반발한 군사령관들이 그의 재상 사아드 앗 다울라를 죽여버렸다.


가이하투 칸의 치세(1291~1295)


사실 가이하투(Gaykhatu)는 잘나서 칸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군사령관들은 그가 놀기 좋아하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량임을 알았기에 그를 통제하기 쉬우리라 판단하고는 즉위시킨 것이었다. 아직 건국한지 30여년밖에 안되었 건만, 남들이 300년에 걸쳐 도달할 타락수준을 1/10만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가이하투 시대에 특기할 일이라 할만한 지폐 발행 시도는 쿠빌라이의 원나라만큼 통제력과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은 일칸국에서는 200m 높이에서 고무줄에만 의존하여 번지점프를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고무줄은 끊어지고 말았고, 일칸국의 상업은 초등학교 방학식 같은 혼돈상태에 빠지고야 말았다.

일칸국 시대에는 수공업자 대부분이 왕실을 위해 일할것이냐 아님 죽을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함에 따라 국가작업장에서의 생산 외에는 민간용으로 사용되는 공예품이나 수공품은 지극히 적은 수준이었다. 상인들도 국가의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몽골인들이 중국부터 지중해까지 싸그리 점령해버림에 따라, 중국과 중동의 상인들은 이전보다 교역이 더 쉬워졌고, 베네치아 등지의 상인들도 일칸국의 친 유럽 정책에 따라 타브리즈등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혼란하고 지배층들이 피지배층을 '자신이 돈을 저금하지 않았음에도 언제든지 꺼내갈 수있는 저금통'으로 생각하는 이상 그러한 상업 발전도 다 헛짓거리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폐까지 발행하니 물가는 뛰어오르고 상인들과 서민들은 죽어나갔다.

그는 네스토리우스교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고, 기독교도를 비교적 좋아했지만 몽골 귀족들을 제한하고 힘을 줄이기 위해 무슬림 편에 섰고, 이것이 몽골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 사실 칸이 이 시기의 몽골 귀족을 만족시키는 일은 자신이 죽는 것뿐이었다. 칸으로서는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가이하투는 1295년 4월 21일 활줄에 목이 조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바이두 칸의 치세(1295 4월~10월)


바이두(Baydu)는 훌라구의 손자이자 가이하투의 사촌이었다. 그는 기독교도를 굉장히 좋아했으며, 목에 십자가를 걸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관직이 기독교도들에게로 몰리자 무슬림들은 불만에 가득찼다. 사실 몽골 이전까지 누려왔던 600여년간의 지배를 생각해보면 6개월을 못참아서 그러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이리 탐욕스러운걸 어찌하랴. 제위에서 밀려나 있던 가잔은 기회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에게 반역한 나우루즈를 용서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바이두가 자신을 죽이는 것을 망설이는 동안 그의 망설임을 끝내주었다. 죽여버렸단 이야기다.

가잔 칸의 치세(1295~1304)


가잔 칸


가잔 칸은 굉장히 못생기고 형편없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관용적이던 사람이었으며(적어도 자신의 백성에게는. 이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다) 훌륭한 군 지도자였다. 또한 몽골어나 아랍어, 페르시아어, 힌두어, 티베트어, 중국어, 프랑크인들의 언어까지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슬림이었지만 다른 누구보다 몽골적인 군주였다.

가잔이 칸의 자리에 오르자 나우루즈는 마음껏 설치기 시작했다. 그는 타브리즈에 입성, 기독교도들의 성당, 유태교도들의 회당, 조로아스터 교도들의 사원, 불교도들의 불탑들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성화와 성상, 불상등을 박살내버리고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를 고문하라고 명령했다. 3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눌려지내던 무슬림은 그 분노를 폭발시켰다. 1297년 아르빌에서는 대대적인 기독교도 학살이 일어났다. 그러나 가잔은 위에서 말했듯이 몽골적이었으며, 그러한 미친 짓은 철저히 거부했다. 결국 그는 나우루즈를 없애버리기로 한다.

야발라하 3세를 복권시킨 그는 나우루즈의 부하를 잡아 모조리 죽여버리고는 나우루즈의 군대도 무너뜨렸다. 나우루즈가 헤라트의 케르트조의 궁성으로 도망가자, '강한 쪽에 붙는다' 라는 약소국의 외교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던 케르트조의 군주 파흐르 웃 딘은 그를 잡아 가잔에게 넘겨준다. 나우루즈는 처형되었다.

가잔은 이제 더 이상 북경의 대칸에게 임명장을 받는 일칸이 아니라, 스스로 영원한 푸른 하늘에 의해 권력을 받는 독립된 군주로 서고자 했다. 또한 몽골제국의 후신국가라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비실비실한 얼간이 국가와 별로 차이점을 찾을 수 없는 일칸국을 올바르고 제대로된 행정체계를 갖춘 좀 정상적인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일단 아르군이 막으려고 한 몽골 귀족들의 약탈을 철저히 금했다. 당시에도 몽골 귀족들은 자국민 약탈을 즐겼는데, 문제는 약탈을 너무 한 나머지 때로는 자신의 군사들이 먹을 곡식도 부족해 질 때가 있었다는 점이다. 가잔은 이러한 상황이 와서 귀족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 귀족은 알아서 하는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의 귀족들의 약탈과 무관심으로 인해 이란 지역 대부분의 경지가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는 토지 사업을 재개, 경작 가능한 토지를 늘리는데 성공했다.


또한 가잔은 라시드 앗 딘(Rashid ad din)을 재상으로 발탁했으며, 그에게 몽골 부족의 기원과 칭기즈칸의 탄생과 그의 점령, 그의 후손들과 자신의 이야기(이게 중요했다)를 역사책으로 편찬할 것을 명했다. 라시드 앗 딘은 몽골인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다른 중동 지역의 칼리프나 술탄들의 역사도 기록함으로써 몽골 제국의 세계사책을 편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집사(Jami at-Tvarikh)였다.


현재 국내 출시된 집사. 김호동 교수가 페르시아어 원본을 토대로 번역. 총 3권. 여기 보이는 책은 두번째 책.


그는 또한 종교적으로도 관용을 유지했다.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속에서부터 구별되니라" (쿠란 2:256) 같은 구절의 뜻에 따라, 그는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도나 유태교에게는 관용을 유지했으며, 그들에 대한 어떠한 탄압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의 선조들이 믿던 불교는 그러나 페르시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일칸국의 어떤 칸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내정을 다진 그는 외부 공격에 나선다. 슬슬 기어오르는 룸셀주크를 응징하고, 오랜 숙적인 맘루크조를 원정한다. 1299~1300년, 가잔 칸은 아르메니아인들과 같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한다. 그 때 차가타이의 군주들이 침공하자 그는 그곳을 떠나 동부 이란으로 돌아갔고, 1303년 한 장군에게 병력을 주고 시리아를 치게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 원정이 몽골 세력의 마지막 중동 공격이었다. 맘루크는 끝끝내 몽골인들로부터 이슬람 세계를 지켜냈다.

1304년 5월 17일, 가잔 칸이 그의 화려하지만 짧은 치세를 마치고 사망한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일칸국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울제이투 칸의 치세(1304~1316)


울제이투(Öljeytü)는 가잔의 동생으로, 어렸을때 세례를 받아 니콜라우스라는 세례명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가잔 시대부터 꿈틀거리던 무슬림들의 반기독교 감정은 통치자의 무관심에 힘입어 터져나오고야 만다. 1310년, 아르빌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또한번 학살당하고야 만다. 한때 그들이 제2의 콘스탄티누스이자 사제왕 요한이라고 떠받들던 존재들은 이제 무슬림이 되어 그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기독교도들에게는 최악이었지만, 울제이투는 그래도 꽤 괜찮은 군주였다. 라시드 앗 딘을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그에게 요직을 맡겼고, 집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자 거기에 자신의 기록도 넣을 것을 명했다. 또한 그는 지금까지 수도였던 타브리즈 대신 새로운 수도인 술타니야를 지었으며, 그곳에 자신의 영묘를 건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지금 술타니야에 남아있는 봐줄만한 건축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고 한다.


술타니야에 있는 울제이투의 영묘. 그나마도 폐허가 다 됐다


이제까지 봐왔듯이 아르메니아인들은 일관되게 몽골편을 들었지만 일관적으로 몽골은 맘루크들에게 패했으며 이젠 맘루크들로부터 '때로는 일관성 있는게 독이 된다'는 설교를 들을 상황이었다. 지루하게 늘어놓는 설교야 참고 들어주면 된다지만, 맘루크들은 그런 건 취향이 아니었고 칼로 하는 설교라면야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를 약탈했다.
 
또한 1304년, 아나톨리아에서는 룸술탄국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마지막 군주 마수드 2세가 죽었음에도 가잔이나 울제이투는 룸셀주크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고 새로운 술탄을 임명하는걸 깜빡했다. 비잔티움의 최대 적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울제이투가 룸셀주크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해내고 급히 아나톨리아를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그곳에는 통제 안되는 투르크 공국들이 바글바글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하나의 공국이 문제였다.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 오스만 1세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


오스만(Osman) 1세는 비잔티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힘을 길러 아나톨리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일구어내고는 니케아를 위협한다. 그러자 비잔티움의 황제 안드로니쿠스 2세는 울제이투와 정략결혼을 하고, 이에 울제이투는 명색이 장인이 된 안드로니쿠스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지만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에 의해 패배한다. 더 이상 투르크도 60년전 쾨세닥과 같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나톨리아에서 패배했지만 울제이투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작아터진 나라가 해봤자 뭘 어쩌겠냐는 생각이었다. 울제이투도, 안드로니쿠스 2세도, 심지어 오스만이나 오르한도 그 작아터진 나라가 후에 세개 대륙을 휩쓸고 전 유럽의 기독교도들을 공포에 떨게 할 줄 누가 알았으랴.

1306년 그는 이제 헤라트로 관심을 돌렸다. 외교력 하나만은 칭기즈칸을 무색케 하던 헤라트의 군주들의 후손인 파흐르 앗 딘은 바로 항복하고, 그의 아들과 일칸군과의 몇번의 교전이 있은 뒤 울제이투는 헤라트를 남겨두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군주 기야스 앗 딘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다.

1313년 일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의 해묵은 분쟁이 또 다시 발발한다. 처음에는 차가타이의 칸인 에센 부카가 승기를 잡았으나, 중국의 대칸이 차가타이칸국의 후방을 공격하자 병력을 뺄 수 밖에 없었다. 헤라트는 이번에는 일칸국 편을 들었다. 이렇게 두 칸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던 헤라트는 두 칸국이 혼란기에 빠지자 독립을 해버리고 만다. 칭기즈칸의 침입 때도 외교력 하나로 버텨낸 헤라트의 케르트 가문의 승리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간에, 울제이투는 1316년 12월 16일 죽었다. 일칸국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아부 사이드 칸의 치세(1316-1335)


아부 사이드(Abu Sa'id)는 일칸국의 아홉 군주중 가장 오래 제위에 있었으며, 가장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고, 가장 약해빠진 군주였다. 그의 아버지가 죽을 당시 그는 고작 12살에 불과했으며, 몽골 귀족들에 휘둘리면서 제위기간을 때웠다.

몽골 귀족들은 후계자를 잃은 라시드 앗 딘을 별별 이유로 몰아 죽여버리고는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했다. 처음에 권력을 얻은 몽골 귀족은 초판(Chopan)이라는 자였는데, 그럭저럭 해먹다가 아부 사이드와 대립,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결국 패배한 그는 헤라트로 도망갔으나 정말이지 줄타기 하나만은 잘 하는 기야스 앗 딘은 그를 죽여 손가락을 아부 사이드에게로 보낸다. 아마 운송비와 배송의 편리성을 위해 그런게 아닌가 싶다.

초판의 죽음은 일칸국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별별 시원치 않은 몽골 귀족들이 서로 싸워대고, 칸은 궁정에 틀어박혀 있었으며, 헤라트는 외줄타기를 그만두고 독립해버렸다. 1335년 아부 사이드가 사망하자 일칸국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뒤에도 몽골 귀족들에 의해 일칸들이 옹립되지만, 사실 거의 존재가치가 없는 치들이었다. 이란은 무자파르조, 잘라이르조 등 다양한 지방 토후들의 왕조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만다. 이러한 혼란은 저 중앙아시아의 절름발이, 티무르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다.
 
루즈벨트 이전에 가장 강력한 절름발이


야발라하 3세는 1317년에 죽었다. 아바카가 그의 어깨에 외투를 씌워주던 화려한 때,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는 굴욕과 비통 속에서 죽었다. 그의 사후 얼마 뒤, 전 유라시아를 덮친 페스트로 인해 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초원의 네스토리우스교 역사는 사실상 끝장이 났고, 한 역사가 그렇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