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7-01-18 오후 08: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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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21세기 창조적 파괴자 | |
동구권 몰락뒤 새롭게 부활 아나키스트 1세대 되짚으며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재조명 | |
손준현 기자 | |
지난해
경남 함양군 안의면은 한국 아나키즘의 성지다. 반골의 땅인 이곳에서 일제와 싸우다 스러져간 수많은 아나키스트가 태어났을 뿐 아니라 1946년 전국아나키스트회의가 열렸다. 세계 아나키스트운동의 한 순금부분인 스페인혁명 때 아나키스트의 저항과 비극, 인간적 승리를 그린 영화 <랜드 앤드 프리덤> (켄 로치 감독, 1995)의 제목을 따와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왜 지금 아나키즘인가? 지은이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 진영 사이에서 억압받아왔던 한국아나키즘의 신원(伸寃)운동을 벌이는 한편 21세기에 걸맞은 사회운동, 또 다른 대안사회를 꿈꾸는 자유와 해방의 전사로서 아나키스트를 그려낸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라는 번역어처럼 정부를 없애자고 하는가? 철학자이며 아나키스트인 하기락은 답한다. “아나키스트가 거부하는 것은 강권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부다. 그러나 민중 자신의 자치적 질서를 방위하기 위한 민중 자신의 권력기관을 반드시 배제하지는 않는다.” 박홍규는 <아나키즘 이야기>(이학사, 2004)에서 “나는 아나키스트란 자각도 없다. 이 나라는 국가주의가 과도하게 자유와 자연을 제한하고 있어 이를 완화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생각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아나키스트는 강권을 거부하고 자치 자율을 추구하는 자, 곧 창조적 파괴자다.
세수할 때도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는 신채호는 과연 일제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일까. 지은이는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창조적 결합에 주목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 우리민족이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길로 가야한다는 그의 혜안을 높이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해방공간에서 제3의 길로서의 아나키즘 정치를 펼친 유림에 대해 주목한다. 그는 서구적 무정부의 원칙을 과감히 깨고 독립노농당을 만들어 자율정부 수립을 추구했다. 유자명은 혁명적 테러리스트의 삶과 농업교육 및 임시정부 참여라는 건설적 삶을 동시에 추구한 글자 그대로 창조적 파괴자였다.
야마다 쇼지가 지은 <가네코 후미코>(정선태 옮김, 2003)에는 그의 아내이자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에 대해 “너무도 뜻이 높아/동지들에게마저 오해를 산 니힐리스트B/적이든 우리 편이든 웃을 테면 웃어라/나 기꺼이 사랑에 죽으리”라고 한 대목이 있다. 적수공권의 식민지 지식인이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를 떨치고 어떻게 세계주의로 나아가는지 박열은 온몸으로 보여준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뜻. 박열은 불령선인이란 이름의 잡지를 펴내 일제의 비열한 용어사용과 강권을 조롱했다.
신채호. 유자명, 이회영, 박열, 유림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의 아나키즘은 해방 이후에도 활발히 전개되지만, 이승만 독재와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 점차 활력을 잃고 명맥만 유지하다가 1980년대 후반 민주화투쟁이 성공을 거두고, 소련 및 동유럽권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새롭게 부활했다. 한국 아나키즘의 1세대의 마지막이자 2세대의 정신적 대부가 바로 하기락이다. 개인적으로는 80년대 대학에서 군사독재를 비판하던 하기락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아나키스트 대신에 ‘자주인’이라는 표현을 쓰며, 단군사상 등 고대 사상으로부터 한국 아나키즘의 원류를 찾는다.
그동안 한국에서 아나키스트운동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적 적실성이 부족했기 때문 이라기보다는 식민지시대에는 코민테른(소련)에 맞섰기 때문이며, 해방 뒤에는 미국이라는 강권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를 맞아 세계 도처에서 아나키즘이 부활하고 있다. 에코아나키즘은 생태파괴의 원천을 국가체제의 폭력성에서 찾고, 반전반핵을 주창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한다. 아나르코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지배와 성적 차별이 억압적 국가체제와 함께 제도화했다고 보고, 진정한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억압적 국가체제의 재편성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지은이가 보는 21세기의 아나키스트는 또 다른 대안사회를 꿈꾸는 자유와 해방의 전사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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