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 -
절에 봄이 찾아오니 꽃이 피고 새 잎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새 잎을, 꽃을 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장 고운 빛깔과 향기로써 꽃을 피워야 합니다.
법구경에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물을 대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곱게 만든다. 목수는 재목을 다듬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룬다.'
또 이런 법문도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워 백만인을 이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승리자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어떤 종교, 어떤 종파에 속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가 아닌 부분입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은 갈등을 낳습니다. 담을 쌓지 말고, 금을 긋지 말고, 내 것 네 것을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절, 네 절을 따지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세계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바른 신앙 생활을 하려면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아야 합니다.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도에서는 쉰 살의 나이를 '바나 플러스'라고 합니다. 이는 '산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오십 년의 인생을 살았으면 사회적인 의무를 다했으니 서서히 산으로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통적으로 힌두교에서는 인생을 네 개의 주기로 나눕니다. 범행기(梵行期)는 스승의 집에서 경전과 고전 등 학문을 배우는 때이고, 가주기(家住期)는 집에 돌아와 결혼을 해서 세속적인 의무를 다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임서기(林棲期)는 숲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때이고, 유행기(遊行期)는 부부간에도 헤어져서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가는 생애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나이 쉰 살이 되면 세속적인 의무를 마치고 산을 바라볼 때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훨훨 짐을 다 벗어버리고 자기 몫의 삶을 챙길 때라는 것입니다.
명상하지 않는 종교는 맹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광신자가 되어 어떤 믿음에 열광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겉도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무익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종파적인 벽에 갇히면 파괴적인 힘까지 발휘할 수 있습니다. 종교성 자체는 본래 명상을 통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명상을 하지 않고 종교를 접하려는 것은 뿌리를 잊어버리고 가지를 뻗으려는 격입니다.
수십 년 절에 다니면서도 명상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입으로만 염불하지 그 정신은 왔다갔다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낱낱이 살피고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주의력과 인내력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집중은 커다란 침묵입니다. 그 안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바다와 같은 침묵이 담겨 있습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 신앙인들은 말이 적어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정신이 흩어집니다. 침묵이야말로 근원적인 세계입니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곧 명상의 입문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삽니까? 말을 하고 싶어도 참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덕이 됩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하면 그 말은 아무런 힘이 없게 됩니다.
침묵의 세계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가능한 한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시시각각 침묵에 잠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30분이나 1시간은 명상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침묵을 하든,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그것을 간절히 행하면 그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스럽고 영원한 것이 깃듭니다. 더없이 평화로운 무엇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마음입니다. 본래의 자기인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설령 부처라 해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부처의 제자가 인류 역사상 수만 명, 수억 명이지만 아무도 깨달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은 우리 안에,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과일에 씨앗이 박혀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깨달음의 빛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찾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씨앗을 키우는 일, 움트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인내를 갖고, 긴 시간 동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언젠가는 씨앗이 싹을 틔우게 됩니다.
커다란 침묵과 하나가 될 때 내가 사라집니다. 내가 어디 있습니까. '나'라는 것은 따져 보면 아무 실체가 없습니다. 반야심경에도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없습니다. 가공적인 것입니다. 몸이 있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 작용이 있는 듯하지만 그 실체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에 불과합니다.
수레를 비유로 들면, 수레를 낱낱이 분해해 보면 거기 수레의 실체는 사라집니다. 바퀴가 있고, 굴대가 있고, 무엇 무엇이 있지만 해체해 보면 실체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없는 텅 비고 무한한 공간 속에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어떤 기운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자유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지고 있는 갈등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갈등은 '나'라는 생각이 만들어 냅니다. 금강경에 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무엇엔가 집중을 하는 것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일입니다. 샤워를 하든, 요리를 하든, 청소를 하든 아무 잡념 없이 그 순간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그것이 삶을 최대한으로 사는 일입니다.
마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하다는 것, 걱정 근심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을 붙들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강물처럼 흘러가 버렸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미래나 과거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돼 버립니다.
현실을 회피한다고 해서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현실, 자신의 현재를 냉엄하게 들여다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거듭거듭 살피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루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자신을 묻고 들여다보는 침묵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빛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싹이고, 새롭게 열리는 문입니다.
옛 법문에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요,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림은 자신을 텅 비우는 일이고,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내 마음의 문이 겹겹이 쌓이면 맞섬과 대립이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대립이 없습니다. 이렇듯 자유로워졌을 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드러납니다. 개체인 자기에서 전체적인 자기로의 변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나로부터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속성, 모든 이익과 얽혀 있는 나로 변신되는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대립이 사라집니다. 어떤 것과도 대립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본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전체를 이루려면 개체가 무無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개체로부터 전체에 도달하는 일입니다.
부처의 마지막 설법인 남전 열반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지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법(진리, 가르침)을 등불 삼고 법에 의지할 것이지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라.'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데,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몸소 부처가 되는 깨달음을 이루는 자기 실현의 길입니다.
불교는 자기 탐구의 종교입니다. 자기 탐구의 과정에서 수많은 자신의 존재를 찾아갑니다. 개체의 자기를 탐구하다 보니 전체의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서 자기 자신을 강조한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해 이웃과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를 통해서만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으면 불교도, 종교도 아닙니다. 참 지혜란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의 존재, 전체의 존재를 찾아내는 따뜻하고 밝은 눈입니다.
이제 곧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이 무슨 날입니까. 등불 켜는 날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사실 절이나 법당 앞은 어둡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사는 이웃을 위해 따뜻하고 환한 등을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입니다.
결식 아동이 전국적으로 1만 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일터를 잃은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 곧 '자비의 등불'입니다.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등불', '지혜의 등불'입니다. 힘닿는 대로 부처의 제자된 자로서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자비의 등'을 많이 밝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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