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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아나키즘의 부활은 무엇을 말하는가 /교수신문 20040910

by 마리산인1324 2007. 7. 17.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6425

 

 

트렌드 : 아나키즘의 부활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유, 자치, 자연...국가권력으로부터의 탈피
2004년 09월 10일 (금) 00:00:00 강성민 기자 editor@kyosu.net

요즘 아나키즘 관련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아나키즘 관련서는 2001년부터 꾸준히 흐름을 이어오다가 올해는 상반기에만 3권이 나왔다.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독자들이 아나키즘을 원해서는 아닌 것 같다. 학계의 아나키즘 재조명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있다는 측면은 있다. 지난 2001년에 나온 '한국의 아나키즘'(이호룡 지음, 지식산업사 刊),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 지음, 웅진닷컴 刊)은 식민지시대 주로 수용되고 활동이 이뤄졌던 '독립운동' 내에서의 '아나키즘'을 재조명하는 책들이다. 역시 2001년에 나온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조세현 지음, 책세상 刊) 역시 국가와 민족에 얽매인 수동적 삶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들의 삶을 '반역'이라는 코드로 꿰고 그걸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므로 일종의 재조명이다. 이런 재조명이 평전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지난 2003년에 나온 '가네코 후미코'(야마다 쇼지 지음, 산처럼 刊)였다.


왜 이런 재조명이 필요한 것일까. 이덕일은 '아나키스트 이회영…'에서 이회영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 망명후의 활발한 독립운동, 여러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 아나키스트가 되기까지의 과정,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 등 그의 파란만장한 삶 뿐 아니라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과 중국에서 이뤄진 독립운동이 구체적으로 그렸다. 이를 통해 볼 때 재조명은 '역사적 복권'에 가까운 듯 보인다. 역사 속의 의미있는 존재들을 거론하는 것은 역사가에게는 충분한 명분을 안겨주니 말이다. 이런 명분은 '저주받은 아니키즘'(엠마 골드만 지음, 우물이있는집 刊)에 오면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것과 우리의 현재를 연결시키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역사적 책들은 인물들의 고난과 영웅적 행보에 초점이 가 있어서 현재와의 연결점을 찾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다. 그와 반면 올해에 나온 아나키즘 관련서들은 '고전적' 아나키즘을 '현대적' 아나키즘으로 재해석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재미있는 것은 재해석하는 사람마다 '아나키즘'을 다른 식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주목하게 되는 건 올 4월에 나온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김은석 지음, 우물이있는집 刊)이다. 김은석 제주대 교수가 펴낸 이 책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과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구분한다. 전자는 인간사회가 대립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는 이유를 개인주의와 사유재산제로 보고 공동체적 연대를 통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위해 사회혁명을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의 보장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그동안 아나키즘에 대한 소개가 바쿠닌, 크로포트킨 같은 '사회주의' 쪽 위주로 소개돼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도 아나키즘의 대표적 경향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고드윈의 인도적 아나키즘, 슈티르네의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터커의 자유방임적 아나키즘 등을 통해 설명한다.


그에 비해 올 8월에 나온 '아나키즘 이야기'(박홍규 지음, 이학사 刊)는 '자유, 자치, 자연'으로 아나키즘을 풀이한다. 저자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아나키즘에 대한 기존의 딱딱한 생각들을 물리침으로써 아나키즘을 이론적 정의에서 해방시킨다. "아나키즘은 무법, 무질서, 혼란과 무관하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도 일탈자들의 반항도 극단적 자유주의나 이기주의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아나키즘을 "국가주의와 과학기술 만능주의, 과잉 소비주의를 완화시키는 대안 사상"으로 파악한다. 긍정적으로, 자유롭게, 자치를 통해,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하는 게 아나키즘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쉽게 다가오는 한편 아나키즘의 외연이 너무 넓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갖게 한다.


지난해에 나온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숀 쉬한 지음, 필맥 刊)은 1960년대 이후의 아나키즘을 생생하게 그린 책이다. 오늘날의 아나키즘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문화, 환경, 예술 등 생활양식으로서 재생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관점이다. 그것은 사회참여와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잠복하며 계기적 맥락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카멜레온' 같은 존재를 연상시킨다. 스스로를 어떤 하나로 규정하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가치로 등장하는 유사한 정신 혹은 기질이 '아나키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생활현실에 호출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나키즘은 두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자유, 자치, 자유'를 추구하는 생활실천으로서의 '아나키즘'과 다른 하나는 기존 좌파운동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찾게된 '제3의 길'로서의 아나키즘으로 말이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후자의 아나키스트들이 국경을 넘어 연대를 이루며 각종 자본의 억압, 환경파괴, 전쟁행위에 대한 반대행동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아나키즘의 가장 크고도 변하지 않는 슬로건은 '직접행동'이라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최근에 출간된 '아나키스트의 초상'(폴 애브리치 지음, 갈무리 刊)은 1920년대의 아나키즘과 맥이 끊겼다가 1960년대에 다시 부활한 아나키즘, 그리고 인터넷 시대의 아나키즘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어 아나키즘에 대한 종합적인 역사적 시각을 얻게 해준다.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아나키즘의 모순과 장단점들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