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세상 여행

종합역사세트 강화도를 찾아서 ②(오마이뉴스 070325)

by 마리산인1324 2007. 3. 26.

 

<오마이뉴스> 2007-03-25 13:17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0053

 

 

 

산사를 느끼려면 고독한 발품을 팔아야 한다

종합역사세트 강화도를 찾아서 ②
    이희동(all31) 기자   
-->
▲ 강화도령 철종이 살던 용흥궁 입구.
ⓒ 이희동
성공회강화성당을 나와 도착한 용흥궁. 철종이 살았다는 그곳은 3년 전보다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폐가 분위기를 내는데 일조했던 기와 사이의 온갖 잡풀들은 말끔히 뽑혀져 있었고, 집안 곳곳에 그득했던 오래된 먼지들은 대충이나마 쓸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누가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그랬을까. 설마하니 철종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결국 이 역시 지자체의 노력일까?

그러나 한층 깨끗해진 용흥궁의 모습에 놀라기도 잠시. 안마당은 많은 어린이들로 북적대고 있었고 나는 어느덧 그 부산함에 휩쓸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토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야외에 나와 교과서 밖의 세상을 몸으로 직접 배우는 아이들. 녀석들이 부러웠다. 20년 전의 나는 토요일에도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에 나가 그 답답한 공간에서 책 바라보기도 바빴거늘.

그런 나의 정신을 화들짝 깨운 건 어느 아이의 강한 부산 사투리였다.

"이곳이 <궁>에 나오는 그 왕이 살던 곳이래."

아마도 그 꼬마는 드라마 <궁S>가 조선조 철종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으리라.

▲ 토요일 오전, 역사를 배우는 어린이들.
ⓒ 이희동
기분이 묘했다. 역사를 역사로 기억하기보다, 현실에서 재구성되는 판타지를 보고 역사를 재인식하는 모습이라니. 그러나 그 꼬마를 탓할 수는 없었다. 원래 역사라는 것 자체가 현재의 필요에 의해 재구성 되는 것이라고 보면, 결국 강화도에 와서 이곳의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나와 녀석은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게라도 역사를 인지하는 모습을 대견스러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용흥궁에서 과거 철종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워낙 오랜 시간이 흐른 탓도 있었지만, 철종이라는 인물 자체가 두고두고 기념할 만큼 역사적 모멘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위인이라 그의 집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아마 영문도 모르고 궁으로 끌려갔던 강화도령 철종은 온갖 모리배들 사이에 둘러싸여 매일 밤 이곳을 그리워하며 울었을 것이다.

강화도의 펜션들

이만 용흥궁을 나와 길을 나섰다. 문수산성에서 시간을 지체했던 터라 시간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내일의 목적지 석모도와 가까운 외포리로 가서 하룻밤 묵을 숙소를 예약해야만 했다.

외포리 가는 길. 우리는 그 길 곳곳에서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펜션들과 마주쳐야만 했다. 항상 올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강화도의 펜션들은 현재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모두들 하나같이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개성 강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풍경이 좀 좋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반영이다. 늘어나는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여가를 챙기게 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원하는 바, 서울 근교지에 이와 같은 펜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펜션사업은 정년퇴직 후 목돈을 쥐게 된 많은 이들에게 몫만 좋고 투자금만 충분하면 승산이 높은 사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펜션에 관한 개인적인 느낌은 약간의 불편함이다. 주위 풍경에는 아랑곳없이, 무조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하고 독특하게 지어지는 지금의 펜션들은 결국 돈만 벌면 된다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주위와의 조화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돈을 벌겠다는 욕망과 언덕 위의 예쁜 별장을 꿈꾸는 허영과의 만남.

펜션에는 10년 전 민박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정이 생략되어 있다. 김치가 모자라면 김치 한 포기 얻을 수 있고, 밥숟가락 하나 더 얹어 같이 술 한 잔 할 수 있는 그런 인간미가 펜션에는 없다. 그러기에 그곳은 너무 깔끔하고 단정하다. 사람들은 겉모습만으로 펜션의 다양성을 추켜세우지만, 난 오히려 그곳이 똑같은 자본논리로서 다양한 삶의 모습은 배제한 채 공장처럼 찍어낸 레크리에이션 장소라는 편견을 거두기 어렵다.

온갖 아름다운 펜션들을 지나쳐 결국 우리가 고른 곳은 언덕 위의 하얀 병동 같이 생긴 유스호스텔이었다. 비수기라서일까? 방값은 예상보다 훨씬 쌌고, 우리는 결국 그 차익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기로 한 채 방값을 치렀다.

강화도 낙조대

▲ 강화도 낙조대.
ⓒ 이희동
유스호스텔에 짐을 푼 뒤 우리가 향한 곳은 낙조대. 전등사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고, 어차피 해도 질 무렵이라 꿩 대신 닭으로 고른 궁여지책이었다. 비록 이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이름 또한 낙조대겠는가. 우리는 무작정 낙조대를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낙조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4륜구동을 몰고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뒤로 자빠지는 듯한, 경사가 매우 심한 길이었다. 차라리 걸었으면 오히려 더 편했을 것을. 문명의 이기가 모든 상황에 혜택을 줄 수 없음을 실감할 뿐이었다.

포장된 도로의 끝에 적석사가 있었으나 오래된 연혁과는 달리 절은 새로 지어져 반짝반짝 거리고 있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사찰은 구한말 때 재산을 모두 빼앗긴 후 폐사 지경이 되었으며, 그 후에 다시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처음 들어보는 절이라니. 오래된 산사의 그윽한 향이 없다면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미련 없이 절을 등졌고 낙조대를 향하여 가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약 10분을 더 갔을까? 시야가 탁 트이는가 싶더니 눈앞으로 강화도의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졌다. 논밭과 산, 바다, 그리고 외딴 섬이 어우러져 만드는 장관이었다. 낙조대 일몰은 강화8경에 든다더니 그 명성 그대로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렇게 쉽게 강화도 낙조를 허락하지 않았다. 기껏 한 번 찾아가 놓고 처음부터 그 멋있다는 일몰을 보려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해는 금세 내려올 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뿌연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췄고 하늘은 특별한 색감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적석사 낙조대는 최근에 구조물을 짓기 시작했는지 불상 밑으로 깔려있는 철근이며 급조된 티가 역력했다. 사찰의 고유한 역사를 잃어버린 탓에 멋진 풍광에 기대어 명성을 쌓겠다는 것인가.

▲ 시간이 허락된다면 꼭 이곳 낙조봉에서 일몰을 볼렵니다.
ⓒ 이희동
못 볼 줄 뻔히 알면서 자리를 지켜 일몰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귀찮다는 친구들을 내버려둔 채 홀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착한 낙조대 정상 낙조봉. 그곳은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의 출생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고려산의 일부였다. 산의 정상인만큼 강화도의 많은 부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쪽으로는 마니산이 보였고 바다 건너로는 교동도와 석모도가 바로 코앞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북녘 땅. 아마도 개성에서부터 피난 온 고려왕은 해질 무렵 이곳에 올라 아름다운 일몰과 함께 바다 건너 개성 땅을 바라보며 환도를 꿈꾸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산의 명칭이 과거 다섯 색깔 아름다운 연꽃이 핀다는 의미의 ‘오련산’에서 ‘고려산’으로 바뀐 것 또한 이와 같은 사실에서 유래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화도를 비롯해 강화도 전역에 남아있는 고려의 흔적. 강화도의 지역사에 있어서 고려왕실의 피난은 그 모든 것을 규정할 만큼 큰 충격이었을 테지만 결국 역사는 흐르고 모든 것은 흔적으로 이름만 남길 뿐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을 가슴에 담고 낙조대에서 기다리던 친구들과 함께 산을 내려와 숙소로 향했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지만 우리는 이제 시작이었다. 방값으로 남긴 차익으로 푸짐하게 배를 채운 우리는 그렇게 깊은 밤을 하얗게 뜬 눈으로 지샜다. 역시 나이가 들어도 MT는 언제나 재미있다.

석모도 보문사

▲ 우리를 길들이고 있는 갈매기.
ⓒ 이희동
다음날 아침 부랴부랴 라면 국물에 밥 한 숟가락 말아 먹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석모도 보문사. 이번 여행의 동선을 그리면서 가장 우선순위를 둔 보문사였다. MT다 뭐다 해서 비록 자주 갔었던 석모도지만 정작 보문사는 중학교 이후로 한 번도 가지 못했기에 좀 더 성숙해진 시선으로 보문사를 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언제나 그렇듯 새우깡을 찾아 날아드는 갈매기들과 함께 바다를 건넌다. 이 녀석들 새우깡 맛이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갈매기가 공중에서 낚아채는 모습을 기대하며 있는 힘껏 새우깡을 던지지만 녀석들은 이미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음을 아는지 유유히 비행하다가 바닷물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 먹는다. 혹자는 우리의 새우깡이 갈매기를 길들여 그들의 야성을 앗아간다고 걱정하지만 오히려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일지도 모른다.

드디어 도착한 석모도 보문사. 역시나 그 앞에서 전을 치고 앉아 비빔밥에 막걸리 한 잔 권하는 아주머니들을 지나쳐 보문사 일주문을 통과하였다. 모두들 예상치 못한 급경사에 헉헉 거렸지만 뒤를 돌아보는 순간 불평불만의 소리는 잦아졌다. 그곳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찰과 바다. 결코 낯익은 조합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금산 보리암을 떠올리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 기억과 기대보다 너무 크고 화려했던 보문사의 전경.
ⓒ 이희동

▲ 사찰에서 바라본 바다.
ⓒ 이희동
그러나 보문사에 대한 환상은 본전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사찰이 나의 기억과 기대보다 훨씬 더 큰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강화도에서도 배타고 더 들어가야 하는 석모도에 위치한 사찰이 이리도 커졌을까? 단순히 아름다운 풍광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보문사가 품고 있는 관음신앙 때문일 것이다. 석모도 보문사는 예로부터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금산 보리암과 함께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찰 뒷산의 명칭 역시 관음보살이 수행했다던 인도 보타의 낙가산에서 유래되었다 하니 보문사는 명실공히 관음보살을 모시는 하나의 성지인 셈이다. 밖으로부터 들어온 서양종교 마저도 기복신앙과 결합시키고 마는 작금의 현실이니 중생을 돌봐준다는 관세음보살에게 빌기 위해 많은 이들이 보문사를 찾을 수밖에.

▲ 보문사 마애불상과 그로 향하는 까마득한 계단.
ⓒ 이희동

▲ 사찰 마당에 모아져 있던 동자승들.
ⓒ 이희동
부담스러운 대웅전을 뒤로 까마득히 나 있는 계단을 오른다. 보문사 마애불상까지 이어져 있는 길. 그나마 마애불상이 그 높은 곳에 있어서 다행이다. 산사가 산사답기 위해서는 고독한 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속세에서 벗어나 극락으로 드는 것이 그렇게 쉬워서야 되겠는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옷을 벗어 걸쳐 맸지만, 그래서 가벼워진 발걸음이 보기 좋았다.

이윽고 도착한 눈썹 바위 밑의 보문사 마애불상. 워낙에 많은 인파가 몰린 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한다는데 기겁했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만든 건 그 앞의 마애불상에 대한 안내였다. 안내판의 내용인 즉 이 마애불상이 1928년 일제시대 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어쩐지 그 생김새가 여태껏 봤던 마애불상과 좀 다르더라니.

그러나 마애불상이 그냥 일제시대 때 만들어졌구나 하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찝찝한 느낌이었다. 내가 교과서에서 배운 일제시대는 모든 문화재가 약탈당하고 파괴되는 시기였건만 그 척박한 시기에 뭔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는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문화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육당이나 춘원 등 그 행위의 목적이 분명한 문학작품이야 간단히 ‘친일’이란 딱지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해서 만들어낸 여타 문화재는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 것일까? 이는 결코 일제시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남과 북이 하나가 된다면 각 체제의 문화행위와 유물들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만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향한다. 비록 짧았던 1박 2일의 여정이었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해탈의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있었다.

▲ 한가득 웃음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우리 일행.
ⓒ 이희동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3-25 13:17
ⓒ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