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파워> 2007/07/0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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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만 있고 진정성 부족한 기독교? | |||
영화 <밀양>, 기독교에 고마운 반성적 가치로 다가와 | |||
‘내가 누구인가?’영화의 화면이 장치적으로 잘 보여주듯 삶은 일상의 소음과 정돈되지 못한 공간과 사물, 그 이미지들로만 가득한 바다---그 속에서 신애는 결국 자신의 또 다른 허위로 인해 아들을 잃고 급기야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마저 기억해 내지 못하는 상실에 이르러 스스로 전율한다. ‘비밀의 햇볕’이라는 해석의 뜻을 지닌 소도시 밀양, 그 지명에 담긴 아름다운 신비적 의미를 물어 볼 자각과 여유를 경험해 볼 수도 없이 일상에 매몰된 밀양사람들, 그 사람들에게서 약간 비껴나 그 사람들을 향해 ‘속물’이라는 조롱으로 개념화시켜낼 줄 아는 도시적 교양의 신애자신도 적당히 허위를 부려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다. 도무지 빈틈이나 물러 설 여유 공간이 보장되거나 허용되지 않은 소도시의 거리와 일상들로 빽빽한 소음의 우주---그 정글 속에서는 내밀한 자각이나 지식과 정보들도 그렇게 내밀하지 못한 채 어디까지나 하나의 ‘의미’나‘자각’으로 변환되지 못하는 내적 유희일 뿐이다. 이런 위태하게 유실되고 엷어진 존재의 연약과 고통이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되고 치유될 것인가? 결국 소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약간 나은 속물인 신애는 보는 것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에 내몰린 채 인스턴트처럼 늘 가까이에 있었고 늘 보아왔던 기독교를 찾아가 일말의 평안을 얻는다. 성령을 체험하고 켜켜이 쌓이고 적체되었던 내면의 상처와 신경증적인 고통들을 울컥 토해 내는 작업들을 거치며 교회가 원하는 신앙에 도달하기도 해 주위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에 이른다. ‘예기치 않은 기쁨’이 내려 왔고 보이는 사물에서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빛이 보이며 갈채로 쏟아지는, 문자 그대로 ‘밀양’도 경험한다. 신애는 이제 교회에서도 인기 있는 신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위로와 자신과의 화해도 잠깐, 그 신비스러운 내적 힘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를 시도하고자 하지만 도시의 인간은 그 과정의 길목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피해의 주체자인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이미 야수와 같은 그 인간은 신애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내적 평화에 도달해 있지 않은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살벌한 구분이나 경계가 실종되다 못해 이렇게 되면 아예 서로의 자리가 바뀌어 버린다. 이제 짐승 같은 가해자는 천사의 얼굴과 내면을 누리고 있고 선량한 피해자는 그 피해의 상처로 인해 매일 매일을 힘겹게 고통을 받으며 싸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이것이 과연 신의 용서인가?’ 신앙으로 인한 혼돈과 혼란은 무 신앙으로 인한 혼란보다는 더욱 치명적인 법. 이 후로의 신애는 완전히 흔들리고 무너져 결국은 정신병원의 신세를 지게 되는데---. 전체적으로 영화는 기독교를 다소 희화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희화는 단순한 부정으로서의 희화가 아니어서 그만큼 오늘날 대중화된 기독교의 ‘얕음’의 속살을 깊이 건드린다. 그렇게 비트는 ‘꼬집음’은 교회의 귀에도 들릴만하고 기독교 전체에 대한 반성적 문제의식을 촉발시킬 만하게 자극적이고 힘이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전체적으로 구성과 짜임새가 투박, 지나친 작가주의로 경도된 것이 아닌가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또 문제의식을 던져 주는 문학적 기능을 뜨겁게 살려 놓는다. 영화 속에서는 복음을 선전하는 가두 전도대의 모습이나 신애의 팔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것’을 애절하게 설명하는 알토란 신자의 진지한 전도도 뻘쭘하고 어색해 보인다. 목사의 언어는 정형화 되어 있고 예배와 신앙행습들도 ‘말’과 이벤트, 고정된‘틀’속에 갇혀 있는 듯 살아있지 못하다. 그 통속적 ‘딱딱함’속에서 인간의 내면과 고통들이 얼마나 이해되고 깊게 용해될 수 있을까? 신앙과 그 내용을 효과적으로 학습하고 전달할 수 있도록 교회는 공공성의 신학과 신앙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더욱 기능적으로 규격화하고 재빨리 상품화하고자 하지만 그 통속성의 바다 속에 교회는 아예 통 채로 빠져 버린 것은 아닌가? 신앙의 대중성이야말로 많은 사람을 구원해야 하는 명제로 항시 확보되고 보장되어야 할 기능적인 영역이지만 오늘날의 기독교가 일반화한 그 대중성 자체를 아예 신앙의 내용을 규정하는 전체적인 범주로 오독하는 수준에서 정지해 있다면 이미 기독교도 밀양사람들처럼‘질문’이 없는 속물로 스스로 내려앉은 것이 아닌가? 기독교의 이런 ‘얕은’대중성이 일상과 금속의 소음 속에서 시멘트의 벽을 뚫지 못하고 유리하고 표류하는 현대인(신애)의 혼돈과 무의미, 고통을 제대로 해석해 내고 그 좌표로 치유해 낼 수 있을까? 이런 기독교의 ‘얕은’대중성과 신애(도시인의)의 발전하는 좌절과 위기의 자리는 영화에서는 점점 중첩되지 못하고 그 틈새가 벌어지며 결국은 다른 층위로 따로 논다. 결국 구원은 현재의 ‘속물’에서 벗어나는 초월에서가 아니라 속물에 대한 반성적 질문은 없지만 항상 곁에 있는 종찬 이라는 인물이 상징해주듯 그 ‘속됨’속에서 밉지 않은 넓은 어깨로 살아가는 부담이 없는 평범의 일상에 있다는 역설로 귀결되는 듯하다. 그 일상의 소음이 묻어 있는 그 ‘속된’‘일상’위에 (다시 일상으로 회귀하는 신애의 잘린 머리카락이 떨어지고 있는 맨 시멘트 바닥 한 켠 위로)그래서 영화의 엔딩에서처럼 다시 내밀한 햇볕이 쏟아지고---.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구원과 은총, 인간의 운명에 역사하는 절대자의 주권적 타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감독의 휴머니티 기독교를 지적하거나 그 한계에 눈살을 찌푸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휴머니티의 해석적 ‘비틀기’라고 하더라도 원작자인 이청준 씨나 이창동 감독의 ‘문제 던지기’내지 기독교에 대한‘말 걸기’는 이미 우리 기독교에 대한 어떤 특정 이해의 옳고 그름을 넘는 시선이 묻어 있어 그 진정한 말 걸기의 자극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생산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 친밀한 우정의 시선을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그 자극을 우리 안에서 더욱 적극적인 힘으로 선용하면 될 것이다. 우리 교회도 이미 그 정도로는 충분히 성숙해져 있다고 본다. 어쨌든 물이 범람하는 홍수 속에서 정작 마실 물이 귀한 격으로 우리 교회가 구원과 치유, 사랑의 복음들이 ‘말’과 ‘기호’, 상품화의 범주에서는 과잉과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영화가 던지는 충고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으로 들리고 만져지는 진정성의 복음은 우리 안에 진짜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깨움만으로도 영화 <밀양>은 이미 우리 기독교에는 고마운 반성적 가치로 다가온다. |
2007/07/01 [15:36]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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