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국가관
이호룡
머리말
1. 민족전선론하에서의 국가관의 변화
1) 타도대상으로서의 국가
2) 국가관의 변화
2.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독립국가건설론
1) 자율적 기관으로서의 국가
2) 독립국가상
맺음말
머리말
우리 민족의 근현대 사상계는 좌우 대립으로만 점철되어 온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 우리 민족의 사상계가 좌우 대립으로만 점철되어 온 것은 아니다. 우익의 자유민주주의와 좌익의 공산주의 이외에도 아나키즘․삼균주의․신민족주의․사회민주주의 등 여러 사상들이 존재했다. 특히 아나키즘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제3의 사상으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1946년 이후 우리 민족의 사상계는 신탁통치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좌우 대립의 장으로 변했다. 그러한 가운데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우익 진영으로 편제되었고, 제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 결국 아나키즘은 제3의 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사상계에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극단적인 대립만이 남고 제3의 사상이 발붙일 공간은 사라졌다.
해방 공간에서 제3의 사상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 원인은 무엇인가? 외적으로는 냉전체제 속에서 양자택일적인 사고가 강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3의 사상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적 요인도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의 국가관을 살펴봄으로써 그 내적 요인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21세기는 통일의 세기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어느 일방에 의한 흡수통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또다시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불행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통일 이후 우리 민족을 이끌어갈 사상은 무엇일까? 흡수통일이 전제되지 않는 한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닌 좌우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제3의 사상이어야 할 것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는 제3의 사상을 창조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1. 민족전선론하에서의 국가관의 변화
1) 타도대상으로서의 국가
한국인들은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반제국주의 사고체계로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즉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이 수용되었던 것이다. 아나키즘은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이념으로서 민족주의․공산주의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했으며, 이 측면에서 아나키즘은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지만, 민족국가 수립을 목표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것은 “민중을 마음대로 착취․압박하다가 결국 日本帝國에게 이 토지를 빼앗긴 그 帝王을 다시 造出”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전 민중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자본가계급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전 민중을 재차 기아에 빠뜨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1) 그들은 민중들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민족해방 뒤 ― 인용자) 어떤 新統治階級이 다시 착취의 뿌리를 조선 민중 안에 심으려고 하는 것을 배격”했다.2) 즉 한국 민족을 억압하고 있는 식민지 권력을 타도하고, 한국 민족을 해방시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3) 또 하나의 억압기구일 수밖에 없는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반식민지 상황에서 가장 억압적인 기구가 바로 식민지 권력이었으므로 아나키스트들에게 일차적 타도대상은 바로 식민지 권력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느 아나키스트는 “전 세계를 자본주의와 지배계급의 掌中에서 완전무결히 탈환”하고, “악마의 현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 ― 인용자)”할 것을 주장했다. 나아가 國境間의 境界標抹을 없앨 것을 주장하며 조국을 부정했다.4)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면서도 민족국가 건설에 대해서는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나키즘이 모든 强權에 반대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절대적 자유 실현을 저해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고 사회제도요 국가인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국가를 국민에 대한 지배권력과 인민의 착취를 보장하기 위해 지배계급 상호간에 맺어진 보험회사와 같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했다. 바쿠닌에 의하면 국가 또는 정부에서 파생되는 권력은 역사발전의 필연이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필요악이므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5) 즉 아나키스트들에게 국가란 최고의 강권 조직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萬惡의 근원일 뿐이며, 지배계급이 민중을 억압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지배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권력과 모든 사회제도․국가를 타파하고, 개인의 자유의지의 연합에 의해 운영되는 무권력․무지배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에게도 국가와 정부는 민중을 억압․착취하는 기구에 불과했다. 즉 모든 정부는 “소수 强者가 극대 다수의 민중을 압박하는 공구이며 인간의 互相友愛를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6) 우선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강권을 부정했다. 강권주의자들은 지배가 없다면 인간은 재차 야만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지만, 인류는 몇 천년 몇 백년 간 전제와 强迫에도 불구하고 그 心底에 흐르는 상호부조적, 창조적, 자주적 정신으로 생활을 영위해 왔다는 것이다.7) 그들은 인간 본능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는 無强權․無支配의 사회이며, 强權이 지배하는 한 영원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8) 그리하여 권력을 인간본능을 말살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으로 규정했으며, 그러한 권력을 파괴할 것을 주장했다.
권력에 대한 부정은 곧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인 국가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있어 국가는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마음대로 착취하기 위해 건립한 기구에 불과할 뿐이며, 민중의 血과 肉을 박탈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유산계급은 법률과 감옥과 군대를 만들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며,9) 그들에 의해 행해지는 교육․군사 기타 등 일체는 대다수 민중을 착취하기 위한 행사에 불과할 뿐이었다.10) 그리하여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강령을 통해서 국가를 폐지할 것을 역설하였다.11)
국가를 부정하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했으며, 민족주의자들을 봉건지배계급을 대신하고자 하는 권력욕․지배욕의 化身이라고 비판했다. ≪黑色新聞≫은 민족주의운동이 지니고 있는 반동성을 근본모순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우리는 우리 입장에 입각하여 민족주의운동의 내재적 근본모순을 분절 구명하고자 한다. 식민지 혹은 약소민족의 해방은 결코 애국적 민족주의운동으로는 성취하지 못할 것은 이론과 사실이 증명한다. 異族의 통치와 민족적 모멸 내지 사회적 불평에 대한 민중의 반항성을 逆用하여 민족이니 독립국가이니 하는 美名으로 민중의 정의와 자유를 탈환하기 위한 정당한 반역운동을 마비시키고 自家의 지배적 착취적 권력확립을 기도하는 민족주의혁명은 벌써 민중의 거부 내지 배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異族의 통치를 倒潰하고 自族 일부의 지배적 권력을 수립하는 것은 즉 민중의 착취적 주인의 지위를 교대하는 것뿐이고 민중 자신은 의연히 노예와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계급적 민족적 二重 압제를 받는 식민지혁명운동은 민족주의적 기조를 철저히 방기하고 최초 민족적 불평과 민족적 의식과 투쟁에까지 발전하면서 있다.12)
위의 글에 의하면 민족주의운동은 민족주의자들이 식민지 권력에 대한 민중들의 반항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우고자 하는 운동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 운동에 의해서는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즉 민족주의운동이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지배적 착취적 권력확립을 위한 운동에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지배적 착취적 야망을 가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지도에 의하여 민족해방이 이루어졌을 경우, 비록 일제의 지배에서는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일본제국주의자를 대신하여 신흥 지배계급 즉 자본가계급이 나타나 민중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족국가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으로서, 민중이 지배계급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국가의 존재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국가관 비판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나코코뮤니스트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즉 건강한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老幼病者는 일하지 않고도 필요에 따라 취하며, 상호부조와 공동연대의 책임 하에 同生共樂을 추구하는 것을 아나키즘의 근본원리로 규정하고,13) 그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이 민족해방 이후 새로이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조선 민중이 조선에 건설하려는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病根, 사유재산, 국가정부의 조직 및 僞道德을 완전히 파괴한 후에 비로소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은 누구라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각 개인이 자기의 필요에 應하여 취하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일하는 絶體(對? ― 인용자)的 공산사회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금전의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농업과 공업을 과학적으로 종합하여 가장 유리하게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농촌의 형식을 가진 도시, 또한 도시처럼 편리한 농촌이 각각 자유로이 연합하는 것이 가능한 지구상의 예술적 사회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각인이 자유의지로써 선택한 사회를 만들고 또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런 까닭에 智能勞動과 근육노동의 구별이 없게 되고, 각인이 마음대로 그 개성을 신장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어느 누구도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된다. (중략) 이와 같이 新社會에서는 종래와 같이 僞道德의 압박을 받아 부모만이 아무런 의식 없이 소년소녀를 결합시키는 결혼제도는 당연히 소멸될 것이다.14)
위의 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南華韓人靑年聯盟이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는 사유재산제도․국가조직․도덕과 종교․가족제도 등이 소멸되고, 각 개인은 자신의 본능적 욕구와 자유의사에 따라 생활하며, 各盡所能 各取所需의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아나코코뮤니스트 사회였다. 在中國朝鮮無政府共産主義者聯盟이 건설하고자 한 사회도 국가를 비롯한 일체의 집권적 조직, 사유재산제도, 종교, 결혼제도―가족제도가 폐지되고, 산업적 집중이 없어지고 공업과 농업의 병합 즉 산업의 지방적 분산이 실행되며, 공산주의가 실행되는 사회였다.15)
아나코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국가제도가 폐지되는 대신 코뮨을 단위로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변혁된다.16) 그리고 사유재산제도가 철폐되는 대신 공산제가 실시되는데, 이 “공산제는 자본을 정부로 집중하는 집산주의 맑스의 간판적 공산주의―政府御用의 공산주의―强權的 공산주의가 아니라 정부가 없는 생산단체 자치의 자유공산주의―무정부공산주의”로서,17) 모든 재화는 국가 소유가 아니라 단위 조직인 코뮨의 공동소유로 된다. 공업과 도시만이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혁”되어,18) 도시와 농촌, 공업과 농업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균형 있게 발달한다.
2) 국가관의 변화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자,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운동을 불신하던19) 아나키스트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적 통일전선을, 일본과 대항한다는 명분 하에 국내 자본계급과 타협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영원히 거절한다고 하여,20) 연합전선을 결성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신간회를 타도하고자 하였다.21) 在日本 한국인 아나키스트들도 신간회 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신간회 파괴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6년 2월 스페인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고, 1936년 6월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되자,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그 영향하에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였다.22) 거기에다가 1936년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군국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한국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한국 민족은 存亡의 위기에 처했다. 이에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일제와의 전면적인 전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아나키즘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하던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1936년 후반부터 민족전선 결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23)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南華通訊≫을 통해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자유평등을 탈환하고 萬人共榮의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도 먼저 최대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운동도 전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민전선 혹은 민족전선이 현실에 가장 적합한 투쟁방식이라고 단정하였다.24) 各黨, 各派, 各階級을 단결시켜 광범한 대중적 기초 위에 결성된 민족전선만이 민족해방운동의 진로를 타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5)
민족전선론은 한국혁명의 성격을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압박과 경제착취의 雙重苦痛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하는 혁명 즉 민족혁명으로 규정하였다.26) 민족혁명은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전선론 하에서 민족주의나 공산주의와의 연합을 거부하고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던 종래의 입장에서 벗어나 국가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와 국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민족전선론의 단계혁명론적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즉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전선론은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와의 연합하에 모든 힘을 항일전쟁에 집중하여 일차적으로 민족해방을 달성하는 것을 당면 최고목표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후 건설되는 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스트사회 건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柳林은 “각자의 주의․주장을 일시 보류하고, 덮어놓고 일치단결하여 독립이란 산을 넘은 후에 다시 각자의 주의를 위하여 매진”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에게는 1차적으로 민족혁명을 완수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민족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무조건 단결해야 했다. 그것은 한국 민족이 독립을 달성하고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임시정부가 3․1운동을 통해서 탄생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요 근거인 것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27) 이러한 단계혁명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한 국가와 정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전선론하에서 조선혁명자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민족해방을 지상 목표로 항일전쟁을 전개했으며, 한국임시정부에도 참가했다.
변화된 정부․국가관은 조선혁명자연맹이 제시한 17개조의 민족전선 행동강령 초안28)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강령 초안이 ① 근로민중을 기본대오로 삼는다는 것, ② 독재정치를 거부하고 전민족적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것, ③ 경제기구의 독점권을 廢除하고 만인평등의 경제제도를 건설한다는 것, ④ 일제 소유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의 공동경영제도를 설립한다는 것, ⑤ 의무노동제를 건립한다는 것, ⑥ 공업의 도시집중을 방지하고 농촌의 공업화․기계화에 注重한다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점에서 조선혁명자연맹이 아나키즘적 입장에서 민족전선을 결성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강령 초안은 民族陣線을 구성하는 각 단체는 혁명공작에서 步驟의 일치와 국호의 통일을 요구한다고 하여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民族陣線은 반일투쟁기의 전략적 결합일 뿐 아니라 장래의 건설시기에서도 협동 노력해야 한다고 하여, 民族陣線을 정권기구로 설정하고 있으며, 정권에의 참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朝鮮革命者聯盟이 정부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29)
단계혁명론적 입장에서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그 정부는 강압적이고 국민을 지배하는 强權的인 기구는 아니었다. 즉 朝鮮革命者聯盟이 완수하고자 했던 한국혁명은 “가장 광범한 민주주의제도를 건립”하는 것이었고, 가장 광범한 민주주의제도란 “이미 자산계급의 민주가 아니고 또한 무산계급의 독재도 아니”었으며, “공산주의자의 민주공화국 구호와 서로 부합”하는 것이었던 것이다.30) 柳林이 구상했던 정부도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부가 아니고 혁명의정원과 혁명정부”였으며,31) “독립을 달성하고 삼천리 강산에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기 위한 근거로서의 정부였다.32)
그리고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限時的인 것이었다. 즉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 사회의 건설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단계혁명론적 입장에서 우선 민족혁명을 통해 한국 민족을 해방시킨 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혁명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민족전선연맹에의 참여
변화된 정부․국가관 하에서 在中國 한국인 아나키스트들 중 일부가 한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즉 柳林과 柳子明이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과 朝鮮革命者聯盟의 대표로서 한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柳林은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선전위원회 위원․建國綱領修改委員會 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 외에 歐陽軍은 광복군총사령부 서무과 과원으로 활동했으며,33) 安偶生은 主席辦公秘書 겸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34)
그러나 민족혁명을 당명의 목표로 설정하고 그를 위해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와 연합하면서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아나키즘 본령에서의 일탈이었고, 그 일탈은 결국 아나키즘으로 하여금 제3의 사상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연합전선 속에서 사상적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민족혁명 그 자체에 매몰되어버림으로써 민족주의와의 차별성이 별로 부각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항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직했던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차지한 역할이 상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군대나 임시정부 내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결과 아나키스트 세력은 민족주의 진영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한 사례는 없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2.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독립국가건설론
1) 자율적 기관35)으로서의 국가
1936년 이후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민족전선론이 대두하면서 변하기 시작한 정부․국가관은 1945년 해방이 되어 건설의 시기가 오자 완전히 달라졌다.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정부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나아가 아나키즘의 정의까지 수정했다. 즉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던 柳林은 1945년 12월 5일 귀국회견에서 “무정부주의자인가?”라는 신문기자의 질문에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이란 희랍말을 일본인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모양이지만, ‘안’은 無요 ‘아키’는 머리니, 强權이나 전제를 배격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强權을 절대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요 무정부주의가 아니요”라고 답변했던 것이다.36) 유림의 이 말은 아나키즘은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즉 아나키즘은 강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에 대해서 반대할 뿐이며, 정부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柳林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가 아닌, 一民族의 자유와 평화는 물론 전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우애를 목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로 규정했다.37)
朴烈 또한 자신이 무정부주의자임을 부정했다. 즉 1949년 8월 9일 신문기자와의 대구회견에서 자신이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는 신문보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신문기자의 질문에 자신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이다.38) 朴烈이 무정부주의자임을 부정한 것은 아나키스트임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정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즉 强權的인 정부에 반대할 뿐 모든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신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정부나 국가의 존재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독립국가 건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공론화하였다. 1946년 2월 21~22일 부산 金剛寺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자경남북대회39)는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의제 등에 대해 토의했으며,40) 1946년 4월 20~23일 안의에서 개최된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41)에서도 “정부수립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원칙”이라는 의제 등에 대해 토의했다.42) 이러한 사실들은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부와 국가의 수립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43)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국가관은 자주적 민주국가 수립을 일차 목표로 설정하는 단계혁명론적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즉 일차적으로 전 민족이 힘을 하나로 합쳐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민족혁명을 달성해야 하며, 민족혁명을 통해 민주정치를 달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단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44)과 독립노농당45)은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방법론을 둘러싸고는 다소 견해 차이를 보였으나, 혁명론이나 정부․국가관, 그리고 사회구상 등에서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두 그룹 모두 1930년대 후반 이후 나타났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탈아나키즘적 경향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오히려 그러한 경향을 확대재생산했다.
해방 이후의 아나키스트들이 한국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으로 규정한 것은, 1945년 8월 15일의 한국 해방을 불완전 해방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15일의 한국 민족해방은 한국인의 손에 의해 쟁취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일본제국주의가 물러감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연합국에 의해 해방되었던 사실은 당시 거의 모든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과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조선공산당조차 주한미군을 해방군으로 규정하고, ‘미군정에의 협력 방침’ 아래 미군정에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한국 해방에 대해 달리 생각했다. 즉 한국이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해방이 됨으로써, 한국 민족은 계속해서 미국과 소련의 통치하에 놓여 있는 것이며, 따라서 한국 해방은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점령군으로서 남한을 통치하고 있는 미군정으로부터 한국 민족의 자주성을 쟁취할 것을 역설했다.
아나키스트들의 한국 해방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자. 우선 아나키스트들은 한국 해방은 한국인 스스로의 힘이 아닌 연합국에 의한 것으로 인식했다. 조선농촌자치연맹46)은 한국 해방이 他力에 의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왜놈들은 ― 인용자) 팔월 보름이 되자 그 기세 그 호기가 삽시간에 다 어디로 가고 그만 여지없이 망하고 말았다고 야단이 났습니다. 영국, 미국, 중국 여러 나라에다 그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중략) 왜놈이 망하여 넘어지는 바람에 우리 조선은 독립이 되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렇게 싸워 오는 것이 비록 왜놈을 우리 힘으로 쳐 없애지 못하였을 망정 이번에 영국, 미국, 러시아, 중국, 여러 나라가 왜놈과 싸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47)
위의 <조선농촌자치연맹선언강령해설>은 한국 민족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한국 민족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한국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이 한 역할은 연합국의 승리에 도움을 준 것에 그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미군과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지 않고 일본군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점령한 점령군으로 인식했다. 즉 1946년 4월 20~23일 경남 안의에서 개최된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는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통치 하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는 “현재의 긴급한 정세 하에 조선 민족은 자주적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조속히 미․소 兩軍政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 “당면의 행동방침”을 결정했다.48)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지배하에 있다는 인식은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로 하여금 한국 해방을 불완전한 해방으로 규정하게 만들었으며,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한국 해방의 불완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싸움은 아직 계속이다. 정면의 적(일본제국주의 ― 인용자)은 패망되었다 하더라도, 아직도 국제신탁 운운의 暗影이 떠돌고 있으며, 겸하여 우리 내부의 양 측면의 적(일본제국주의와 야합한 봉건적 토착자본주의자와 사이비 반혁명적 독재주의자 ― 인용자)은 오히려 그 기세가 앙등되는 형편이 아니냐. 완전 해방은 아직도 幾多의 혈투가 연상되고 민족적 완전한 건설은 장구한 시간의 노력을 요구한다. 이에서 우리는 時勢를 靜觀하면서 단결을 굳게 하여 가지고 총진군을 개시하자. 우리 선열의 뿌린 피가 우리의 혈관에서 맥동하면서 그 피의 산 경험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49)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위 <선언>에서 한국이 비록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만,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았고, 일제와 야합한 반봉건세력이 여전히 건재하여 기세를 부리고 있다면서, 한국의 해방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이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외세 및 반봉건 세력과 수많은 혈투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미국과 소련의 통치계급은 결코 한국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며, 그렇게 믿는 것은 중대 과오라고 하면서, “지금은 조선 사람 자신이 본격적으로 투쟁하여 우리의 해방, 우리의 자주독립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될 시기”라고 역설했다.50) 한국 민족이 해결해야 할 제1차 과제는 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하고, 한국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불완전한 해방으로 인식함에 따라, 한국 민족은 우선 민족혁명부터 완수해야 한다는 단계혁명론적 입장을 고수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혁명을 완수하여 미국과 소련의 지배로부터 한국 민족을 완전히 해방시키고 자주적 민주국가를 건설할 주체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정했다. 즉 앞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臨政法統論을 주장했던 것이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1945년 12월 20~21일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시국수습대책을 논의하였는데, 그 대회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 근거는 임시정부가 “3․1운동 이후 조선혁명운동의 가장 옳은 길을 걸어 온 정통파”이고, “현재에 있어 사상적으로만 아니라 사실상으로 혁명적 사상의 3세력의 합동”이라는 것이었다.51) 독립노농당 또한 임정법통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좌우합작에 대해서 반대하였는데,52) 그것은 좌우합작이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의 임정법통론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3․1운동을 통해서 탄생한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이라는53) 데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아나키스트들이 자율적 기관으로서의 국가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국가관하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강권적이지 않은 정부나 국가의 존재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임시정부만이 강제권력에 의한 강압적인 정부가 아닌 민중들이 자율적으로 조직한 정부로서 독립국가 건설의 주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임정법통론을 내세우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새로운 독립국가의 정부로 추대하고자 하는 임정봉대운동을 전개하였다. 李乙奎․李丁奎 등이 曺成渙․鄭寅普․兪昌濬․安鎬瀯․柳正烈과 함께 발족한 한국혁명위원회는 1947년 3월 1일 독립선언기념대회 식장에서 임시정부 奉戴를 결의하여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梁熙錫․梁一東․李圭虎(李圭昌)․趙漢應, 金亨潤, 金芝江, 申鉉商 등도 이에 동조하기로 하였다.54) 이어 李乙奎는 1947년 3월 3일 국민의회55) 긴급대의원대회에서 臨政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56) 그러나 임정봉대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臨政奉戴 실패로 이을규는 국무위원직을 사임하였다.57)
임정봉대운동은 독립노농당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1947년 5월 5~7일 삼일간 제1회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일체 독립운동 역량을 국민의회에 집중하여 大韓臨政을 개조․강화하고 연합국에 승인을 요구할 것”을 결의하였다.58) 그리고 大韓民國臨時政府奉戴推進會59)와의 합작 하에 1947년 8월 29일 전국혁명자대표대회60)를 개최하여, “혁명세력은 국민의회로 총집중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옹호하여 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전체의 주권 행사를 발동하도록 열국의 승인을 구한다” 등의 결의문을 결정하였다.61)
아나키스트들은 미․소의 지배 하에 있는 한국 민족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민족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좌익 민족주의자들을 友軍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공동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선언>을 통하여 “우리는 자주독립 완전해방을 위하여 그 실현의 날까지 우리의 友軍인 혁명적 좌익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공동전선을 펴자”고 주장했다.62) 이 공동전선방침 하에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1945년 12월 29일에 개최된 신탁관리배격각정당각계층대표자대회에 참여하였으며,63) 1946년 4월 6일에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대책국민총연맹 결성대회에도 조선농촌자치연맹과 함께 참가하였다.64) 아나키스트들은 해방공간에서 신탁통치반대운동과 임정봉대운동을 전개하면서 줄곧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과 공동보조를 취했다.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민족주의세력과는 공동전선을 폈지만, 공산주의세력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즉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창립대회의 <개회사>는 공산주의자들을 ‘露國의 走狗輩’로 규정하고, 그들을 배격할 것을 주장했다.65)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1945년 12월 20~21일에 개최된 전국대표대회에서도 공산당과의 제휴에 대해서 ‘소련을 조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대사상을 버릴 것’과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不顧하는 것을 버리고 무산자 독재정권을 수립하려는 의도를 포기할 것’ 등의 전제조건을 제시하여,66) 공산당에 대해서는 사실상 반대한다는 입장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적 좌익 민족주의자와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민족혁명을 완수하고, 그것을 통해 자주적 민주적 국가를 수립하여 민주정치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나키스트 사회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단계혁명론적 입장은 아나키스트로 하여금 현실정치와 일정 부분 타협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인 아나키스트 ‘파리그룹’이 정치는 專制로부터 共和로, 공화로부터 무정부의 상태로 나아간다고 하는 ‘과도기론’에 근거해서, 동맹회에 가입하여 혁명파와 연합했고, 중화민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의 정치체제 논의에 참여했으며, 국민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던 것처럼,67) 한국인 아나키스트들도 단계혁명론적 입장에서 비상국민회의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민주당 등과 같은 각종 정치조직에 참여하여 기존 정치인들과 함께 정치활동을 전개하거나,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2) 독립국가상
(1) 勞農民主國家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되자 한국인들에게는 민족국가 건설이 주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노선에 따라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되,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하에 부르주아개혁을 우선적으로 단행하고자 했다. 아나키스트들 또한 단계혁명론적 입장에서 1차적으로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건국 과정에서 외세와 친외세 세력을 배제하고, 한국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연합국의 후원 하에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아나키스트들은 외세에 의한 신탁통치와 군사점령을 한국의 자주독립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의 장애물로 파악하고, 이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46년 4월 20~23일에 개최된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는 “정부수립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원칙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여, 아나키스트들의 정부수립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세우는 정부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적이어야 한다. 자주적이 아닌 정부를 우리는 거부할 것이다. 타인이 세워주는 정부, 그러한 정부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남들이 우리를 이해하고 협력해주면 고마울 뿐이다.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그래야 한다. 우리가 자율적 자주적으로 정부를 세울 때, 그들이 곁에서 조언해주고 협력해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인 격이 되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거나 명령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우리 정부를 세우고 나서 그들은 조용히 물러가면 되는 것이다.68)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아나키스트들이 강조한 것은 외세의 개입을 극력 배제하는 것이었다. 외세가 개입되면 자주적 정부는 수립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한국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 친미․친소정권을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나키스트들은 민중을 국가 건설의 주체로 설정했다. 1946년 4월 20~23일에 개최된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는 “이 당면과업(자주적 정부 수립 ― 인용자)은 노동자․농민․근로대중의 조직된 민주역량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면의 행동방침 중의 하나로 채택하여,69) 노동자․농민․근로대중의 민주역량이 정부 수립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독립노농당도 <結黨宣言>을 통해 민중이 국가건설의 주역이 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건국사업이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됨은 민중이 직접으로 건국공작을 부담 아니한 데서 원인이 발견된다. 특히 暴虐한 왜정의 蹂躪 밑에서 가장 양심적으로, 또 가장 큰 희생으로 이 땅을 지키면서 모든 것을 시설해놓은 우리 노농근로대중은 이 국토의 진정한 주인이요, 신국가를 건설할 유일한 자격자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점한 우리들의 주력이 아니고는 국가의 건설이 전연 불가능하고 전연 무의미할 것이다.70)
위의 독립노농당의 <結黨宣言>에 의하면, 식민지 권력과 맞서 싸우면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민중이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각 정치세력들이 외국의 힘을 빌려 자신의 정권욕만 채우고자 하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면서도 독립국가가 건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에 의하면, 민중이 국가건설의 주체가 되어야만 소위 ‘권력광’ 내지 ‘지배광’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해야만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민족혁명을 통해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르주아정권을 수립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독립노농당은 강령을 통해 “일체 독재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국내외 세력과 평등호조의 원칙에 의하여 합작”한다고 천명하고,71) 黨略에서도 “국민의 평등과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는 민주입헌정치를 실시한다”고 하여,72) 민주국가 수립을 목표로 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수립하고자 한 민주국가는 노동자․농민․근로대중 등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그들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는 노농민주국가였다. 1947년 3월 30일 아나키스트 청년들에 의하여 결성된 노농청년총연맹은 결성선언을 통해 노농민주정부 수립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73) 노농민주정부는 노동자․농민독재를 시행하는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농민․근로대중 등 민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하는 정부를 의미한다.
독립노농당은 노농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도로서, 우선 정치부문에 관한 정책에서 인민에게 선거권․피선거권, 신체․거주․신앙․언론․출판․집회․결사․여행․통신비밀․파업․시위 등의 자유, 불법간섭․인격적 침해를 받지 아니할 권리 등 부르주아민주주의적 諸權利를 줄 것과,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제대로 시행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74) 독립노농당이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철저히 시행할 것을 주장한 것은 민중들에게 민주주의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수립하고자 한 勞農民主國家는 아나키스트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한정되었다. 勞農民主國家는 아나키스트 사회가 건설되면 소멸될 존재였다. 즉 아나키스트들이 민족혁명이라는 1차 혁명을 완수하여 노농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것은 민주정부 하에서 민주주의 훈련을 통해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위한 것이었다.
(2) 자주관리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과 함께 일본 자본과 일본인 기술자가 물러갔다. 거기에다 미군정에 의해 일본경제권과도 단절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직후 한국산업계는 자본 부족, 자재 부족, 기술 부족 등으로 인해 파탄되어 갔다. 점차 심각해져 가는 산업파탄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관리운동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은 일본인들로부터 공장을 접수하고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에 의하여 산업은 조금씩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은 기본적으로 자주관리를 지향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에 대해 당시 조선공산당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조직부장인 玄勳이 결성대회에서 <노동자 공장관리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기존의 노동자에 의한 공장관리운동이 소부르주아적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의 공장관리운동을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75) 하지만 현훈의 주장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지도부에 의하여 채택되지 못하고, 오히려 미군정에 협력하는 산업건설협력방침이 채택되었다.76) 그것은 자주관리체제가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어긋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아나키스트들은 생산수단의 사유화는 물론이고 국유화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946년 2월 21~22일에 개최된 무정부주의자경남북대회에서는 기본원칙을 결정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耕者有田․工人有機의 원칙’으로서 “모든 생산수단은 생산활동자에 의하여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것이다.77) 한국노동자자치연맹도 “직공은 죽어도 그 공장의 주인의 자격과 지위를 가져야” 되며, “공장의 운영에 노동조합 대표로서 참획할 권리를 가져야” 하고, “동시에 이익의 분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익금의 일부를 노동자가 배당받는 것은 “공장은 工人에게”라는 원칙의 한국적인 형이라 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사회가 우리(노동자 ― 인용자)에게 주는 노동대가(노동력 값의 잘못 ― 인용자)가 아니라 한 사회성원에게 주어야 하는 생활비”요,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는 것은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노자간의 계급투쟁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78) 조선농촌자치연맹도 강령79)에서 “吾等은 농경의 합리적 경영을 위하여 공동경작․생산수단 及 시설의 공동화를 기함”이라고 밝히면서, 공동생산과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추구했다. 독립노농당도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하고자 했다. 즉 독립노농당은 “산업의 경영, 산업기관의 관리, 생산품의 분배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동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80) 이러한 사실들은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모든 생산과정을 생산자 혹은 생산자단체가 주관하는 자주관리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자주관리체제 하에서는 모든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국유화가 부정된다. 자주관리체제가 근거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리는 사회적 소유이다.81) 하지만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당장 모든 생산수단을 공유화 내지 사회화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독립노농당은 정책을 통해 주요한 교통기관․통신기관․중공업․주요 광업․전력․瓦斯․대생산기구․외국무역․금융업․造林․대규모의 製材業․대규모의 수산업․어로기구․중요한 문화기관․의료기관․오락기관․조산원․탁아소․양로원․요양원․病廢者扶養所․공동주택․공동식당․共同浴室․공공집합소․공설시장․여관업 등은 국영 혹은 공영으로 하고, 산림․어장․광산 등은 국유로 하고 자치단체가 관리하며, 사유자본은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노동자자치연맹도 조직대강에서 “우리는 공장의 소유권의 존재를 인정함으로 국가 혹 개인이 그 소유권을 가”진다거나, 이익의 1/3을 소유권자의 몫으로 분배할 것을 천명하였다.82) 즉 독립노농당과 한국노동자자치연맹은 과도기 사회에서는 중요 산업시설이나 공공시설의 국가소유와 소규모의 사유의 존재를 인정했던 것이다.
나아가 독립노농당은 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각 지방자치단체․직업자치단체들의 정책을 전체적인 차원에서 조정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즉 독립노농당은 정책을 통해 국가는 신 토지법을 제정하여 토지의 겸병을 방지하고, 생산․분배․소비․생활방식의 합리적 개선에 대한 국가적 계획을 수립하여 실시하고, 생활필수품의 생산분배는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3)
이처럼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자주관리체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의 자주관리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은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과 결합되지 못했다. 그것은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운동을 주도하면서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독점하다시피 한 데 비하여, 아나키스트들의 노동운동단체인 한국노동자자치연맹은 별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대한노총에 흡수되어 反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활동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소생산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던 사실에도 그 원인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궁극적으로는 모든 재화의 사회적 소유 내지 공유를 추구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各盡所能 各取所需’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사회는 소생산자 중심의 사회로 설정했다. 독립노농당의 당략에는 “중소 자산층을 주체로 한 富民主義 계획경제 체제를 시행한다”, “독점성 사업과 대규모 기업은 국영 혹은 공영으로 하고 중소산업의 자유발달을 장려한다”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84) 독립노농당의 정책 중 경제부문에 관한 것에는 “중소자본이 적극 활동하는 국민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시행함”, “중소산업의 자유발달에 필요한 자금은 국가가 보조함” 등의 조항이 들어 있다.85) 이처럼 아나키스트들이 구상했던 과도기사회는 중소자본가 즉 소생산자가 사회운영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광범한 지지를 끌어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3) 지방자치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앞으로 건설될 새로운 국가에서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여 권력을 분산할 것을 주장했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선언>을 통해 “완전한 자유 평등의 상호부조적 新朝鮮은 완전한 지방자치체의 자유연합으로서 건설된다”고 하여,86)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는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독립노농당도 당략과 정치부문에 관한 정책에서 “지역자치제와 직업자치제를 시행”한다고 천명하거나, 직업단체․농민․노동단체․어민․교육자․문화인 등의 자치권을 확립하고 “중앙행정기구와 지방행정기구 및 각종 자치단체의 권한을 규정하여 권력의 과도집중을 방지”하는 정책을 수립하여,87) 지방자치제와 직업자치제를 실시하고 중앙기구와 자치단체의 권한 경계를 명시함으로써 권력을 분산할 것을 역설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지역자치제와 직업자치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한 것은 정치단위가 적을수록 민중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통해 대의정치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중앙정부 또한 지방자치체를 기반으로 하여 상향적으로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무정부주의자경남북대회는 “각 시․읍․면은 자발적으로 그 자치제를 구성하고, 그들의 대표자로 하여금 국민대표자회의를 구성”하도록 하며, “이 기관(국민대표자회의 ― 인용자)으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구성”케 할 것을 주장했다.88) 그것은 지방자치체를 기반으로 하여야만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나키스트들은 집권적이고 强權的인 정부를 부정하는 아나키즘 논리에 입각하여,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부정하고 권력이 분산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단계혁명론적 입장에서 정부와 국가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새로이 건설되는 사회가 중앙집권적이고 강제적인 권력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던 것이다.
(4) 농공병진
모든 사람이 서로 평등하고 풍요롭게 사는 사회가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사회이다.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은 그러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도시가 너무 비대하게 성장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공장들이 지방에 분산되어 농촌과 도시가 그리고 농업과 공업이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강령에서 “吾等은 집산주의 경제제도를 거부하고 지방분산주의의 실현을 기한다”고 하여,89) 중앙집권적인 공산주의 계획경제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산업시설을 지방으로 분산시킬 것을 주장했다.
조선농촌자치연맹과 독립노농당은 농공병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촌을 우선시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농촌자치연맹은 “우리 나라가 잘되고 우리 조선 사람이 잘 살자면 …… 우리 농촌이 중심이 되어 가지고 이 농촌에다가 도회지를 붙이어서 놓아야 하겠습니다. 농촌에다가 도회를 합치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도회지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학교라든지 공장이라든지 모든 문명한 설비를 우리 농촌으로 나누어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0) 즉 한국인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농촌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도시를 결합시켜야 하며, 산업시설이나 문화시설을 지방으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노농당도 “農工을 병진하고 상호조화를 기”하고자 하는 黨略을 채택하고,91) 산업의 지방분산책 실시, 도시 과도집중의 폐 교정과 전원도시 건설, 농산물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국가적 계획 수립, 농공협조책 실시, 농사시험장 증설과 농시지식 보급, 농촌문화기관과 농민보험시설 확충, 국가부담으로 농민의 생활조건 개선, 凶作農作物의 가치 저락에 대한 국가보조제 실시, 農村의 手輕工業과 一般副業 적극 장려 등과 같은 정책을 수립하여,92) 국가 차원에서 농업을 적극 육성하고 농촌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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