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 불기 2545년 1월 1일 301호
http://www.buddhapia.com/mem/hyundae/auto/newspaper/301/s-2.htm
【가까이서 뵌 큰스님】송담스님<인천 용화선원 원장>
“참선은 출-재가
누구나 할수 있다”
용화선원에선
오늘도
25년전 열반한
전강선사의
육성법문 듣는다
◇용화선원 법보전에서 전강선사 추모재를 봉행한 후 스님과 신도들의 인사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는 송담스님(가운데).
◇구랍 27일 인천 용화선원 법보전에서 봉행된 전강선사 26주기 추모재에서 송담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구랍 27일 인천시 남구 주안5동에 소재한 용화선원 법보전. 스승인 전강선사의 26주기 추모재를 맞아 인사말을 하는 용화선원 원장 송담스님. 이날 용화선원에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든 스님 200여명 등 1천여 불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선지식이지만 스승의 육성법문을 법어로 대신한 채 법단아래에 서서 사부대중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겸손함이 예사롭지 않다.
스님의 하심(下心)은 스승인 전강선사(1898∼1975)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송담스님은 조실 추대를 거절한 채 여전히 열반한 스승을 조실로 모시고 있다.
일반 불자들에게도 문을 활짝 열어 법보(비구)선원 외에 시민선방과 보살선방까지 운영하고 있는 용화선원에선 25년이 지난 오늘도 전강 선사의 테이프(700여개의 육성 녹음 남김) 법문이 매일 흘러나온다.
이는 “가고 옴이 없음이 여래의 진면목, 중생의 눈엔 전강 선사께서 돌아가신 걸로 보이나 생사없는 도리를 증득한 스님은 열반상만 보인 것이기에, 전강 조실스님은 생존시와 똑같이 항시 도량에 계시며 후학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송담스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전강-송담 두 선지식의 사제지간의 정은 피와 살을 나눈 부모보다도 더 깊은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23세 때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33세의 나이로 통도사 보광선원의 조실로 추대될 정도로 선풍을 드날렸던 전강 선사는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거듭할 때도 제자의 수행을 돕기 위해 실로 눈물겨운 행적을 보였다. 행여 제자인 송담에게 해가 올 것을 걱정하여 집 천장에 숨겨두고 스스로 구멍가게를 열어 제자를 도운 일화는 두고두고 사표가 되고 있다.
그러한 전강선사의 예측대로 송담스님은 오늘날 한국 선종의 선맥을 이끌어 가는 거목이 되었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정휴스님이 <전강평전>(우리출판사)에서 서술한 것처럼 “10년 벙어리로 오도하지 못하면 다시 10년간 눈까지 감아버리려고 했다”는 치열한 구도와 스승의 배려에 힘입어 스님은 홀연히 생사의 대의를 깨쳤으니, 10년 묵언수행을 깨고 진여 대도에 이르는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을 울며 북을 향하여 날아가는구나
무슨 일로 십년간 헛되이 힘을 낭비하였는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黃梅山庭春雪下
寒雁 天向北飛
何事十年枉費力
月下蟾津大江流
이 절, 저 절에서 앞다투어 나이든 스님들을 조실로 추대하는 이른바 ‘조실 홍수시대’를 맞고 있는 이때, 조계종에서 최고의 선사중 한분으로 추앙받고 있는 송담스님은 “자격이 없다”고 겸양하며 여전히, 스승의 상징인 조실 자리를 마다하고 있다. 지금도 송담스님이 전강스님의 육성녹음 테이프를 듣고 난 뒤 상당법문을 하는 것 또한 선가의 아름다움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전강 선사가 생전에 ‘조실제도의 미비’를 지적하면서, “조실이란 불조의 혜명을 잇는 명맥인데, 스승의 인가 없는 조실이 날로 많아져서 큰일이다”고 개탄한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 “위음왕불(威音王佛) 이래 스승없이 깨우침은 외도(外道)이며, 이들은 비단 초심학자들을 눈 멀게 하고 불법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도 해친다”는 게 송담스님의 선지식론이다.
용화선원의 전통(寺乘)은 이처럼 전강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조사선풍을 진작하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선양하는 것이다.
전강·송담스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활구참선법은 송담스님의 다음과 같은 게송에 잘 나타나 있다.
뾰족한 산봉우리에 달뜨는 것을 보고(芭峀午更看月出)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杜鵑聲裡牧將驪)
원앙새 수놓은 것 보여주어도(鴛鴦繡出從敎看)
수놓은 금침은 주지 못하네(不把金針渡與人)
“‘파수오경’의 오경은 낮 ‘오’(午)자 오경입니다. 달은 밤에 뜨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낮 오경에 달뜨는 것을 보느냐? 이 ‘파수오경간월출’은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 없고, 만져볼래야 만져볼 수 없는 한 물건을 깨닫는 도리를 표현한 것이고 ,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 하는 것은 내가 나를 깨닫고 그 도리에 입각해서 깨달은 뒤에 수행해 나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다. 그러나 내가 생사해탈 하고 모든 중생도 영원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소원이 있다 하더라도 바른 수행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없다. 또 바른 길을 알았다 하더라도, 쉬지 않고 정진하지 않는다면 도업을 성취할 수 없다는 법문이다.
송담스님은 활구참선을 “선지식으로부터 공안 하나를 받아 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당장 처음 시작할 때는 꽉 막혀 한 걸음도 나아갈래야 나아갈 수 없는 상태로 지어가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참나를 깨닫는 길이다.
사구(死句)참선 즉, 공안을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죽은 참선과 대조되는 말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약아져서 힘은 적게 들이고 쉽게 목적하는 바에 도달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참선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런 약은 생각을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바보가 되어, 자기의 온갖 지식과 상식을 다 버리고 백지상태에서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활구참선을 하려면 그 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불교에 관한 것은 물론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까지도 다 놓아 버려야 해요.”
송담스님은 활구참선을 위해서는 자세를 바르게 가지고 호흡을 바르게 하며, 생각을 옳게 지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말과 행동과 마음씀에 덧붙여 ‘이 뭣고’를 참구해야 하며, 앉아서나 서서나 걸어가면서나 일하면서나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이 뭣고’를 놓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속이 상할 때나 기분이 나쁠 때나 성이 날 때나 외롭고 슬플 때나 원망스러울 때나 무슨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이 일어날려고 하자마자 탁 숨을 단전까지 깊이 들이 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숨이 다 나가면 또 들이마셔서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하다보면 치밀어 올라오던 가슴이 쑥 가라 앉으면서 저절로 계를 지키게 되고 참 나를 찾는 공부로 나아가니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입니다.”
송담스님은 처음에는 별로 재미도 없고 맛도 없지만 법문을 자주듣고 자꾸 법문대로 ‘이 뭣고’를 열심히 찾으면 차츰차츰 저절로 동요하지 않게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며, 언제나 납자들을 자상하게 독려한다.
“번뇌망상이 일어나도 짜증 내지말고 그냥 그대로 놔둔 채 ‘이 뭣고’만 추켜들면 번뇌망상은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이라 저절로 없어지고 화두가 순일하게 됩니다. 어떠한 찰나에 통의 밑구멍 빠지듯 툭 터져서 의단을 타파하게 되면 그때는 선지식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확철대오를 했으면 공부해 나가는 법을 지도받을 것이고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니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해 가야 할 것입니다.”
용화선원은 하·동절기만 안거를 지내고 있는 다른 선원과는 달리 춘·하·추·동 4계절로 방부를 받고 있어 연중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잠시도 수행을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스승 전강 선사의 간곡한 책려의 뜻을 받든 것이다.
특히 매일 24시간 개방하는 시민선방에서는 200여명의 불자들이 스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원하는 시간에 가부좌를 틀고 화두에 몰입할 정도로 재가 수행자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고 있다.
이곳이 국내 처음으로 시민들의 참선도량이 된 것은 지난 63년 산문을 나와 도심 한가운데 선원을 연 전강선사의 유지를 받든 송담스님이 84년 보살선원, 92년 시민선원을 잇따라 개설하면서부터. 선원장 송담스님은 “참선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언제나, 누구든 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송광사신도회장을 역임한 조달공 성균관대 명예교수, 세계적인 음악 거장 故 윤이상씨 등 수 많은 재가불자들이 송담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부산과 광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 와 매월 정기법회에 참석하는 거사들을 비롯 많은 우바새·우바이가 스님의 법문에 따라 생활 속에서 정진하고 있다.
20여년전 송담스님으로부터 화두 드는 법을 배운 조달공 거사는 “스님은 신도들의 번거로운 질문에도 언제나 자상하게 대답해 주셨지만, 수좌들의 정진을 독려할 때에는 무척 엄하기도 하셨다”면서, “스님 법문의 특징은 세상의 어려운 현실을 활구참선법으로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참선법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송담스님은 최상승법인 활구참선을 수좌들은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가르쳐 참선의 대중화 및 포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수행과 함께 포교에도 높은 원력을 가진 사실은 고려대장경 전산화 불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99년 2월 송담 스님의 첫 법문으로 시작된 용화선원 팔만대장경 전산화 후원은 그동안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려대장경연구소에 기사회생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날 25년동안 한번도 법상에서 용화사와 관련한 불사 모연을 하지 않으셨다는 스님은 불사를 위한 법석의 문을 활짝 열어 전자 대장경 불사를 왜 해야 하는지를 낱낱이 일러 주고, 부처님 당시의 가난한 수달장자 비유를 통한 보시의 공덕을 법문하실 때 대중은 모두 그 엄중함과 간절함에 감동의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스님은 들어온 많은 공양물을 대장경 불사를 위해 돌렸고, 손수 당신 손으로 동참문을 받아 주시기도 하면서 먼저 귀감이 되었다.
고려대장경연구소장 종림스님은 “그와 같은 큰스님의 뜻이 있었기에 한해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스님과 신도들의 연속적인 후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서 “부처님의 종지를 이 땅위에 꽃피워 무질서와 혼돈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 말법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세간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보이지 않게 중생구제의 방편을 제시하는 한편 필생의 과업으로 전법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마지막 원력을 쏟고 있다.
“도인의 책무는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 전법제자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온 송담스님은 말법시대에 수행자들의 구도열이 미약해진 것을 가장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미 당신 열반 후 스승인 전강 선사처럼 화장후 유골을 서해바다에 뿌릴 것을 유언한 송담스님은 오늘도 몸소 용맹정진을 보이며, 출·재가 제자들의 확철대오를 서원하고 있다.
“여러분이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더라도 ‘이 뭣고’, 한 마디로써 모든 고통을 다 치료해 나갑시다. 미운 사람을 만나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나, 좋은 경계를 만나나, 괴로운 경계를 만났을 때, 환(幻)인 줄 깨닫는 법이 바로 ‘이 뭣고’이니, 이 화두를 놓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새로 태어나는 길입니다.”
글·김재경/사진·고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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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 스님은
친견 어렵기로 유명
불립문자 철저 추구
수좌계에 ‘북 송담, 남 진제’로 일컬어지며, 납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송담스님은 세간에 친견하기 가장 어려운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년전까지 인천 용화선원의 매월 첫째주 일요 정기법회에서 법문하던 송담스님은 최근 74세의 고령에다, 필생의 불사인 전법제자 양성을 위해 출·재가를 막론하고 일체의 외부 법문과 친견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평소 토굴정신과 야인정신을 강조해 온 스님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해 시봉하는 스님들조차 언론 취재에 응하지 않고 있다. 용화선원 조실추대는 물론 수년전 봉암사 조실 추대를 사양하기 위해 자취를 감출 정도로 명예를 멀리하고 평생 수행과 참선 지도에만 매진해 왔다. 한 권의 법문집도 내지 않고, 법문 녹음테이프 조차 글로 풀지 못하게 하는 철저하게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추구하는 스님에게서 일체의 상(相)에 걸리지 않으려는 치열한 구도심을 읽을 수 있다.
지면에 소개하는 것 조차 망상을 피우는 것이 아닐까 자못 우려지만 스님의 법향을 단편이나마 접하고 싶은 불자들의 관심이 지대하고 역사적인 근거를 남겨야 하는 것이 후학의 도리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송담스님은 1929년 12월 生으로, 45년 전강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해 사미계(법호 松潭, 법명 正隱)를, 51년 나주 다보사에서 전강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광주서중을 졸업하고 10년간 묵언정진 한후 깨달음을 얻어 전강스님의 인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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