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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생태주의의 제문제와 불교의 생명사상(인드라망, 060816)

by 마리산인1324 2007. 5. 18.

 

<인드라망생명공동체> 06-08-16 16:46    

http://www.indramang.org/bbs/board.php?bo_table=information&wr_id=127

 

 

* 출처: 인드라망 3호 (2001)년 5․6월호

 

 

생태주의의 제문제와 불교의 생명사상


전 재 성
철학박사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생태주의의 제문제는 환경을 생명의 관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곧바로 환경윤리학(environmental ethics)의 제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생태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연을 단순한 쾌락의 도구로 더 이상 학대해서는 안되고 자연은 생물학적인 생존권을 갖는 존재로서 자연과 인간은 윤리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주의 윤리학의 주된 네 가지 테마를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자연의 생존권문제 자연물도 생존의 권리를 갖고 있다.
② 세대간의 윤리문제 현재의 세대는 통시적으로 미래의 세대에 책임을 져야 한다.
③ 에코페미니즘의 문제 여성과 자연은 가부장제적 남성중심주의의 희생물이다.
④ 지구주의의 문제 지구의 생태계는 열린 우주가 아니라 닫혀진 우주선지구호의 세계이다.

불교는 이러한 환경윤리에 관해 현대를 이끌어 가는 지도적인 종교로서 어떠한 형태로든 응답을 해야하며 비판적으로도 검토해봐야 한다.

I. 자연의 생존권 문제

자연의 생존권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 문화가 자연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생존이 다른 생물이나 자연물의 생존에 우선한다는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대기독교적 사유는 신을 중요시함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인간중심주의적이다. 창세기 9장 3절에 “살아 있는 모든 짐승이 너희의 양식이 되리라. 내가 전에 풀과 곡식을 양식으로 주었듯이 이제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주장한다. 근대과학은 이러한 신학적 유산인 인간중심주의에 베이컨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과학적 지식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맹종한 근대과학적인 자연은 기계론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기계론적인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과학적 행위는 양심의 가책이나 거리낌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세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므로 인간이 이용할 수 없고, 열매를 얻을 수 없는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은 그들 자신이 아닌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Bacon, De Sapientiae Veterum). 이러한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대기독교적인 신에 의한 인간의 자연지배사상의 교묘한 변형으로서, 과학자가 대신 신의 지위에 올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정당화한 것이다. 근대과학과 산업자본가가 결탁하여 엄청난 자연파괴를 감행해 온 사실은 아무래도 부정하기 힘들다. 이러한 근대과학의 유산은 현대의 기술지향주의에 그 유산으로 강력하게 남아 있다. 기술지향주의자들은 과학의 포기가 아니라 과학을 더욱 확장 발전시킴으로서 환경파괴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지향주의는 세계에 대한 기계론적 파악에 또다른 토대를 두고 있고 인간은 생산과 소비의 한 단위로 기계적으로 물화(物化)해 가는 결과를 낳고 있다.

최근에 들어 이러한 비판에 직면한 인간중심주의는 ‘한사람의 생명은 지구 전체보다 무겁다’라는 생명윤리주의로 탈바꿈했다. 개인주의적 생명윤리주의는 개인의 인격적 자기 결정권을 옹호하며, 환경기술개발을 옹호하지만, 장기매매, 대리모, 인체개조, 유전자개조 등의 기술지향적 환경론을 옹호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물화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밟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생태주의적 환경론은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를 해체시키고,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물과 생태계의 생존권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불교적 사고와 일치한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의 생태계의 존재는 독자적으로 위계질서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의해 부분이 결정되는 부분전체론적인 수반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인간 중심주의는 해체되고 유정무정(有情無情)의 일체 생태계의 생존권의 보장은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을 걸고 보호하듯,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자연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생태지향주의는 엘렌 샘플(Ellen Sample)처럼 “인간은 지구표피의 산물이다.… 지구는 인간을 낳고 기른다.”는 조야한 형태의 기계적 환경결정론으로 둔갑하거나, 아니면 카프라(Capra)처럼 고전과학의 기계론을 거부하고 “근본적인 절대미립자는 존재하지 않고 인간과 물리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주장하여 유기체적인 체계론을 옹호하여 영적인 생태학적 인식을 강조한 나머지 지구의 영성을 주장하면서 범신론적이고 물활론적인 신비주의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생태주의자인 북친(Bookchin)은 근본생태주의자인 카프라의 신비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문화적 부패의 일종으로 보고 그 선행자인 고대 신비주의와 유사성을 지니는 타락된 신비주의로 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태지향주의의 성향들은 비불교적인 것들이다. 고전과학에 토대를 둔 기술지향주의뿐만 아니라 환경결정론은 인과적 스펙트럼에서 결정론에 속하며, 영성의 존재를 주장하여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지구영성주의는 철학적으로 신인동형적이며 인과론적으로 비결정론에 가깝다. 이들은 모두 양극단에 속하는 이론으로 무조건성을 드러낸다는 데서 결정론적이고 신인동형적인 것으로 연기법칙에 위배되며, 비경험적인 것으로 자명한 인과관계를 성립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연기법칙은 조건적이고 수반적인 생성의 구체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연기론에 따르면 자연의 생존권은 오히려 더욱 존속하고 쾌락을 즐기려는 존재에의 갈애(有愛:bhavataṅhā)에 바탕을 두는 기계적 실체성이나 영혼의 실체성이 소멸되는 과정에 수반되는 중도적인 팔정도(八正道)를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

진정한 생태지향주의는 기계론적이거나 도구주의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이거나 물활론적인 과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생태지향주의는 탄광에서 인간의 생태환경에 위험한가 아닌가를 테스트하기 위해 집어넣는 카나리아가 멸종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자연에 생존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생태지향주의는 인간중심적인 카나리아주의를 결코 극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생태지향주의적 과학은 무지와 갈애의 소멸에 수반적 자유로 주어지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따듯함에 토대를 두는 불교적 생태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

II. 세대간의 윤리문제

세습적 사회의 통시적 책임감을 부정하고 진보적인 자유를 확보해 온 현대의 민주주의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롭게 행동하는 공시적인 자기결정적 환원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물질의 실체를 인정하는 고전적인 기계론적 발상에 입각해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폐수를 무단 방류해도 드넓은 강과 바다가 오염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폐수는 폐수로서의 실체가 있고, 강과 바다는 각각 고유한 본성을 갖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서로의 실체를 손상함이 없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발상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웃나라인 중국의 급속한 공업화에 따른 대기오염이 한반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만, 중국은 중국이고 한반도는 한반도이므로 국제적인 책임감은 법적으로 제도화되기 어렵다. 공업화된 선진 어느 나라도 거대한 원시림을 지닌 나라의 대기정화장치에 사용료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북(北)은 북이고 남(南)은 남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산업자본주의와 결탁해서 환경의 무자비한 파괴를 기계론적으로 정당화했다. 우리는 지금 35억 년간에 걸쳐서 축적된 태양에너지를 불과 150년만에 다 써버리게 되었다. 공시적인 경제적 진보는 방탕한 아들로서의 현세대의 사치, 낭비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우리는 미래세대의 생존가능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가토우 하사타케(加藤尙武)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은 ‘현재세대가 미래세대를 사닥다리 위에 올라가게 해놓고는 나중에 사닥다리를 떼어 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미래세대의 생존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은 인류역사상의 어떤 끔찍한 대량학살보다 더 악랄한 것이다.

메도우(D.H.Meadows)를 중심으로 한 로마클럽의 학자들은 지구의 자원 고갈을 예측하여 인구, 자원, 환경문제를 비관적으로 보고 인류의 위기를 경고한 성장의 한계의 세계표준모델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1900~2100년 사이의 성장한계의 모델이 그렸는데, 1900년부터 식량생산, 공업화, 인구성장은 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이지만, 급격한 자원 고갈로 인해서 공업화와 식량생산은 2010년경부터 증가추세가 둔화되고 내리막 길을 걷는다. 그러나 자연적 지연반응으로 인구와 오염도는 계속 증가추세를 나타내게 된다. 결국 자원고갈, 식량부족, 공업화부진, 환경오염 등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워져 2050년을 고비로 미래세대의 인구는 급속히 감소한다.

그래서 환경지향주의자들은 현재세대가 미래세대의 생존가능성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는 통시적인 민주주의로서의 세대간의 윤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세대의 주장이 인간중심주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극단적인 사고실험을 통해 “공룡처럼 인간이 멸종할 경우에 최후의 인간세대가 지구환경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것은 정당한가”라고 우리가 반문한다면,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적 세대간의 윤리를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의 비타당성은 인간 세대간의 윤리문제는 생태적 세대간의 윤리문제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직도 생태지향주의자들이 인간과 동물과 환경을 기계적인 실체로서 구분하여 보는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볼 때 세대간의 윤리문제는 본질적으로 공시적 자아(존재요소 五蘊의 복합체)의 유전적 상속의 문제가 아니라, 통시적인 자아의 윤회 문제이다. 불교에서 윤회설은 철학적 인간학의 전혀 새로운 토대 위에 놓여 있다. 부모는 인간을 그 물질적 측면에서 잉태한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선행하면서 잉태의 순간에 한 인간의 업력(業力)이 그의 최초의 의식을 형성한다. 이 불가시적인 전생에 형성된 업력의 힘이 영적인 현상을 가져오면서, 미래존재를 구성하는 생태적 현상으로서의 미래세대의 삶을 규정한다. 미래세대는 다름아니라 지구상에 다시 태어나게 될 우리자신의 미래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환경윤리에서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에 의한 미래세대의 생존권은 우리 생태세대의 생존권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생태적 자아는 공시적으로 현재의 지구전체로 확산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 미래에 도래할 윤회하는 자아의 생태계로까지 확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톰슨(E.P.Thompson)이 주장했듯이 무가치하다고 생각되는 것의 대량살상을 용인하는 절멸주의(Exterminismus)에 빠져들 위험성이 상존한다. 이러한 절멸주의는 부처님 입멸후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현세의 이익을 극대화한 현실주의자들을 단멸론자(斷滅論者:ucchedavādin)라고 부른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절멸주의는 현대판 단멸주의로 자기근절의 논리(die Logik der Selbstausrottung)를 통해서 산업체제로 하여금 양적 위주의 성장으로 돌진하게 하며, 역사적으로는 군사적 팽창주의와 절멸주의로 나타난다.

III. 에코페미니즘의 문제

에코페미니즘은 그 내부에 다양한 사상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지만, 모두가 가부장주의와 가부장적인 인식론의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에서 연유한다는 데서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인간중심적이고 이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지배주의에 의한 자연의 파괴는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적인 전통과의 결탁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네 이웃이나 아내나… 그의 여종이나…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주장으로 보아 남성위주의 사회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동양의 유교적 윤리도 역시 “夫婦有別, 女必從夫, 夫倡婦隨, 男尊女卑”의 남성중심적 사회를 주장했다. 이러한 남성중심주의 근대과학의 출현과 더불어 개발프로젝트에 자연에 대한 지배와 폭력이라는 형태로 내재화되었다. 그래서 에코페미니즘은 자연과 여성은 모두 생명의 출산과 보호라는 자신의 가치를  박탈당하고 도구화되고, 상품화되고, 타자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킹(King)과 같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도 반자연주의를 공유하고 있는데 두 이론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적이고, 그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자연정복에 기반을 둔 남근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인 가부장제적인 사회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코페미니즘은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생태주의적인 비판을 함유하고 있다.

이러한 에코페미니즘이 자연과 여성의 일치를 강조할 때에 본질주의적인 페미니즘이 성립한다. 자연페미니스트인 알렌은 “우리는 대지이다… 지구는 인간의 원천이자 생명이다. 우리는 똑같이 지구의 생명이다.”라고 주장한다. 여성과 자연의 합일을 강조하는 본질주의적 페미니즘은 지구여성이라는 영성주의적이고 여신숭배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영성주의적 여성운동은 여성의 권리와 자연물의 생존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생태주의의 신인동형적 사고방식은 인도의 여신숭배가 파괴의 여신인 깔리여신의 숭배로 귀결되었듯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여신숭배를 합리화하는 것은 여성의 모성애적 본능이외에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삶을 죽음의 세계로 흡수해버리는 성향을 방기한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성의 영적 본질에 초점을 맞추었던 에코페미니스트인 댈리는 “남성의 남근지배적 지배의 더럽고 유해하며 타락적인 죄악은 강탈과 강간, 인종차별주의, 여성학살, 종족학살, 그리고 궁극적인 생명학살의 뿌리이다.”라고까지 주장했다. 인도에서 깔리여신은 자애로운 모성과 잔인하고 파괴적인 특성이 결합되어 있다. 깔리여신은 파괴적인 측면에서는 자신의 아이들마저 삼켜 버린다. 특히 마하깔리는 위대한 검은 여신으로 피를 흘리며 늘어뜨린 혓바닥, 칼과 방패, 사람의 잘리운 머리로 장식되어 있다. 생태파괴의 절멸주의적 충동은 여성에서부터 근원하는 남성적 가부장제주의가 아닌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여성과 남성의 이원론적 위계질서가 역전된다고 해서 자연의 생존권이 보장된다는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구조주의적인 에코페미니즘은 남성을 선천적으로 지배주의적이고 폭력적이고, 여성을 모성적이고 외호적이라고 보는 본질주의적인 에코페미니즘에 관해서는 반대한다. 성적인 양극성을 강조하는 것은 반동적인 가부장제적인 정치를 고무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여성의 자기동일성은 사회적 구조물이라고 본다. 여성과 남성-양성은 그들의 성에 의해 규정받는 만큼이나 계급, 인종, 종교, 민족의 문제들에 의해 규정받는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경험적 실체 속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육체’로서 사회적인 권력관계의 그물망에 의해서 형성되는 육체로서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따라서 구조주의적인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을 특화시키보다는 남성의 가부장제적 환경파괴에 반대하는 모든 집단적인 공동투쟁에 참가할 필요를 제시한다는 데서 본질주의보다는 합리적이고 포괄적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에코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체계로 희석시킴으로서 초기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정열을 감소시킨 측면도 없지 않으나 보다 포괄적인 여성운동을 정착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초기불교는 남성에 대한 이원론적인 여성과 자연의 일치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토불이(身土不二) 등의 인간과 자연의 일치에 관해서는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체들과 더불어 업력에 의해 윤회하는 상호가능적 자아로서 이원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는 기본적으로 여자만이 갖는 괴로움을 “①시집가서 친부모와 본가를 떠나기 ②월경 ③분만 ④남자에의 봉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성의 생물학적인 조건과 사회적인 조건에 관해 명확히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SN.4.p.239). ②와 ③은 자연적인 본질로서의 여성의 고통에 관해, ①과 ④는 사회적인 행위자로서의 체화된 여성의 고통에 관한 설명이다. 에코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의 자연적 본질은 지구적 자연과 일치되며, 지구영성과 여신숭배의 토대를 마련해주는 데 비해 초기불교는 여성의 생물학적인 본질 자체를 괴로움으로 보고 있으며, 거기에서 형이상학적인 신인동형론을 도출하지는 않는다. 초기불교에서의 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훗날 대승불교에서 그 사상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 대승불교에 따르면, 여성의 자연적 본질에서 오는 고통은 대승본생십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大正3,p.297b)에 의하면 잉태하고 힘들게 낳고 키우는 것은 여성의 도덕적 탁월성 즉 공덕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공덕의 힘이야말로 본질주의적인 에코페미니즘의 원동력이 되지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대승밀교에 와서 사회적 행위자로 체화된 여성의 고통은 모든 생(生)의 태장(胎藏)으로서 모든 생력(生力)의 담지자일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의 원동력으로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때 여성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남성에 대한 이원론적 위계질서의 역전이 아니라 연기적 그물망에 대한 통찰을 여성화한 반야즉모(般若卽母)의 사상에 입각한 상징적 체계로 나타난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그 이념은 구조주의적인 페미니즘의 체계와 유사성을 지닌다. 다만 초기불교 및 대승불교의 성립 당시에는 지금처럼 환경파괴가 심하지 않아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동일시는 없었으나 가부장제적이고 지배주의적인 바라문계급의 비도덕적인 사회구조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불교가 그 평등감과 동족감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넘어서,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넘어서, 모든 생명체에까지 확대해간 것은 현대의 이원론적 에코페미니즘이 극복해야할 과제의 해결을 불교적으로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다. 

Ⅳ. 지구주의의 문제

근대의 고전과학과 개인주의, 자유주의에 기초한 사상은 모두 공간의 상대적 유한성을 적용시키지 않고, 무한공간의 우주를 상정해 왔다. 기계론적 사유는 “운동하는 물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그 운동을 지속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어, 무한히 열린 우주를 상정해 왔던 것이다. 이와 똑같이 자유주의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어 무한한 욕망의 공간을 가정했다. 그리하여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거기에 부합되는 자유, 평등주의는 욕망의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거대한 제국주의적이고 지배주의적이고 마침내 절멸주의적인 문화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우주의 무한성과 가용자원의 무한한 활용에 토대를 둔 기계론적인 산업주의 문화는 환경파괴라는 우주의 상대적 유한성 앞에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환경주의는 지구를 무한한 열린 계가 아니라 유한한 닫힌 계로 보게 되었다. 닫힌 계에서는 이용가능한 에너지와 물질의 총량은 유한할 수밖에 없다.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나 오염은 무한한 우주 속으로 희석되지 않고 유한한 지구전체를 파괴시키고 오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생태학적으로 지구를 우주선지구호라고 부른다. 지구는 상대적으로 유한하게 완결된 사물이라는 것이다. 지구는 확실히 유한한 공간을 갖고 있다. 무한한 욕망의 공간을 상정하는 무한한 경제성장은 우주선지구호의 생태학적으로 천연자원의 소모와 쓰레기의 증가를 의미하는 우주선지구호의 방탕한 사치이다. 생태주의자들은 우주선지구호를 구하기 위해서 경제성장의 사악함과 국가의 무능력을 비판하여 에코파시즘(ecofascism)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절멸을 향해 치닫는 우주선지구호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절명의 과제이고 전쟁은 인구조절을 위한 필연적인 생태적인 원리라고까지 합리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소멸되고 전체주의의 부활가능성이 온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지구를 절대적으로 닫힌 세계로 보는 극단적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구를 상대적인 닫힌 세계로 보는 생태주의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다. 지구는 완전히 닫힌 계가 아니라, 생태학적으로 태양에너지의 유입과 방출을 통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그러나 그것을 제외한다면, 현저하게 상대적으로 닫혀있는 계에 속한다. 그들은 무한우주의 이념에 기초하는 자본주의적 자유와 사회주의적 평등대신에, 유한한 지구에서의 다양성의 조화를 내세운다.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욕망을 다양성 속에서 잠재우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이러한 이론은 생태적 위기에 처한 종의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태학적 이론과 잘 조화가 된다. 그런데 게슈탈트(Gestalt)심리학의 원리에 따라 지구를 하나의 백지라고 한다면, 거기에 누군가가 일부분을 색칠하면, 나머지의 여백은 그 일부분을 뺀 나머지 형상에 의존한다. 누군가 다른 색을 칠하려면 동일한 백지에 칠할 수 없으며, 다른 형태의 나머지의 여백에 칠해야 한다. 이처럼 지구구성원 하나하나의 행동들은 서로 타자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며, 따라서 타자에 대한 책임감에 기초한 상보적 원리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유한한 지구호의 구성원들은 무한공간을 요구하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버리고 다양성의 조화를 꾀하는 상보주의를 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토우 하사타케(加藤尙武)의 주장처럼, 10명의 사람이 5명씩 택시에 탈 때에 뚱뚱하거나 바싹 마른 다양한 사람이 함께 짝을 맞추어 함께 타는 것이 택시와 같은 우주선지구호의 유한공간 속에서 살아 남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보주의적 생태주의속에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이득은 다른 개인이나 집단의 손해라는 제로썸(Zero-Sum)의 논리가 시한 폭탄처럼 존재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래서 붓다는 세계가 유한한가 무한한가, 열려있는가 닫혀 있는가에 대하여 대답하길 거부했다. 그것은 연기법적인 진리를 성립시킬 수 없는 극단적인 세속철학적인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기계론적인 철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대성이론 이후에는 시공(時空)은 시공연속체로서 상대적으로 파악될 뿐이며, 절대적인 무한공간이나 유한공간의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우주선지구호는 시공[器世間]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닫혀 있지만 생태[有情世間]적으로는 열려있다. 불교적 우주론은 현대천문학이 발견한 시공적 광대함과 일치한다. 이 지구적 세계가 전개될 때, 생명체들은 우주의 어디인가 광음천(光音天)에서 도래했으며, 그들은 지구상에서 윤회전생하다가 지구가 괴멸되면, 다른 세계로 윤회전생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불경에 의하면 지구의 파멸은 겁탁(劫濁)이라고 불리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욕망의 시대에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이 세계가 시공적으로 무한하다고 가정하고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부르짖으며 철없이 진보와 발전만을 추구하는 것은 시공적으로 한계 지워진 지구생태계의 관점에서 보면 비속하고 사악한 것이며, 우주선지구호를 절대적으로 닫혀진 공간이라고 주장하며 에코파시즘적인 전체주의를 획책하는 시도는 더욱 사악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주선지구호에서 생명의 다양성을 상보적인 존재로 규정하여 보존하고, 생태문화적 다양성을 일깨워주고 환경과 자연을 보존해 가는 것만이 중도적인 생태운동의 올바른 지표가 될 수 있다. 붓다가 인식한 생명체의 종류는 나무와 풀, 곤충, 네 발 달린 동물, 파충류, 물고기, 새와 인간이었다. 이들은 땅, 물, 불, 바람의 생태계 속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공존하고 있다. 이들 생태계는 모두 인간중심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자비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비는 욕망의 감소에 수반되는 자유로서 자연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요리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기계론적 발상과는 다르다.

V. 결론

우리는 이제까지 생태주의의 주된 테마와 그 불교적인 관점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자연의 생존권문제에서 자연물도 생존의 권리를 같고 있다는 주장은 무생물의 물화론적인 부활과 타락된 신비주의 및 영성주의를 획책하지 못하도록 땅, 물, 불, 바람 등의 지구생태계들은 동등한 생존의 권리를 갖는다는 원리로 대체되어야 한다.
세대간의 윤리문제에서는 현재의 세대는 통시적으로 미래의 세대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원리는 인간중심주의에 국한되어서는 안되고 현재의 생태세대는 미래의 생태세대에 대하여 통시적으로 윤회전생한다는 사실에서 미래의 생태세대에 책임을 져야한다.

에코페미니즘의 문제에서는 여성과 자연은 가부장제적 남성중심주의의 희생물이라는 이원적인 세계관에서 초월되어져야하며, 여성과 자연의 생태학적인 본질은 보살정신으로서의 도덕적 탁월성으로 고양되어야한다.

지구주의의 문제에서는 지구는 상대적으로 닫혀진 물질계로서 생태계간에 상보적인 다양성을 필요로 하지만, 그 한계상황에서는 광활한 우주에 생태적으로 열려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지구의 생태계는 열린 세계가 아니라 닫혀진 세계이다라는 허무주의적인 단멸주의는 지양되어야한다.

하나(一)이기를 획책하는 영성주의나 차이(異)를 획책하는 물질주의는 붓다에 의하면, 모두 극단적인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경험적인 연기(緣起)의 세계를 성립시킬 수 없는 비진리이다. 우리에게는 중도적 입장에서 생태계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소멸시키는 팔정도의 길을 생태윤리학적으로 재정립하는 것이 매우 긴요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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