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세상 여행

종합역사세트 강화도를 찾아서 ①(오마이뉴스 080313)

by 마리산인1324 2007. 3. 26.

 

<오마이뉴스> 2007-03-13 09:03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7513

 

 

 

다양한 시공간이 공존하는 그곳, 강화도
[종합역사세트 강화도를 찾아서 ①]
    이희동(all31) 기자   
-->
내 기억 속의 강화도

3월의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젠 결혼한 녀석도 있고 해서 한꺼번에 모두 움직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날짜는 의외로 쉽게 잡혔다.

5년 전부터 여행을 목적으로 모아 온 곗돈도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어느새 직장인으로서 모두들 답답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간절히 염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소에 대한 고민. 그러나 그 역시 많은 시간을 필요치 않았다. 누군가가 강화도를 제안했고 나머지가 흔쾌히 그 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너무나도 친숙한 그 이름 강화도. 어쩌면 그 친숙함은 나의 주거지가 바로 서울 강서구이기에 느끼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집에서부터 운전을 해도 1시간이면 충분한 강화도는 시간대비 서울과 가장 다른, 그래서 가장 빨리 일상의 앙금을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 장소로서, 엠티를 가더라도, 주말 연인과의 데이트 장소를 물색하더라도 항상 1순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화도에 대한 나의 애착을 단순히 집에서 가깝다는 사실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에서 가까운 관광지야 여러 군데 있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어렸을 때부터 뻔질나게 갔음에도 불구하고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강화도에는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무얼까? 그것은 바로 강화도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 과거와 현재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 그 자체다.

강화도 가는 길에 마주친 분단의 흔적

▲ 몽고군은 저 바다 아닌 바다를 건너지 못해 통탄했을 겁니다.
ⓒ 이희동
강화도는 학부 시절 주요 답사지 중 한 군데였다. 물론 답사로 경주를 가장 많이 다닌 게 사실이지만, 강화도는 유적이 편중된 경주와는 달리 다양한 시공간이 공존하는 곳으로서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닌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고조선의 마니산부터 시작해 고려, 조선의 역사가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또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에 분단의 아픔이 절절히 배어 있기도 하다. 그야말로 강화도는 이 한반도의 역사를 축약해 놓은 '종합역사세트'인 것이다.

어쨌든 그런 강화도를 친구들과 함께 나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춘삼월, 나의 발걸음은 강화도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서 강화도 가는 길. 강화도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지 않는 이상 경기도 김포시를 관통해야 하는데 김포를 지나는 그 길의 풍경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비록 길 자체는 시원하게 뻗은 것이 포장도 잘 되어 있었지만, 반면 그 주위의 시야는 난립하는 아파트들로 오히려 좁아져 있었다. 김포 신도시를 운운하더니 그 결과인가. 시야가 시원하면 길이 꼬부랑거리고, 길이 시원하게 뻗으면 시야가 좁아지는 아이러니라니.

▲ 강화도 가는 길에 마주친 분단의 흔적.
ⓒ 이희동
김포시를 관통해 얼마나 갔을까. 곧이어 강화도가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빨간색과 노란색의 조화, 해병대였다. 어렸을 때는 그 멋들어진 신화에 현혹되어 마냥 선망의 대상이었건만, 이제 내게 해병대는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군사문화의 대표명사일 뿐이다. '한번 고참은 영원한 고참'이라는 비합리적 관계맺음이 자랑스럽게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집단과 그런 식으로 맺은 연줄을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해병대는 합리적인 관계 맺기보다 '우리가 남이가' 식의 전근대적 네트워크가 더 효율적인 우리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때만 되면 자랑스러운 군복을 입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들은 결국 이 사회가 만들어낸 시대의 자화상인 것이다.

다행히 날씨도 놓은 것이 멀리 조망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해병대의 정문을 지나 문수산성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쨌든 그래도 명색이 산인데 바로 지척이라는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철조망.
ⓒ 이희동
길은 강화도와 뭍을 가로지르는 바다를 따라 나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풍경과 마주쳤다. 해변을 따라 살벌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는 철조망. 그리고 그 철조망 군데군데에는 빨간색, 노란색의 글씨로 간첩의 흔적이 친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봐라, 아직도 우리는 간첩에게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니 딴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이.

비록 2년 동안 지겹게 보아온 풍경이건만 오랜만에 마주친 철조망은 나를 또다시 착잡하게 만들었다.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철조망을 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명목이야 간첩 등 외부 적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함이지만 실제 간첩이 침투한다면 철조망의 존재가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철조망은 그보다 내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소위 '안보의식'의 증거물로서 철조망은 이 시대의 소명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철조망을 보고 분단을 떠올리며, 우리의 현실을 위협하는 적에 대해 증오하는 법을 배운다.

철조망은 외부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위한 내부로부터의 움직임이다. 저기 보이는 강화도 앞의 좁은 바다가 고려시대 고립의 울타리로서 자위의 근간이었다면 이 시대에는 그 역할을 이 조잡한 철조망이 하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나타난 문수산성. 산성의 시작은 역시나 허연 화강암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문루가 대신하고 있어 볼품없었지만, 옛 산성의 흔적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니 그 밑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꽤 볼만 했다. 너른 김포평야와 바다 같지 않은 바다, 그리고 저기 잡힐 듯이 선명하게 보이는 북녘의 산하.

▲ 많은 이들이 올랐을 문수산성의 모습.
ⓒ 이희동

▲ 문수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북한 땅이 바로 앞입니다.
ⓒ 이희동
아마도 문수산성은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망을 보기 위해 올랐던 주요 공간이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인들이 이곳에 올라 저기 좁은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에 대해 통탄했을 것이며, 조선 시대에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세곡선을 탐망하기 위해 도적들이나 관리들이 눈을 번뜩였을 테고, 지금은 나와 같은 이들이 올라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시대의 아픔을 다시금 새기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강화도와 바다를 끼고 있는 이 산성의 운명이리라.

강화도를 지척에 두고 기약 없이 산성을 탈 수도 없는 터라 이만 발걸음을 돌려 문수산성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왼편 해병대가 똬리를 튼 공간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총소리와 기합소리들이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끝없이 되새기게끔 만들었다. 저 좁은 바다를 두고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원.

▲ 안보의 산실, 강화도.
ⓒ 이희동
문수산성에서 나와 강화대교에 올라섰다. 저 너머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깨끗한 성벽들과 예전 시대의 포들이 눈에 띄었다. 초지진 등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조선을 침략했던 서양세력들에 맞서 눈물겹게 싸워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금 과거의 울분을 되새기고 있는, 견학 온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모든 것이 과거 조선의 역사로 치부되겠지만 '안보'와 '부국강병'이란 주제에 있어서 그 구조물들은 분명 현재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연찮게도 그곳에서 북한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 모든 것이 나의 괜한 노파심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딱딱 들어맞는 우연의 일치에 다만 찝찝할 뿐이었다.

전통의 원형을 찾아서

부지부식 간에 강화대교를 건넜다. 섬을 육지로 만든 바로 그 강화대교. 난 이번에도 역시 몇 년 전 강화도에서 만났던 어느 할머니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뭍사람은 도통 믿을 수 없다던 그 할머니.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뭍사람과 섬사람을 구별하는 그 촌로의 말은 당시 내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고립된 섬 강화도. 그것은 내가 강화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이 얼마나 일면적이고 표면적인가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지리적 연결과 교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많고 많은 강화도의 유적지 중 강화읍내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성공회강화성당이었다. 3년 전 답사 시 처음 찾아 갔던 그곳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을 만큼 꽤 인상적이었다. 비록 공사를 하고 있었음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며 생김새가 다시금 나의 발걸음을 이끌 만큼.

다시 찾아 간 성공회성당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비록 전처럼 성당 자체에 대한 공사는 아니었지만 요번에는 그 앞의 지역이 개발을 핑계로 파헤쳐지고 있었다. 설명판을 보아하니 그 위에 자리한 고려궁과 이곳 성공회성당, 그리고 그 뒤로 용흥궁를 포함해 하나의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결국 그것은 지방자치제의 결과물이었다. 재정을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지자체들이 예전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중소형 유적지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재정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마냥 방치되어 있었던 유적지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관의 관리는 분명 긍정적이었지만, 사람들의 일상으로 굳어졌던 유적지를 다시 개발하여 박제시키는 모습은 또 하나의 비극이기도 했다. 그것은 역사가 단절되어 전통이 사라진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 유교식 삼문을 정문으로 두고 있는 성공회강화성당.
ⓒ 이희동

▲ 옛 것도 아닌 것이, 새 것도 아닌 것이. 잃어버린 전통의 원형.
ⓒ 이희동
박제된 전통만이 살아남아 옛 것을 기억하는 시대. 그러나 성공회강화성당은 달랐다. 아직 100년 전의 성당은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비록 요번에도 역시 그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한옥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얹고 있는 성당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유교식의 대문을 지나 불교식의 범종을 거쳐 마주치는 한옥 위의 십자가라.

그것은 전통이었다. 옛것과 새것이 만나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나의 것과 남의 것이 만나 또 다른 나의 것이 탄생되는 과정이 그곳 성공회강화성당에 담겨 있었다. 어쩌면 내가 성공회강화성당을 아직까지 마음 속에 두고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 새로운 전통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 멀리 보이는, 무작정 크고 화려하면 다인 줄 아는 대형 성전 건물들의 천박함과 비견되는 고풍스러움. 그것이 내가 꿈꾸는 전통이다. 역사가 단절된 이 시대에 우리가 복구해야 될 전통의 원형.

단순히 한옥을 보존하고 보수한다고 전통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전통은 현재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민속촌이나 박물관보다 산사가 더욱 고색창연한 것은 그것이 결코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때가 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뭐든지 개발하면 다 된다는 식의 사고가 내성화된 작금의 현실에서 전통을 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며 지나간 과거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덧붙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만 성당을 나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목적지는 성당 바로 옆에 자리한 용흥궁. 조선 철종이 강화도령으로, 왕이 되기 전까지 기거했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곳이었다.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3-13 09:03
ⓒ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