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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혼의 풀무질로 ‘유기농 메카’ 밑불, 이찬갑 선생(한겨레신문 070417)

by 마리산인1324 2007. 5. 15.

 

<한겨레신문> 2007-04-17 오후 08:42:29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03604.html

 

혼의 풀무질로 ‘유기농 메카’ 밑불
홍성에 풀무농업학교 열어 기적의 씨 뿌리고
모두 주인이라는 ‘무두무미’정신 평생 실천
한겨레 조연현 기자
» 풀무농업학교 학생들이 지난 11일 풀무생협이 운영하는 갓골작은가게 앞에서 그림을 그리다 부근을 지나던 홍순명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을 자리에 앉게 한 뒤 정겹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기독교 120주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⑫ 이찬갑 선생

 

충남 홍성 홍동면 갓골에 들어서니 멋들어진 집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 풀무농업학교 남녀 학생들이 어울려 풀무생활협동조합 빵가게 텃마루에서 봄볕을 쪼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홍순명(71) 선생님을 보며 친할아버지보다 살갑게 웃음 띤 얼굴에선 요즘 세상을 달구는 입시와 경쟁과 3불 논쟁의 그림자가 없다. 가게 안엔 갓 구운 유기농 빵들이 군침을 돌게 하고, 바로 앞 공방에선 동네 아낙들이 모여 바느질을 하고,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헌책방에선 마을 아이들이 책을 사고 홀로 돈통에 돈을 넣고 나온다. 이상적인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온 때문일까. 별천지다.

 

별천지는 갓골만이 아니다. 지난해만도 이 일대 200여만 평의 들녘에선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쌀과 채소를 길러냈다. 홍성이 ‘유기농의 메카’가 되어 많은 귀농자들이 새로 들어오게 된 배경엔 풀무농업학교가 있다.

 

» 밝맑 이찬갑(1904~74)
밝맑 이찬갑(1904~74·사진) 선생이 주옥로 선생과 함께 풀무농업학교를 연 것은 1958년 4월23일 이런 봄날이었다. 초가지붕 아래 개교 때만 해도 어느 학교도 넘보지 못할 기적의 씨앗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급격한 산업화와 이농 현상으로 농업학교는 ‘똥통학교’라며 외면해 입학생이 2~3명에 불과한 때도 있었다. 1960년 이찬갑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누운 뒤부터 이 학교를 짊어진 홍순명은 자신의 자녀 6명을 모두 이 학교에 보내며 시류에 맞섰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홍성 여러 마을의 이장이 되고,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벌이며 힘을 합치면서 홍성은 ‘희망의 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홍순명이 40여년 세상의 비웃음 속에서도 이 학교를 지탱하도록 한 것은 바로 이찬갑의 정신이었다.

 

이찬갑은 남강 이승훈이 고향 평북 정주에 세운 민족학교인 오산학교 출신이었다. 남강은 이찬갑의 증조부의 동생이다. 남강은 1899년 용동촌에 친인척들을 집단 이주시켰고, 오산학교를 세우면서 학교와 지역과 문화시설들이 어우러져 상생하는 이상촌을 건설했는데, 이찬갑은 남강이 가장 사랑했던 이 마을의 종손이었다. 그럼에도 이찬갑은 오산학교가 일제의 제도권 학교로 편입되면서 조선역사와 한글 대신 일본 역사와 일본어 과목이 등장하자 과감히 오산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역시 오산학교를 같은 이유로 그만둔 교사 함석헌의 성서모임에 참석하고,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민족을 살릴 꿈을 키웠다. 여러 학교 교사로서 경험을 쌓은 그가 이 학교를 세운 것은 오산학교에서 못 이룬 꿈을 제대로 이뤄보기 위함이었다.

 

대장간 자리가 있는 풀무골에 세워진 학교에서 혼의 풀무질이 시작되었다. 학교는 권위나 돈이나 입시가 아니라 정신과 정성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던 이찬갑의 뜻에 따라 이 학교엔 교장도 사환도 없었다. ‘무두무미’(우두머리도 병졸도 없는 모두가 주인)라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학생들과 함께 했다. 지게질도 함께 했고, 마라톤도 함께 뛰었다.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소똥과 유리 조각을 주워 와선 소똥은 밭에 뿌리고, 유리 조각은 한쪽에 묻었다. 또 농민들을 위해 보리 깜부기병을 막도록 종자를 열탕소독하는 법을 직접 개발해 보급하면서 교육과 삶이 일체가 되는 현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일만 하면 짐승이고, 공부만 하면 도깨비”라면서 일과 공부, 인문과 실습이 조화되는 자신의 삶에 학생들이 스며들게 했다.

 

자신의 이해타산을 셈하며 시류에 눈을 번득이는 권력자와 학자와 언론인이 아니라 평범한 평민들이 깨어날 때 우리의 삶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던 그는 그 나라와 역사와 말만이 그 나라를 깨울 수 있다고 믿었고, 역사와 한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두 아들 이기백과 이기문이 역사학자와 국어학자가 된 것도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이찬갑은 남들이 성적에 가려 보지 못한 인간의 개성과 능력을 보았다. 그랬기에 명성과 권위와 제도권이란 이름으로 우등생만을 선점해 열매만 거두려는 경쟁에도 동요하지 않고 무소뿔처럼 자신은 뿌리를 가꾸겠다고 했다. 풀무농업학교가 최고 인기 대안학교가 되어 전국에서 학생이 몰려오는 것을 홍순명이 오히려 기쁨이 아니라 위기로 보고 있는 것은 그런 이찬갑의 교육혼 때문이다.

 

매일 새벽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뒷동산에서 올라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며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연 이찬갑은 아침이면 늘 “밝았습니다”, 낮엔 “맑았습니다”, 저녁엔 “고요합니다”라고 인사했고 그 인사법은 이 학교의 인사법이 되었다. 밝다와 맑다를 딴 ‘밝맑’은 그의 호였다.

 

학교 개교 50돌을 맞는 내년엔 마을에 밝맑도서관을 열어 학교와 지역이 함께 이용하고 함께 사는 이찬갑의 꿈을 열어갈 꿈을 꾸고 있다.

 

홍성의 들녘을 지나오니 정호승 시인이 말한 그 봄길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홍성/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