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일본학연구소> 2005/05/09
http://www.hufsjapan.com/data.html
일본의 선불교와 일본문화
한국외국어대학교 김후련
▶선은 일체의 문명의 틀을 거부하는 철저한 자유탐구
선(禪)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가장 평가가 높은 일본불교의 일파이다. 젠(Zen:禪)이라고 하는 용어는 현재 쥬도(Judo:儒道), 가라데(Karate:空手), 고(Go:碁=바둑)라는 용어와 함께 일본어 발음이 국제용어로 그대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일본문화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선은 일본 고유의 것은 아니고 원래 고대 인도에서 발생해서 중국으로 들어오고 다시 중국에서 일본으로 들어와서 집대성된 것이다. 선은 본래 특수한 정신집중을 위한 수련이나 훈련의 특정한 상황을 의미하는 디야나 또는 쟈나라는 고대 인도어를 중국에서 받아들일 때 챤이라고 발음한 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이를 다시 일본에서 받아들일 때 고대 한어(漢語)의 표음대로 ‘젠’이라고 발음한 것이다. 이처럼 선은 아시아의 정신문명 특유의 긴 역사적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젠’이라는 이 말 한 마디에는 고대인도에서 시작해서 근세일본에 이르는 정신문명의 세계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불교가 처음 중국에 정착할 때 중국인들이 이를 상교(像敎)라고 부른 것은 불교와 닮은 모습, 즉 그 복제라는 의미였다. 상교라는 말에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굴절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는 진짜 부처가 살아있던 시대나 고대 중국의 성인들이 활동하던 시대가 이미 지나고 단지 부처의 가르침만이 남아 있는데다가 그 가르침조차도 이미 소멸해 세상은 이미 말법 시대가 도래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중국에서 선은 불교의 근본사상인 공(空)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가르침으로서 선종(禪宗)이라는 독자적인 종파로서 탄생한다. 8세기 무렵에는 불교의 가르침 바깥에 존재하는 부처의 마음을 전하는 달마선(達磨禪)이 등장한다. 선이 불교의 가르침 외부에 존재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은 선이 종래의 불교전통 그 자체를 버리고 무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이다. 불교라고 하는 하나의 문명이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 그 생명을 다하고 소멸해 갈 때, 재래의 전통 그 자체를 혁신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국의 선이었던 것이다. 인도의 선과 구분해서 중국의 선을 대승선(大乘禪)이라든가 조사선(祖師禪)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907년 당이 망하고 나서 불교가 쇠퇴하나 906년 송이 다시 중국을 통일하자 불교가 다시 부흥하면서 선종은 눈부시게 발전한다. 12세기 초에 선종의 유파로서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이 성립되면서 선종은 송의 대표적인 불교종파가 된다.
▶선의 본질은 생사의 자유
중국에서 자유라는 용어가 그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 선이 발생한 이후부터이다. 해탈과 득도가 보다 높은 의미의 자유의 획득이라고 생각하면, 선에서 말하는 자유는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사고이다.
중국 당대에 임제선(臨濟禪)을 개산(開山)한 임제의현(臨濟義玄)이란 선승은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서 해탈(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자유라는 말이 그 스스로 절대가치를 가지고 사용된 것은 이 시기 이후부터이다. 임제의현은 제자들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만큼 단순하면서 이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만약 제자가 스승의 말에 따라 스승의 가르침에 등을 돌리면 그는 이미 스승의 말을 따르는 것이 된다. 하물며 이를 처음부터 받아들이면 당초부터 틀린 것이 된다. 어느 쪽을 따르든 안 되는 것이다. 요컨대 선의 자유는 선 그 자체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는 것을 포함한 자유이다.
당대의 선승이었던 마조도일(馬祖道一)은 현재의 강서성 사람으로 새로운 선 운동을 일으킨 사람이다. 달마로 시작되는 신불교도 이 사람에 의해 제2기에 들어가게 된다. 마조도일은 제자와의 선문답에서 본래 부처라고 하는 말조차도 필요가 없으며, 누구나 거리낌 없이 서로 손을 잡고 사통팔달 자유롭게 대도를 걸어가면 된다고 가르친다.
선의 자유는 생사의 자유, 존망의 자유라는 자기의 존재를 건 자유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 송대의 어느 선승이 깨달음의 즐거움을 노래하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생사피안의 대자유를 얻어 육도사생(六道四生) 속에 유희산매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같은 의미이다.
이처럼 중국의 선은 “사람은 본래 누구나 모두 부처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중국의 선은 일본에 도래한 후 한층 고양되고 확대된다. 일본의 선은 살아있는 중생은 물론이고 초목산천과 같은 무생물도 부처 그 자체라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부처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은 사람, 즉 스스로 자각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살아 있는 중생뿐만 아니라 산천초목조차도 부처라고 자각하고 이를 받아들이는데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반해 애초부터 그런 수행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잊었으니까 그런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무조건 만물 그 자체를 본래의 부처라고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선은 후자의 세계이다. 일본의 선은 그것을 여실히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좌선 중심의 조동종과 선문답 중심의 임제종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뒤 얼마 안 되어서 선이 전해졌으나, 중국의 선종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92) 말기에서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1192~1333) 초엽에 걸쳐 송과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기 전 해인 1191년에 에사이(榮西:1141~1215)가 임제종을 개종(開宗)하였다. 중국에서 임제선을 배운 에사이는 교토에서 말법의 가르침이라고 하며 선에 의한 천태종(天台宗)의 부흥을 부르짖었으나, 당시 일본불교의 본산이었던 히에잔(比叡山)은 그를 이단시하여 박해했고 조정은 선종을 금지시킨다. 박해에 지친 에사이는 1199년 막부의 부름을 받고 가마쿠라로 간다. 임제선은 당시 교토의 귀족에게 대항의식을 갖고 있던 무사층으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이라 하여 막부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에이사이가 임제선을 일본에 전한데 이어서 도겐(道原:1200~1253)은 역시 송에서 유학을 한 뒤 1227년 일본에 돌아와서 조동선을 전한다. 조동선은 공안(公案) 중심의 임제선에 대해서 전적으로 좌선(坐禪)에 의해 내면의 자유를 얻으려는 선이다. 그는 선이야말로 석가로부터 전해진 올바른 법(法)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에사이처럼 히에잔의 박해를 받아 우지(宇治)에 은거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중국 당대의 엄격한 선을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론에 사로잡히지 않고 전적으로 좌선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도를 강론하였다.
인도불교와 중국의 전통문명이 만나 완성된 선은 에사이와 도오겐이라는 걸출한 두 사람의 구도자에 의해 전해지고 그 후 선은 일본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면서 많은 문화를 만들어낸다. 일본의 선종은 이처럼 조동종(曹洞宗)과 임제종(臨濟宗)의 2파로 성립되어 있는데, 조동종은 좌선 중심이고 임제종은 선문답 중심이다. 또 하나 황벽종(黃檗宗)이 있으나, 이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임제종에 속한다.
이들 종파들은 중국의 선의 분파 명칭인데, 각 종파의 명칭은 이들 종파의 종조(宗祖)들이 활약하던 지역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처럼 선은 특정 개인으로서의 종조가 없고 복잡한 교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조동종은 좌선이라는 수행 이외에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으며 좌선수행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임제종은 철저하게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으며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좌선은 무용지물이라는 입장이다.
일본불교의 특색은 부처가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일부러 보살이나 신의 모습을 빌어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는 혼지스이쟈쿠설(本地垂迹說)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인도의 부처나 일본의 신이 원래는 하나라고 하는 발상이다. 일본에 정착한 중국의 선은 일본의 혼지스이쟈쿠설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취하게 된다. 도겐(道原)이 창시한 조동종은 철저하게 혼지스이쟈쿠설을 배척하고 본래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이에 반해 임제종은 철저하게 혼지스이쟈쿠설을 지지하면서 무엇이든지 끌어안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가마쿠라시대 초엽인 13세기부터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 중엽인 18세기까지 500년에 걸친 장기간 동안 선의 주변에서 발전한 건축, 정원, 공예, 예능, 다도, 하이쿠(俳句: 17자로 된 일본의 시)와 같은 일본독자의 생활예능은 모두 임제종이 만들어 낸 성과이다.
▶일본인의 자연관과 선종의 조우
아시아대륙의 극동에 위치한 일본은 좁은 국토를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북반구의 전역에 걸쳐서 길게 뻗쳐 있어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나라이다. 수도인 도쿄에 봄이 와도 북쪽의 홋카이도는 아직 겨울이고 홋카이도에 늦게 봄이 찾아올 무렵이면 남쪽의 큐슈와 오키나와는 한여름이 된다. 일본문화는 이와 같은 사계의 변화가 풍부한 자연과의 대화에서 출발한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바로 계절의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과 한국을 거쳐 유입되어 정착한 것은 6세기 무렵이었다.
불교는 당시의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정말이지 세계문명 그 자체였다. 불교가 일본을 바꾼 것처럼 일본의 자연이 불교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것은 바로 부처가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보살이나 신의 모습을 빌어 일본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혼지스이쟈쿠설(本地垂迹說)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인이 당초부터 갖고 있었던 소박한 신사신도(神社神道), 농경의례, 산악신앙, 조령숭배와 같은 복잡다단한 종교는 바로 일본열도에 부처가 이미 와 계신 증거이며, 일본열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신들은 부처가 일본인을 위해 그 모습을 바꾼 것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이미 인도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 밀교이다.
부처의 최후의 설교집인 열반경(涅槃經)에는 일체중생, 즉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불성이란 부처와 같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불교는 일체의 자연존재를 그대로 불성이라고 간주하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중생을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생물에게까지 확대한 것이다. 일본의 선을 창시한 도겐은 일체의 중생은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경전의 말을 바꾸어서 ‘일체는 불성’이라고 해석한다. 요코쿠(謠曲)에 전하는 ‘초목 국토 일체가 성불할 수 있다(草木國土 悉皆成佛)’는 발상은 바로 이와 같은 도오겐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다. 이처럼 자연만물에 불성이 깃들여있다고 보는 일본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인간이 개조해야 되고 훼손해도 될 대상이 아니라 외경하고 신앙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일본인은 일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사물을 기르고 물건을 만드는 것을 사는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본인의 노동관념 내지 가치관은 일본인의 자연관을 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노동을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천지자연의 운행에 합일에 이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물건을 만들고 자연과 교감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지고의 미덕인 것이다.
▶선과 일본인의 미의식
일본인의 미의식에 선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국제적인 통념 중의 하나이다. 일본문화와 선과의 관련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고 한 대표적인 저서는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真一)의 『선과 미술(禪と美術)』이란 책이다.
히사마츠 신이치는 이 책 속에서 일본인의 미의식을 불균제(不均齊), 즉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을 선호하고 우수(偶數)보다는 기수(奇數)를 귀히 여기는 데에 있다고 하고 있다. 즉 일본인의 기호는 전후좌우의 대칭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뭔가 덜 갖추어져 있고 거칠고 묘하게 일그러진 데가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고, 일정한 균형이 있어 안정감을 잃지 않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면이 있는데, 이러한 미의식이 선에서 온 것이다.
예를 들면 건축, 공예, 수묵화, 서도와 같은 미술분야의 경우, 중세 이후의 일본미술은 모두 현란한 색채를 꺼리는 무광택의 아름다움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이 현재도 일본인의 전반적인 미의식의 근간이 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일본미술의 불균형이 기하학적인 완결에 이르기 직전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한 번 완성에 달한 것이 내부에서 자기완결성을 깨고 다시 원래의 자연으로 되돌아온 그와 같은 완성의 부정으로서의 미완성, 또는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의식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세의 대표적인 수필집의 하나인 요시다 겐코(吉田兼好)의 『즈레즈레쿠사(徒然草)』이다. 히사마츠 신이치가 말하는 불균형의 미학, 무광택의 미의식이 이 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즈레즈레쿠사(徒然草)』에는 요시다 겐코오의 자연에 대한 견해와 미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세상사람들은 보통 만개한 벚꽃이나 환하게 밝은 달을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요시다 겐코는 만개한 꽃보다는 막 피기 시작한 꽃이나 지고 난 후의 꽃이 보다 아름다우며, 또한 달도 완전하게 밝은 만월의 보름달보다는 오히려 달이 차고 이지러질 무렵이나 구름에 가려 으스름하게 쪽이 흥취가 있다고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츠리(축제) 구경 때도 주된 행사가 거의 끝나고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뒤, 즉 혼잡함 뒤에 찾아오는 정적 속에서 마츠리의 참된 맛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선이 추구하는 무광택의 미의식이 이 수필집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요시다 겐코가 그의 수필집에서 이러한 미의식을 특별히 선이라고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요시다 겐코는 교토(京都)의 선의 본산 중에 하나인 다이토쿠지(大德寺)와 관계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미 일본사회에 널리 정착해있던 선사상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을 것은 여심의 여지가 없다. 요시다 겐코가 발견한 미의식은 금일에도 여전히 일본인의 미의식의 근간이 되고 있다.
선과 일본인의 미의식의 문제를 생각할 때, 보다 명확한 시각적인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교토에서 탄생한 류안지(龍安寺)의 돌정원(石庭)이다. 류안지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이후의 일본의 선사(禪寺)는 그 대부분이 가레산스이(枯山水)라 불리는 독자적인 돌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가레산스이라는 것은 말라버린 산수, 즉 실제로 물이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간소하게 돌과 모래, 이끼만으로 산수의 모습을 표현한 상징주의 조형미술이다.
종래의 왕조풍의 지센카이유시키(池泉回遊式) 정원은 연못과 냇물이 감싸고 돌아가는 형태로 만든 사치스러운 정원으로 이를 배경으로 왕조의 귀족들이 시를 읊고 주연을 베푸는 귀족들의 실용적인 사교장이었다. 물론 고대의 지센카이유시키 정원에도 종교적 의미는 다소 포함되어 있었다. 정토교(淨土敎)풍의 연못, 샘물과 건물, 또는 도교풍의 선경을 나타내는 정원석의 배치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세계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한 실용적인 목적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가레산스이 정원은 초현실적인 선의 세계를 표현한 정원이다. 중세일본의 가레산스이의 특색은 원칙적으로 좌선석(坐禪石)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좌선석은 그 위에서 좌선을 한다든가 아니면 선사가 좌선의 도장이기 때문에 좌선석이 필요하다든가 하는 실용적인 목적과는 무관하게, 본래의 자기라고 하는 선의 미의식 그 자체를 나타냈다는 데에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일본의 선은 중국의 선을 이상으로 하면서도 마침내 중국의 선과는 다른 독자적인 미의식을 창조한 것이다.
▶일본인의 사생관과 선
일반적으로 일본인의 사생관이라고 하면 곧 무사도와 할복을 떠올릴 정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선과 무사도를 연결시키는 발상은 상당히 잘못되고 위험스러운 근대적 선입견이 담겨 있다. 선은 단지 자신의 생사에 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뿐, 결코 깨끗하게 죽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무사도와 할복은 일찍이 벚꽃이 일시에 피었다가 지듯이 깨끗하게 죽는 것을 일본인의 자랑으로 삼던 군국주의 일본의 선전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원래 할복은 무사가 전쟁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죽음으로써 책임을 다하기 위한 자해행위였다. 그러나 에도시대가 되면서 할복은 법적으로 금지되고, 잘못을 범한 무사에 대한 형벌로서 사형을 명하게 된다. 이는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무사들을 일반 잡범들과 똑 같이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무사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이므로 막부는 할복이라는 명예로운 죽음을 명한 것이다.
19세기 메이지시대(明治時代:1868~1911)의 미술평론가인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이 영문으로 쓴 『차의 책(茶の本)』에는 다도를 창시한 센노리큐(千利久)의 최후를 일본인의 전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센노리큐는 일본 다도를 창시한 사람으로 당대의 다도 후원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갑자기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자 센노리큐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소수의 지인들을 자택으로 불러 마지막 다회(茶會)를 연다. 센노리큐는 그 좌석에서 사용했던 차 도구를 모든 손님들에게 유품으로 나누어주고, 그 날의 다회를 기념하는 최고의 명품 다완 만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부셔 버린다. 그리고 나서 손님들이 자리를 뜬 후 다회에 입었던 겉옷을 벗는다. 그 밑에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순백의 의상과 짧은 단도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센노리큐는 자신의 생애를 총괄하는 사자사구(四字四句)의 지세(辭世)의 시를 남기고 자결한다. 당시 교토 지역의 선의 본산이자 다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다이도쿠지(大德寺)에 참선했었던 센노리큐는 임종 직전에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준비한 단도에 비유해 선의 조사도 부처도 전부 베어버리고 혼자서 완전한 무의 세계로 들어간다. 오카쿠라 덴신은 센노리큐의 다회와 지세의 시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해 “아름다운 것과 함께 살아온 사람인 만큼 아름답게 죽을 수가 있었다. 위대한 다인의 최후의 순간은 그의 생애처럼 더할 나위 없이 멋지고 숭고한 것이었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임종에 즈음해서 지세의 시를 남기는 것은 원래 선승들의 관습이다. 일찍이 일본의 무사들은 선승에게서 배워 지세의 시를 남겼다. 하지만 일본인이 죽음에 즈음해서 이런 지세의 시를 남기는 풍습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세의 시는 중국의 선승의 작품을 그대로 빌려와 일부만을 바꾼 표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요시다 겐코는 “우리들은 죽을 때까지 애써서 형식적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원래 무사의 죽음은 지나치게 격양되어 있다. 죽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말고 조용히 마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세의 시는 모두 속되다.”고 비평하고 있다. 요시다 겐코의 이와 같은 비평은 적절하다. 이는 무엇보다 진실해야 할 임종 직전에 지세의 시를 남김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미화하는 거짓됨을 비판한 것이다.
선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알고 자기 자신의 눈이 열리는 체험인 것이다. 선의 달인에게는 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깨달음과는 무관한 중국의 유명한 선승들의 임종의 시를 표절해서 거짓으로 자신의 최후를 미화하는 것은 선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거짓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중국의 선과는 달리 애써서 이를 배우고자 한 일본인 사이에서 발생한 간격이다.
한편 메이지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병상에서 쓴 일기에, “나는 지금까지 선종의 이른바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잘못이며,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남기고 있다.
일본인의 사생관에 이처럼 선사상과 무사도정신이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래 무사도란 가마쿠라시대에 발달해서 에도시대에 유교적 사상에 의해 체계화된 무사계급의 도덕체계이다. 일본전토가 무수히 작은 번(藩)으로 분할되어 각각의 번에 번주(藩主)가 임명되고 그 위에 모든 번을 통치하는 쇼군(將軍)이 군림하는 전형적인 국가관리체제 하에서 무사는 완전히 녹봉으로 먹고사는 샐러리맨과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무사도란 죽음에 대한 응시이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하가쿠레(葉隱)』라는 책은, 무사가 지배계층이 되기 이전에 오로지 싸우는 것이 직업이었던 시대에 대한 동경과 무사로서 살지 못하는 시대에 대한 회한을 담은 기록이다. 이 책이 나온 후 마치 이것이 무사도의 본질인 것처럼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무사도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던 극히 평화스러운 시절 지방의 하급무사가 무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무사로서의 일상의 마음가짐을 적은 일종의 인생독본이다. 요컨대 무사도는 죽음에 대한 각오이며 죽음 그 자체는 아니었다.
▶선의 무종교성이야말로 인류문명의 대안
선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을 거치는 동안 다수의 민족전통과 관련되어 형성되고 여러 민족이 공유해 온 정신문명이기 때문에, 어느 민족에게도 편향되어 있지 않은 보편성을 띠고 있다. 선은 일찍이 중국에서 생겨난 신종교이면서 금일의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잊혀졌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져 찬란하게 개화하여 500년 이상 지속되었던 선은 대부분의 일본인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으나 현대의 일본인들은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은 근대적 서구문명에 대한 아시아의 응답이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일본의 선에 대해 서구인들이 더 주목하고 관심을 갖고 있고 현대인들이 새삼 선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선은 불교의 일파이면서 불교의 외부에 존재하는 무종교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제나 구원,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기성의 종교와 달리, 선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자기탐구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선은 애당초부터 신도 부처도 세우지 않는 철저한 무신론에서 출발한다. 선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아가 선 그 자체에서도 탈각하는 절대자유를 지향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선은 근대 유럽의 무신론자들이 애써서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듯이 새삼스럽게 부처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불교의 부처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해탈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선은 극히 정신적인 자기훈련을 통해 모든 문명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철저한 자유탐구의 정신이다. 요컨대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 그 자체가 선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처가 추구했던 정신인 것이다. 선은 우리에게 부처다 중생이다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가르쳐 온 것이다. 또한 선은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같이 자유롭게 대도(大道)를 걸어가면 된다고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선의 정신이야말로 서구문명과 기독교만이 유일한 선이라는 자만에 차 있는 서구인들과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한없이 방황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것이다.
선은 형체가 없는 마음의 훈련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실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만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선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실천이란 바로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라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류가 만들어 놓은 인종, 민족, 종교에 대한 편견의 질곡에서 벗어나서 근대문명이 자신의 내면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고 자신의 육체를 좀 먹고 있는가 깨닫기 위해서, 선이 지향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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