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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활

<밀양> 비평(김진호 070613)

by 마리산인1324 2007. 7. 7.

 

<FILM 2.0>

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4558

 

 

왜 교회는 그녀의 고통을 읽지 못할까
<밀양> 비평
2007.06.13 / 김진호(목사) 

<밀양>은 전도연의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으로 화제에 올랐지만 개봉 후 종교적인 논쟁을 낳기도 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김진호 목사가 종교인의 시각에서 <밀양>의 신앙문제를 짚어본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어떤 이의 고통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처절한 절망 한가운데서 존재가 산산이 부서진 이에게 신앙이 어떠한 의미도 될 수 없는 상황. 대개 그런 상황에 처한 이들은 육체에 대한 조절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을 표현할 언어의 붕괴를 체감한다. 아픔을 묘사하는 언어의 붕괴는 종종 자학으로 나타난다. 잠을 못 자고 식사를 못 하고 때론 자해를 한다. 느닷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과장되게 웃기도 한다. 감정의 굴곡이 격변하는 가운데 종교적 수단에 의지하기도 한다. 자신을 치유해보려 애써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들이 목회자를 찾는다.

대개는 가까운 누군가가 신앙을 권고한 결과다. 이 기독교적 신앙의 ‘특효약’이 회자되는 것은 놀랍게도 그것에 효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효험을 본 이들은 대개 평범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통의 순간 사람들은 아픔을 표현하는 몸짓과 소리를 낸다. 그리고 고통이 예감된 상황에서는 그것을 회피한다. 한데 다가온 고통이 기억하기에 너무 벅찰 정도로 큰 경우가 있다. 이 극도의 고통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대략 두 가지 양식을 갖는다. 고통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는 것과 무의식에 저장되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사회적 증오’다. 가령, 남한사회에서 한국전쟁의 끔찍한 기억은 ‘빨갱이’에 대한 증오로 치환됐다. 기독교 초기, 1세기 말에 이르러 예수의 죽임 당함의 기억이 로마제국이라는 막강한 권력에 대한 반감으로 표현되는 대신에 배신자가 된 한 사람에 대한 증오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물론 좀 더 어려운 방식이지만, 증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치환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치환은 효능이 탁월하다. 한편 무의식에 저장된 공포는 기억에선 삭제된 듯하지만, 다른 형태로 변형돼 몸과 정신을 훼손시킨다. 히스테리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 의학이 정신적 질환으로 분류한 일부 질병들은 이 두 번째 양식과 관련이 있다.



나는 위에서 말한 ‘평범한 감수성’을 첫 번째 양식에 따라 고통을 대하는 태도로 이해한다. 하여 그런 이들에게 기독교적 신앙은 효능이 매우 탁월한 특효약이 되곤 한다. <밀양>의 납치살해범 박도섭이나 원작인 <벌레이야기>의 김도섭은 그런 상투적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토록 빠르게 회심할 수 있었고, 그토록 편안한 얼굴로 피해자를 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심지어 피해자를 위해 도리어 신의 사면을 간청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소한’ 죄보다 더욱 ‘근원적인’ 신 앞에서의 죄에 대해 사면을 간청하는 메시아적 중개의 소임으로 자신의 죄의식을 치환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 신애에게서 나는 신앙의 무력감을 체감케 했던 이들을 떠올려야 했다. 일천한 경험이지만, 나에게도 몇 명의 ‘신애’가 구원을 갈구하며 다가왔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나의 신앙은 이들에게 무능력했다. 구원은커녕 어떠한 위안도 주지 못했고, 다시는 신앙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했다. 이들에게 신앙은 특효약이 아니라 독약에 가깝다.

너무 단순한 계보지만, 위에서 말한 고통을 대하는 두 번째 양식에 친화적인 사람들, 예외적인 감수성의 존재들과 이들을 나는 연계시켜 이해한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어떤 고통을 다른 이들, 평범한 감수성의 사람들보다 더욱 심각하게 체현해낸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나 대구지하철 화재사건처럼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에서 많은 이들은 그 사건의 기억을 어느 정도 상대화할 수 있었으나 소수의 사람들은 몸과 정신이 훼손된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사건 직후엔 외상의 징후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경우도 있다. 고통의 감수성이 예사스럽지 않은 이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한계의식, <밀양>에 대한 나의 관심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돼 있다. 아니, 나아가 기독교 신앙이 고통에 대한 사회적 상투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됐다는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다가왔다.

<밀양>에서 기독교는 악의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른바 기독교 시청집회들이나 사학법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서 보였던 이미지에 비해 이 영화의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도 양식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도 말했지만, 영화 속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투적 태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주요 소재로 나오는 것은 그러한 상투성의 전형을 교회가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벌레이야기>보다 <밀양>에서 기독교도는 ‘교양 있는 시민’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교회는 교양 있는 시민사회의 상징이다. 반면 신애에게 '구원의 볕'은 교양 있는 시민사회의 상투적인 구원담론이 아니라 속물스런 종찬의 그림자 같은 관심 속에 있었다. 1985년 군부독재의 야만성이 적나라하던 시절의 <벌레이야기>와,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이른바 ‘교양 있는 시민들’의 은폐된 야만성이 문제적인 2007년의 <밀양>에는 바로 이런 차이가 있다. <밀양>의 기독교도들은 교양 있는 시민을, 상처 입은 여인을 상투적으로 대하는 무미건조한 깨끗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종찬의 볕은 시민적 교양의 시선에서 속물스러움으로 은폐되었기에 ‘비밀의 볕’, 곧 서울이 아닌 시골도시 ‘밀양(密陽)’인 셈인 것이다.



나는 교양 있는 시민사회의 한 상징으로서 기독교를 보여주는 몇 년 전의 한 사건을 회상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개최한 회개기도회(2005.4.8)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 세 사람이 역사 앞에 기독교의 죄책을 고백했다. 그 몇 년 전에 요한 바오로 2세도 지난 2천 년간 천주교회가 저지른 죄들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미사를 집전한 바 있다(2000.3.12). 또 그 어간 한국 천주교회도 이 땅에서 자행한 잘못에 대한 사죄의 고백을 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이러한 역사적 사죄는 드디어 교회가 교양 있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했다는 사회적 표시로 해석됐다. 한데 목사들의 회개기도회가 열리던 바로 그 시절은 일본의 우익이 주도한 역사교과서 사태로 꽤나 시끄러웠다. 한국 사람이라면 일본 지도자들의 역사에 대한 태도가 그토록 완강하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왜 두 영역의 지도자들은 속죄에 대해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일본 사회에서 엘리트가 된다는 것과 기독교에서 엘리트가 된다는 것 사이에는 ‘사죄’에 대한 매우 다른 감각의 제도화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내게 일본에 대해 상세히 말할 지식은 없지만, 기독교의 경우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기독교는 역사 앞의 죄책을 신 앞에서 사죄하는 습성을 제도화했다. 그것은 사람에게 용서를 비는 과정이 생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 앞의 사죄는 주로 의전(儀典)을 통해 수행된다. 의전은 미리 약속된 방식으로 소통을 조직하는 양식이다. 그러므로 의전 당사자는 약속된 방식으로만 행동하도록 강요된다. 의전 속에서, 인간은 신 앞에 속죄를 표현하고 신은 사면하는 식으로 대화한다. 신 앞에 속죄하지 않는 존재가 신자일 수 없듯이, 사면하지 않는 신도 신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사면을 제도화했다. 피해자의 분노를 거칠 필요도 없고, 그러한 감정소비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도들에게 속죄는 손쉬운 행동이며, 피해 당사자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신을 위한 충성을 의전 속에서 보이기만 하면 속죄는 실체화되는 것이다.

기독교도들의 속죄는 이렇게 커피 한 잔과 같다. 어느 차보다도 손쉽게 먹을 수 있고, 어느 차보다도 자극적인, 그런 식의 가벼운 속죄 감각이다. 한데 이는 교양 있는 시민사회의 속성과 잘 부합된다. 과거 국가는 범죄에 대해 야만적인 처벌을 제도화했다. 반면 시민사회는 그러한 야만성을 제거한, 교양 있는 사회를 구축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점에서 시민사회의 교양을 가장 체계적이고 손쉬운 것으로 상품화한 장본인이다. 하여 속죄한 범죄자는 처절한 죄책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시민사회의 교양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사면 행위를 조직화하도록 유도된다.

한데 <밀양>의 신애는 이러한 신의 용서에 항의한다. 내가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고. 이는 교양 있는 시민사회가 제도화한 상투적 속죄 체계에 대한 이의이기도 하다. 사회적 죄에 대한 야만적 처벌을 최소화하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하려는 시민사회적 교양이 상처받은 이, 그 상처를 손쉽게 다른 것으로 치환하지 못하는, 하여 몸과 정신이 훼손된 이들과의 대화를 생략한 채 구축한 사면제도에 대한 저항이다. 교양 있는 시민사회적 제도의 은폐된 영역, 폭력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사회적 처리의 미학에 치중했던 속죄의 제도화에 대한 항거인 것이다.

나는 기독교가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이런 주류 시민사회의 방식을 따르고 보다 손쉽게 선도했던 것에 문제의식을 느낀다. 고통당하는 저 잊힌 하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이의 언어를 더욱 봉쇄하는 데에 치중했던 것에 문제를 느낀다. <밀양>은 그러한 고통 망각의 체계를 지적하는 영화로서 내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