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2007년07월05일 제667호
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07/021015000200707050667002.html
아프간 전쟁, 그 쓸쓸함에 관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소련 군인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제9중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미국에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면, 옛 소련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었다. 미군이 베트남 침공에 실패했듯이 소련도 아프간에서 실패하고 철수했다. 1979년부터 89년까지 이어졌던 아프간 침공에 소련 군인 6만2천 명이 파병됐고, 1만5천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표도르 본다르추크 감독의 러시아 영화 <제9중대>는 아프간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소비에트의 쓰라린 추억을 돌아본다.
△ <제9중대> |
어쩌면 뻔한 구성이다. 아프간으로 떠나는 군인들의 면면이 그러하다. 애인을 두고 떠나는 청년 바라비(알렉세이 차도프), 아이를 가진 아버지 스타쉬(아르티옴 미하일콥), 입대 전날 결혼한 추가이놉(이반 코코린), 군바리 체질인 고아 출신 청년 류타옙(아서 스몰랴니놉), 전쟁의 미학에 매료된 화가 지오콘다(콘스탄틴 크류콥). 소련이 아니라도 지구촌 어디의 전쟁영화에나 나올 법한 청춘들의 종합이다. 그리고 그들이 훈련소에서 만나는 광기 어린 소대장 교관 디갈로(미카일 포레첸콥)의 캐릭터도 그렇다. 물론 소대장의 무자비에는 알리바이가 따라붙는다. 전투에서 부대원이 모두 숨지고 혼자 살아남아서 정신적 상처가 깊다는, 어쩌면 고전적 알리바이다. 디갈로는 이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상부가 전쟁터로의 복귀를 또다시 거부하자 디갈로는 꽃밭에서 혼자서 울먹인다. 이 장면은 어떤 이에게 전쟁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관습적인 디갈로의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훈련소 주변에는 ‘백설공주’(일리나 랴크마노바)라 불리는 여인이 산다. <제9중대>는 역시나 관습대로 백설공주를 훈련병 절반은 거쳐가는 여성으로 묘사한다. 가련한 훈련병에 포악한 교관에 군인을 위한 여성까지, 색다른 구성은 아니다.
가련한 훈련병, 포악한 교관, 백설공주…
<제9중대>는 군인이 되는 과정과 전투를 하는 과정으로 나뉜다. 먼저 그들은 훈련소에서 함께 훈련받고, 서로 싸움질하면서 군인이 되고 전우애를 쌓는다. 그렇다고 <제9중대>가 그들이 군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당시 아프간 참전은 징집병의 의무가 아니라 징집병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참전을 피해서 다른 곳에서 복무할 기회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군대라는 남성집단 안에서 낙오로 여겨진다. 그래서 훈련의 막바지에 연대장은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지만, 전쟁터에 가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던 바라비는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이렇게 자발적 선택의 형식으로 포장되는 남성성의 압력을 <제9중대>는 놓치지 않는다.
황량한 아프간 땅에서 일그러진 얼굴
△ <제9중대> |
그렇다고 <제9중대>가 반전(反戰)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짜 ‘전쟁’영화에 가깝다. 전쟁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군인이 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러시아 영화로는 블록버스터급인 90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제9중대>에는 전투신의 스펙터클도 있다. 하지만 <제9중대>는 전쟁의 스펙터클에서 쾌감을 찾지는 않는다. 전쟁의 스펙터클도 전장에서 일그러진 병사의 얼굴을 비추기 위한 배경으로 보인다. 그리고 황량한 아프간 땅에서 도대체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저렇게 하는 것일까, 풍경은 스스로 말한다.
마침내 그들이 훈련소에서 전쟁터로 배치된다. 그들의 대부분은 ‘제9중대’에 속한다. 이제부터 노련한 전쟁터 교관인 호르호이(표도르 본다르추크)가 그들을 이끈다. 아프간에 도착한 첫날에 그들은 비행기 폭파 사고를 목격하고 경험한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공포를 떨치며 전장의 군인이 돼간다. 가장 소심해 보였던 전투병이 처음으로 적군을 살해한다. 그들이 치르는 전투는 장엄한 스펙터클이 아니라 칼로 찌르고 총으로 때리는 육박전에 가깝다. 때때로 시위대처럼 무자헤딘 군인들이 몰려들고, 그들을 향해서 반격하는 소비에트 군대도 시위대를 진압하는 군인처럼 보인다. 이렇게 가깝게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육박전의 분위기는 전투를 더욱 저열한 무언가로 보이게 만든다. 마치 러시아 사실주의 영화의 군중신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렇게 ‘진짜’ 혹은 ‘생짜’ 전쟁영화 <제9중대>는 전투를 치열하게 묘사한다. 영웅이 아니라 인간이 보이는 전투신은 결과적으로 전쟁을 처참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당연히 그들의 전우애는 전투를 거치며 단단해지지만, 드디어 전우들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마을에서는 차를 대접하다가도 마을을 벗어나면 등에 대고 총을 쏜다”던 훈련소 교관의 ‘예언’대로, 스타쉬는 마을에 수색을 나갔다가 10대의 아프간 소년이 쏜 총에 맞아 숨진다. 그렇다고 소비에트 군대가 피해자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스타쉬가 숨진 아프간 마을은 공중폭격으로 초토화된다. 피투성이로 숨진 스타쉬를 안고서 전우들이 흐느끼는 뒤로 무자비하게 폭격당하는 마을이 보인다. 이 장면은 <제9중대>의 정서와 묘사 방식을 압축한다. <제9중대>는 시종일관 철저하게 소비에트 병영에 집중하고 소비에트 군인들의 얼굴에 집착하지만, 소비에트의 명분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클로즈업은 생생한 고통을 전시한다. 마치 풍경처럼 보이는 아프간 사람들의 무표정은 풍경의 상처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쪽이든 저쪽이든 전쟁의 명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전쟁에서 단지 처절함만 남는다.
“전쟁에 관한 메이저 영화를 원했다”
단지 구호로 말하는 전쟁의 명분이 나온다. 소비에트 군대의 아프간 참전의 명분을 병사들은 구호로 외친다. “국제적 의무를 다해 아프간 형제들을 도와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라고 기계처럼 외치는 병사들의 구호는 전쟁의 명분이 허위임을 방증한다. ‘제국주의’라는 말과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원래는 반대의 뜻이지만, 현실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같은 의미, 같은 의도의 단어로 쓰였음이 새삼 확인된다. 그래도 이렇게 <제9중대>는 이제는 사라진 소비에트 군대의 풍경을 엿보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표도르 본다추르크 감독은 “나는 전쟁에 관한, 그리고 내가 겪어온 세대에 관한 거대한 스케일의 메이저 영화를 원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세대가 <풀 메탈 재킷> 같은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아야 했듯이, 러시아의 아프간전 세대도 그러했을 것이다. <제9중대>는 그들의 상실감을 말한다. 그것은 결국 버려진 군인들이 이야기다. 영화의 막바지에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나오면 새삼 놀랍다. <제9중대>는 전쟁이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무섭게 속삭인다. 7월12일 개봉.
'삶의 이야기 >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양> 비평(김진호 070613) (0) | 2007.07.07 |
---|---|
영화 <밀양>, 기독교에 고마운 반성적 가치로 다가와(뉴스파워 070701) (0) | 2007.07.07 |
자유와 민권을 노래한 존 바에즈 /하늘사랑20070404 (0) | 2007.05.04 |
노 대통령을 대놓고 그린 영화 ‘이장과 군수’ (데일리서프라이즈 070405) (0) | 2007.04.05 |
후륜구동이 눈길에 취약한 이유 (0) | 2007.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