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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 도시는 식민지의 기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안창모 교수의 글을 접하고는 거의 흥분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일제하 건축물에 대한 철거 찬반을 떠나 일제흔적이 남아 있는 건축물을 제한된 공간에서 이렇게 많이 만날 수 있다니…. 서해안 고속도로로 빠져나간 고속버스는 예상 밖으로 빨리 달린다. 동군산 IC를 빠져 나가 군산 외곽으로 들어 가는 버스가 멈추는 순간, 세풍제지선으로 그 유명한 기차가 지나간다. 공휴일에는 다니지도 않고 평일도 하루에 한 번 정도라는데…. 셔터기회를 놓친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횡단보도 신호불빛 마저 얼어 붙게 만든 꽃샘추위와 바람 때문에 고르고 뭐고 할 것 없이 길 건너편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 가니, 아줌마 셋이 밥을 먹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홍어탕, 조기탕, 대합탕, 해장국, 뭐, 뭐, 뭐, 백반. 그래 "아줌마 여기 백반 둘!" 펄펄 뚝배기에 끓여 나오는 미역국과 튀긴 덕대(서대)가 몸를 녹여준다. 갑자기 어디서 기관차 디젤엔진 소리가 '붕붕붕붕' 들린다. '아뿔사' 아까 세풍제지로 들어 갔던 기차가 다시 돌아 나오고 있다. 명장면 재현은 못하더라도 기관차 사진 하나는 건져가야 하지 않는가? 숟가락을 던지고 허겁지겁 카메라를 들고 뛰어 나갔으나 화물열차는 반대편 골목으로 꼬리를 감추려는 참이다. 인터넷에서 내려 받아 조각조각 연결한 지도를 들고 조선은행을 찾는다. 빨간 벽돌 이층집에 세로로 긴 창문은 위쪽과 아래 창문을 하얀 화강석을 연결하여 권위를 강조했다. 그 위에 물매(경사)가 가파른 동판 지붕을 대어 놓은 것으로도 부족하여 지붕 허리쯤을 가로로 띠처럼 돌아 천창을 두어 화려함을 더했다. 나이트클럽으로 쓰였다는 조선은행 건물 홀에는 파벽돌과 나무조각, 조명파편, 부서진 의자로 폐허에 가까웠는데 거기에서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폐허 속에서 그 옛날을 상상해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며칠 전에도 와 보았던 은행이지만 초가집의 다섯 배도 훨씬 넘는 높이의 붉은 건물이 주는 위압감은 경찰서 못지 않다. 반짝반짝 빛나는 노랗고 커다란 신주 손잡이를 밀고 들어 서니 쇠창살 창구 너머로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일하고 있다. 커다란 금고문 앞에 자리잡고 까만 안경테에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파이프를 물고 있는 야마모토가 먼저 눈에 뜨인다. 힐끗 나를 쳐다보던 야마모토는 파이프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온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햇살을 타고 올라가는 담배연기에서 나는 오늘도 절망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
이 은행은 나카사키에 있던 상인을 중심으로 설립된 것이라는데 1907년에 설립되어 무역에 따른 대부업이 주종이었단다. 차차 싼 이자로 대출 받은 일본인들이 이 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여 이를 갚지 못한 농민들의 농지를 갈취하는 일이 부지기수라 하였다. 이곳 역시 보존상태가 썩 좋지 못하지만, 금고로 쓰인 듯한 뒤쪽 부속건물의 폐쇄적인 창문과 그 옆 판자를 겹쳐 벽을 만든 일식 목조건물이 우리의 눈을 끈다.
옆의 신청사로 들어가 내부를 구경할 수 없느냐고 물으니, 뒷문이 열려 있다며 한 직원이 나와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휴일에 나온 무슨 이유야 있겠지만, 본연의 임무가 아닌 이런 일에 일일히 안내하며 자상한 설명을 해주는 공무원스럽지 않은 태도에 그저 감격할 따름이다.
가운데 홀에는 일제하 군산 사진들이 이젤에 전시되어, 이 세관이 호남과 충청지역에서 수탈된 쌀, 곡식 등의 전쟁물자를 반출하는 선봉장 구실을 하였음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진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복도 구석에는 아무렇게나 놓아 둔, 그러나 세심히 배치해 놓은 듯한 낡은 금고가 놓여져 있는데 'TANEUCHI SAFE CO. TOKYO JAPAN'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각인되어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추운 날씨인지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상인들이 많이 나와 있어 그나마 군산에서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신문 보도대로 홍어가 진짜로 많이 잡히는지 여기저기 홍어가 깔려 있고, 덕대, 병어, 조기들도 많이 진열되어 있으나, 살아 있는 꽃게는 그리 많지 않다. 젓갈을 조금 사고 2층으로 올라가니 광어 1㎏에 각종 해물들과 매운탕을 끓여준다고 유혹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것 봤나? 못 이기는 척 끌려 개방식 식당의 온돌 위로 올라가 엉덩이를 붙인다. 밑반찬에는 죽순도 있다. 뒤 이어 올라 오는 싱싱한 해산물들. 호화롭거나 양이 많지는 않아도 두 사람이 먹기에 적은 량이 아니다. 뒤 이어 올라오는 광어 1㎏. '이거 정말 1㎏ 맞어?' 접시 한가득 올라오는 광어는 나를 질리게 만들지만 배에서 갖 잡은 놀래미처럼 쫄깃한 질감이다. 먹다 남은 회는 팔팔 끓는 매운탕 국물에 데쳐 먹는다.
김혁종 가옥은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이라 한다. 개인이 사용하는 집이라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하지만, 상당히 큰 규모의 가옥이다. 현관은 담장이 디귿자로 들어 간 곳에 위치하는데 이런 구조는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 가옥의 은폐구조 양식을 따른 것이라 한다. 담장 밖에서는 안쪽의 상황을 짐작만 할 뿐, 볼 수 없지만, 담장 위로 비죽 고개 내민 정원수로 대충 짐작이 된다. 일본식으로 잘 꾸며진 정원과 연못, 다리, 물을 쫄쫄 흘리며 까딱이는 대나무통…. 한국사람들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사람 손이 절제된 정원을 만들었다면, 일본사람들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축소하여 마당에 끌어들여 놓는 것이 특색이라 하던가?
잊어 버리고 싶은 과거, 이제 젊은이들은 잘 모르는 뼈아픈 역사, 일본 식민지배로 우리 근대 산업의 기초가 다져졌다는 주장, 시청이 빠져 나간 거리에는 '임대함' 딱지만 붙어 있는 구 시가,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아직도 적산가옥들이 남아 있는 도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시간이 멈추어 버린 회색 도시. 그 아픔의 흔적들이 황폐하게 군산 거리를 나뒹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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