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2007년03월22일 제652호
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7/03/021109000200703220652023.html
왜 한국 기독교는 참회하지 않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나에게 다른 종교에서 찾기 어려운 기독교의 매력은 기독교적 평화주의다.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들도 원칙상 살생을 금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개교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병역거부, 폭력거부의 전통을 꾸준히 이어온 기독교 평화주의자들만큼 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 강한 종교인들은 없다. 물론 기독교의 주류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된 313년 이후로는 초기 교회 시절과 달리 병역거부를 더 이상 ‘기독교인의 당연한 의무’로 여기지 않았고 국가적 폭력에 부역했다. 하지만 그 주류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아온 소수 교단과 개인들은 중세부터 지금까지 예수의 평화 정신을 지켜왔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한 톨스토이의 다음과 같은 말은 평화주의적 기독교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 고 이승만 대통령의 33주기 추도식이 열린 국립현충원에서 한국군종목사단이 추모 찬송을 부르고 있다. (사진/ 연합 전수영) |
박애의 정신으로 죽여라
“내면의 하나님의 법만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내면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외부의 어떤 법체계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국가 존재의 전제 조건인 국가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배교에 해당하는 행위다. …폭력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만이 결국 이 세계 전체를 외부 권력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1893)
물론 자본과 국가 권력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내면의 하나님의 법’만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기독교의 평화주의적 내용을 인식하는 사람 역시 소수다. 그럼에도 복음주의 교회들과 장로교회, 감리교회, 루터교회 등 미국의 주류 교단의 전쟁관과 평화관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회중교회 계통에 속하는 오벌린대학의 학장 에드워드 도스워스는 1917년에 미국이 제1차 대전에 뛰어들어 징병령이 내려졌을 때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명성’을 얻었다.
“기독교적 군인은 기독교 박애정신으로 적병에 부상을 입히고 살해한다. 그 마음속으로 적병을 저주하지 않으면서 살해만 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전쟁 방식이다.” 당시 미국 주류 사회의 전쟁 히스테리 속에서 직장을 잃지 않으려 전쟁 부역을 해야만 했던 그의 처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적병 살해’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닌가? “박애의 정신으로 죽여라”는 이야기는 심한 쪽에 속하지만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운다” 정도는 제1,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주류 교단의 통일된 입장이었다. 그 범죄성이 명백한 베트남 전쟁 때에 이르러서야, 감리교회와 같은 일부 주류 교단이 전쟁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신도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권리를 인정하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 현재는 우파 복음주의 교회를 제외한 미국의 다수 교회들이 이라크 침략의 지속을 반대하지만 원칙상 ‘의로운 전쟁’의 가능성은 아직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주류 기독교는 이처럼 전쟁 때에 국가의 종교적 보조원의 역할을 조직적으로 했지만 적어도 소수 성직자들은 전쟁 반대나 군목으로서 참전 이후의 참회 등 전쟁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싹이 약간이나마 틔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 교회사에서는, 주류 교회의 문 밖에 내몰렸던 함석헌 선생과 같은 특수한 개인을 제외하고는, 국가적 폭력과의 관계에 대해 반성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개신교가 처음 전해진 구한말에는 선교하는 쪽과 새로운 종교를 접하는 쪽 모두 자기 나름의 국가적 의식을 바탕으로 행동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에서 일본을 지원했던 미국이나 영국 등 본국 정부의 입장을 따랐던 선교사들은 1901년부터 일본의 식민지화 계획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해 합방 이후에 총독부와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다. 한편, 수많은 조선 개화주의자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가진 배경에는 ‘최강의 문명국’인 구미 열강에 대한 흠모가 깔려 있었다. 궁극적인 관심이 ‘문명의 힘’에 있었던 만큼 기독교적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독립신문>은 1898년에 ‘덜 개화된’ 스페인에 대한 ‘개화 종주국’인 미국의 승리에 갈채를 보내는 등 ‘문명인’들의 무력 사용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국가보다 ‘반공 성전’에 더 열을 올려
일제 말기에 식민지 모국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다수 성직자들의 행위가 당국의 강요로 인한 타율적인 행동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해방과 미군정으로 한국 기독교인과 국가의 관계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목사 이상의 종교적인 열정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감리교인 이승만의 기독교적 기도로 1948년 8월18일 수립이 선포된 대한민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전 민족 기독화’의 꿈을 키우는 ‘우리의 국가’였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기대어 그 세를 급격히 넓힌 교회는 1952년의 선거에 이승만을 “한국의 모세”라고 부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그 이유로 ‘정치의 기독화’(기독교 의례의 국가적 수용) 이외에 군목 제도의 설립을 들었다. 즉, 동족상잔을 치르고 있던 한국군에 목사들이 파견되어 ‘공산 악마와의 성전’을 격려해주었던 것은, 교회로서는 ‘문제’라기보다는 ‘성취’였다. 이 제도의 신설을 이승만에게 요청했던 한경직 목사는, 전쟁 때에 “군대의 정신 무장이 기독교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해 ‘전군의 기독화’를 촉구하고, 1956년에 성경을 “애국애족의 교과서”라고 평가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주류 교회들이 국가에 전시 협력을 했을 때 국방부 산하의 ‘종교 관련 부서’로 전락했다고 평화주의자들이 비판했지만, 어쩌면 국가보다 ‘반공 성전’에 더 열을 올렸던 한국 교회들의 당시 언행은 국가를 “공산 악마 박멸”의 도구로 여긴 듯한 감마저 든다. 그러한 토양에서는 국가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원론적으로 불가능했다.
교계의 총아였던 이승만이 “한국군을 3사단 정도 보내고 싶다”고 했던 베트남전쟁을, 한국 교회는 6·25를 그대로 이은 ‘멸공 성전’이라고 인식해 국군 베트남 파병에 앞장섰다. 1966년 8월, 백마부대의 베트남 파병 환송식이 기독교 기도로 진행됐고, 그 부대장까지도 성경을 인용해가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나님의 십자군”을 보호하겠다는 자신의 신앙적 전쟁관을 밝혔다. 베트남 전선에 수많은 군목들이 간 것은 물론, 백마부대 안에서는 아예 ‘임마누엘부대’라는 기독교인만의 중대가 편성되어 교계에서 ‘신앙의 십자군’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백낙준 등 한국 기독교의 원로들이 나서서 국제 교계의 반전 운동을 “공산 침략을 당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르는 소리”라고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당시에 베트남에서 미국 침략에의 부역을 글과 말, 기도로 옹호한 수많은 기독교 지식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중에 공개적으로 참회한 적이 있었던가?
제국의 ‘힘’보다 제국에 희생된 ‘사랑’을…
국가를 부단히 상대해야 하는 현대의 대중적인 주류 교회가, 국가 권력에 의해 법살을 당한 예수나 국가 권력과 불협화음을 냈던 톨스토이의 평화 정신을 그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된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국가적 폭력을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계급사회에 교회가 적응한 이상 그 교회에 예수 정신의 완전한 구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이 미국의 주류 교단처럼 전쟁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병역거부를 “개인이 자유 의사에 따라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양심적 선택”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개과천선해 참회할 줄 아는 종교집단답게 되려면, 이미 역사의 비극으로 인정된 6·25 동족상잔 때나 침략전쟁으로 정리된 베트남전쟁 때의 한국 기독교의 호전성에 대한 참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가 찬양했던 전쟁들의 와중에서 죽은 이들을 살릴 수야 없지만, 적어도 당시의 행동이 예수의 정신을 배반했다는 것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면 다음에 주류 기독교 집단이 국가에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과연 성조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대형 교회의 성직자들에게는 제국의 ‘힘’보다 제국에 희생됐던 예수의 ‘사랑’을 우선시할 용의가 있을까?
참고 문헌:
1. <국가와 종교> 최종고, 현대사상사, 1983.
2. ‘한경직 목사와 한국전쟁’ 이승준,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15호, 9~38쪽, 2001.
3.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 유대영,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21호, 73~99쪽.
4. ‘한국군 베트남 파병과 박정희’ 최용호, 정성화 편 <박정희 시대 연구의 쟁점과 과제>, 선인, 355~405쪽,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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