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망생명공동체> 06-08-0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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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망세계관과 삶의 철학
- 도법스님 -
1. 본래의 길, 생명살림의 길인 인드라망세계관
인드라망은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불교 우주관에 나타나 있는 무수한 하늘나라 가운데 하나인 제석천 궁전에 드리워진 그물을 뜻하는 말이다. 깨달음의 핵심인 연기법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비유이다. 구체적으로 인드라망 세계관이 화엄겸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제석천 궁전에는 투명한 구슬구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다. 그물코마다의 투명구슬에는 우주삼라만상이 휘황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들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투영되고 저 구슬은 이 구슬에 투영된다.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투영되고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투영되고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투영된다.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투영되고 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된다. 위의 구슬은 아래 구슬에 투영되고 아래 구슬은 위의 구슬에 투영된다.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투영되고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투영되고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투영되고 공간의 구슬은 시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들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화엄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세계의 실상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연기법의 세계관 또는 인드라망 세계관이라고 한다. 실로 그 활동작용이 신비롭고 황홀하고 불가사의하다. 신비롭게 활동하고 있는 우주의 그물은 연기의 산물로서 불멸의 실체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구슬 하나하나도 연기의 산물로서 독립된 실체성이 없다.
여기에 한송이 꽃이 피어 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이 하나의 그물관계를 이루어 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꽃과 무관한 것은 없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의 작용에 의해 꽃이 피어나고 있기 때문에 꽃 그 자체가 바로 세계요, 세계 그 자체가 바로 꽃이다. 관계의 그물인 우주는 본래 하나의 유기적 생명공동체이다. 공동체로 성립하고 공동체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우주의 진면목이다. 시간과 공간,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인간과 신, 너와 나 등 모든 것들이 총체적 관계 속에 성립 전개되고 있다. 영원에서 영원 너머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관계 속에 끊임없이 생성변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요, 우주의 모든 것들이다. 이처럼 우주의 삼라만상 어느 것 한 가지도 관계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달리 표현하면 온 우주는 ‘한 몸, 한 생명’인 것이다.
<불본행집경>에서는 부처님이 연기법(인드라망, 즉 한 몸, 한 생명 세계관)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류역사에 희망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음을 선언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어두움의 역사가 청산되고 광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도다. 고통과 죽음은 뿌리를 뽑아내고 안락한 참삶의 새싹을 움트게 했도다.’
영원한 우주의 진리인 연기법을 깨닫고 본래의 길인 연기법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인류 역사에 희망의 서광이 빛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치 봉사가 눈뜨듯이 인드라망세계관을 확립할 때 희망의 길이 열리게 된다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한 몸, 한 생명의 길인 인드라망세계관을 확립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다.
2. 한 몸, 한 생명의 질서인 더불어 함께 사는 길
인드라망세계관으로 보면 이 세상의 길은 더불어 함께 사는 큰 길 하나밖에 없다. 함께 사는 본래의 길 말고는 그 어디에도 길이 있지 않다. 이 세상에는 천 갈래, 만 갈래의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은 진정한 길이 아니다. 오로지 더불어 함께 사는 길만이 참된 길이요, 희망의 길이다. 서로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나 더불어 함께 살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연못과 연꽃의 관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못은 연꽃을 피워낸다. 연꽃은 연못에서 피어난다. 연꽃 없는 연못은 무의미하다. 연못을 떠난 연꽃이란 있을 수 없다. 연꽃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은 뻘 연못이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연못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연꽃이 제 아무리 우아하다 하더라도 퀴퀴한 냄새의 진원지인 연못을 떠나서는 피어날 수 없다. 연꽃과 연못은 분리시킬래야 분리시킬 수 없는 한 몸, 한 생명이다. 연못은 연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존재가치가 있다. 연꽃은 연못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꽃으로 피어난다. 연꽃과 연못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절대가치이다. 연꽃은 연못에 가치를 부여하고 연못은 연꽃에 생명을 준다. 연꽃과 연못은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 의지해 함께 있을 때 생명을 갖게 되고 가치를 갖게 된다. 연꽃과 연못처럼 함께 사는 길만이 참된 길이요, 생명의 길이며, 희망의 길이다. 인간과 자연, 너와 나 등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길 말고는 그 어디에도 진정한 길은 없다.
3. 한 몸, 한 생명의 질서인 서로 돕는 길
서로 돕는 길만이 확실한 생명의 길이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살펴보자. 남자는 여자와의 서로 돕는 관계에 의해 남편이 된다. 여자는 남자와의 서로 돕는 관계에 의해 아내가 된다. 여자가 없는 남편, 남자가 없는 아내란 있을 수 없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주고받는 도움관계에 의해 자식을 낳고 아버지, 어머니가 된다. 서로 주고받는 도움관계에 의해 아들, 딸이라는 가치창조가 이루어진다. 주고받는 도움관계를 떠나서는 가치창조란 있을 수 없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평등한 가치의 존재들이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살도록 되어 있다. 서로 도우면 삶이 안락하고 아름답고 더 나은 가치창조의 삶이 된다. 반면, 서로 돕지 않으면 삶은 갈등과 추악함으로 가득하고 나아가서는 가치파괴의 삶이 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다. 서로 호흡이 잘 맞으면 삶의 짐은 가벼워지고 뜻한 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백지장은 맞들면 찢어져 버린다. 호흡이 맞지 않는 삶은 짐이 무거워지고 뜻한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서로의 개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서로 돕는 관계로 삶을 가꾸는 방법과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길, 확실한 희망의 길은 이 길밖에 없다.
4. 한 몸, 한 생명의 질서인 균형을 유지하는 길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홍수와 가뭄,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비가 너무 많이 오면 홍수가 나고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물면 모든 생명이 고통과 위험에 처하게 된다. 비오는 날과 맑은 날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면 농사도 잘되고 건강에도 좋고 나아가 삶이 풍요롭고 편안하다. 물과 불, 음과 양의 균형과 조화를 잘 유지할 때 뜻한 바 가치창조가 이루어진다.
또 한가지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따져보자. 지금 도시는 사람이 너무 많음으로 인하여 경제, 교통, 주택, 교육, 환경 등 심각한 문제들이 계속되고 있다. 농촌은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려 마을이 텅 비고 농지가 황폐해지고 식량자급율이 낮아지는 등 절망과 부작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도시와 농촌이 균형을 이루면 도시는 인간적인 도시가 되고 농촌은 살기 좋은 고향으로 가꾸어진다. 도시와 농촌이 조화를 이루면 사회는 안정되고 삶의 문화는 더욱 풍부해지며 나아가 삶의 질이 향상된다. 삶은 인간과 자연, 너와 나, 정신과 물질 등 총체적인 균형과 조화속에 흘러가고 있다. 균형과 조화의 길을 닦아가야 한다. 균형과 조화를 통해서만 우리가 희망하는 삶이 가능하다. 길은 분명 이 길뿐이다.
5. 가치창조를 위한 주체의 길
우리가 희망하는 삶을 가꾸어가려면 주체에 대한 올바른 눈뜸이 필요하다. 삶의 주체인 나라고 하는 존재도 총체적인 관계 속의 나이다. 하늘과 땅이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와 달이 없는 나란 성립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나, 너와 이웃이 없는 나, 대자연이 없는 나란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있을 수 없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 하늘과 땅, 부모와 형제, 너와 이웃이 동시에 없으면 안된다. 하늘과 땅과 부모와 너라는 대상은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절대가치이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가치가 중요하듯이 나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상대의 존재가치도 중요하다는 이해와 인식을 실천해야 한다. 한 몸, 한 생명의 진리인 나, 한 몸, 한 생명의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인 나의 삶은 업(業)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업은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즉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가 업인 것이다. 경전에서는 업의 주체성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다.(自業自受)’ 업의 창조성을 ‘자신의 업에 따라 삶이 이루어진다.(自業自得)’고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자신의 행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임을 의미한다. 스스로 도둑질에 관심을 갖고 행위하면 도둑놈이 된다. 싸움에 관심을 갖고 행위하면 싸움꾼이 된다. 보살의 삶에 관심을 갖고 행위하면 보살이 된다. 부처의 삶에 관심을 갖고 행위하면 부처가 된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면 힘이 나오고 힘이 형성되면 현실이 된다. 얼마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가.
삶은 스스로가 주인이다. 나의 행위가 삶의 전부이다. 부처의 행위를 하면 부처의 삶의 되고 중생의 행위를 하면 중생의 삶이 된다. 한 몸, 한 생명의 진리로 보면 나의 삶이 그대로 역사이고 역사가 그대로 나의 삶인 것이다. 나의 삶을 떠난 역사, 역사를 떠난 나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 한 몸, 한 생명의 삶을 온전히 사는 자가 부처요, 한 몸, 한 생명의 삶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현장이 정토이다. 박노해 시인은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라고 읊었다. 부처님은 ‘자신을 등불로 보고 스스로 등불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한 몸, 한 생명의 진리인 주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없는 한 참된 가치창조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한 몸, 한 생명의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의 역할을 온전히 할 때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 삶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6. 맺음의 글
미래를 열어 가는 길이 먼 곳에 있지 않다. 희망을 가꾸는 길이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새로운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은 본래부터 있었다. 다만 우리들이 본래 있는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해 온 것이다. 잃어 버린 본래 길을 찾아야 한다. 본래의 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샛길이요, 희망의 길이다. 그 길은 과거의 길이었고 오늘의 길이었고 미래의 길이기도 하다. 하늘의 길이요, 지상의 길이다. 인간의 길이요, 자연의 길이다. 너의 길이요, 나의 길이다. 너무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매왔다. 본래의 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버렸다. 이제는 본래의 길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고자 한다면 본래의 길에서 시작해야 한다. 올바른 방향인 인드라망세계관 확립과 바람직한 방법인 더불어 함께 사는 길, 서로 돕는 길, 균형과 조화의 길에서 삶을 가꾸어야 한다. 이 길만이 희망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다. 이 길만이 인류의 영원한 꿈인 자유, 평등, 평화를 실현하는 큰길이다. 또 다시 시행착오를 해도 괜찮을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머뭇거림을 용납해서는 안되는 상황이다. 똑바로 보고 똑바로 가야 한다. 큰 결심하고 큰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도법 /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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