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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도올 설교전문(한겨레신문 070305)

by 마리산인1324 2007. 3. 15.

 

<한겨레신문> 2007-03-05 오전 09:38:12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94280.html

 

[설교 전문] “내가 왜 반기독교냐? 나야말로 정통신앙인”
 ‘성서 논쟁’ 도올, 은혜공동체교회서 초빙설교 전문
한겨레
» 구약폐기론으로 '도올 성서 논쟁'을 불러 일으킨 김용옥 교수가 4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은혜공동체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구약폐기론으로 '도올 성서 논쟁'을 불러 일으킨 김용옥 교수가 4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은혜공동체교회에서 찬양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이런 자리에서 뵙기에 앞서서 여러분 찬송가 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난다. 왠일인지 눈물이 쏟아져서 말을 잘 못하겠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큰 사람이 되어나서 여러분들이 부른 찬송가에 어렸을 때의 감격같은 게 숨어있다가 다시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도 난다. 내가 사는 천안에 우리 집 옆에 함석헌 선생이 씨알농장을 하면서 한 손에 희랍어 성경을 들고, 한 손엔 호미를 들고 농사를 지었다, 그 분이 참외를 지게에 지고 우리 집에 오는 것을 보면, ‘참 잘 생긴 할아버지다’고 생각했다. 그 분은 굉장한 미남이다. 북에서 핍박받고 남하하면서 수염을 자를 기회가 없어서 그대로 길렀다고 하는데 흰수염이 펄럭였다. 그런 생각들이 솟구친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교회 간다는 것은 감격이 있었다. 그저 예배 보는 게 아니라, 함선생 같은 분도 오셔서.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얘기들을 많이 했다.

 

영친왕이 마지막 황손인데, 그가 죽어서 장례 행렬이 나가는데, 사람들이 엄청 울었다. 그런데 함 선생이 설교 때 이 우매한 백성이 가짜왕이 나가는데 울고 따라간다고 욕을 했다. 그 때만 해도 함 선생님 말씀이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그랬다.

 

“너희들 착각하지 마라. 왕조시대는 이미 끝났다. 기독인들은 세속의 왕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게 야단을 쳤다. 그 때는 이해가 안갔는데, 얼마나 당대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역사를 고민하고, 우리 민족이 어떻게 바르게 살아가야 할지 바로 일러주었느냐. 지금은 그런 모습을 교회에 가서 볼 수 없다.

 

“어릴 적 영친왕 장례 통곡에 함석헌 선생 ‘착각하지 마라’ 호통쳐”

 

어느 시점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기보다는 등산을 가는 것이 참다운 예배라고 생각했다. 북한산에 올라가 물소리 듣고, 새소리 들으면 그게 하나님 소리다. 백합을 보아라. 교회 가면 솔로몬의 백합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를 안나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 선생도, 로마인서 12장 보면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의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 그것이 영적 예배니라. 내 몸을 살아있는 제물로 드린다”고 했다. 등산을 가면 몸이 건강해진다. 내 몸 하나라도 건강하게 지켜서 살아야 이 몸을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냐.

 

일요일날 교회 대신 등산하는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여러분을 보니,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께 몸을 산예배로, 영적 예배로 드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설교보다 등산 가는 게 참다운 예배라고 생각해”
“교회 가면 솔로몬의 백합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마지막에 여러분이 드린 찬송가에서, “다 좋지만, 바라보아라 인간의 내면을, 인식하여라 온전할 수 없는 인간을, 아무리 노력하여도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절망적인 메시지냐. 사람이 그렇거든. 내가 입만 뻥긋하면 욕을 해댄다. 우선 도올이 뭘 얘기하면 까고 본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입만 열면 깐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은 예의라도 지켜가면서 해야할 것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할 수 없는 게 인간의 모습이다. 내 자신을 반성해봐도 그런다. 내 자신이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신앙이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잘 난척해 봐도 인간은 인간이다. 변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육체를 가지고 있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인간으로서만은 극복하기 어렵다.

인간의 힘으로서 되면 좋겠는데, 그게 어렵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미륵보살의 도움을 필요도 한다. 자기를 구원한다지만 그걸로 해결이 안된다. 그래서 종교가 있다.

 

그렇게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 속에서 무엇인가 희망을 바라보기 있어서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예수의 진리다. 요한복음은 ‘예수=진리’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들은 알기 어렵다. 말씀은 이 살(피부)이 할 수는 없다. 목청이 떠는 것은 영혼이 울려야 목청이 떤다. 이 목청을 울리게 하는 그것은 인간의 어떠한 영혼이랄까 정신이랄까, 말씀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 성령이라고도 하고, 보헤사란 말도 쓴다.

 

이런 것을 통해 인간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너는 나를 볼 수 없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엄마 자궁 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와야 하느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땅의 언어로만 얘기한다. 나의 하늘의 언어를 못알아듣는데,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로마서에도 ‘너희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다. 이 세대를 본받으면 그건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말라는 것은 혼자 고고하게 살라는 게 아니다. 네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회도 나오는데 매주 똑같으면 안된다. 나올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 때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우리에게 분별돼 나타난다. 마음이 새롭게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뭔지 모른다.

 

내가 요한복음 해석을 냈으면 새로운 것이면 그것을 읽어보고, 이런 시각에서도, 저런 시각에서도 볼 수 있구나하고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새롭게 통합해야 하는데, 그저 분열만 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새롭게 하지 않으면 썩어버린다. 나는 늘 새로워지지 않으면 내 인생을 살면서도 아무 재미가 없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

 

햄릿이 그러지않았느냐 “투 비 오어 낫 투 비”. 존재할 거냐. 존재하는 것을 그칠 것이냐. 인간은 자살할 수도 있다. 간단히 죽을 수도 있다. 자기가 존재할려고 한다면, 존재하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대학은 요한복음 사상과 같아…날마다 새로워져야”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대학이란 고전을 봐라. 대학은 큰배움이다. 소학은 작은 배움이다. 글씨나 배우고, 인사법을 배우지만 대학은 그런 걸 배우는 게 아니다. 큰 걸 배우는 거다. 대학은 요한복음 사상과 같다. 밝은 덕을 밝게 하는 데 있다. 인간의 로고스. 인간에게 빛이 있다. 밝은 덕을 밝히는 게 대학이다. 그렇게 해서, 백성들을 새롭게 한다. 그렇게 해서, 지극히 선한 데 이르게 하는 것이 큰 배움이다. 이게 대학이란 책의 첫말이다.

 

» 구약폐기론으로 '도올 성서 논쟁'을 불러 일으킨 김용옥 교수가 4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은혜공동체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자기 밝은 덕을 밝게 하는 것은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얼마나 멋있냐. 일일신. 매일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또 있다. 또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얼마나 정체를 거부하고, 새로워지는 것을 중요시하느냐.

 

헤겔이란 미친 놈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동양을 정체의 왕국이라고 했다. 서양만이 새로워지는 문명이라고 했다. 그 나쁜 놈이. 알지도 못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동양은 변하지 않는 지속의 왕국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동양사람이야말로 일신 일일신 우일신 하는 문명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정체를 싫어한다. 인터넷 하면 싸그리 깔아버린다. 유교하다가도 싸그리 벗어버리고 기독교 받아들여버린다. 지구상에서 이렇게 끊임 없이 새로워지는 문명이 어디 있느냐.

 

“헤겔, ‘동양은 정체의 왕국’…한국사람만큼 새로워지는 문명 어딨나”

 

그렇게 지독하게 샤머니즘을 하다가 불교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였다. 또 그것을 싹 쓸어버리고 500년을 유교로만 지탱했다. 그것도 구한말에 싹 쓸어버리고 기독교로 바꾸었다 인류에서 그런 문명이 있느냐.

애초엔 풍류의 원류인 현묘지도, 풍류지도를 받아들이고, 불교-유교-기독교. 이렇게 했는데 기독교가 잘못하면 싹 쓸어버린다.

 

불교를 싹 갈고 유교로 간 사람들인데, 기독교도 싹 갈아버릴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진리를 추구하는 민족이지 특정한 종교에 미치는 민족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1세기 동안 기독교에 헌신했다. 헌신 한 것은 딴 게 아니고 기독교에 희망이 있다고 봤다. 억압받던 상황에서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해 억압받은 상황과 일제에 억압받는 상황이 비슷했던것이다.

 

일본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우리 어머니가 길거리에 순사 온다면 우리는 울음을 그쳤다. 일본도 차고 지나가는 소리만 들어도 서슬이 퍼랬다. 그냥 죽여버려도 꼼짝 못했다. 일본인들은 너무 잔악했다. 지금 일본 가보면 그렇게 질서 정연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학문 수준 높고, 위대한 민족처럼 보인다. 지들 안에선 그런 룰을 잘 지키는데,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개새끼가 된다. 일본인들은 보편주의가 없는 것이다.

 

나도 동경대에서도 강의했다. 너희는 보편주의가 없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안그렇다. 우리끼리만의 잣대로 사는게 아니라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서 진리를 추구할 줄 아는 민족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보편주의로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울타리 안에서만 룰 지키고 벗어나면 ‘개’”

 

어린시절 사도바울과 스트러글 속에서도,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듯이 사도바울이 은혜도 권능도 있고 이적도 행하지만, 몸이 아팠다고 한다. 나도 관절염의 고통을 심하게 받고 살았다.

 

사도 바울이 자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몸에 가시를 줬다고 했다. 나도 관절염이 툭툭 쑤셨다. 동병상련이 느낌으로 사도 바울을 좋아했다. 남은 고치면서 왜 자기병은 못고치느냐. 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 나온다. 3번이나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은혜가 이미 충분하다. 왜냐. 내 힘은 연약한 가운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가 아프고 고통 당하는 데서 하나님의 온전한 힘이 깃든다고 하는 것을 알고 전도여행을 이겨냈다는 실존적 고백이 있다.

 

나도 병을 평생 갖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사도 바울에게 배웠다. 내 몸이 연약하다고 탓하지 말자. 아프면 아픈대로 받아들이고 살자고 생각한 것이다.

 

성경이 27서 체제다. 우리 때는 노래로 외웠다. 27서 체제는 A.D. 367년 전에는 없었다. 314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막상 초대교회를 모른다. 초대교회엔 성경이 없었다. 300여년 동안 기독교엔 성경이 없었다. 예수의 말씀만 있었다. 여러가지 텍스트는 있었지만 단일한 체제로서 성경이란 이름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날 권위주의적 교회가 아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전해내려오는 것이 있었다. 그게 가라사대 구절이다.

 

“예수교란 기독교랑은 엄밀하게 다르다”

 

그게 우리가 가장 중시해야 할 부분이다. 예수의 말씀만이 초대교회의 오리지날한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복음서 기자들이 그것을 연결하는 스토리를 쓴 것이다. 그게 내러티브다. 크게 말하면 내러티브보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독교를 생각해야한다.

 

여기도 대한예수회장로회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교와 기독교가 다르다. 예수교는 정말로 3년 예수님과 더불어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 3년이 진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 다음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도들의 공동체였다. 그리스도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믿음의 종교다. 예수교와 기독교는 엄밀하게 다르다.

 

그래도 초대교회는 예수교적인 기독교다. 그런데 313년 로마황제에게 공인받은 뒤엔 황제교적 기독교가 됐다. 나는 그것을 못믿겠다. 그 이후 기독교는 문제가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믿게 한 것을 아옵소서”라고 했다.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내가 참 포도나무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다. 예수가 만약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열매가 여러분이다. 나무 전체가 교회라는 영적인 생명 공동체다.

 

기독교가 이런 것을 상실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할 땐 내 안에서 거하라. 나도 동시에 너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 근거는 내가 하나님 속에 거한다. 예수님이 그랬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 거함에 의해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 논리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과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로서 거한다. 기독교는 요한복음 메시지를 밀고 들어가면 불교도 설 자리가 없이 과격하게 된다. 기독교는 이런 요한복음 사상을 해석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런 속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 없는데 뭐하러 하나님이 가치가 있느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있느냐.

 

인간의 관계를 떠난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민족과의 계약 관계에서만 하나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줬다는 것 때문에 야훼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예수와 우리와 관계다. 너희들 모두가 하나되라고 했다. 은혜공동체라고 하는 곳은 여기서 찬송가 부를 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나무는 과수원의 한 나무는 아니다. 이것을 갖다가 과수원의 한나무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적 나무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 나무다. 거기에 있는 열매는 이슬람도 불교도 있다. 그게 다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하나님 나무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해석을 안내린다. 로마 황제가 심은 한 나무에만 매달린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그건 반성서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신도들에게 구라를 피운다.

 

그것이 과연 기독교의 모습인가. 그래서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모습은 한민족이 갈구하던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 땅에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다. 자꾸 악순환이 많다. 나는 훌륭한 목사님이 이 땅에서 펼쳐지길 바라는 사람이다, 왜 내가 반기독교냐. 나야말로 정통 기독교 신앙인이다.

 

“내가 왜 반기독교냐? 나야말로 정통 기독교신앙인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도올 같은 사람을 내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사도 바울 같은 이가 기독교를 구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핍박했던 사도바울을 자기 사도로 만들어 썼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면 나를 까더라도 예의는 지켜야지. 그런데 인신 공격을 한다. 네가 공부를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감히 내게 그런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을 가지고 나에게 덤비겠다니.

 

나는 지금도 재즈 공부를 한다. 다음엔 피아노 반주하러 오겠다. 쑥쓰러운 얘기지만 자신들을 돌아보는 게 현명하다.

 

<기독교성서이해>라는 책이 나와서 이 설교 기회가 만들어졌다. 오늘의 설교를 울음으로 시작했지만, 여러분과 영적인 교류가 이뤄진 것에 대해 너무 행복하다. 내가 예수교장로회다. 내가 예장에서 큰사람이다.

 

이런 교회가 있어서 예수교장로회의 체면을 세워줘 너무 기쁘다. 은혜공동체 교회가 영적으로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길 바란다.

 

» 구약폐기론으로 '도올 성서 논쟁'을 불러 일으킨 김용옥 교수가 4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은혜공동체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정리 = <한겨레>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