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사회

공동체와 창조성 - 작은누리 공동체 이야기

by 마리산인1324 2007. 2. 13.
 
<생태공동체운동센터> 2005/06/03 
 
 
제 목 : 공동체와 창조성 - 작은누리 공동체 이야기
저 자 : 박형규
발행일 : 2005년 1-2월호
수록지 : 녹색평론 제80호
발행처 : 녹색평론사


편집자의 말


작은누리 공동체는 경북 문경의 산골짜기에 있는 아주 독특한 사회복지공동체이다. 대표인 박형규 씨는 신학대학을 나와 한때 목회자를 꿈꾸기도 했으나, 기존의 교회 구조 아래서는 복음 그대로 목회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기 나름의 ‘교회’를 만들기로 했다.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공동체였다. 1993년 서울 후암동에서 입양아 3명을 데리고 시작한 역사가 2000년에 문경 모래실 마을로 정착한 지금은 아이 15명과 어른 7명이 함께 사는 제법 큰 공동체로 발전했다.


작은누리는 워낙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인지라 철저하게 ‘자발적 가난’을 추구한다. 따라서 “공동노동 공동분배”는 기본이다. 아이들이 공동체의 기본 노동력이라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규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탁월한 교육효과를 보고 있기도 하다. 작은누리에 있는 5채의 집들은 모두 아이들과 함께 지은 것이다.


편집자가 작은누리를 방문한 그날은 마침 큰아이들이 공부하는 날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공부해온 것을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공부란 것이 아이들에게는 좀 지독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집중적이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것이 중간에 저녁식사 시간을 빼고 밤 10시까지 논스톱으로 진행되었다. 놀라운 것이 그 정도로 장시간 앉아있으면 진력이 나서 몸을 비비 꼴 만도 한데 한 아이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아이들로서는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녹색평론》의 거창한 주제들을 가지고 말이다.《녹색평론》의 글들이 거기에서는 ‘교과서’였다.


나는 졸지에 참관자로 끼어들었다가 어느덧 아이들과 함께 묻고 답하는 학생 겸 교사가 되었다. 공부모임은 박씨가 주관을 하고 어른 3명이 사이사이에 앉아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현직교사로서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하여 언론을 탄 최진 씨(본지 제77호 참고)도 ‘보조 교사’의 하나였다. 최씨는 감옥행을 앞에 둔 사람답지 않게 아이들처럼 명랑하게 공부모임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작은누리에서는 제한된 교사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전국적으로 유명한 참교육의 스승들을 초청하여 ‘빈당강좌’라는 것을 주기적으로 연다. 이 강좌는 외부인에게도 공개된 것으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작은누리에 매력을 느껴 식구가 되기도 한다. 그밖에 계절마다 ‘초등학생 캠프’와 ‘청소년 캠프’를 열어 외지의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두고 있다. 작은누리는 이 땅에 독창적인 홈스쿨링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다.


이번에 싣게 된 박형규 대표의〈공동체와 창조성〉은 창조적 공동체 교육에 대한 그의 교육이념과 철학이 담겨있는 귀중한 글이다.


[객원편집자 황대권(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



비가 온다. 단비다. 한동안 가물더니 금싸라기 같은 비가 온다. 말랐던 땅을 담뿍 적시고 산과 들의 온 친구들이 한껏 생기를 내뿜는다. 목말라 하던 벼도, 고추도, 콩과 고구마, 토마토도 화들짝 웃는다.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할아버지 감나무 소리, ‘빈당’―작은누리 건물의 이름―함석지붕 비 맞는 소리,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포로롱 대며 재재거리는 새들의 노래, 큰 아이들 중국어 따라하는 소리…가만히 귀기울이면 이것들은 그냥 그대로 함께 부르는 멋들어진 노래다. 저마다 제 소리를 내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합창이다. 이렇게 부르는 우리의 노래가 정말 좋다. 아마 이것이 살아가는 일의 가장 큰 기쁨일 게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나름대로의 바람직한) 공동체를 생각해왔다. 우리는 여러 가정, 여러 핏줄의 아이들과 한 울타리에서 산다. 현재 아이들 15명, 어른들 7명. 그러다 보니 항상 어떤 입장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가면서 동시에 우리 삶의 터전을 바로세우는 것이겠는가를 염두에 두고 고민하며 공부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그 나름의 본성을 따라 성장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가장 좋은 모습이 아니겠는가.

한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공동체원(개인)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는 창조성은 떨어질 수 없는 필요충분의 조건이다. 마치 그것은 땅과 비의 관계와도 같다. 비는 땅에서 오고 땅은 비를 통해서 더 풍성해진다. 땅 없이 비가 없고 비 없으면 땅은 황폐해진다. 공동체와 그 속에 사는 개인도 이와 마찬가지의 관계로 성장해나가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산다고 해서 그것을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공동체라면 반드시 지향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 공동체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운동으로 하나의 물결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데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에 대한 공유과정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구성원이 아무리 다양한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 없을 것이다.

가치관을 공유하는 ‘배움자리’

공동체를 꾸려가는, 혹은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신들이 함께 하려는 공동체가 무엇을 위한, 무엇을 향한 공동체인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의 공유이다. 구성원들이 이 인식을 얼마나 탄탄히 공유했느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생명력이 좌우된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가치관 혹은 세계관의 공유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관의 공유를 위해서는 일관성 있고 신축성 있는 일상 속의 ‘배움자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떤 삶의 내용을 그 공동체가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그 양상이 좀 다르게 나타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일관성 있는 공부와 나눔이다.

공동체의 ‘배움자리’가 얼마나 생동감 있게 돌아가느냐가 그 공동체의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세계관의 공유는 머리로만 하는 이론작업은 아니다. 오히려 몸의 작업이고 마음의 작업이다. 몸과 마음의 공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같은 정도로 공유의 자리로 나아갈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서 그 차이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이때 차이를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면서 서로 노력하고 기다리는 과정 자체를 나누어야 한다. 때문에 이것은 지난한 인내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과정은 바람직한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이 아니라 이 과정 자체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고 바로 공동체다. 진정한 공동체라면 어떤 규정된 틀 속에 맞추어가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틀거리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열려있는 틀이어야 한다. 하기에 배움자리는 단순히 생각을 맞추어가는 자리가 아니라 공동체 식구들 생활의 전 측면―몸(실천), 마음(기도), 머리(논리)―이 통짜로 고백되어지고 나누어지며 온 존재를 부둥켜 아우르는 공동성찰의 자리여야 한다.

창조성의 참된 의미

오늘 우리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창조성은 한 개인의 개성, 재능, 재질에서 비롯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 그것도 가장 효율적으로 상품화되어서 그 개인이나 그가 속한 집단의 경제적 이익으로 환산되는 그 무엇 정도로 생각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창조성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지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그 지배 하에 놓이게 한다. 개인의 반짝이는 창조성이 발현되어서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단편적이고 기능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한다. 그 결과는 삶의 본질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결코 ‘창조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창조성은 생명의 본성이다

인간의 창조성은 한 개인이 지니고 있는 자기만의 독특한 재질이나 재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내적인 생명력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생명력인 창조성을 지극히 표피적인 단계에서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자본의 구조가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그릇된 방향으로 치닫는 세상 속에서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갖고 사는 단 하나의 길은 우리 온 민중들이 도시에서건 농촌에서건 자기 삶의 터전을 공동체로 일구어 세워내는 일이다. 인간의 삶을 산산조각 내고 자기 삶의 주인이지 못하게 하는 이 끝없는 욕심의 구조를 극복하는 길은 자각한 민중의 공동체운동뿐이다. 자각한 민중, 자기 생명력의 길을 회복한 평범한 사람들, 인간의 참된 창조성의 뜻을 깨우쳐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들이 이곳저곳, 여기저기 많이 생겨나야 한다.

창조성의 참된 의미는 통전적 존재로서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인간 모두에게 창조성은 근원적인 생명력으로 주어져 있다. 허나 그것은 상황에 따라 저절로 발현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끄집어내서 다듬는 과정을 통하여 발현된다. 저절로 발현되는 것들은 주로 맹아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맹아적인 것들을 삶의 진정한 생명력으로 이끌어내는 과정, 자기 길로의 올바른 눈뜸, 통전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통해서 인간의 창조성은 삶을 살아가는 생명력, 이른바 ‘창조력’으로 나타난다. 자기 안에 있는 창조성을 보고 그것을 창조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교육이다.

10여년간 아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일구어 오면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이 있다. 그건 바로 공동체의 삶과 문화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꾸준하고 일관된 통짜로서의 자기각성의 과정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해가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의 노력이기도 하거니와 공동의 배움자리를 통한 공동성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주적인 가난의 삶’, ‘생명의 본성을 따르는 삶’, ‘평화와 평등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식·주·의 문제와 교육을 스스로 해간다. 머지않아 의료와 에너지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중이다. 자본주의 생활방식을 서서히 벗어버리고, 가난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삶과 문화를 주체적으로 창조해가는 생활의 양식을 창출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구체적인 노력은 자기 존재에 대한 통전적인 자각, 이 생명세계와 역사에 대한 통짜로서의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통전적 존재로서의 자각이란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 대한 실존적, 사회·역사적, 영적 혹은 우주적인 각성이 분리되지 않고 통짜로 오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한 인간의 깨우침은 반드시 총체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시작을 어디서부터 해왔든 삶의 자리에 대한 그의 살핌이 꾸준한 일관성을 가진다면, 곧 온 생명세계가 진행되는 전체의 과정으로서의 역사와 순간순간 속에 녹아있는 삶의 영원성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통전적 존재로서의 자각이란 삶의 전체성과 통전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역사이고 영원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을 가진 자는 ‘나’라고 하는 개인이 온 생명세계와 역사의 총체적인 관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는 개별적인 존재로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항상 사회적·역사적 존재이며 우주적 존재이다.

창조성의 방향―공동체적 품성 기르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모양새의 공동체를 지향하든지 공동체 구성원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것이 있는데, 공동체적 품성의 깊이와 넓이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애초부터 공동체적 존재이다. 들에 사는 풀과 꽃, 산에 사는 나무들과 동물, 새…그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정말로 제각기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다른 존재들이 사는 방식은 한데 어울림이고 아우름이다. 어울림과 아우름, 이것은 모든 생명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명의 본성이며 그 본성대로 살아가는 존재의 근원적 방식이기도 하다. 생명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어울림과 아우름, 이것을 나는 공동체적 품성의 삶이라고 부른다. 공동체적 품성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온 생명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공동체적 품성은 한가지로 깊게 스며들어 있다.

이 공동체적 품성을 기르는 생활의 훈련이 얼마나 진지하게 진행되느냐의 정도가 그 공동체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그러면 어떻게 공동체적 품성을 길러낼 것인가.

공경의 마음

공경은 모든 것의 중심에 놓여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의 중심에 놓여있으며,
아이들과 가족관계의 중심에 놓여있다.
뿐만 아니라 공경은 자연과의 관계의 중심에 놓여있으며
위대한 신령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경은 훈련과…모든 학습과정의 기본을 이룬다.

―키오와 족의 앨런 퀘톤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하늘 아래 사는 온갖 것들이 모두 한 형제라고 말하는 인디언들의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하며 동의하며 동행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공경하는 마음이다. 공동체를 하는 사람들, 또 공동체를 하려는 사람들이 진실로 온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 바로 이 공경의 마음이다. 공경의 마음은 자기자신과 모든 살아있는 생명과의 어울림과 아우름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공경하고 자연을 공경함이 근간이 되는 창조성이 바람직한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녹아내릴 수 있도록 공경의 마음을 우리의 훈련과 학습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땀흘리는 노동

그간의 경험으로 한가지 분명한 깨우침을 얻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12살이 넘어가고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각기 자기 기질들이 밖으로 드러나고 그게 때로는 서로간의 심각한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더러는 이웃집의 것들을 슬쩍하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그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자라는 과정에서 자연스런 일이지만 여러 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기에 이 갈등과 다툼과 잘못된 버릇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생활의 내용과 분위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타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엄하게 꾸짖기도 했지만, 한창 자라는 녀석들의 기운을 도저히 잠재울 길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냥 그렇게 커가겠거니 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딱 한 부분에서만은 이 아이들이 낄낄대고 서로 부대끼며 한 덩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농촌에서 밭농사도 짓고 동물들도 기르면서 노동을 통해 살고 있다. 그러던 중 1998년 가을에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마땅히 살 곳도 없고 해서 포천 영중면의 폐가를 고쳐서 살기로 했다. 집수리를 하는데 11월이라 찬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었지만 우리가 살 집을 고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달 보름을 보냈다. 기초와 기둥을 제외하고 썩은 서까래까지 싹 다 뜯어내 지붕까지 전부 새로 해야 했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힘들고 고단한 초겨울의 날들이었지만 한마음이 되어서 함께 한 우리의 땀흘리는 노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우리 집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드는 노동 속에서 그동안에 있었던 갈등도 껄끄러움도 흐르는 땀방울 속에 다 녹아버리는 듯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항상 기본노동이 각자 있었지만 그때만큼 집중적으로 모두 함께 땀흘려 본 적이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묘한 자신감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넓고 험한 산골짜기 비탈밭이라도 우리가 가면 해낼 수 있었고, 엄청나게 무거운 대들보도 우리가 함께 들면 거뜬히 올릴 수 있었다. 이제 우리 집 아이들은 자재만 있으면 스스로 집을 짓는다. 아니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로 하여 뭉치고 협동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자긍심이 더 소중하다. 우린 그동안 두번 폐가를 고쳐보았고, 다섯번 새 집을 지어보았다. 나도 아이들도 집을 지으면 지을수록 자신의 모남과 모자람을 알게 되고, 그래서 돌아보며 반성하게 된다. 혼자 잘나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노동의 원칙을 우리는 이제 안다. 오히려 좀 부족하고 모자라더라도 그 힘을 한데 모으고 집중했을 때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근사한 집이 세워지고, 그 속에서 삶의 소중한 것들이 알알이 이어지는 기적을 우리는 보았다.

땀흘리며 함께하는 노동, 그 과정 속에서 나를 보고, 너를 보고, 우리를 본다. 맞잡은 통나무를 한켜 한켜 쌓으며 우리가 가는 삶의 길을 보고, 우리가 가야 할 역사를 보고, 생명의 길을 본다. 서로 부대끼며 흘리는 땀 속에서 너와 나는 다르지만 더 큰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이 망망한 생의 바다를 함께 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하는 몸의 구체적인 노동, 이것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유일한 끈이다. 땡볕에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우리가 짓고 있는 집을 보며 밝게 웃을 수 있다. 우리가 지은 그 집은 그냥 집이 아니다. 그건 우리의 슬픔과 기쁨, 갈등과 용서, 절망과 희망, 눈물과 땀의 몸부림으로 빚어낸 우리의 삶 자체이다. 때문에 노동은 우리의 힘이며 우리의 생명력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노동과 기도와 공부(교육)가 통짜의 생활로 하나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삶이 하늘의 뜻을 따라 생명의 본성 그대로를 구현하며 사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것은 상생의 삶이요, 평등의 삶이요, 공의(公義)의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자체가 바로 이런 삶의 정신을 그대로 실현해 가는 과정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부단하고 끊임없는 수련과 자기성찰(기도)이 없고서는 도저히 안된다. 더욱이 이것은 혼자만의 몸부림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가지 마음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 한자리에서 함께하는 공동의 일이며 공동의 깨우침이고 성찰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창조성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른 삶을 살며 창조해내는 공동체운동을 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누리공동체이야기.pdf
0.2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