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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 원문
Woodcock, George - Anarchism, A History Of Libertarian Ideas And Movements.pdf
- 조지 우드코크 -
1. 프롤로그 (서장)
「권위를 부정하고 그것과 싸우는 자는 누구나 아나키스트」라고 세바스챤 폴은 말했다. 이 정의는 간결함으로 해서 매력이 있으나, 간결하다는 것은 도리어 아나키즘의 역사를 쓸 적에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공중의 마음 속에 이만큼 많이 혼동을 일으켜 이해를 어지럽혀 온 주의나 운동은 별로 없고,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루거나 행동할 적에 이만큼 그 혼란을 대하여 많은 변명을 해온 것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이론 및 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에 대하여 현실의 역사 경과를 더듬어 보기 전에 나는 정의의 일장으로써 시작한다.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될 문제이다.
폴이 말한 것은 적어도 아나키즘이 존재할 영역만은 밝히고 있다. 모든 아나키스트는 권위를 부정하고 많은 아나키스트는 그것과 싸운다. 하지만, 권력을 부정하고 그것과 싸우는 자라고 해서 모두 정당히 아나키스트라 불려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아나키즘이란 기존사회에 대하여 비판을 제기하는 교의이고, 바람직한 미래사회의 전망이고, 그리고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에로의 이행수단이다. 한갖 무분별한 반란이나 현세의 권력에 대한 철학적 또는 종교적 배척이 아나키스트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나 금욕주의자는 아나키를 구하지 않고 별개의 왕국을 구한다. 아나키즘은, 역사적으로 말하면, 주로 사회와의 관련에서의 인간에 상관하고 있다. 그 궁극의 목표는 언제나 사회변혁에 있다. 그 당면의 태도는, 비록 그것이 인간성에 대한 개인주의적 견해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사회적인 비난의 태도이다. 그 방법은 언제나 폭력적 또는 비폭력적인 사회적 반란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을 하나의 사회적 정치적 교의라고 인정하는 사람들 간에도 역시 혼란이 개재한다. 아나키즘, 니힐리즘, 테러리즘은 종종 잘못 동일시되고 있으며, 대개의 사전에는 아나키스트에 대하여 적어도 두 가지 정의가 실려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아나키스트를 정부가 사멸하고서야 비로소 자유가 존속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그가 파괴하는 질서에 대신할 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면서 단지 무질서를 추진하는 자라고 그를 규정해 버린다. 통속의 생각에서는 둘째 개념이 훨씬 널리 퍼져 있다. 아나키스트의 정평적(定評的) 형은 기성사회의 상징인 대지주를 단도나 폭탄으로 습격하는 냉혈의 암살자라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통속적인 표현에 따르면 아나키란 악질의 혼란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악질의 혼란상태란 것은 톨스토이나 고드윈 또는 솔로나 크로포트킨과 같은 그 사회이론이 모두 아나키즘적이라 일컬어져온 사람들의 의도와는 분명히 거리가 멀다. 정평의 아나키스트형(型)과 우리가 실제로 가장 자주 만나는 아나키스트와의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일부는 어의(語義)에 관한 혼란에, 일부는 역사상의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아나키」「아나키즘」「아나키스트」란 말의 어원 속에, 그리고 또한 그것들을 써온 역사 속에, 우리는 이러한 말에 주어진 서로 모순하는 일련의 쌍방의 정당성을 발견한다. 어원으로 되고 있는 그리스 말 「아나르코스」(anarchos)는 단지 「지배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 따라서 아나키 그 자체는 일반적 문맥으로 봐서 분명히 「지배에 따르고 있지 않다」(unruliness)는 소극적인 태도거나 또는 지배는 질서의 유지에 불필요하니까 「지배를 안 받겠다」(being unruled)는 적극적인 태도거나 그 어느편을 의미하도록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에 있어서의 비난의 말
우리가 이들 세 가지 말을 사회적 정치적 문맥에서 쓰게 될 때 비로소 중요한 의미의 변화에 마주친다. 「아나키」와 「아나키스트」는 프랑스 혁명기에 처음으로 정치적인 의미에서 자유로 사용되었다. 당시는 이들의 용어가 각종 당파가 그들의 반대자를 규탄하기 위하여 구사한 부정적 비판, 때로는 욕설의 말이었고, 보통은 좌익에 대한 호칭이었다. 예컨대 지론드파의 브리소는 그가 아나키스트라고 부른 과격파(Enrage's)의 억압을 요구하여 1793년에 「이 아나키를 정의할 것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법률은 실시 안되고, 권위는 무력하며 경멸되고, 범죄는 처벌되지 않고, 재산은 습격되고, 개인의 안전은 침해되고, 국민도덕은 부패하고, 헌법은 없고, 정의도 없다. 이와 같은 것이 아나키의 특색이다.
브리소는 적어도 하나의 정의를 시도했다. 수년 뒤에 집정부(執政府)는 그들이 멸망시킨 쟈코방파에게 독설로 당파적 욕지거리를 퍼붓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집정부는 「아나키스트」란 말에 의하여, 범죄 투성이가 되고, 피로 더럽혀지고, 약탈로 살찐 자들, 자기네가 안만든 법률과 자기네가 지배 안하는 정부의 적, 자유를 설교하면서 전제를 자행하고, 우애를 말하면서 그 동포를 학살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지나친 행동, 모든 비열함, 범죄를 자행하는 모든 폭군, 노예, 그리고 그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영리한 지배자들에게 비굴하게 아첨하는 자들이다.
브리소에 의하여 부드럽게 쓰여지건 집정부에 의하여 과격한 어조로 쓰여지건 「아나키」는 분명히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나 그 이후에 있어서의 비난의 언사이었다. 기껏 좋게 말해서 그것은 파괴적이고 비참한 것으로 생각되는 정책의 소지자이고, 가장 나쁘게는 경쟁상대를 중상하기 위하여 무차별하게 사용되는 말이었다. 따라서 과도의 권력에 불신을 품었던 과격파도 권력을 즐긴 로베스피엘도 같은 불유쾌한 검정 빛깔로 먹칠해졌던 것이다.
프루동에 있어서의 긍정적 의미
그러나 크리스챤이나 쾨커란 명칭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란 명칭은 마침내 그것이 비난의 의미로 쓰여져 오던 상대자의 한 사람에 의하여 자랑스럽게 채용되었다. 역설의 인물이요 모순의 선동자임을 자부하고 격렬한 논쟁을 좋아하는 개인주의자 피에르 조세프 프루동은 1840년에 <자주인>의 선구적 사상가로서 그를 확고부동하게 만든 저작을 출판했다. 그것은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인데 거기서 그는 그 자신의 질문에 저 유명한 해답을 주었다. 즉 「소유는 도적이다」같은 책에서 그는 아나키스트란 이름을 즐겨 자칭하는 최초의 사람으로 되었다.
물론 프루동은 약간 도전의 의미에서 그리고 약간은 그 말의 역설적인 성질을 이용하기 위하여 이 명칭을 썼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 말의 아나르코스가 지닌 애매성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 말로 돌아갔었다―그가 시작코자 하는 권위비판은 반드시 무질서의 옹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가 「아나키스트」와 「아나키」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문장은 충분히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을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그 문장이 이들의 용어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쓰이기 비롯한 것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이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논거로서 일반으로 사용해 온 자연법에 의한 정당화의 싹이 거기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있어서의 정부는 형식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나에게는 나의 독자의 몇 사람이 이렇게 답하는 것이 들린다. 「아니, 어째서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공화주의자인데.」공화주의자, 그렇다. 그러나 그 말은 아무 것도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 Res publica, 그것은 퍼블릭한(공공의)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 공공의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어떤 형태의 정부 아래서나 그 자신을 공화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국왕들마저 공화주의자다. 「그럼 당신은 민주주의자다.」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 나는 아나키스트다.
프루동은 다시 계속해서,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참된 법은 권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 참된 법은 위로부터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의 성질에서 생긴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그와 같은 법의 자유로운 출현을 사회운동의 목표라고 보고 있다.
힘의 권리나 책략의 권리 따위가 정의의 착실한 진보 앞에서는 퇴각하듯이, 그리고 최후에는 평등 속에서 소멸하지 않으면 안되듯이, 의지의 지배권은 이성의 지배권에 굴복할 것이며, 마침내는 과학적인 사회주의 속에 자취를 감추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정의를 평등 속에 구하듯이 사회는 질서를 아나키 속에 구한다. 아나키―주인도 군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와 같은 것이 우리가 날마다 접근해 가는 정부의 형태이다.
아나키에 있어서의 질서라는 외견상의 역설―바로 여기에, 이 어군(語群) 전체가 포함한 의미의 변화에 대한 단서가 있다. 프루동은 사회의 내부에는 균형 잡힌 자연법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질서의 벗이 아니라 그 적으로서 권위를 거절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나키스트들에게 퍼붓는 비난을 <권위주의자>에게 되돌려 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악평을 깨끗이 제거한 것으로 보는 이 아나키스트라는 명칭을 쓴다.
우리가 나중에 보듯이, 프루동은 19세기의 정계에서는 스스로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추종자를 구하지 않고, 그가 어떤 종류의 조직을 만들었다는 설을 정연히 물리치고, 그리고 자기의 생애의 대부분을 실제로 고립상태 속에서 아나키스트란 명칭을 받아들여 왔다는 사실에 확실히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직접 추종자들조차도 자기네를 차라리 상호주의자(相互主義者 mutualist)라고 부르기를 즐겼다. 그리고 바쿠닌파의 사람들이―그들은 간접적으로 프루동파 사람들이기도 했다―처음엔 오히려 주저하면서 자기네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제1 인터네셔널에서의 마르크스파와 바쿠닌파의 분열후 1870년대 후반이 되고 나서의 일이다.
그 후의 아나키스트들 바쿠닌, 크로포트킨, 그리고 아나키스트란 명칭을 받지 않고 반정부적인 체계를 전개한 고드윈, 슈티르너, 톨스토이와 같은 그 전후의 사상가들과 프루동을 결부하는 것은 바로 1840년에 프루동에 의하여 제창된 이 일반적인 사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변종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나키즘을 논하는 것도 또한 바로 이 의미에 있어서이다. 즉 사회구조에 있어서의 근본적 변화, 특히―이것이 모든 형태를 결부하는 공통의 요소이므로―<권위주의적> 국가를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정부에 의존하지 않는 형태로 바꿔놓을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사회사상의 한 체계로서 논하는 것이다.
아나키즘과 니힐리즘
그러나 아나키즘이 일정한 시점에서 행동으로 구체화하고 사회철학의 명확한 조류로서 확립된 때조차도 어의에 관한 혼란이기 보다 오히려 역사적인 혼란에서 일어나는 오해가 남는다. 첫째로, 아나키즘을 니힐리즘과 동일시하거나 또는 부정적인 철학, 단순한 파괴의 철학으로 보거나 하는 경향이 있다. 아나키스트들 자신이 얼마만큼은 그 오해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은 흔히 자기네의 주의의 파괴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권위를 전폐(全廢)한다고 하는 바로 그 사상은 전형적 근대사회에서 현저한 거의 모든 제도를 완전히 일소(一掃)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아나키스트의 저작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언제나 그러한 제도의 신랄한 비판이었다. 이에 비하여 그들의 재건 계획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어서 사람들을 신복(信服)시키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아나키스트 사상가의 중심에도 파괴의 사상이 그것만으로 고립하여 있은 일은 없었다. 프루동은 그의 『경제적 제모순』(Economic Contradiction, 1846)에서 구체화한 그러한 산업상의 전제정치(industrial Caesarism)를 공격하기 위한 모토로서 「나는 파괴하고 건설한다」(Destraum et Aedificabo)는 어구를 썼다. 미하일 바쿠닌은 또 『독일에 있어서의 반동』(Reaction in Germany)이란 논문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기원의 말로 맺었다. 「오직 그것이 전생명의 신비적이고도 영원히 창조적인 원천인 까닭으로 해서만 파괴하고 전멸시키는 그 영원한 정신을 믿게 할지어다. 파괴에의 정열은 또한 창조적 정열이기도 하다!」
그 전통은 우리들 자신의 세대로 계속했다. 1936년 바쿠닌이 『독일에 있어서의 반동』을 출판하고 약 백년 후에,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지도자 베난벤투라 도울티는 내전으로 인하여 일으켜진 파괴의 한 복판에 서서 피엘 봔 팟센에게 장담했다.
우리는 조금도 황폐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세계를 계승하려 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바 없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의 무대를 떠나기 전에 자기의 세계를 파괴하여 황폐시킬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세계를 갖고 있다. 그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는 파괴를 인정할는지도 모르나, 그것은 오직 자연의 세계에서 죽음이 있고 나며 새로이 탄생하는 생명을 산출하는 저 영원의 과정의 일부로서이며 또한 자유로운 인간은 파괴된 과거의 폐허에서 다시 건설하고, 더욱이 보다 잘 건설하는 힘을 지녔다고 믿기 때문일 뿐이다. 새로 탄생한다고 하는 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아나키스트의 꿈에다 감동적 표현을 해 준 것은 쇠리, 저 고드윈의 가장 위대한 제자 쇠리였다.
대지의 우렁찬 시대는 다시 시작하여,
황금의 시절도 되돌아 가고,
대지는 뱀처럼, 입어서 낡은
메마른 겨울의 풀을 소생시킨다.
하늘은 미소하며, 신앙과 지배는
사라지는 꿈속의 잔해처럼 흐리게 비친다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자유로운 세계의 빛나는 탑이 나타나는 것을 항상 내다본 것은 지배와 신앙의 잔해를 통해서였다. 그 전망은 소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우리는 아직 그러한 말에서 그것을 판단할 만한 지점에 도달하여 있지 않다―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터무니없는 파괴의 전망은 아니다.
확실히 이러한 전망을 지닌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간단히 말해 버릴 수는 없다. 니힐리스트는, 그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서 말한다면, 아무런 도덕원리도 아무런 자연법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는 권위가 파괴된 뒤에도 살아남아 우애라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유대로 사회를 결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덕적 충동을 믿고 있다. 아나키스트는 또한 엄밀한 역사적 의미에서도 니힐리스트는 아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역사에서 다소 부정확하게 니힐리스트라 불려진 특수한 그룹은 「인민의 의지단」(The people's will)에 속하는 테러리스트들이었으니 말이다. 「인민의 의지단」은 19세기 후반에 제정 러시아의 독재적 지배자들을 겨눈 조직적 암살계획에 의하여 입헌정부의 수립―아나키스트의 목적은 아니다―을 구한 조직적 음모의 운동이다.
아나키즘과 테러리즘
이렇게 설명하면 흔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만일 아나키스트들이 니힐리스트가 아니라고 한다면, 여하한 경우나 테러리스트도 또한 아니란 말인가. 정치적 테러리즘과 아나키즘의 결부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여전히 뿌리를 박고 있으나 그것은 필연적인 결부는 아니며 다소는 그렇다 할 수 있을 뿐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의 궁극적 일반적 목적에 관해서는 실질상 일치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 목적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전술에 관해서는 놀랄만큼 불일치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특히 폭력에 관하는 경우다. 톨스토이주의자들은 여하한 상황 아래서도 폭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드윈은 평론을 통하여, 그리고 프루동과 그 일파는 협동조합 조직의 평화적 증가를 통하여 변혁을 초래할 것을 구했다. 크로포트킨은 폭력을 용인했다. 그러나 그것은 만부득기(萬不得己) 인정했을 뿐이고, 혁명기간에는 불가피하게 폭력이 생기며 혁명은 인류의 진보에 있어서 피치 못할 단계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바쿠닌마저 몇 번이나 바리케이트 위에서 싸웠으며 농민봉기의 잔인함을 칭송은 했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이상주의의 어조로 한마디 할 적에는 동요를 느낄 때가 있었다.
유혈의 혁명은 인류가 어리석은 탓으로 종종 필요하다. 허나 그것은 그것이 초래하는 희생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 이름아래 혁명이 행하여지는 목적의 순수함과 안전함을 위해서도 또한 언제나 악이다. 끔찍한 악이요 대참사다.
사실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을 인정한 곳에서는 대부분 그들이 프랑스, 아메리카, 그리고 끝으로는 영국의 혁명에서 생긴 전통에 집착한 때문이었다―이것은 자유의 이름 아래서의 폭력적인 민중운동의 전통으로서 아나키스트들이 쟈코방파, 마르크스주의자, 브랑키주의자, 그리고 마찌니와 가리바르디의 추종자들과 같은 그들의 시대의 다른 운동과 공통으로 갖고 있던 것이다. 시간이 흐름과 함께―특히 1871년의 파리 콤뮨의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함에 따라 그 전통은 로맨틱한 향기를 띠었다. 그것은 혁명적인 신화의 일부분이 되고, 많은 나라에서 현실의 실천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특수한 상황이, 특히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에 있어서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거기서는 폭력이 정치생활에 있어서 오랫동안 풍토적인 것으로 되어 있었고, 이 속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당파와 마찬가지로 폭동주의를 거의 일상 다반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의 역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 중에는 폭력행위에 의한 영웅들보다는 언론방면에서의 호걸들 편이 훨씬 수가 많았다.
그렇다고는 할지라도 폭력 비폭력에 관한 태도의 막연한 혼란을 통하여 아나키즘의 어두운 사자(使者), 테러리스트의 암살자들이 확실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스페인과 러시아의 특별한 조건을 빼놓고 그들은 근소한 인수(人數)에 불과하며 대개는 1874년대에 작전행동을 했다. 그들의 희생자가 눈에 띠이기 때문에―왜냐하면 제 멋대로 재판관을 자임하는 이 사람들에 의하여 권위란 죄명으로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프랑스와 미국의 대통령과 몇 사람의 왕족들이 있었으니―그들의 인수(人數)와는 전혀 균형을 잃을 정도로 그들의 행동은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때에 있어서나 테러리즘의 정책은 아나키스트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채용된 것은 결코 아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나중에 보듯이, 대개 고독한 사람들이고 엄격한 이상주의와 천계적(天啓的)인 정열과의 기묘한 혼합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었다. 이것은 피요트르 크로포트킨이나 루이스 미셀과 같은 다른 아나키스트들을 현세의 성인들이 되게 한 저 동일한 정열의 어두운 면인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악명 높은 사람들 중에서 세 사람만 지적하면 라파쇼르, 에밀 안리, 레온 쵸르고슈와 같은 인물이 수행한 암살은 아나키스트의 운동에 극히 유해했다. 그들은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만큼 민중의 가슴 속 깊이 이 관념을 심어 놓았다. 이사한 일이지만 같은 시대의 다른 암살은 아나키스트들의 암살보다는 아주 쉽게 잊혀져 버렸다. 러시아 사회혁명당원들의 이름은, 그들에게 살해된 희생자의 수는 훨씬 많지만, 아무런 전율도 일으키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을 단도나 폭탄과 결부하는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미국의 대통령을 암살한 3인 중에서 아나키스트라 주장한 것은 한 사람 뿐임을 생각해 보지 않는다. 다른 한 사람은 아메리카 남부동맹 지지자였고, 제3인은 실망한 공화당원이었다.
이 쉽사리 제거 안되는 편견은, 그 어떤 극단의 논리를 가진 교의가 불안을 품는 사람들의 심중에 일으키는 착란이라는 것으로, 아마도 설명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현대의 사회형태의 핵심인 권위의 원리를 공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심중에 일종의 깊은 죄의식의 혐오를 일으킨다. 그들은, 법정에서 「누가 제 애비의 죽음을 원치 않을 것이냐」고 부르짖는 이반 카라마조프와 같은 것이다. 보통 사람의 태도 중에 이와 같은 애증(愛憎) 두 가지 감정이 병존하고 있음이야 말로 그가 은근히 느끼고 있는 울분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불신의 념(念)을 품게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무슨 까닭으로―역사의 증거에 반하여―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아나키즘을 구할 길 없는 파괴나 니힐리즘이나 정치테러와 동일시하는가 하는 이유는 바로 에리히 프롬이 「자유의 공포」라 이름 붙인 심리적 상황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나키즘은 현실로 무엇인가, 이제부터 그 고찰을 시작하자.
아나키즘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아나키즘의 본질적 이론을 설명하는 것은 말하자면 프로테우스와 씨름하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자주인적> 태도의 본래의 성격―독단을 배제하고 융통성 없는 체계적 이론을 신중히 피하고 특히 극도의 자유와 개인적 판단의 우위를 강조하는―은 엄격히 독단적인 체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각양각색의 견해가 발생하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사실 다양하고 부정(不定)하다. 역사의 전망에 있어서, 그것은 운명이란 대해로 향하여 도도히 수량이 불어나며 흐르기를 계속하는 분류(奔流)(마르크시즘에 아마도 적절한 이미지)는 아니고 오히려 다혈성(多穴性)의 지면을 통하여 스며나오는 물의 양상을 보여 준다―여기서는 한 때 강한 지하의 흐름이 되고, 저기서는 모여서 소용돌이치는 연(淵)을 이루고, 갈라진 틈새로 방울져 떨어지고, 시야(視野)에서 사라지고, 그리고 사회구조에 있어서의 결함이 흘러 나갈 길을 트는 곳에서는 다시 나타난다. 교의로서는,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운동으로서는, 그것은 끊임없는 변동 속에서 성장하고 붕괴하나, 결코 꺼지지 않는다. 그것은 1840년 이래 유럽의 부단히 존재해 왔다. 그리하여 그 프로테우스와 같은 변환 무궁한 특질에 의하여, 이 백년간에 훨씬 강력하긴 하나 적응성이 적은 여러 운동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곳에서, 다시 연명하여 왔다.
아나키즘의 독특한 유동성은 조직에 대한 그 태도 속에 반영되고 있다. 모든 아나키스트가 조직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것에다 인위적인 영속성을 붙여 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주인적> 태도가 유동적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 아나키즘의 기초이념은 자유와 자발성을 강조함으로써 경직한 조직을 만들 가능성, 특히 권력을 잡고 그것을 유지할 목적을 가진 당파란 성격의 것을 만들 가능성을 배제한다. 「예외 없이 모든 당파는 그것이 권력을 구하는 한 절대주의의 변형이다」고 프루동은 말하고 그의 후계자들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당의 조직이란 생각 대신에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적 민중적 충동이란 그들의 신비를 바꿔 놓는다. 실제로는 그 충동은 사람들을 지도한다기보다 오히려 계몽하고 그들에게 시범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는 선전자들의 일련의 자유로운 일시적 집단과 연합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아나키스트 폭동주의자들 조차도 그들이 소규모 봉기를 실행한 것은 그들의 통제 아래 혁명이 계속해서 일어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은 행위를 그들의 해방으로 이끌어 갈지도 행동의 방향으로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를 목표한 「행동에 의한 선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물론, 아나키스트 전투분자들은 종종 혁명적 지도자라는 독재적 위치로까지 위험하게도 접근했다. 하지만 그들의 근본이론은 언제나 여하한 것이든지 지도자란 입장을 거부하고 혁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다는 생각을 표시함으로서 이러한 입장의 필요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해 왔다.
혁명은〔바쿠닌은 말했다〕개인에 의해서도 비밀결사에 의해서도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즉 사물의 힘, 즉 사건과 사실의 조류가 그것을 산출한다. 그것은 대중의 막연한 의식의 깊이 속에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다―그리하여 돌연 그것은 폭발한다. 가끔, 분명히 아주 작은 동기에서.
크로포트킨은 같은 사상을 19세기 후반의 사고방식에 따라 과학적으로 고쳐서 말했다.
진화란 것은, 종래에 주장되어 온 것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진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화와 혁명은 교대로 일어난다. 그리하여 혁명―그것은 가속한 진화의 시대다―은 진화가 보다 서서히 일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조화에 속한다.
사려 없는 대중의 충동에 대한 바쿠닌의 신비적인 신앙과 크로포트킨에 의한 사회적 다위니즘의 적용은 둘 다 융통성 없는 조직과 융통성 없는 현론(現論) 체계가 진보―혁명적이건 진화적이건―에 대하여 장애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들은 문제를 부드러운 태도로 다루기를 장려한다. 이 유연성이, 불만만 욕구의 흐름에 대하여, 사람들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유로운 해석과 다양한 처리방식은 사람들이 아나키스트의 세계에서 응당 발견할 것으로 기대하는 요소다. 독단론과 정통주의에 응고한 태도는 그 세계에 있어서조차 전혀 없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이것들은 이론의 문제임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그렇지만 비교적 단시일 내에 그것들은 항상 변화를 구하는 충동 속에서, 개인적인 지도자나 성전(聖典)의 힘에 의하여 방해되는 일이 없는 충동 속에서 해소되어 왔다. 크로포트킨이나 마라테스타나 루이스 미셀과 같은 개인은 당대에 존경을 받았을지 모르나, 그들 중의 누구도 브랑키나 마르크스처럼 운동전체에 최면술적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었고 또 미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나키즘은 유명한 서적을 산출했지만―고드윈의 『정치적 정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프루동의 『혁명의 일반이념』―이들 중의 어느 것도 마르크스주의의 정전(正典)을 충실히 보존하는 그러한 예배당의 벽감(壁龕)은 제공되지 않았으며 또 그것을 바랐던 것같이 보이지도 않는다.
아나키스트의 학파
그러나 문제제기방식과 해석과의 개인주의로 향하는 충동이 반복하여 일어남에도 불구하는 공통한 환경과 개인적 유사성이 아나키스트들 간에도 집단적 사고로 향하는 수정된 경향을 일으켜 왔다. 그래서 아나키즘 사상에 있어 꽤 명확히 규정된 여러 「학파」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 계열의 한편 끝―사람들의 성미에 따라 좌익이라 부르건 우익이라 부르건 간에―에 개인주의 아나키즘 막스 슈티르너가 위치한다. 그는 전투적인 자기관철을 주장하고, 상호간의 무자비성을 존중하면서 모인 에고이스트 동맹을 예견하여, 이 경향을 이론적 열광이 몰고 가는 데까지 밀고나간다. 윌리암 고드윈은 추상적정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의 부를 나우어 가지는 자유로운 인간의 테베라는 비전에 있어서 슈티르너의 비전을 한결 냉정히 박애적으로 변화시킨 것을 제기하고 있다.
아나키스트의 태도의 스페크톨에 따르면 다음 지점은 프루동의 상호부조론이다. 프루동은 역사를 사회형태에서 보는 까닭에,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엄격히 옹호하면서도 그것을 연합(association)의 견지에서 보는 까닭에, 순전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과는 다르다. 「내가 자유롭고 내가 나 자신 이외의 여하한 법률에도 따르지 않고서 나 자신을 지배하기 위하여 사회라는 건축물은 계약의 사상 위에 재건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리하여 그는 미래의 세계를 경제적으로는 그들의 생산수단을 점유한(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과 소집단의 하나의 형에 기초를 두고 각 개인에게 자기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을 보증하는 교환과 상호신용의 계약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는 콤뮨과 노동자협동조합의 대연합으로서 구상한다.
상호부조론을 넘어가 우리는 아나키즘 사상의 일층 친숙한 3변종―집산주의(collectivism), 아나르코 코뮨주의(anarcho communism), 아나르코 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프루동 이론의 몇 가지 요소―특히 그의 연합주의(federalism)와 노동자들의 연합의 강조란 요소를 점유하며 이것이 그의 상호부조론의 신봉자들로 하여금 1865년에 인터내셔널의 최초의 프랑스 지부를 결성케 했다. 그러나 바쿠닌과 1860년대 후반의 집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의 태도를 성장하는 산업사회에 적응시키기를 구하여, 프루동의 개인적 보유한 주장을 자발적인 집단제도에 의한 점유―개인의 생산물 또는 노동자 개인에게 보증된 그와 동등의 가치있는 것을 향수할 권리를 수반하는―란 생각으로 바꿔놓았다. 1870년대 후반에 크로포트킨과 그의 동지 아나르코 코뮨주의자들은 이 발전을 다시 논리적으로 일보 전진시켰다. 그들은 지방 콤뮨과 이에 유사한 연합을 생산수단의 적당한 관리자로서 구상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제도를 그 모든 형태에 있어서 공격하고 「그 능력에 따라 각인에서, 그 필요에 따라 각인에게」라는 슬로건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서 각자의 욕망에 따라 누구라도 공동의 창고에서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문자 그대로의 코뮨주의(공산주의)사상―토마스 모어에 이하여 이미 제창된―을 부활시켰다. 아나르코 코뮨주의자들과 10년 후 프랑스 노동조합 속에서 나타난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와의 주요 상위점(相違點)은 후자가 혁명적 노동조합을 전쟁의 기관(제네스트는 그 가장 유효한 전술)으로서 또한 장래의 자유사회가 그 위에 세워질 기초로서 강조한 점에 있다.
끝으로 아나키스트의 개인주의에서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에 이르는 곡선에서 약간 벗어나 톨스토이주의와 제2차 대전 전전과 전중에 주로 화란, 영국, 미국에 나타난 평화주의자 아나키즘(anarchism pacifist)이 있다. 톨스토이는 아나키즘을 폭력과 결부시켰기 �문에 아나키즘이란 명칭을 물리쳤으나 국가 및 다른 <권위주의적> 형태에 대한 그의 철저한 반대는 그의 사상을 분명히 아나키즘적인 궤도에 올려놓는다. 그의 신봉자들과 현대의 평화주의 아나키스트들은 톨스토이가 물리친 명칭을 다시 인정하고 「행동에 의한 선전」의 평화화의 일종으로서 현대사회 속에 <자주인적> 사회―특히 농업사회―를 만드는 데에 주로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의 문제에서 분열한다. 톨스토이는 무저항을 설교하고 그의 가장 위대한 제자 간디는 이 교의를 실천으로 표현했다. 평화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저항의 원리나 혁명적 행동조차도 인정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원리와 행동이 폭력을, 즉 권력의 한 형태이고 그런 까닭으로 비아나키스트적이라고 보는 폭력을 초래하지 않는 한에서 이다. 이와 같은 태도의 변화는 평화주의 아나키스트들을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로 전향시켰다. 왜냐하면 위대한 혁명적 무기로서의 제네스트라는 후자의 생각은, 근본적 사회변혁의 필요는 인정하나 부정적(즉 폭력적) 수단의 사용에 의하여 자기네의 이상을 상처 입히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 평화주의자의 양심에 호소하는 바 있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아나키스트 학파간의 상위는 일견 상당히 크게 보이지만 사실은 혁명의 방법(특히 폭력의 사용)과 경제조직이란 두 개의 분명히 한정된 범위에 속한다. 모든 학파는, 만일 아나키스트의 희망이 달성되어 정치적 지배가 끝난다면, 경제적 관계가 그 속에서 조직을 요하는 주요분야로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지금까지 보아 온 각종 사상의 여러 학파간의 상위는 협동적 「사물의 관리」(아나키스트의 저술이 널리 차용한 생 시몽 주의의 용어)가 개인의 독립을 침해할 위험 없이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견해의 차이를 반영한다. 한편 극으로 개인주의자들은 금욕적 생활을 위한 극소량을 넘은 모든 협동을 위험시한다. 다른 편 극으로 아나르코 코뮨주의자들은 상호연결하는 상호부조제도의 광범한 망상조직을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보호수단으로서 구상한다.
공통의 가설, 자연주의적 사회관
이들의 상위에도 불구하고 각양의 아나키스트 학파는 그들의 철학의 핵심을 형성하는 일군의 공통한 가설에 의하여 결합되고 있다. 그것은 자연주의적 사회관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자유와 사회적 조화 속에 살 수 있기 위한 모든 성질을 타고나면서 자기 속에 갖고 있다고 하는 주장을 모든 아나키스트는 인정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천성으로 선하다고 믿지 않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들은 인간은 본래 사회적이라고 매우 열렬히 믿고 있다. 인간의 사교성은 프루동에 의하면, 정의라는 내적 감각―완전히 인간적이며 인간이 타고나면서 지니는―에 있어서 표현되고 있다.
집단적 존재를 위하여 불가결한 요소로서 인간은 그 존엄을 자기자신과 타인 속에 동시에 느끼며 이리하여 그의 마음 속에 자기자신을 넘어선 도덕의 원리를 갖고 있다. 이 원리는 밖으로부터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의 속에 잠재하여 그 속에 내재한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이루고 사회자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그것은 인간정신의 참된 형태이며 이 형태는 일상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서 구체화하고 완성으로 향하여 성장한다. 다시 말하면 정의는, 사랑처럼, 미(美)나 공리(功利)나 진리의 개념처럼,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처럼, 우리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비단 자연으로 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성향은 인간이 동물계에서 진화함에 따라 인간과 함께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고 아나키스트는 주장한다. 사회는 인간 이전에 존재했다. 그리고 자유로 싱싱하게 성장하는 사회는 사실 자연스런 사회일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에서 강조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사회를 가슴 속에 품고 있다. 거기서는 그 구성원의 모든 상호관계가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고, 또한 권위―스스로 즐겨서건 선출되어서건―에 의해서도 아니라, 그 사회의 성원 상호간의 동의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의 온갖 습관의 총화(總和)에 의해서, 규제되는 그러한 사회―법률이나 상례화한 행동이나 또는 미신에 의해서, 고정됨이 없이 과학의 진보와 발명 및 보다 높은 이상의 착실한 성장에 의하여 자극되는 자유로운 생활의 항상 증대하는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고 끊임없이 재편성되는 사회. 그 때에는 여하한 지배적인 권위도 없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도 없다. 여하한 결정화도 고정도 없고 부단의 진화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대자연 속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가령 인간이 타고나면서 그와 같은 자유로운 사회 속에 생활할 수 있다면, 가령 사회가 실제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였다면, 그 때는 분명히 인간이 만든 법률을 강제하려고 한다든지 혹은 또 고드윈이 「적극적 제도」라고 부른 것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사회의 적이요 그들에 반항아는 아나키스트들은 비록 폭력이나 파괴를 감행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반사회적이 아니다. 아나키스트의 의논에 의하면, 아나키스트는 사회를 쇄신하는 자이고, 사회적 균형을 그 자연스런 방향으로 조정하려고 노력하는 책임있는 개인이다.
아나키즘과 유토피아 사상
사회의 기원은 자연적이고 인간의 출생 전부터 있었다고 하는 강조는 고드윈에서 현재까지의 거의 모든 아나키스트 이론가로 하여금 루소의 사회계약 사상을 거부케 하였다. 그것은 또,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평등을 강제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를 거부케 할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이전의 각종 공상적 사회주의를 또한 거부케 한다. 사실, 유토피아 사상은 대개의 아나키스트들을 접근시키지 않는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소망대로 행하여진다 하더라도 여하한 현재국가나 마찬가지로 그것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거세해 버릴 그러한 엄격한 정신구조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는 하나의 완전한 사회로서 생각되고 있다. 완전한 사물은 무엇이건 성장을 자동적으로 멈춘다. 고드윈마저, 인간은 완전하게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은 무한히 개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언명함으로써 인간의 완전 가능성에의 성급한 주장을 완화했다. 그 생각을 그는 「완전에로 이끄려갈 능력을 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완전이라는 것에 명백히 대립한다」고 논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유토피아적 사고의 엄격성을 일반으로 싫어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유토피아 속에 포함된 몇 가지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아나르코 코뮨주의자들은 원조의 「유토피아」(Utopia)에서 모어에 의하여 제창된 공동주의적 분배의 시사(示唆)에 화창(和唱)하고, 다른 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이익보다는 정열을 위하여 일하게 하는 방법에 대한 푸리에의 어떤 사상이 「게으름뱅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토론 속에 깊이 파고들어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나키스트들이 일반으로 좋아하는 단 하나의 완전한 유토피아의 비전은 『무하유향소식』(無何有鄕消息 News from Nowhere)이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현저히 접근한 윌리엄 모리스는 이 책에서, 권위의 폐허 위에 조화를 수립한다고 하는 모든 아나키스트의 꿈이 실현될 기회를 갖게 된다면 혹은 나타날지도 모를 세계의 비전―매력적인 것에는 아무런 강제의 기미가 없다―을 제시했다.
『무하유향소식』에 있어서의 모리스의 비전의 가장 흥미진진한 특징의 하나는 독자에게 보통의 시간관계가 소멸해 버린 하나의 연속체 속으로 옮겨 놓여진 듯 한 기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이다. 무하유향의 주민에게는 년대적으로는 훨씬 가까운 19세기보다도 중세는 실제로 일층 현실적이다. 진보는 하나의 필요한 선(善)이라고 하는 사상은 사라지고, 모리스가 부정하는 완전이라는 냉엄한 빛 속에서가 아니라 기나긴 여름철 오후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정적 속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그것은 빅토리아기의 생활이나, 런던이나, 사회주의자 동맹을 난파시키고 있던 신랄한 토론에 불행하게도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미래에의 방문자에 대해서만 끝나는 것이다.
아나키즘과 진보
시간이 영원의 언저리에 쉬고 있던 저 기나긴 여름의 오후에 있어서의 황금색 양광(陽光)은 아나키스트들의 마음도 또한 종종 휘어잡았다. 분명히 19세기의 대개의 좌익에 속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로 종종 진보에 대하여 말했다. 고드윈은 무한히 진보하는 인간을 꿈꾸었고, 크로포트킨은 조심스레 아나키즘과 진화를 결부했고, 프루동은 실제로 『진보의 철학』을 썼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보통 빅토리아 시대의 의미에 있어서의 진보적이라고, 또는 더욱 복잡한 형태―이 경우는 사회적 형태―에의 발달을 원한다는 보통으로 이해되고 있는 의미에 있어서 발전적이라고, 보여지는 것은 다만 조건부로서 뿐이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아나키즘에 있어서의 진보적 요소의 존재를 부정해 왔으며 반동적 경향을 가졌다고 아나키스트들을 비난조차 해왔다. 그들 자신의 견지에서 말한다면, 그들은 전혀 잘못 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발달에 대한 그 태도에 있어서 아나키즘은 종종 이상화한 미래와 이상화한 과거와의 천연자석의 중간에 드리워져 있는 마호메트의 관(棺)처럼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아나키스트가 보는 과거는 정녕 헤시오도스나 플라톤의 황금시대가 아니라 숫제 저 고대의 비전에 달아 있다. 그것은 조직된 정부 아래서라기보다 오히려 협동에 의하여 존재한―혹은 존재했다고 상상되는―온갖 사회의 일종의 혼합물이다. 그 구성요소는 온갖 사회와 온갖 역사에서 모아진다. 러시아의 미르라는 농민공동체, 아트라스 산맥의 카바이르인의 촌조직, 유럽의 중세 자유도시, 엣세네파 신도나 초기 크리스트 교도나 도코보르ㅡ의 사회, 어떤 원시종족의 습관 중에 있는 재산의 공유, 이러한 모든 것이 국가란 기구가 필요치 않은 예로서 아나키스트 이론가를 유인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이러한 「자주인」의 과거의 단편 속에 생활하고 있었을 인간의 고찰에 향수의 생각과 함께 유도한다. 크로포트킨이 특히 이들의 초기의 사회에 대하여 해석한 정확성은, 습관이란 폭정이 얼마나 공공연한 권위의 대신 역할을 하고 있었던가에 충분한 설명이 없다는 이유로, 의심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과거에 대한 이 견해의 결점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보여 주는 태도, 즉 모든 <비권위주의적> 사회를 연결하는 연속성―전통이라 해도 좋을―을 확립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소박한 생활과 자연에의 친화를 적극적인 덕(德)으로 보는 태도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스트와 농민
여기서 우리는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사이에 또 하나의 중요한 상위가 있다는 것을 본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소박한 사람들을 이미 지나간 사회진화의 한 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거부한다. 그에게는 종족민, 농민, 소직인(小職人) 따위는 모두 부르주아지나 귀족과 함께 역사의 유물 위에 쌓 재여진다. 공산주의자의 현실정책은, 현재의 극동에 있어서와 같이, 때로는 농민과의 접근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의 목적은 항상 농민을 농업 프롤레타리아로 바꾸어 놓는데 있다. 다른 편, 아나키스트들은 농민 속에 매우 큰 희망을 걸어 왔다. 농민은 대지에 친숙하고, 자연에 친숙하고, 그런 까닭으로 그의 반응방식은 보다 「아나키적」이다. 자연적인 농민봉기는 혁명을 위한 바쿠닌의 이상이었으니, 농민반란은 그 미완성형태라고 봤다. 더욱이 농민은 역사적 환경에 의하여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협동이란 긴 전통의 계승자다.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은 농민의 사회에 있어서의 이러한 경향을 시인함에 있어서, 농민사회가 점점 번영하는데 따라―역사에 있어서 알려져 있는 한의 다른 모든 발전하는 사회와 마찬가지로―부농, 빈농, 노동자라는 계급제도의 확립에 이르게 되는 부와 지위의 차별을 나타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아나키즘은 안다르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빈농들 간에 강력한 대중운동을 일으켰으나 그보다 부유한 농민들 간에서는 이렇다 할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민전쟁 초기에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지지된 집산주의적 조직을 아라곤의 포도 재배자들이 채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은 도우르티와 그의 의용군의 공포였을 뿐이다.
아나키스트와 근대산업조직
아나키스트는 자연적 자발적 개별적 인간에 대한 숭배에 의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그 유토피아에의 서곡이라고 보고 있는 근대의 산업적 국가 통제적 사회의 고도로 조직화한 구조에 대립하고 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즘과 같은 교의에 의하여 산업세계를 포섭하려는 노력마저 산업세계에 대립하는 급격한 반동―노동자들을 도덕적 개혁자로 보는 신비적 비전으로 이끄는―과 혼동되어 왔다. 생디칼리스트마저 금일(今日)의 산업사회가 영속할 것을 냉정히 예견하지는 못했다.
사실 파리, 리용 지방, 마르세이유, 바르세르나, 그리로 밀라노의 공업 노동자들이란 독립지대를 제외하고는 아나키즘의 매력은, 산업계에 있어서의 기계조직과 획일화로 향하는 일반적 방향의 권외에 있는 계급간에 언제나 가장 강했다.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의 대부분은 귀족이거나 지방지주출신이었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바쿠닌, 크로포트킨, 체르게소프,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마라테스타, 카피엘로 등은 전형적 예이다. 또한 고드윈, 도메라 뉴엔하우스, 세바스챤 폴과 같은 사람들은 기왕에 목사나 선교사였다. 나머지 사람들 중에는 직인 계급―전통적 장인―이 아마도 가장 중요하다. 아나키스트 투사에는 놀랄 만큼 큰 비율의 제화공과 인쇄공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시대―프랑스에서 189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는 1940년대―에 있어서는 매스 밸류에 반항하는 지식인과 예술가의 꽤 많은 수가 아나키즘에 끌렸다. 마르크스가 사회의 계층화란 그의 분명한 어느 형에도 결국 안들어 맞는다 해서 그 대부분을 경멸한 계급 탈락자의 요소를 아나키스트들은 자연스런 반역자로서 환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아나키스트 운동은 반란이 범죄행위와 얽혀 있는 어두운 세계에, 바르사크의 보트랑과 현실생활에서의 그 사본(寫本)들의 세계에, 항상 연결을 갖고 있다.
이들의 요소는 주로 현대 국가와 현대 자본주의자 또는 공산주의 경제에 대한 그들의 대립에 있어서 일체가 된다. 그들은 반란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과거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 속에는 없는 개인의 자유란 이상을 위해서다. 이 사실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깊게 아나키스트의 진보주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확실히 금일 존재하는 바와 같은 사회를 그대로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아나키스트는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후퇴―소박화의 선에 따른 후퇴―를 의도하고 있다.
소박한 생활에의 충동
이것은 물론 사회개조를 위한 아나키스트의 제안에 나타난다. 그는 파괴하고, 근저(根底)까지 돌아가, 그리하여―아나키스트의 애용하는 말을 쓰면―「생산점」위에 어떤 필요한 조직을 구축하려고 한다. 이 권위와 정부의 소멸, 책임의 분산, 국가나 그와 유사한 획일적 조직을 사회의 기본단위가 주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연합주의에 의하여 바꿔놓을 것―이는 여러 가지 길에 있어서 아나키스트들이 모두 바래 왔던 것이고 그러한 바램은 필연적으로 소박화의 방침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회의 소박화에의 충동이 단지 사회를 훨씬 유효하게 움직이려는 희망에서가 아니고, 혹은 단지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권위기관을 제거하려는 소원에서도 아니고, 주로 보다 소박한 생활의 덕에 대한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아나키스트의 태도의 본질을 잘못보게 될 것이다.
아나키즘에 있어서의 깊은 도덕주의의 요소는 아나키즘을 단순한 정치적 주의 이상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이 점에 충분한 고찰이 없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인습적 도덕을 거부만 하고 그들 자신의 철학이 지닌 바 이 측면을 강조하기를 싫어한 아나키스트 자신들의 탓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화에의 운동은 확실히 아나키스트 사상에 침투한 금욕적 태도의 중요한 부분이다. 아나키스트는 단지 부유한 사람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부 자체에 대하여 노여움을 느낀다. 그의 눈에는 가난한 사람이 궁핍의 희생으로 보이듯이 부유한 사람은 사치의 희생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치스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현혹시킨 저 비전은 결코 아나키스트에게 호소력력을 갖지 못했다. 그들의 태도는 프루동이 『전쟁과 평화』(La Guerre et la paix)에서 요구휼(要救恤)상태(pauperism)와 빈곤(poverty) 간의 구별을 지적하는 데서 표현되었다. 요구휼상태는 순전한 궁핍(destitution)이다. 빈곤은 사람이 자기의 노동에 의하여 자기의 요구에 충분한 것을 얻는 상태다. 이 상태를 프루동은 인간의 이상적 상태로서 서정적인 말로 찬미한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가장 자유롭고,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의 감각과 욕망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을 가장 고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기에 충분한 양―그것이 물질세계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요구의 한도다. 그것이 비단 이론적 한도만이 아니었음은 스페인 시민전쟁의 초기에 권위를 축출하고 아나키스트의 에덴 동산을 만들기 시작한 안다르시아의 마을에 대하여 파란쯔 보르케나우가 한 놀랄 만한 설명에서 강조되고 있다. 극도로 조심스레 촌민은 소박을 구하고, 죄 많은 지난날 그들의 것이었던 가난한 생활마저 목표로 했다. 그들은 술집(continas)을 문닫고, 이웃 콤뮨과의 교환계획에서 커피와 같은 죄 없는 사치품마저 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사람들은 물론 모두가 아나키즘의 열광적 사도는 아니었다. 그들 주의 많은 사람은 역사의 한 순간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던 신앙의 도덕적 차원에 의하여 영감 주어진 보통 촌민이었다.
프루동과 안다르시아 촌의 금욕주의자들은 아나키즘 운동에 있어서 고립해 있지는 않았다. 일단 소박한 필수품이 충족시켜지고 나서는 사람들이 그 마음과 감성을 닦기 위한 여가를 가지게 될 사회에 공명(共鳴)하는 사상은 아나키즘 문헌의 도처에 나타난다.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The Conquest of Breed)에서 이 주장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치에의 요구」(Need of Luxury)라는 한 장을 넣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살펴 보면, 그가 사치를 물질적인 향락으로서가 아니라 「과학, 특히 과학적 발견과 예술, 특히 예술적 창조와의 보다 높은 기쁨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고(勞苦)를 경감하는 생활의 소박화에 의하여 사람은 그 배려를 그와 같은 고귀한 활동에 기울이고 죽음도 벌써 공포가 아니게 되는 철학적인 마음의 평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 아나키스트는 믿고 있다. 여기서도 또한 그 비전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것은 프루동이다. 그는 『정의에 대하여』(De la justice)에서 인간의 생활은 사랑과 일과 「사회적 공유 즉 정의」를 포함할 때 비로소 알찬 것으로 된다고 말한다. 「만일 이러한 조건들이 만족시켜진다면, 생활은 풍부하게 된다. 그것은 즐거움이요, 사랑의 노래이고, 영원의 열광, 행복에의 끝없는 찬미가이다. 어느 때 죽음의 신호가 오더라도 사람은 준비가 되어 있다. 고 하는 것은 그가 항상 죽음 속에 있고, 이는 또 그가 생명과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선언한다.
필연성의 부정
생활을 소박화한다는 비전에 좀 자세히 들어감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이 분명히 되었을 것이다. 즉 아나키스트는 물질적 부와 생활의 복잡성이 확실히 증대한다는 견지에서가 아니라 권위, 불평등, 경제적 착취의 폐지에 의하여 사회를 도덕화하는 견지에서 진보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히 되면, 자연적인 과정이 사회와 개인의 생활 위에 그 영향을 돌이키고, 인간을 동물 이상의 것으로 되게 하는 정신에 따라 인간이 내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되는 상태로 우리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프루동이 『진보의 철학』에서 균형의 존재가 우주에 있어서의 끝없는 운동에 대하여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본다. 진보는 무한이어서 끝이 없고 또 보통 의미에서의 목적지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끊임없는 변형」이요, 절대의 부정이요 우주의 운동의 긍정이고, 그 결과 불변의 형식과 정칙(定則)의 부정이고 영원, 영속성, 무과오의 모든 교의의 부정이고, 우주의 그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고정된 절서의 부정이고, 정신적인 또는 초월적인 불변의 주체 또는 객체의 부정이다. 그 법칙은 거의 헤라클레이토스적이다. 그것은 헤겔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변증법적 전진운동 보다 차라리 결코 끝나지 않을 변화의 흐름을 시사한다. 그것은 역사가 균형적 제력(諸力)의 합류 속에서 그 모든 경직성을 상실하는 그러한 세계를 시사한다. 그것은 모순을 적극적인 생산적 요소로서 시사하고, 불완전이야말로 영속하는 운동의 원인이자 결과인 고로 끊임없이 변화하여 완전이란 정지상태에 결코 도달하는 일이 없는 세계에 있어서의 율동적 상태로서 균형을 시사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 이론 중에는 필연적 과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표시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인상을 남김으로써 이 장을 맺는다면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을 잘못 전한 것이 될 것이다. 아나키스트에게는, 때로는 그의 교설(敎說) 중에 전후가 모순하여 과학적 결정론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하한 특별한 사건도 필연적이 아니고, 또 확실히 인간사회 속에는 여하한 특별한 사건도 없다. 그에 대하여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생각하는 변증법적 필연이란 철(鐵)의 궤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투쟁에서 나타나고 인간의 투쟁은 인간 속의 자유로운 자각이란 불꽃으로 말미암아 자유에의 끊임없는 자극을 일으키는 여하한 충동―이성에 있어서의 또는 본성에 있어서의―에도 호응하는 인간의 의지작용이 산출한 것이다.
아나키즘과 정치
아나키즘을 정치의 세계로 이끄는 것은 이 투쟁의 필요에 대한 자각이고, 사회의 해방을 성취하는 데는 실제적 수단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자각이다. 여기서 나는 논쟁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들은 사회변혁을 성취하는 데에 써야 할 전술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자기자신을 비정치적 또는 반정치적이라고 보고 있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와의 사이의 가장 격렬한 전투는 평등한 사회란 것이 국가기구의 장악을 목표로 한 노동자들의 정당에 의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어졌다.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적 행동을 모두 부정하고 국가는 장악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폐지되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해 왔다. 그리고 또 사회혁명은, 비록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하한 계급의 독재도 가져와서는 안되고, 모든 계급의 폐지를 성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언해 왔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용감한 신세계』(Brave New World)나 『1984년』과 같은 반(反)유토피아가 유토피아 문학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의 반정치는 투쟁의 상대방인 통치제도 자체에 의하여 조건 붙여진 정치적 역사의 일부이다. 아나키즘의 발전은 중앙집권구가의 발전과 병행하여 나가고, 그리고 몇 천년 동안 스페인 공화국의 붕괴와 함께 그것이 수적으로 중요한 운동으로서는 소멸하기까지, 아나키즘은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의 정치적 형태의 불가결의 일부였다.
정치적으로 지배된 세계에서는 전략으로서 정치를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과 정치운동 자체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공격과의 사이의 날카로운 상위는 일부는 <자주인적> 개인주의에서 발생하고, 또 일부는 적어도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수단은 목적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우리가 이미 보아온 확신에서 발생한다. 비유컨대 사람은 악마의 손으로 악마를 몰아낼 수는 없다고 하는 크리스트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아나키스트들은 통치행위와 인위적 법률에 의하여 사회변혁을 규제하려고 하는 생각에 기초를 둔 모든 제도와 정당을 반혁명적이라고 본다. 그 논거로서 정치적 수단에 의하여 수행된 모든 혁명은 독재로 끝났다는 사실을 아나키스트들은 지적한다. 강제에 호소함은 혁명의 성질을 변질시키고 혁명적 이상을 배반해 왔다. 아나키스트들이 그와 같은 정치적 행동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개량주의―사회는 조금씩 변혁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공격하고 자본주의국가와 아나키적 사회간의 이행기(移行期)에 관한 이론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이다. 사회가 일약 완전한 자유로 돌입하기는 사실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그의 목적만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그의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고 부자유한 사회의 모든 약점을 이용해야 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 까닭에 아나키스트들은 「직접행동」의 이론에다 그들의 전술의 기초를 두고, 그들의 수단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경제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수단은 온갖 전술의 범위―제네스트와 병역거부에서 협동조합적 사회와 신용조합의 형성에 이르는―를 포함하고 이것들은 현존질서의 소멸을 목적으로 하고, 사회혁명을 준비하거나 또는 일단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그것이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것을 확실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수단과 정치적 수단간의 구별은 실제로는 아나키스트들이 보통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히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정치구조의 변혁―혹은 그 구조의 소멸―을 목적으로 하는 제네스트란 것은, 크라우제비쯔가 전쟁에 대하여 말한 것처럼, 실제는 정치 이외의 수단에 의하여 실행되는 정치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이 여러 시대에 폭력적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변호된 폭동주의와 1880년대의 소수 테러리스트에 의하여 실행된 암살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이 문제는 아나키스트의 직접행동주의와 다른 좌익운동의 방법간에 참된 상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매하게 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고 하는 것은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옹호된 모든 종류의 전술을 결부하고 특징지우는 것은, 아무리 그것들이 폭력과 비폭력, 집단행동과 개인행동 따위의 문제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국 개인의 결정에 직접 기초를 두공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개인은 자발적으로 제네스트에 참가하고, 자유의지에 의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또는 병역을 거부하고 또는 폭동에 참가한다. 책임에 대하여 아무런 강제나 위임은 나오지 않는다. 개인은 자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 가거나 오거나, 행동하거나 행동을 거절하거나 한다. 혁명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이미지가 민중의 자발적인 봉기라는 형태를 실지로 가장 자주 취한다는 것은 정말이다. 그런데 민중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의미에서의 대중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그들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신 행동의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최고의 개인의 집합으로서 보여지고 있다.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기초한 혁명적 행동의 수단은 물론 자유로운 사회의 목적과 평행하여 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사회적 경제적 업무의 관리는 작은 지방적 및 기능적 집단에 의하여 수행될 것이다. 이 집단은 분산하고 비관료화하고 그리고 고도로 단순화한 생활에 대하여 필요한 주권의 최소한의 희생밖에 개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개인은 사실 자기들 자신을 콤뮨이나 노동자협회에 연합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역적인 몇 개의 단위로 연합하여, 사람들을 짓밟는 권위는 조정정(調整役)의 위원들에 의하여 바꿔 놓일 것이다. 상호부조라는 자연스런 행위에 기초하여 제(諸)이익을 균형시키는 이 유기적 망상조직(網狀組織) 속에서 강제라는 인위적인 형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거부
개인적 선택의 지고성(至高性)에 대한 극도의 관심은 혁명의 전술과 미래사회의 구조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생각을 지배할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아나키스트가 독재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이유도 설명한다. 아나키즘을 민주주의의 극단의 형태로 보는 것만큼 아나키즘의 개념상 진실로부터 거리가 먼 것은 없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주권을 옹호한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주권을 옹호한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아나키스들이 민주주의의 형식과 견해의 많은 것을 거부함을 의미한다. 의회제도는 개인이 그의 주권을 대표자에게 넘겨줌으로써 주권을 버림을 의미하는 까닭으로 거부된다. 한번 개인이 버리고 나면, 많은 결정은 그의 이름으로 지어지고, 그는 벌써 그것에 대하여 여하한 통제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은 상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투표는 자유를 배반하는 행위라고 본다. 「보통선거는 반혁명이다」라고 프루동은 부르짖고 그의 후계자들은 아무도 그를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대립은 형식에 관한 논쟁보다 훨씬 깊이 나간다. 아나키스트는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과는 별개의 실재로서, 인민이란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또 인민의 정부를 부정한다. 이 점에 관하여 와일드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아나키스트들을 편들고 있는 것이다. 「군주정치를 군중과 구별할 필요는 없다. 모든 권위는 한가지로 나쁘다.」 특히 아나키스트는 그 의지를 소수자에게 강제하는 다수자의 권리를 거부한다. 올바름은 수에 있지 않고 이성에 있다. 정의는 머리 수를 헤아리는 데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서 찾아진다. 「내가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을 바칠 수 있는 힘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즉 나 자신의 오성(悟性)의 결정, 나 자신의 양심의 명령」이라고 고드윈은 말했다. 그리고 프루동은 「누구든지 나를 지배하려고 획책하는 자는 횡령자요 폭군이다. 나는 그 자를 나의 적이라 선언한다」고 가슴을 펴고 선언했을 때,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나키스트의 이상은 그 논리의 궁극까지 밀고 나간 민주주의와 같은 그러한 것이 아니고 보편화하고 순수화한 귀족주의에 한결 가깝다. 여기서 역사의 나선(螺旋)은 완전히 일회전했다. 그리고 귀족주의가―테렘의 승원(僧院)의 라브레의 비전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귀인들의 자유를 요구한 곳에서 아나키즘은 항상 자유인의 고결함을 주장해 왔다. 아나키의 궁극의 비전에 있어서 이들 자유인은, 신과 같이, 우뚝 선다. 쇠리가 묘사하듯이, 군주들의 탄생이다.
그 밉상스런 가면은 벗겨져 떨어진 것입니다.
인류는 벌써 홀(笏)도 없고 자유롭고 속박도 없어
평등한 인간이 되고, 계급도 종족도 국가의 구별도 없고
공포나 예배나 신분의 차별에서도 면하여 있고
자기를 지배하는 왕자로 되어 바르게 다정하게 어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번뇌가 없어졌을까요―아닙니다.
죄나 고통은 인간의 의지가 지어서 맛본 것이니까
일찍이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노예와 같이 다스리기는 하더라도
운명이나 죽음이나 무상함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장애만 없었으면 허공의 극의 정점에 가서
아직 아무도 오른 일이 없는 하늘의 높은 끝의 별까지라도
훨훨 넘어 올라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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