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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활

자유와 민권을 노래한 존 바에즈 /하늘사랑20070404

by 마리산인1324 2007.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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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4 14:30

자유와 민권을 노래한 존 바에즈

 

- Joan Baez, 1997

 
"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존 바에즈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존 바에즈는 아버지가 멕시코계라는 이유와 그녀의 갈색 피부로 인해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존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어릴 때 환경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백인들로부터 멕시코식 이름과 그리고 피부 색깔로 인해 따돌림을 당했고, 멕시칸으로부터는 스페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런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존 바에즈가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4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합창반에서 노래를 했고, 1956년엔 그녀만의 첫 기타를 구입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57년엔 간디주의 철학자인 아이라 샌드펄(Ira Sandperl)을 만나 그녀로부터 강한 정치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1958년 존 바에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데모 음반을 제작해 음반사에 보내지만 레코드 취입을 거절당하고, 아버지가 MIT와 인근의 몇 개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매사추세츠주의 벨몬트로 이사하였습니다. 보스톤 대학에 등록한 그녀는 학업보다는 자신의 뮤지션 경력을 꽃피우는 데 더 치중하였습니다. 그녀는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의 작은 클럽에서 솔로 보칼리스트로 노래했는데, 이때 인기 포크 가수 밥 깁슨(Bob Gibson)의 눈에 뜨이게 되었고, 그의 요청에 의해 1959년 7월 11일 개최된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밥 깁슨의 백업 보컬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때 존 바에즈 나이는 18세였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쏟았고, 그녀를 주목한 포크/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는 존 바에즈와 12년간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녀의 첫번째 앨범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녀의 노래에 매혹된 수많은 팬들이 그녀의 순회공연에 몰려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녀는 그녀의 삶에 있어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사회정치운동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60년대 저항운동의 주목받는 인물로 부각되었습니다. 또한 뱅가드와의 계약기간 동안 그녀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둬 8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하였습니다.

 

- Joan Baez with Bob Dylan, September 1963

19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Gerde's Folk City)에서 밥 딜런과 처음 만나 포크의 왕과 여왕은 연인이 되어 동거하기도 하였습니다만 1965년 헤어졌습니다. 그후 존 바이에즈는 평화 운동가인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와 1968년에 결혼하였지만, 이 역시 4년 후 이혼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후에 그녀가 "나에게 가장 쉬운 관계는 만 명의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가장 힘든 관계는 한 사람과의 관계다."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1955년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발생한 흑인들의 버스승차거부 운동은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간디의 비폭력노선을 추구한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존 바에즈는 1963년 3월 25만 명의 민중과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고, 이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하고, 부통령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1965년은 존 바에즈에게 그리고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그해 6월 17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면서 베트남전은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였습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의 수입 중 60%가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총탄과 포탄이 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된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그녀는 세금징수에 불복했고,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존 바에즈는 자신의 주장을 좀더 널리 알리기 위해 흑인 공민권 확대를 위한 콘서트와 반전 등 여러 현장에서 무료로 공연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1965년 이 해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연인 관계를 끝냈습니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 두 사람은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저항정신을 실천한 운동가였습니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은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인종차별, 베트남전, 세대간의 갈등 등)을 저항과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담아냈고, 삶에 대한 열의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했던 청년 문화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물론 존 바에즈에게 끼친 밥 딜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밥 딜런을 가장 중요한 포크 뮤지션으로 주목받도록 한 사람이 존 바에즈란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도록 했고, 포크 음악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서로 많은 교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프로테스탄트 포크라는 포크 음악의 순수함을 밥 딜런보다 더 오래 지켜나갔고, 포크 음악의 대중화란 측면에선 밥 딜런보다 더 많은 공로를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ack up Your Sorrows, French single, 1966

'진보'를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존 바에즈만큼 이런 진보의 정신에 충실했던 뮤지션은 드물 것입니다. 그녀의 노래는 늘 힘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졌고 그들을 각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민자들로 대표되는 사회적 소수의 정서를 노래에 담았으며, 잊혀진 그들의 권리와 상실된 권리를 찾도록 부추켰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소외받는 민중들의 위안이자 실탄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미국 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부였고, 국민 대다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습니다. 더군다나 그 전쟁은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불의의 전쟁이었습니다. 존 바에즈는 시종일관 약자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흑인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쉬지 않고 노래했고, 반전시위 현장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1968년은 프라하의 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등과 같은 세계적으로 커다란 일들이 일어났고, 그 전해에 죽은 체 게바라는 1968년의 젊은이들이 숭배한 주요 영웅들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서구의 근대합리주의 문명이 창출해낸 모든 권위에 저항하였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사회 체제들, 근대적 합리주의와 그것이 낳은 관리 사회, 인간 소외의 구조를 파시즘(전체주의)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했고, 기성 세대의 권위를 깡그리 짓밟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사회적, 성적 금기 등 모든 금기에 대해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68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던 임마뉴엘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 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둘 다 세계를 바꿔놓았다"고 말하였습니다. 

 

- Joan Baez' 1975 bestseller Diamonds & Rust

진보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엎을 것 같았던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대가 되자 세상이 돌연 잠잠해졌습니다.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3일간의 음악, 평화, 사랑의 제전'을 제창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성공은 60년대라는 시공간이 쌓아올린 금자탑이자 동시에 정점이었습니다. 그 이후엔 끝을 알 수 없는 '순수의 추락'이 이어졌습니다.

록의 혁명성과 포크의 순수를 믿었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록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었고, 포크 음악은 활로를 찾지 못해 헤매었습니다. 밥 딜런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짊어졌고, 그의 노래에선 더 이상 '우리'란 말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라는 개인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런 시기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10월 그녀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는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그녀는 뱅가드 레이블을 떠나 A&M으로 옮겨갔고, 이제 그녀의 음악형식도 뱅가드 시절의 전통 포크의 모습에서 새로운 음악스타일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A&M시절 그녀의 최대 명곡인 'Diamond & Rust'는 1972년 4월에 발매되었습니다. 1973년엔 국제인권사면위원회 엠네스티(Amnesty)의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했고, 1975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밥 딜런 등과 함께 전미투어를 했습니다. 1976년엔 자신의 자작곡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를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1977년 독재자 프랑코의 지배 아래있는 스페인을 방문해 TV 생방송 중 40여년 전부터 금지곡이었던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 Joan Baez in Charlotte, North Carolina in 2003

존 바에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무릅썼습니다. 그녀는 베트남의 하노이, 북아일랜드, 튀니지, 아르헨티나, 레바논에서 노래했고, 억울하게 구금당한 사람의 사면을 위해서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를 위해 노래했고, 캄보디아를 위해 노래했습니다. 존 바에즈는 레이건 집권 이후 더 한층 강화된 미국의 보수주의 물결 속에서도 19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을 강행했습니다.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이 모든 일을 끝까지 해냈습니다. 또한 그녀는 핵무기 제조 및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83년 유럽을 순회공연했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해 12만 명의 군중 속에서 노래해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존 바에즈는 한때 1년공연의 개런티로 10만불을 제시한 프로모터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포크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음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 글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참고하였습니다.
by 하늘사랑 | 2007-04-04 14:30 | 잡상잡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