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세계를 갑자기 나타난 몽골인들이 싹 정리해버렸다. 덕분에 이후 지도제작자들은 색을 상당히 절약하게 되었다.



신이 아담을 창조한 이래 세상이 그렇게도 잔인한 사건을 목격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 이븐 알 아시르



1218년,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중국을 평정한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에서 제일 날리던 호레즘 제국의 술탄 무함마드에게 교역을 트자는 사절을 보낸다. 그러나 이 사절은 시르다리야강 근처에 있는 오트라르의 지사 카디르 칸(Qadir Qan)에게 몽땅 살해당하고, 이를 항의하러 간 사절 역시 무시당함에 따라(아니, 살해당했나?) 칭기즈칸은 안그래도 호시탐탐 노리던 중앙아시아의 이 대국을 털어버릴 명분을 얻게 되었다.

당시 호레즘 제국은 40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나라꼴은 영 눈뜨고 봐주기 힘든 판국이었다. 호레즘 제국의 기반이 되는 호레즘이라는 동네는 워낙 좁아터진 벽촌이었기에 투르크족 방식대로 봉토를 나눠줘 군대를 양성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동네였고, 결국에는 어중이떠중이 투르크멘인들이나 캉글리인들을 끌여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캉글리족에게 영향력을 발휘나는 술탄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투르칸 카툰(Turkan Qatun)은 술탄의 아들인 잘랄 웃 딘(Jalal ad-Din)을 싫어했고, 무함마드는 자기 아들을 싫어하는 어머니를 싫어했다. 호레즘 제국의 백성들은 병사들을 싫어했고, 병사들은 백성들을 싫어했다.

한술 더떠 호레즘 제국은 이웃들과도 별로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무함마드가 망상에 가득차 바그다드를 공격하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겨우겨우 권력을 얻은 바그다드의 칼리프 안 나시르(An Nasir)는 그를 지독히 싫어하게 되었으며, 칼리프 자신은 별볼일 없다 해도 그가 하는 말은 어느정도(정말이지 명목상이었지만) 약빨이 먹히던 당시에는 칼리프와 싸운다는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 몽골인같은 전쟁기계와 대판 붙으면서 그런다는건 더더욱 좋은 일이 아니었다.
1219년, 칭기즈칸은 대략 15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들들에게 골고루 이 병력을 나눠주었다. 큰아들 주치는 시르다리야를 따라 호레즘으로 달려들었고, 오고타이와 차가타이가 이끄는 군대는 오트라르를 향해갔다. 칭기즈칸 자신과 막내 톨루이는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의 주요 도시들-부하라나 사마르칸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호레즘 군이 눈물겨운 분투를 했음에도, 분투는 처절한 학살로 마무리되었다. 칭기즈칸은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하라에 입성, 자신의 무슬림들을 밟아주러 온 신의 채찍이라고 주장했다. 허풍이겠지만, 그정도의 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허풍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아무튼간에, 이븐 시나와 알 콰라즈미의 찬란한 학문이 빛나는 부하라는 이날 철저히 박살났다.



부하라 시민들에게 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칭기즈칸


1221년, 몽골군은 침략 2년여 만에 아무다리야를 넘어 호레즘 본토에 진입, 우르겐치를 박살낸다. 그 전에 무함마드는 자신이 거둔 패배에 너무나 당황하여 일단 도망가기부터 했는데, 막강한 기동력을 가진 몽골군을 따돌리는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며 카스피해의 섬 한가운데까지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를 잡기 위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제베와 수베테이가 붙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가 잡혀 죽지 않고 도망갔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다.

칭기즈칸은 톨루이를 이란 지역으로 보내 호레즘의 잔당들을 처리하라고 했다. 톨루이는 이를 철저하게 실햏행, 메르브나 발흐등이 쑥대밭이 되었으며 헤라트는 조용히 항복했다. 1년의 날짜를 계산해내고 정말이지 긴긴 사행시를 쓴 오마르 하이얌이 태어난 니샤푸르도 이때 박살이 났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니샤푸르에서 174만 7000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몽골군에게는 기관총도 탱크도 없었기에 이런 수치는 필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1220년 12월, 무함마드가 피로와 좌절 속에서 죽고, 그의 어머니가 싫어한 그의 아들 잘랄 웃 딘은 여전히 항전을 계속한다.(혹시나 궁금한 사람을 위해, 그의 어머니 투르칸 카툰은 몽골인에게 사로잡혀 노예로 살다 죽었다)그가 몽골군을 상대로 한 소규모 교전에서 승리하자, 얼간이같은(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헤라트와 메르브의 주민들은 잘랄 웃 딘의 편을 들었다가 그가 인도로 내빼자 대책없이 살해당했다. 헤라트에서는 240만이 죽었다는데, 이 역시 말도 안되는 수치다.

잘 알려진 바지만, 몽골인들은 공성전에 있어서 포로를 이용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포로들은 화살받이, 참호 매우기(흙으로 매우던, 그들 몸으로 매우던 그건 포로들의 운과 재능에 달렸다),기타 보급과 공성 등등 매우 쓸모 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당하는 무슬림들이야 아주 미칠 노릇이었겠지만.
바로 이 시기에, 피르도우시와 이븐 시나, 오마르 하이얌이나 알 콰라즈미등 전 이슬람 세계중에서도 후덜덜한 성취를 이루어냈던 동부 이란의 찬란한 도시들은 대부분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다시는 옛 명성을 찾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몽골 침입 이후 이 동네의 학문적 성취가 박살난건 사실인듯 하다. 이렇게 해서 몽골 침입의 제 1타가 끝난다.

몽골인들은 종교 전쟁같은 개념에는 미숙했다. 다 때려부수기는 했지만, 그들은 도시의 이맘(신학자)이나 카디(법관)들에게 면세조치를 했으며, 예배를 계속 하는 것을 허락했다.

칭기즈칸이 죽고, 우구데이 칸이 대칸위에 오른 후, 인도로 도망간 잘랄 웃 딘은 끈덕지게 살아남아서(도망에는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를 닮았다)다시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로 화려한 귀환을 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다. 이전에 제베와 수베테이가 밟고 간 그루지야를 다시 한번 밟아버림으로써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잘랄 웃 딘이 아버지를 닮은게 또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정말이지 형편없기 짝이없던 정치감각이었다. 아직 동부에는 몽골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그는 압바스조의 칼리프나 시리아의 아이유브조 군주들, 아나톨리아의 룸셀주크조의 술탄들과 티격태격했다. 이틈을 타 우구데이 칸은 1230년, 초르마간 노얀을 파견, 이 멋모르는 얼간이를 혼내주기로(그리고 덤으로 숨통도 끊기로)했다. 이번에는 성공해서 1231년 잘랄 웃 딘은 살해당한다. 이후 몽골의 이란에 대한 통치가 시작된다.

한편 당시 중동에는 무슬림만 바글바글했던건 아니다. 동방 정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악착같이 동방으로 진출해 머나먼 몽골의 웅구트 족등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몽골제국 당시 몽골군 장군들에도 네스토리우스 교도가 많았다. 이란을 통치하던 초르마간 노얀의 처남들도 네스토리우스 교도였다. 그렇기에 그는 그 지역의 기독교도들에게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대했다.

그의 후임자인 바이주 노얀은 룸셀주크를 공격했다. 1243년 6월 26일, 아나톨리아의 쾨세닥(Köse Dag)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바이주 노얀은 룸셀주크 술탄 케이후스라브 2세를 격파하고 룸셀주크를 몽골의 영향권 안에 집어넣는다. 이후 룸셀주크조는 망할때까지 몽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칸국보다 먼저 망했으니까.

한편 몽골도 대책없이 죽이고 부수고 태우기만 해서는 통치가 안된다는걸 생각해서인지, 위구르인 출신의 행정가를 보냈다. 쾨르귀즈나 아르군 아가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몽골이 짓밟고 간 그 자리를 다시금 복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란 지역에서는 장군들에 의한 통치(라기보다는 점령)이 이루어졌고, 아프간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들 행정가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훌라구칸


1251년, 톨루이의 아들 뭉케는 대칸에 오르면서 동생 훌라구에게 '아무다리야의 유역부터 이집트의 끝까지 칭기즈칸의 법을 확립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슬림 세계에 내려쳐진 몽골군의 두번째 채찍질의 시작이었다.
훌라구의 막강한 몽골군은 재빨리 중동으로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이들의 먹잇감이 된 곳은 알라무트의 하사신파들의 요새였다



진짜 하사신들은 이런 이미지하고는 마하트마 간디와 아돌프 히틀러만큼이나 서로 관계가 없다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시아파를 어떻게 해보려는 무슬림들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였다. 셀주크조의 명재상인 니잠 알 물크도 이 인간들에게 테러를 당했고(한술더떠 이 양반의 남아있는 유일한 초상화는 이 장면을 묘사한 초상화다) 십자군 전쟁 시기 프랑크인들과 맞서 싸우던 많은 무슬림 지도자들이 이들에게 암살당했다. 심지어는 살라딘도 이들에게 암살당할뻔 했다. 살라딘은 이들을 처부수려 했지만, 알라무트 산의 요새가 워낙 험하고, 프랑크인들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지라 그만두었다.

몽골인들은 딱히 해결할 문제도 없었고, 살라딘보다 시간도 더 많았기에, 더 정성들여 이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공성끝에 이들의 요새는 함락당했고, 이 종파도 종말을 맞이했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바그다드였다. 도시의 정식 명칭은 평화의 도시-메디나 알 살람(Medina Al Salam)이었지만, 사실 그 역사는 별로 평화롭지 못했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러겠지만.

사실, 몽골군이 압바스조와 바그다드를 호시탐탐 노리던건 몽골군이 처음 왔을때 부터였다. 1221년, 몽골군이 이라크의 이르빌 시를 공격하자 칼리프 안 나시르는 부랴부랴 병력을 모아봤지만 모인 병력은 고작 800이었고, 이르빌은 처절하게 수난당했다. 이후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Al Mustansir)나 알 무스타으심(Al Musta'sim)시대에도 몽골군은 바그다드 근처를 공격했다.

이전까지는 투르크계 맘루크나 군벌들, 부예이흐 왕조(Buwayhid)나 사만조(Samanids)의 군주들에게 질질 끌러다니던 신도들의 지도자(Amir al Muminin)는 안 나시르 시절에 이르러서야 어느정도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망할때 다 되어서 권력을 되찾다니. 아무튼간에, 몽골의 침입이 있을 거란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뻔하게 되었고, 안 나시르나 알 무스탄시르는 열심히 병력을 키워 10만정도의 병력을 구축했다.
문제는 알 무스탄시르가 1242년 죽으며 터졌다. 그가 죽자 중신 알 다와타다르는 칼리프의 아들 아흐메드를 칼리프위에 오르도록 적극적으로 힘을 썼는데, 그것은 그가 똑똑하거나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알 다와타다르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흐메드는 다른 유능한 경쟁자를 제치고 칼리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저주받은 압바스 칼리프조의 칼리프중 가장 저주받은 알 무스타으심이었다.

칼리프를 단순히 예배를 주관하고, 무슬림 세계를 총괄하는 신도들의 지도자로만 본다면 그는 꽤 쓸만한 인재였다. 독실한 순니파였으니까. 문제는 칼리프는 정치도 하고, 외교도 하고, 전쟁도 해야만 했으며, 그가 상대하는 적은 전대미문의 힘을 자랑하던 몽골군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도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가 선조들의 교훈을 되살려 몽골군에게 알아서 기었다면 적어도 그는 천수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들이나 후손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그것도 놓치고 말았다.

여기에 더불어, 그는 굉장히 우유부단했으며, 수전노였다. 알레포의 군주 알 무으잠이 그에게 10만 디나르를 맡기며, 잠깐 봐달라고 한 뒤 다시 찾으려 할때, 칼리프는 접대비니 수고비니 보관수수료니 별별 이상한 명목을 달아 이 불쌍한 알 무으잠에게 몇푼 던져주고 다 떼어먹고 말았다. 그는 게다가 10만의 병력도 2만으로 대폭 줄였다. 10만으로도 힘들 몽골군을 2만으로 막아낸다? 그렇다고 알 무스타으심에게 별다른 대책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바그다드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동방 정교회 기독교 신자들, 유태인들, 기타등등. 당시 시아와 수니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1237년, 바그다드 근교 시아파 거주지역인 알 카르흐에서 시아파들이 소동을 일으켰을때, 알 무스타으심은 아들 아부 바크르와 군대를 보내 '화려한 휴가' 작전을 개시한다. 시아파 출신 재상이었던 이븐 알 아까미는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그는 항상 알 다와타다르와 대립했다. 이븐 알 아까미는 몽골군과 평화를 제안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시아라는 이유로 후대 수니파 역사가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까인다.

먼저 훌라구는 알라무트를 공격할때 칼리프의 군대를 요구했다.
알 무스타으심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훌라구는 조용히 기는게 신상에 좋을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알 무스타으심은 모로코부터 동쪽의 모든 무슬림이 일어날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훌라구는 그랬다간 남은 건 죽음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알 무스타으심은 가서 끓는 물에 머리를 처박으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훌라구는 지금 네놈 궁전으로 날아가는 저것은 나의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덩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든 설명이 끝난 이후, 알 다와타다르가 이끄는 칼리프의 군대는 허무하게 사라졌으며, 500년 역사를 자랑하던 바그다드는 꽁꽁 포위돼 파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칼리프는 이제와서 동전에 이름을 새겨준다는둥 예배 시간에 이름을 언급해주겠다는 따위로는 훌라구를 만족시킬수 없음이 드러났다. 물론 무슬림이 일어나는 일따위는 저승가서 알아봐야 할것이 분명했다.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훌라구의 그의 군대


1258년 2월 10일. 칼리프는 항복했다. 수비대는 모조리 도륙당했다. 1258년 2월 13일. 몽골군이 진입했다. 약탈은 17일간 계속되었으며, 9만여의 주민이 학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칼리프는 말가죽 자루속에서 압사당했다. 압바스조 칼리프의 능묘가 파헤쳐졌고, 대모스크와 궁전들, 시장과 도서관, 학교와 상점들이 불타고 파괴당했다. 수많은 칼리프들이 사 모은(읽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책들은 불태워졌고, 불태워진걸로 모자라 물로 지워졌다. 흘려내린 잉크가 피와 섞여 강을 이루었다. 버려진 책들-이제는 종이더미가 되었지만-은 아무곳이나 내팽개쳐져 산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이러한 참상에서 어느정도는 몸을 뺄 수 있었다. 훌라구의 아내인 도쿠즈 카툰은 케레이트족 출신으로 네스토리우스 교도였기에, 그들의 교회나 회당은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몽골군이 처음 진입했을 때 그 앞에서 얼쩡거렸던 기독교도들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간에 계속 무슬림들에게 억눌려 지냈던 기독교도들은 굉장히 만족해했다.

시아파도 어느정도는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훌라구의 고문인 나시룻딘 투시(Nasiruddin Tusi)는 시아파였기에 시아파에 대한 보호를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몽골군이 처음 바그다드로 달려들었을때 그 앞에서 얼쩡거린 시아파들의 운명은 신만이 아신다.

몽골인들은 바람처럼 나타나 득달같이 달려들어 번개같이 때려부수고 태우고 죽이고 찢고 지나갔다. 아무도 그들 앞을 막을 수 없었다. 무슬림들은 이제 몽골인들이 메카로 달려들어 예언자의 종교를 끝장내는걸 지켜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그들을 구원해 낸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