密陽-상처중독의 사회에서 여자가 살아남기(online if)

 

<online 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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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 陽

 

-상처중독의 사회에서 여자가 살아남기

 

 

 

신애(전도연)는 아들의 웅변대회가 끝난 뒤 마련된 회식 자리에서 사소한 뻥을 친다! 사실 여윳돈도 많지 않으면서 돈깨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땅을 보러 다닌다고 한 신애의 허언은 처음에는 일상에서 흔히 저질러지는 흔한 말장난이나 뭐 애교처럼도 생각되었다. 며칠 뒤에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 유괴당한 뒤 무참히 살해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신애의 그 작은 거짓말은 하나뿐인 자식-여기서 아들이란 설정은 단순해 보이지 않는데, 아들은 죽은 남편의 영향력이 여전히 신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 범죄대상으로 찍히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유괴사건 담당 형사들이 땅을 보러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는지부터 탐문수사를 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신애의 처절한 슬픔 뒤에는 그래서 자신의 실수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자책이 없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신애의 통곡은 그래서 더욱 더 사무치게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런데 왜 신애는 그런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또한 동생과 맥주를 마시는 장면에서 신애가 죽은 남편의 외도 사실을 믿지 않으려는 태도는 무언가를 감추려는 태도는 아닐까? 신애는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애는 아이를 웅변학원으로 보냈다. 아버지가 죽고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을 찾아와서 아버지의 코골이를 흉내내는 아들을 웅변학원을 보냈다는 설정은 어찌 보면 평범할 것 같다. 그러나 이창동 영화에서 거저는 없다. 평범하고 자연스런 전개 같아 보이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곱씹어볼 의미가 도드라져 나오는 것이 이창동 영화의 재미다. 그래서 이창동 영화는 사색을 요한다. 애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듣고 소심해지거나 침울해지지 말라는 뜻에서 그 학원을 보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우리의 주인공인 신애의 입장에서 보면 그 속의 의미는 신애의 정서적인 독립심 부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들은 흔히 자식을 통하여 대리성공이나 대리만족 성향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김사장을 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취향이 딱 부러지는 깐깐한 신애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신애는 아들이 웅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인생의 꿈의 좌절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아들의 웅변이 끝난 뒤 신애가 일어나서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은 이런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신애의 꿈은 피아니스트였고 신애는 결혼과 함께 그 꿈이 무산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잃어버린 현재, 아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무슨 꿈이든지 다시 지펴줄 거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속물적 캐릭터로 나온 김종찬 카센터 사장(송강호 분)은 이런 신애를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는 피아니스트라고 불러 준다.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의 전문가를 부자연스럽게 과장스런 존칭으로 부르는 것은 속물들의 무지와 비굴감 때문이기는 하다. 하지만, 신애를 피아니스트라고 불러준 그 행위는 바로 신애의 결혼 이전의 꿈, 곧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보람을 약속하는 미래의 전망 앞에서 활짝 열려져 있는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꿈, 바로 깊은 내면에 공명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종찬의 외사랑은 깊은 순정의 표현이다. 이창동 영화마다 나오는 남자의 순정-<초록물고기>의 막동이나 <박하사탕>의 영호만 보더라도-은 사랑의 욕망을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은 조급함을 보이는 대신에 거리를 두고 일상의 주변을 맴돌며 사랑하는 여자의 삶 속에 참여하고 싶은 관심으로 시종일관 나타난다는 점에서 남성적 권력행사로서의 일상적 사랑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런데 신애는 이런 순정을 거부한다.

 

신애의 처지는 행복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바람피던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은 소진되어 버렸다. 하는 일이란 게 여느 사람처럼 재테크에 열중하는 척하며 은근히 돈 많은 사람인 양 선망과 시기를 받으려고 연극적인 행동을 하며, 하나뿐인 아들에게 온통 삶의 희망을 걸고 있을 뿐이다. 신애는 어찌 보면 고요한 절망에 빠진 평범한 미망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신애의 마음이 남들에게 차마 하소연할 수 없는 낫기 힘든 상처투성일 뿐이다. 여기까지 이창동 감독은 충분히 주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여자의 평범한 현실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짜 사건은 이제부터 터진다. 신애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인 상황과 직면하게 된다.

 

아들이 유괴된다. 잔혹한 범인은 어머니의 약점을 이용해서 돈을 요구한다. 그런 돈이 신애에게 있을 턱이 없다. 어렵게 이사온 남편의 고향에서 신애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밤중에 도움을 청하러 간 카센터 김사장은 가라오케에 대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도움이 꽉 막힌 벼랑 끝 같은 상황에서 사랑타령하는 데 열중하는 김사장의 모습은 위기상황에서의 소통단절을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다. 할 수 없이 신애는 단독적으로 문제를 처리하기로 한다. 범인이 요구하는 몸값보다 훨씬 밑지는 돈을 약속장소의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 뒤에 형사들이 신애의 집을 찾아온다. 숨 막히게 하는 두려운 불안. 형사들과 함께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 던져진다. 파국처럼 신애의 아들은 강변에서 거적대기를 뒤집어 쓴 채 죽어 있다.

 

범인이 잡힌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범인은 바로 웅변학원 원장선생이 아닌가. 이것은 대체 무슨 이상망측한 불행일까. 바로 자랑스럽고 자신만만한 아들로 키워주겠다고 약속을 하던 학원 선생이 바로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했다니!

 

몸을 짓누르는 고통을 신앙을 통하여 이겨보려고 노력한 신애는 얼마 동안 신앙을 체험한 뒤에 자기의 아들을 돈 몇 푼 때문에 살해한 범인과 면회한다. 그 때 면회실 유리 뒤에서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짓는 반질반질한 얼굴의 아들 살해범은 신애의 숨겨놓은 상처를 날카로운 양면칼로 휘젓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소통불능의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 신애는 면회를 마치고 나온 교도소의 흙바닥 위로 기절해서 쓰러진다. 신애의 고통은 용서라는 기독교적 행위마술 속에서 용서의 주도권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신애의 상처는 그 바지런한 신앙생활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신애는 압도하는 절망감과 자기 신앙에 대한 환멸적인 배신감 때문에 비정상적인 행동을 표출하게 되는데, 이런 행위들은 삶의 의지를 바닥까지 파괴해버린 괴로운 상처들에 대한 조건반사에 가깝다.

 

신애의 고통의 깊이에 피상적인 공감만을 표하는 지옥 같은 밀양이란 도시 어디에서도 ‘밀도 있는’ 볕살의 지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애가 무의식적으로 희구해 온 <비밀의 볕>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영화의 종반부에서 짝사랑하는 김종찬이 신애가 머리를 자를 수 있도록 거울을 들어주는 아름다운 장면조차 이 두 사람의 관계의 미래를 암시하는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의 깊이가 빼어나게 녹아든 영화는 끝까지 관객에게 경솔한 희망에의 기대감을 갖게 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의 사랑조차 어떻게 될지 자못 불투명하다. 왜냐하면 신애가 어떤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느냐가 결국은 상처중독의 과거와의 연속성을 끊을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이며 그것이 바로 김종찬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신애가 앞으로는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가져봄 직하다. 머리칼을 자르며 신애는 과거와 결별하려고 한다. 자라난 머리털은 과거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미끄러지는 화면에서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털이 바람에 날린다. 그리고 지저분한 마당 한켠의 한뙈기를 비친 햇볕에 잠시 머무르던 카메라는 암전되며 영화는 끝난다…… 그렇다면 사회의 남성적-자본주의적 폭력에 의하여 영혼을 內破당한 여성이 다시 일어나 살아갈 길을 비춰주는 비밀의 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여성 스스로의 진지한 내면적 성찰과 주체적 단련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유기고가 김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