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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아나키즘의 계보 /조지 우드코크George Wookcock

by 마리산인1324 2007. 7. 17.

 

http://my.dreamwiz.com/anarkhiibook/files.html

 

 

** George Woodcock의  <Anarchism: A History of Libertarian Ideas and Movements, 1962> 가운데 Part one The Idea 중 2. The Family Tree 번역

 

George Woodcock-Anarchism, A History Of Libertarian Ideas And Movements.pdf

 

아나키즘의 계보

 

- 조지 우드코크 -

 

 

2. 계 보


아나키즘과 전통

 

  아나키즘은 역설에 의하여 생기를 띠게 되고 골치를 앓기도 한 신조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창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전통을 거부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교의의 선조에 대하여 무척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관심은 아나키즘이야말로 자연스런 인간적 충동의 표명이고 <권위주의적> 제도를 만들어내는 경향은 거기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것이라고 하는 신념에서 나온다. 가령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그럴 때 아나키즘은 단지 현재의 현상에 그치는 것일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에서 보는 그 모습은 사회에 있어서의 일요소의 하나의 형태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피요트르 크로포트킨, 막스 넷트라우, 루돌푸 톡카와 같은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은 바로 이 불변이면서 또한 파악키도 어려운 요소를 추적하는 데에 크게 전심해 왔다.


  이들의 저술가가 그렇게 주의깊게 가꾸어 온 이 계보의 나무는 정말 장대하게 무성하고 사람은 그 가지의 그늘에서 몇 사람의 놀랄만한 선조에 마주친다. 크로포트킨은 아마도 모든 아나키스트 계보학자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다. 고 하는 것은, 그는 그의 신조의 참다운 기원을 개개의 사상가 속에서가 아니라 무명의 민중 속에서 구했으니 말이다. 「아나키즘은 민중 속에 기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민중의 운동에 머무르는 한에 있어서만, 그 생명력과 창조력을 유지할 것이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에서 이 신념은 역사의 술어로 다듬어지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이 책에서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사상과 행동에 대한 두 개의 흐름이 인간사회의 한복판에서 서로 싸워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한편은 「상호부조」의 경향인데, 이것은 종족의 관습, 부락공동체, 중세의 길드 및 사실상 「입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창조정신에 의하여 발전하고 성취된」 모든 조직에 있어서 예증된다. 그리고 다른편은 <권력주의적> 흐름인데, 그것은 「마기, 샤만교의 도사, 마법사, 기우사, 예언자 및 승려로써 시작되고 계속해서 법률기록자 및 「군단의 수령」을 포함한다. 크로포트킨은 독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했다. 「아나키는 분명코 이들 두 개의 흐름의 전자로서 나타난다. ……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시대에 아나키스트와 국가주의자가 존재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대목에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근원은 「최고(最古)의 고대 석기시대」에 발견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추측하고, 선사시대에 대한 이 아주 개인적인 견해에서, 반항운동의 모든 음정을 통하여 영국의 초기 노동조합에까지 더듬어 간다. 그리하여 「이것들이 우리가 역사상 알고 있는 주요한 일반적인 아나키스트의 흐름이라」는 최종결론에 도달한다.


  이름도 없고 말도 없는 민중 속의 아나키즘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연구와 병행하여, 이 운동에 대한 다른 역사가들의, 과거의 철학자나 저술가의 사상 속에 아나키즘적 요소를 구하는 연구도 행하여지고 있다. 노자, 아리스팁포스, 제논, 에치엔느 도 라 보에시, 페넬론과 디도로가 여기에 참열(參列)하고, 테렘 승원의 유쾌한 기사의 유토피아를 쓴 라보레도, 그 「너의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자주인>의 표어를 강하게 표방하고 있는 점에서, 이 예에 첨가된다. 재세례파, 후드파 도코볼 및 역세네파와 같은 종교운동이 일괄적으로 여기에 주장되고 「아나키의 참된 창설자는 예수 크라이스트이고…… 최초의 아니키스트 사회는 사종(使從)들의 그것이었다」고 단언한 것은 결코 프랑스의 톨스토이주의자 루샤르티에 한 사람에 그치지는 않았다. 아나키즘에 관한 최근의 두 사람의 역사가 아란 세르쟌과 크로드 아르메르는 18세기의 에에토르피니의 교구목사 쟌 메리에 속에 최초의 아나키스트를 발견했다. 당시의 성계와 속계의 권위에 대한 그의 격심한 분개가 그로 하여금 시골의 교구민에게 위대한 유언서를 남기게 했다. (그것은 그의 사후 교회권력에 의하여 탈취되고 정작 농민들의 손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그 가운데서 모든 종류의 권위를 비난하고, 농민공동체 속의 우애에 바탕한 목가적 사회를 옹호했다. 미국의 제임스 A. 프루 교수는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의 요지는―모든 아나키즘 사상의 요지도 또한 그렇다고 시애(示唉)하고 있다―『가리바 여행기』 제4권 속에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끔 밝혔다. 이 토리당의 장로 속에 위장된 아나키스트의 선조를 인정한 것은 그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가지를 펼친 이 계통수의 뿌리는 그 가지의 꼭대기를 버티어 주기에는 너무도 약하다. 아나키스트라고 불리워지는 저술가들에 대한 대체적 연구마저, 아나키즘의 전사(前史)로서 종종 주장되어 온 것은, 오히려 운동이나 그 이론에다 권위를 붙여주기 위하여 만들어낸 신화이고, 그것은 원시 씨족이나 종족이 전통이나 타부에 권위를 주기 위하여 토템신화를 만들어낸 것과 똑같은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신화는 반란과 자유에의 소망이 다 같이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고래(古來)의 요소이긴 하나, 그것들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한다고 하는데 대한 인식부족에 의하여 지탱해 왔다. 예컨대 부루터스나 스파르탁스와 같은 고전적 고대의 위대한 전형적 반역자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인식한다. 즉 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란 현상을 위하여 성심성의 분투했다고는 하지만 독재의 위협에 항거하여 귀족의 과현정치의 이익을 위해서 싸운 부루터스도, 노예가 그들의 파괴된 생활을 자국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방을 요구한 스파르탁스도, 19세기의 아나키스트가 점점 중앙집권화하고 기계화해가는 자본주의국가에 대한 반발로서 전개한 경제적 평등과 계급 없는 자유란 특수한 개념을 공통으로 갖고 있지도 않으며 또 이해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근대적 아나키즘

 

  일반적으로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은 아나키즘의 핵심에 있는 어떤 태도―인간의 본질적 품성에 대한 신뢰,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한 원망(願望), 지배의 부정―를 역사의 어떤 특정의 시대에 나타나 특수한 이론, 목적, 방법을 갖고 있는 운동 및 신조로서의 아나키즘과 혼동해 왔다. 핵심으로 되고 있는 태도는 확실히 역사를 통하여 적어도 고대 그리스까지 소급하면서 발견된다. 그러나 발전한, 명확한, 뚜렷이 그것으로 나타난 경향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자각한 사회적 정치적 혁명이란 근대의 시기에서만 나타난다.


  도덕적인 비전과 급진적 사회비판과의 그 특수한 결합은 중세질서가 무너진 뒤에 비로소 현저한 형태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 붕괴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와 근대 중앙집권국가의 융흥(隆興)에로 이끌어간 것이지만 다른편으로는 또 19세기에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과의 항쟁 속에서 성숙한 <권위주의적> 흐름과 <자주인적> 흐름을 일찍부터 나타내기 시작한 혁명적 경향의 출현에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농민의 반항운동의 한계

 

  중세사회의 대분해가, 그 가닥을 구별하기는 매우 어려우나, 교회적 사회적 정치적 형태를 띠었던 것과 똑같이 반항의 운동은 17세기의 말기까지 3중의 국면을 갖고 있었다. 이 시대의 극단적 사회비판은 휴머니스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서의 원의(原義)를 존중하는 종교적 이단자들에 의하여 발언되었다. 그들은 자구(字句)대로의 성서해석에 기초하여 교회 및 현행권위와 사유재산의 제도를 양편 다 공격했다. 그들의 요구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자연적 정의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걸인승(乞人僧) 죤 볼이 사실 그것을 노래했든지 안했든지 간에 유명한 이행 연구(連句)―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질삼했을 때,
  도대체 누구 지주였단 말인가.

 

―에는, 잃어버린 소박성으로 향하는 조짐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3백년 뒤에도 역시 공화정치시대의 팜플렛 속에 되풀이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14세기, 독일에서는 16세기 초에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의 요구는 그 자체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불평분자들은 승려와 영주에 의한 과세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들은 대개 숨져 가는 농노제도의 완전한 멸망을 바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개혁자의 요구를 넘어 갔던 것은 그들 주에서도 소수였다. 그리고 봉건제도의 어떤 측면에 대한 소박한 신앙은 영국의 농민들이 그들의 지도자 왓트 타일러가 살해된 뒤에도 왕국 리챠드 2세와의 약속에 신뢰를 두고 있었음에 의하여 표시된다. 그들의 태도는 1905년에 가본신부의 뒤를 따라 동궁으로 향하여 행진한 무식한 러시아인의 그것과 비교되겠다.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아직도 반(半)봉건적 세계에 있어서의 저 상징적인 신부였던 쯔아의 이해있는 동정을 얻게 되리라는 어리석은 비극적 희망을 품었던 것인데 실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총탄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의 농민주도자 중에는 그후 아나키즘으로 발전한 사회비판의 최초의 징후가 나타났다. 후로와살이 보존해 온 죤 볼의 연설의 단편―중세의 암흑에서 반쯤 얼굴을 내어민 저 격렬한 성격의 사나이가 가진 의견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전부―은 재산과 권위를 둘 다 공격하고 양자간의 연결에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19세기의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발전시켜진 이론의 선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재산이 공유되어 농노도 지주도 없어지고 우리가 평등하게 될 때까지는 잉글랜드에 있어서 사태가 잘 되어 갈 수 없고 장래도 결코 잘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우리가 영주라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들보다도 특권을 얻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것을 가질만한 가치가 있게 되었는가. 무슨 까닭으로 그들은 우리 예속의 신세가 되게 했는가. 가령 우리가 모두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 즉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면 어찌해서 그들은 우리보다 주인에 어울린다고 주장하고 또는 증명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들은 자기네의 소비를 위하여 우리를 부려먹고 생산시키는 이외에 주인이라 할만한 요소가 있을 리 없다.

 

  이 연설의 어조는, 설사 기록자가 세부를 격렬한 표현으로 고쳤다 치더라도, 신뢰할 수 있을만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종교개혁이 더욱 과격한 형태로 발전함에 따라 흔히 보게 되는 저 종교적 격앙과 사회적 비난과의 특수한 혼합이다. 그러나 볼은 사유재산을 비난하고 평등을 요구했지만 정부 자체를 특히 거부한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는 <권위주의적> 틀 속에서 평등주의적 공산주의에의 요구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상적 평등사회의 최초의 문학적 표현인 토마스 모아 경(卿)의 『유토피아』(1516)는 복잡한 수속을 거쳐 뽑힌 권력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으며 개개인의 행동에다 엄격한 규칙을 부과한다. 그리고 토마스 뮨짜가 지도한 독일의 농민반란이나 뮨스타의 재세례파의 자치공화체 속에 아나키즘의 요소를 발견코자 하는 노력을 해 왔지만, 그들의 어떤 지도자의 말 속에 시사된 <반권위주의적> 태도는 어느 것이나 그 실천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뮨짜는 권위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권위 없이 해나갈 수 있는 사회형태를 위해서는 아무런 구체적 제안도 내놓지 않았으며 그가 이상적 공화국을 뮤르하우젠에 건설하려고 했을 때 실제로는 아나키즘 사회와 비슷한 것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엥겔스는 『독일농민전쟁』에서 그 상황을 아주 선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모든 재산의 공유, 만인의 평등한 노동의무, 모든 권위의 폐지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뮤르하우젠은 얼마만큼의 민주주의적인 헌법을 가지고, 보통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농민집회의 통제하에 있는 의회를 가지고, 빈민에 대한 임시방편의 급식제도를 가지는 공화주의적인 제국직할도시에 불과했다. 동시대의 프로테스탄트의 중산계급에 그렇게도 무섭게 보였던 사회변혁은 실제는 후년의 부르조아 사회를 조숙하게도 설립하려고 하는 취약한 무의식적 시험을 넘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재세례파는 어쨌느냐 하면, 지상의 권위에 대한 그들은 비난은 그들의 신권정치적 경향에 의하여 취소되었으며 뮨스타에서 억지로 공산주의를 강제하려고 한 것에도, 재세례파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고을에서 추방한 것에도, 혹은 또 사본이나 악기의 파괴에까지 이른 퓨리탄적 우상파괴 속에도, 참다운 <자주인적> 경향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뮨스타의 자치공화체의 질풍의 역사에 있어서 재세례파성도의 소그룹은 거의 전기간에 걸쳐 오히려 무자비한 권위를 휘둘은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는 얀 오브 라이덴이 크리스트의 재림을 준비하는 제5왕국의 선구가 되도록 운명지어진 현세의 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비단 정신적 지도자 뿐 아니라 이 도시의 세속적 지배자로 되었다.

 

세속적 및 종교적 개인주의의 발전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운동에 결여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개인주의의 요소인 바, 만일 그것이 있었다면, 그들의 평등주의도 균형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을 신들에 의하여 정해진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는 중세적 경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서서(徐徐)한 과정이었으며, 아마도 농민의 반항이나 재세례파의 운동이 주로 발판으로 하는 농민과 직인계급―그들은 길드와 촌락생활의 공동체적인 형에 익숙해 있다―에 있어서는 가장 지지(遲遲)한 것이었다. 여기에 있어서 아나키스트의 사상가는, 상호부조에 근거하여, 대체로는 본래 평등주의적인 원시적 또는 중세적 씨족공동체도 또한 개인주의적이라고 보는 잘못에 빠진다. 물론 그것은 대부분 정반대로, 옛 공동체는 순응이 기대되고 예외적인 것이 백안시되는 전통적 형으로 향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중세후기의 유럽에서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처음 15세기 이탈리아 제도시의 교양있는 계급 속에 나타난다. 그것은 사회개혁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성예찬으로서 나타나 휴머니스트 학자에 의한 인간의 다면적 충실에의 소원을 발생시켰거니와 또한 마찬가지로 종종 전제군주의 교만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회질서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일으킨다. 단테의 시대이래 그것은 남유럽의 문학에 널리 퍼지고, 죠사이후 영국문학에 전파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엘리자베스왕조시대의 극, 전기, 자서전, 그리고 최후에는 소설과 같은 개인주의적인 문학형식에로 이끌어 간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배경에서라기 보다 오히려 그것에 대립하여 규정되는 인간의 정서적 심리학적 성질에 대하여 점점 관심이 깊어진 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속계에 있어서의 이러한 개인의 찬미와 병행하여 종교개혁의 후단계는 마침내 종교적 급진주의로 나아간다. 그것은 재세례파와 같은 지복천년설(至福千年說)적 일파를 넘어가서 특히 쾨커에 있어서는 조직된 형태를 거부하고 「속에 있는 빛」 즉 죠지 폭스의 이른바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신의 빛」이란 사상에 근거하여 종교에 있어서의 개인주의적 견해를 발전시킨다. 이 「속에 있는 빛」이란 사상은 톨스토이의 사상과 유사하며 내재하는 정의에 대한 몇 가지 아나키스트적 개념과 거리가 멀지 않다.


  이들의 세속적 및 종교적 경향은 모두 17세기를 개인의 자유란 가치의식이 심화하는 방향으로 추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향이 최초의 명료한 아나키스트적 운동을 산출한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내전의 기간에 있어서였다.


영국혁명에 있어서의 아나키즘, 레벨라즈

 

  이 내전을 싸운 사람들은―양편 다―일반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보다 이상으로 철저히 르네상스 개인주의의 상속자였다. 아마도 밀톤의 사탄만큼 개성의 바로크식 예찬의 훌륭한 예는 없을 것이다. 다른 편으로 칼빈주의자들에 반대한 독립파의 발흥은 종교적 및 도덕적 선택을 명령하는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크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에서 밀톤은 자유주의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주인적> 결론을 끌어냈다. 경제적 및 사회적 변혁, 초기 자본주의의 발흥과 신사층의 세력강화는 모두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한데 결합되어 극도의 정치적 긴장을 만들어냈다. 이 정치적 긴장은 반란을 경과하여 근대 최초의 혁명적 독재―크롬웰의 전체주의적 국가의 원형―에로, 게다가 또 그 부정에로 이끌어 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적인 선언에 의하여 은폐된 계급과두정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투쟁 속에 중산계급을 투입한 그 개인주의 자체가 하층계급 속에 두 개의 급진적 운동의 출현을 초래했으니 말이다. 그 중의 큰 편은 레벨라즈, 즉 챠티스트의 선조이고 보통선거권의 창도자들의 운동이었다. 그들 중의 몇몇은 월윈처럼 재산의 공유를 시사했지만, 그들의 일반적 요구는 경제적 평등이라기 보다 정치적 평등이고, 신형군(軍)의 고급장교들이 부당하게 얻은 특권을 폐지하는 민주주의적 헌법이었다. 재미나는 것은, 프랑스혁명 당시의 욕설을 선취하여 어떤 크롬웰파의 팜플렛 작자는 레벨라즈를 「스위스화하는 아나키스트」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영국 혁명운동의 진정한 아나키스트적 일익을 대표한 것은 레벨라즈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사회적 반항의 그 특수한 형태에 의하여 디가즈란 이름을 얻은 저 단명한 집단이었다.


디가즈의 아나키즘

 

  레벨라즈는 주로 신형군의 하급병사에서 모여진 것인데 그들은 전쟁에 의하여 왕권신수설에 의한 국왕의 지배에서 해방된 이 나라의 통치에 관여하고자 했다. 이와는 달리 디가즈는 대개 내전에 계속된 경제적 불황의 희생자인 빈민이고, 그들의 요구는 주로 사회적 경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부자 그대로인 사람들이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생존수단에 대한 기본적 권리마저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항의는 굶주림의 부르짖음이고, 그들의 지도자 제라드 윈스탄리와 윌리암 에봐라드는 그 시대의 고뇌를 함께 맛보았다. 윈스탄리는 기왕에는 란카시야의 의복상이었는데 런던에 와서 직물상을 개업했다가 불황으로 인하여 파산했다. 「나는 재산도 장사도 빈털털이가 되어 나를 신용해 주는 친구들의 호의를 받아들여 시골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에봐라드는 내전의 노병이었는데 레베라즈의 선전을 하다가 면직되었다.


  디가즈는 1648년에는 먼저 이론에서 시작하여 1649년에 행동으로 옮겼다. 윈스탄리의 초기 팜플렛 『진리의 대두』(Truth Lifting Up Its Head Above Scandals)는 합리주의적인 것으로서의 이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신이란 「무한의 정신 즉 이성」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이성은 어디에 존재하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 속에, 그 피조물의 성질과 존재에 따라 존재한다. 그러나 최고의 것으로서의 인간 속에 존재한다. 그런 고로 인간은 합리적인 피조물이라 불려진다.」 흥미롭게도 톨스토이를 앞질러 그는 계속한다. 「……이것은 인간 속에 있는 신의 왕국이다.」


  이 내재하는 이성으로서의 신이라고 하는 거의 범신론적인 개념에서 하나의 행위의 이론이 나왔다. 그것에 의하면, 만일 인간이 그 자신의 합리적인 성질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의 의무를 다하게될 것이다.

 

  이성으로 하여금 인간을 지배케 하라. 그러면 그는 감히 그의 동포를 침범하지 않고, 그 자신이 하여지고자 하는 그대로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 너의 이웃이 굶주리고 헐벗엇으면 너는 그에게 의식(衣食)을 주라. 내일은 네가 당할 일이 될는지도 모르며 그럴 때 이웃은 곧 너를 도울 것이다 라고.

 

  이것은 그대로 크리스트교에 가까운 바, 꼭 마찬가지로 상호부조론의 동기가 된 크로포트킨의 견해와도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진보적인 팜플렛『정의의 신법(新法)』(The New Law of Rightousness)에서 윈스탄리는 그의 사상 중의 아나키즘적 요소를 강조하는 일련의 주장을 제시한다. 크리스트를 「보편적 자유」와 같은 것으로 보면서 그는 권력의 부패한 성질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한다. 여기에 있어서 그는 정치적 권력뿐 아니라, 머슴에 대한 주인의 경제적 권력 및 자식에 대한 아비의, 처에 대한 지아비의 가족적 권력도 비판한다.

 

  무릇 권력을 손에 넣은 자는 타인을 학대한다. 세속에 사는 많은 남편, 양친, 주인 및 통치자는 그들의 처나 자식이나 머슴이나 신하들을 자기와 같은 또래이고 자유의 은혜의 한 몫을 차지한 평등한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치 압제적 영주처럼 자기의 지배하에 있는 그들에 대하여 행동한다.

 

  그러나 「자유의 은혜의 한 몫에 참여하는 평등한 특권」은 결코 추상적 특권이 아니다. 그 획득은 재산권에 대한 공격과 결부되어 있고, 여기에 있어서 윈스탄리는 경제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과의 사이의 밀접한 연결을 그의 주장에서 강조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라. 토지를 자기의 것이라 칭하고, 이 개개의 재산을 내 것 네 것이라 주장하는 자가 지배자인 한 일반민중은 그들의 자유를 결코 가지지 못할 것이며 토지는 분쟁과 억압과 불평(不平)에서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만물의 조물주는 항상 분노를 느끼고 있다.

 

  윈스탄리가 그 생애의 중대한 시점에서 품은 사회비판이, 권력과 재산의 양쪽을 <자주인적> 관점에서 거부하는 것으로 그친다 하더라도, 그가 만들고 싶어 한 평등주의적 사회에 대한 비전은 2세기경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마음 속에 그려진 이상사회의 많은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이 공정에 관한 보편적 법이 모든 남녀 속에 발생한다면, 이 때에는 누구도 피조물에 대해서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이것은 내 것 저것은 네 것, 이것은 내 일 저것은 네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토지의 경작이나 가축의 사육에 관여하고 토지의 혜택은 만인의 공유물이 될 것이다. 곡물이나 가축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마침 그의 눈에 띠이는 가까운 창고에서 가지면 된다. 사고 팔고 하는 일도 없고, 모든 토지는 만인을 위한 공동의 보고(寶庫)로 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지는 신의 것이니까…… 사람은 먹고 싶을 때나 마시고 입고 싶을 때 충분히 주어져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즐거이 이들의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데에 참여하고 서로 함께 도울 것이다. 타인을 지배하는 주인은 없고,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정의, 이성, 공정의 법에 따를 것이다. 이것이 그의 속에 존재하여 지배할 것이다. 이것이 신(the Lord)인 것이다.

 

  일은 공동으로 하고 생산물은 평등히 분배된다. 지배자가 있지 않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서로 평화롭게 생활한다. 상업은 폐지되고 자유로 출입하는 창고의 제도가 이것에 바꿔놓인다. 그것을 읽으면,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뮨주의사회를 그린 소박한 스켓치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윈스탄리가 형벌을 비난하여 범죄는 경제적 불평등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주인적> 사상가의 전방향에 선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스켓치에는 분명한 유사성에 대한 점청의 일필이 가하여 진다.

  왜냐하면 내 것 네 것이란 이 개인의 재산이 확실히 사람들에게 모든 불행을 가져왔다. 우선 첫째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떤 자가 다른 자의 것을 훔쳐낼 기회를 만들어 왔다. 둘째로, 그것은 법률로 하여금 도적질을 한 자에게 교수형을 가하게 해 왔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게끔 충동을 해 놓고 그리고선 그런 짓을 했다는 허물로 그를 죽인다. 이것이 괴상한 악마가 아니고 무엇인지 누구나 판단해 보라.

 

  윈스탄리는 사회적 부정을 끝나게 할 유일의 방법은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함에 있다고 주장하고 세계의 개혁에 있어서의 빈자의 역할을 천계적 열정을 갖고 말한다. 「신은 이제야 최하층에 출생하여 가장 멸시된 종류의 사람을 티끌 속에서 스스로 일어서게 하고 있다. …… 여기에 있어서 또 여기로부터, 정의의 법이 비로소 나온다.」 이 사람들은 부의 주요한 원천을 이루는 토지를 탈취하여 그것을 경작함으로써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윈스탄리는 주장한다. 하지만 부자의 영지를 강제로 탈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빈자는 공유지나 황무지(그것이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한다고 그는 계산한다)에 이주하여 그것을 공동을 경작할 수 있다. 그들의 예에서 사람들은 공동생활의 장점을 배울 수 있으며 대지는 만인을 위하여 자유로 충분한 것을 공급하는 「공동의 보고」로 된다. 『정의의 신법』의 최량의 페이지는 예언적인 열정의 수준으로 높여진다.

 

  그리고 신이 우리에게 장소와 수단을 보여 주신다면, 평민이라 불려지는 우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공유지에서 시비(施肥)케 하고 일하게 하려는가를 보여 주신다면, 그때 우리는 가서 행동을 선언하리라, 임금을 주고 받는 일도 없고, 내 땅도 남의 땅도 똑 같이 자유롭게 갈아, 내 이마에 땀흘려 내 빵을 먹을 것을.


디가즈의 직접행동

 

  신은 주저하지 않았다. 『정의의 신법』은 1649년 1월에 나왔고, 4월초에 윈스탄리와 그의 동지들은 월톤 온 템즈 근방 성 죠지 언덕으로 가서 직접행동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보리, 우봉, 콩의 씨를 뿌렸다. 그들은 전부가 30명 내지 40명이었는데 윈스탄리는 그 지방 농민들에게 그들의 한패가 되기를 권유했다. 그의 예언에 의하면, 그들의 수는 얼마 안 가서 5천명으로 불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디가즈는 그들의 가난한 이웃들에게조차 별로 동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지방의 승려와 지주들에게 큰 적의를 갖게 한듯 하다. 그들은 매수된 부랑자에게 두들겨맞았고 치안판사에 의하여 벌금이 과해졌다. 가축은 몰아내어지고, 싹은 뽑아 던져지고, 그들의 허술한 초가는 불살라버렸다. 그들은 페어팍스장군 앞에 호출되었다. 그는 그들을 협박하는데 실패했기에 그들을 취조하기 위하여 군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군대의 다수가 디가즈의 교의에 분명히 흥미를 표시했을 때, 군대는 소환되었다. 이 모든 어려움의 수개월을 통하여 윈스탄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한 나머지 난동을 부리는 일이 없이 폭력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팜플렛은 1649년에 연달아 나타나 그들을 인정하기를 거절한 세상에 대한 정의의 호소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런던을 둘러싼 모든 주(州)와 그론스타샤와 같이 멀리 떨어진 몇 군데서 황무지의 점유를 선동하는 그들의 지도자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디가즈의 인내력도 가차없는 박해에 대한 방류로 되지는 못했다. 1650년 3월에 개척자들은 성 죠지 언덕을 떠나 실례의 힘으로 영국을 농업 공화주의에로 설득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다른 콜로니의 혁명은 더욱 짧았고 운동으로서의 디가즈는 1650년말까지에 소멸해 버렸다.


  잠시동안 윈스탄리는 이번에는 순전히 문필이란 수단으로 그의 사상을 보급하기를 계속하고 1652년에 그의 최후 최장의 저작―『자유의 법』(The Law of Freedom in a Platform, or True Magisracy Restored)―를 크롬웰에게 제출함으로써 사태를 일변시키려고 하는 가장 가능성이 희박한 목표를 세웠다. 이 팜플렛이 전에 것보다 온건한 것은 윈스탄리의 열광과 그의 극단적인 견해가 다 같이 성 죠지 언덕의 경험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 하는 것은 그가 거의 완전한 공동주의를 계속 주창은 하나 매년의 의회를 요구하고 각종의 관사 및 감독관을 설정하고 노동의 강제를 도입하고 공동체에 반역하는 몇 가지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마저 인정하는 과격한 레베라즈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정치적 플랜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법』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했으며 이것을 출판한 뒤에 윈스탄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그의 죽은 곳과 일자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디가즈의 운동은 그 지지자의 몇 사람이 쾨커에 영향을 끼치기는 했겠지만, 후세의 사회적 정치적 운동에는 아무런 상속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사실 디가즈는 완전히 망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윌리암 고드윈조차 『공화국의 역사』(History of the Commonwealth)를 썼을 때 디가즈의 교의가 얼마나 고드윈 자신이 『정치적 정의』에서 전개한 것과 유사한가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19세기말에 겨우 근대사회사상의 선구자로서 윈스탄리의 중요성이 인정되기에 이르렀으며 그로부터 그의 공동주의적 사상을 근거로 해서 몇 사람의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를 자기네의 선구로서 주장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윈스탄리가 『정의의 신법』에서 그린 농민의 낙원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공동주의는 전혀 <자주인적>이고 윈스탄리와 그의 벗들이 성 죠지 언덕에서 그 원리를 최후까지 수행하려고 한 그 노력은 직접행동이란 아나키스트의 전통의 단서가 되는 것이다.


미국혁명에 있어서의 아나키즘, 제퍼슨

 

  미국혁명에 있어서도 프랑스혁명에 있어서도 1648년과 1649년에 디가즈가 만들어낸 만큼 예언적인 아나키스트의 미래의 상세도를 제시하는 사건이나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동안에 미국도 프랑스도 아나키스트의 사상과 행동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확실히 풍부했으나 그러나 위대한 18세기의 제혁명에 있어서 이 경향이 표시한 것은 충동적이요 불완전했다.


  토마스 제퍼슨의 민주주의 속에 아나키즘의 요소를 보는 저작가도 몇 사람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에게 따르는 여러 사람들, 특히 죠엘 바로와는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를 찬양은 했지만, 제퍼슨이 쓴 것 중에는 그가 고드윈의 견해를 그 극단의 형태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도 없고 또 그가 정치의 지나친 정도에 반대했다는 것 이상의 증거도 거의 없다. 그가 그 유명한 언명―「통치하는 바가 가장 적은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을 말했을 때, 그는 권력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만일 국민이 완전한 운영에 참가한다면, 그것은 무해한 것으로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모든 국민이 갖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그들 대중을 구성하고 있는 각인이 궁극의 권력에 참가한다면, 정부는 안태(安泰)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대중을 부패시키기에는 어떤 개인의 자력(資力)도 못미칠 것이니까.

 

  이러한 문장은 제퍼슨이 될 수 있는 대로 국민이 지배자로 되는 보통선거의 제도―다른 어떤 형의 권력이나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의 사상과 배치하는 상태―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는 또 바람직한 것으로서 「자연계에 있어서의 폭풍과 같이 정치적 세계에 필요한 것」으로서의 「때때로의 소(小)반항」에 대하여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히 이것을 혁명적인 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중화하는 힘으로서 보고 있었다. 「그것은 정부의 타락을 방지하고 공공사항에 대한 일반의 주의를 육성한다.」


  사실, 영토확장론자의 대통령으로서, 노예를 가진 봐지니아 신사로서, 타협에 능한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제퍼슨의 경력의 모든 것은 그의 저술에 있어서의 <권위주의적> 지류를 보강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의 선조를 모시는 만신전(萬神殿)에 자리를 얻으려고 하는 그의 요구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페인의 아나키즘

 

  이보다는 정당한 요구가 토마스 페인을 위하여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애는 그로 하여금 18세기 후반의 영국, 미국 및 프랑스 혁명운동에 결부된 공통한 이상의 화신으로 되게 했다. 페인의 극단적 정부불신은 확실히 고드윈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드윈은 1789년에서 1792년에 걸친 중대한 수년간에 그와 사귀고 정부의 폐해에 대한 그 의논은 『정치적 정의』의 구조의 일부로 되어 인용되고 있다. 페인은 정부가 실제로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본래적 순진성의 부패로 말미암아 초래한 매우 못마땅한 것으로 생각한 한 사람이었다.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 때 「코몬 센스」라 불려진 역사적인 팜플렛에서 그는 사회와 정부의 구별을 하고 그럼으로써 그는 그 후 고드윈에 의하여 확립된관점에 접근했다.

  어떤 저작가들은 사회와 정부를 몹시 혼동해서 양자를 거의 또는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은 양자가 비단 상이할 뿐 아니라 기원부터가 다른 것이다. 사회는 우리의 필요에서 생기고 정부는 우리의 악덕에서 생긴다. 전자는 우리의 실정(實情)을 결합시킴으로써 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후자는 우리의 악덕을 억제함으로써 소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킨다. 한편은 교제를 촉진하고 다른 편은 차별을 만들어낸다. 전자는 보호자이고, 후자는 처벌자이다.


  사회는 어떤 상태에 있어서나 환영할만한 것인데, 정부는 그 최량의 상태에 있어서조차 필요악에 불과하다. 그 최악의 상태에 있어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부가 없는 나라에서 부닥칠지도 모를 그러한 불행에, 정부에 의하여 괴롭힘을 당하거나 또는 봉착할 때에는,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는 이 수단을 제 손으로 만들고 있다고 반성함으로써, 불행은 더하여 오기 때문이다. 정부는, 의복과 마찬가지로, 순결을 잃은 징표다. 왕의 궁전은 파라다이스의 주가(住家)의 폐허 위에 세워져 있다.

 

  페인의 정부불신은 일관한 것이었다. 사실 그 불신은, 그가 정직하였기 때문에 혁명정부에 있어서조차 그가 직면한 모든 곤란에 의하여 아마도 증대했을 것이다. 16년 뒤에 『인간의 권리』에서 그는 정부에의 요구에 대하여, 크로포트킨이 뒤에 『상호부조론』의 주제로 한 저 자연스런 사회적 충동이란 유익한 영향을 대치했다.

 

  인류간에 지배하는 질서의 대부분은 정부의 영향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근원을 사회의 원리와 인간의 자연스런 구조 속에 갖고 있다. 그것은 정부에 앞서서 존재했으며 정부란 형식이 폐지되더라도 존속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문명사회의 모든 부분이 상호간에 대하여 가지는 바 상호적 의존과 호혜적 이익은 사회를 결합시키는 저 위대한 연결의 사슬을 만들어낸다. 토지소유자, 농업자, 제조업자, 대상인, 소상인, 그리고 모든 직업의 사람들은 각자가 타인으로부터 또 전체로부터 받아들이는 원조로 말미암아 번영한다. 공통의 이익이 그들의 관계를 규제하고, 그들의 법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공통의 관습이 정하는 법은 정부의 법률보다 큰 영향을 갖고 있다.

 

  같은 책에서 페인은, 고드윈과 같이, 「사회에의 자연적 경향」에 대한 방해물인 정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가장 완전한 문명은 문명이 스스로의 일을 규제하고 스스로를 지배하면 할수록, 그 때문에 정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적게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전형적 아나키스트를 특징짓는 것으로 보아 온 견해가 있다. 그는 정부가 지배하는 사악한 현재에 서서 소박한 순결을 지닌 잃어버린 낙원을 돌이켜 보고, 문명화한 소박성이 자유의 황금시대를 재건할 미래가 올 것을 기대한다. 기질과 이상에 있어서 페인은 아나키스트에 매우 가깝다, 가까이 예견되는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의 결여만이 그가 아나키스트의 한 사람으로 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다.


  미국혁명에 있어서 토착한 아나키즘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영국혁명에 있어서는 디가즈를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갈라놓았던 깊은 사회적 분열을, 외국의 압박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공통한 충동으로 엄폐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분열은 19세기에 와서야 겨우 실제로 명백히 되었다.


프랑스혁명에 있어서의 아나키즘, 크로포트킨의 분석

 

  다른 편으로 프랑스혁명에 있어서는 <자주인적> 경향과 <권위주의적> 경향의 충돌은 명백하고 종종 폭력적 형태를 취했다. 크로포트킨은 그의 가장 학문적인 저서의 하나인 『프랑스대혁명』(The Great French Revolution)을 1789년에서 1793년의 쟈코방 지배 붕괴에 이르는 폭동의 세월의 민중운동을 해명하는 데에 바쳤다. 그의 아나키스트적 경향은 <자주인적> 요소를 과도로 강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또 그로 하여금 프랑스혁명의 제사건을 정당이나 인간들 사이의 단순한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부각시켜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끔 했다.


  우리는 확실히, 크로포트킨에 따라, 마침내 19세기의 아나키즘에로 형태화한 몇가지의 사상이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장래성 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인 콘도르세는 계급없는 자유에로의 인간의 무한한 진보를 믿고 있었으며, 쟈코방파로부터 숨어 있던 때에 프루동의 아나키즘에 있어서의 두 개의 지주(支柱) 중의 하나로 된 상호조직(mutualité)의 사상을 벌써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노동자가 보통 같으면 그 노동을 기아적 가격으로 팔지 않으면 안될 저 경제공황의 위험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전노동의 상호부조 조합의 계획을 품고 있었다.


  프루동주의의 또 하나의 지주인 연합주의는 혁명기간에 한창 논의되어고 또한 실천되기까지 했다. 지론드파는 그것을 정치적 수법으로 생각했다. 1871년 파리 콤뮨이 반동 프랑스로부터 파리를 구출하는 수단을 연합주의 공화국에 인정하게 된데 대하여, 다른편으로 지론드파는 그것이 자코방파의 파리로부터 프랑스를 구출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훨씬 순수히 사회적인 연합주의는 당시의 각종 반(半)자연발생적인 혁명조직 속에 나타났다. 최초는 선거목적을 위하여 수도의 기능이 분할되었고, 또한 파리 콤뮨 발생의 모태로 되었다. 「관구(管區)」(districts)와 「구(區)」(sections) 속에, 나중에는 「민중협회, 우애협회 및 혁명위원회」의 그물 속에. 그리고 이것들은 쟈코방의 지배에 의하여, 구가 종속적인 정치적 기관이 된 때, 구에 대신하는 경향을 가졌다. 이 기관에 있어서 크로포트킨은 시지스몬 라크로아의 『콤뮨의 활동』(Acts de la commune)에서 흥미있는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관구의 정신상태는…… 콤뮨의 결합의 매우 강한 감정과 그것에 못지 않은 자치에 대한 강한 경향과의 양자에 의하여 포시된다. 파리는 아무렇게나 제각기의 영토로 분단된 60의 공화국의 연합일 것을 바라지 않았다. 콤뮨은 그 관구의 결합에 의하여 구성된 통일체이다.…… 그러나 이 의논의 여지가 없는 원리와 함께 또 하나의 원리가 나타난다…… 즉 콤뮨은 가능한 한, 독력(毒力)으로 직접 입법과 행정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콤뮨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어떤 중개자도 어떤 대리인도 없이, 콤뮨에 의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위임한 사람들의 끈임없는 통제아래 행동하는 특별위원의 역할에 제한된 대표자에 의하여 행하여질 것이다. …… 콤뮨의 입법과 행정의 종국적 권리는 관구―관구의 총회에 모인 시민들―에 속한다.

 

  이와 같은 조직 속에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제원리」가 벌써 나타나 있다고 보며 이 제원리는 「그 근원은 이론적 사색 속에가 아니라 프랑스혁명의 행동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결론한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 그는 다시 아나키즘이 민중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코자 열망하는 나머지 과장으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입법의 권리」가, 비록 그것이 총회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져 있다고 할지라도, 역시 그것은 존재한다는 것, 즉 민중이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고로 우리는, 혁명의 세월을, 아나키를 목표로 했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직접민주제를 목표로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의미에서는 조금도 아나키즘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콤뮨은―1871년에 있어서의 후계자와 같이―연합주의이고, 이 의미에서 프루동에 선행하고 있었다. 즉 아나키즘의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고 프루동이 내다본 실제적 구조를 불완전하게나마 발전시켰다.


과격파, 루우와 봐르레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혁명에 있어서의 참된 아나키스트의 원형을 발견하기 위하여 콘도르세의 상호부조론이나 콤뮨의 연합주의의 앞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출현을 민중 속에서 찾는데 너무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제사건에 대하여 아나키스트에 가장 가까운 태도를 표명한 몇 사람의 개인을 부당하게도 등한시해 버렸다. 그는 작크 루우, 쟌 봐르레 및 그들의 주위에 모인 과격파(Enragés)에는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프랑스혁명 속에 아나키스트의 선조가 있었다고 하면, 우리가 그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곳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또 역사적으로 밝혀져 있지도 않지만 바로 이들의 용감한 비타협자들에 있어서다.


  과격파의 운동은 1793년에 나타나 음산한 기초저음과 같이 공포시대에 울려퍼졌다. 영국의 내전 때의 디가즈의 운동과 같이 그것은 경제적 불황의 시기에 나타났다. 그것은 대부분 파리와 리용의 빈민의 경제적 곤궁에 대한 반향이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또 상승하고 있는 중산계급의 강화하는 힘을 특색짓는 사회적 차별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과격파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정당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직도, 일치한 정책도 갖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뜻을 지닌 혁명가들의 자유로운 집단이었으며 가장 유치한 방법으로 협력하나 국가권력에 대한 쟈코방적 사고방식에는 일치하여 반대하고 민중이 직접 행동할 것을 주장하여, 정치적 행동에서 보다는 오히려 콤뮨주의적인 경제적 방책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뇌를 종식시킬 방법을 찾았다. 민중에게 「모든 종류의 정부는 추방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해서 쟈코방파가 루우에게 가한 비난은 사실인즉 과격파 전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과격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크 루우는 프랑스혁명에 참가한 성직자의 한 사람이고 지방의 목사인데, 1790년에 파리로 오기 전에도 그의 관구의 농민에게 영주의 과세권을 강화하려는 한 지방의 성관(城館)을 불사르고 약탈하라고 선동했다는 죄로 고발된 일이 있었다. 「토지는 똑같이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고 그는 그의 교구민에게 설교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는 혁명 후에도 목사였다. 그는 혁명 속에 크리스트교의 순수한 정신의 반영을 본 것 같다. 그는 일찍이 목사의 직분을 「인간이 신의 앞에서 영원히 그러하듯이 상호간에 인간을 평등케 하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루우와 같은 기질 태도를 가진 인간이 정통적 로마 카톨릭교도에 불과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제라드 윈스탄리의 그것과 그다지 멀지 않았을 것이다.


  루우의 성실성은 가장 엄격한 크리스트교적 금욕주의자와 같은 정도로 그를 가난케 하고, 그가 살고 있던 그리비에가(街)의 노동자에 대한 그의 동정이 그의 급진주의에 있어서의 과격성의 원인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성격에는 격렬한 광신의 칼날이 있어 그것이 그의 기억을 가증한 것으로 상처 입히는 하나의 행위에로 그를 이끌었다. 토마스 페인은 루이 16세의 구명을 탄원했는데 루우는 왕의 처형에 입회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루이는 감옥을 나서기 전에 목사로서의 루우에게 유언을 부탁해도 좋을지 물었다. 루우는 「나는 당신을 단두대로 안내하기 위해서만 여기 있는 것이요」라고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나 권력의 권화(權化)로서의 왕의 파멸을 고소하게 바라본 이 사나이도, 훗날에 그 자신 감옥의 독방에서 죄라고는 오직 그들이 마침 그 신분에 태어났다는 것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공포정치가 가하고 있는 잔학행위에 대하여 항의를 했다.


  처음부터 루우는 파리의 혁명생활에 있어서 활동적이엇다. 그는 코르도리에 그라브에 번질나게 드나들었고 1792년의 3월 마라를 그의 집에 숨겼는데, 이 행위는 나중에 이 자칭 「민중의 벗」의 공격으로부터 그 자신을 구하는 것으로 되지는 못했다. 루우는 국민의회의 후보자로서 입후보했다가 실패했고 결국 콤뮨의 총평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1792년말이 되어서 비로소 루우는 그의 가장 친한 동료였던 그라비에 제화공 및 목공들과 사귀어 일하면서 발전시킨 과격한 견해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혁명이 그 최후의 해에 그가 제출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고, 그는 이 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비로소 아나키스트적 경향을 암시했다. 「의회의 전제는 왕의 홀(笏)과 같은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중을 모르는 동안에 결전(結縳)하고, 민중이 스스로 만들었다고 일컬어지는 법률에 대하여 그들을 짐승처럼 다루고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그 후 계속되는 혼란의 수주간에 청원자들이 가격규제의 요구를 갖고 국민의회의 방책에 밀어닥치고 그리비에의 빈민들이 폭리를 멋대로 하는 점주들에 대하여 폭동을 일으킨 때, 루우는 그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선동하는 데에 얼마만큼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1793년 3월 루우는 젊은 혁명적 웅변가 쟌 봐르레를 한패에 넣었다. 루우와 같이 봐르레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좋은 집안에 태어나 아르쿠르의 학교에서 배우고 혁명 때 관청의 직위와 약간의 개인적 수입을 갖고 있었다. 혁명은 그를 혹종(或種)의 열광으로 채웠고, 그것이 좌절한 때에는 비통으로 변했다. 그는 대중적 연설가로 되어 1793년 3월에는 지론드파에 대한 최초의 공격의 지도자로서 나타났다. 그러나 루우의 물가에 대한 선동연설의 배후에 공유의 사상이 있었던 것과 꼭 같이 국민의회에서의 가장 보수적인 일파에 대한 봐르레의 공격의 배후에는 대의제에 의한 통치라는 사상에 대한 전면적 탄핵이 숨어 있었다.


  1793년 6월까지는 봐르레와 루우가 협력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활비에 관한 새로운 선동에 있어서 보조(步調)를 같이 했다. 그리고 작크 루우는 일련의 연설에서 혁명후에도 존속한 계급을 비난했다. ―「한 계급의 인간이 다른 계급의 인간을 아사시킬 때, 자유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뿐만 아니라 법률이 착취를 보호하고 있으며 「착취는 법률의 그늘에서」 번영하고 있다는 것도 시사했다. 그는 입법자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폭리에 대한 단죄가,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한 방식으로, 헌법 속에 기입될 것을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탄압

 

  1793년을 통하여 과격파의 선동은 계속되었다. 리용에서 테오필 루크레르가 그들에게 가담했고 재색을 겸비한 여우(女優) 크레르 라콤프가 그녀의 여성조직 혁명적 공화주의자협회(La Société des Républicaines Revolutionnaires)를 이끌고 가담했다. 동시에 특히 국가에 의하여 추진된 공포정치에 반대하는 과격파의 소리가 높아진 때에는 쟈코방파의 적의가 주위에 집중했다.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는 과격파의 연설 및 그들의 단명의 간행물〔루우의 『정론기자(政論記者)』(Le Publiciste)와 루크레르의 『민중의 벗』(L' Ami du peuple)〕이 지니는 반정부적 의미는 금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명백했다. 그에게는 그들의 선동을 무제한 묵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루우와 봐르레는 체포되었다. 크레르 라콤프의 협회는, 6천명의 성난 부인의 항의데모에도 불구하고, 금지되었다. 혁명법정 앞에 호출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루우는 끔찍한 자살로 기로친을 면했다. 그는 죽기 전에 말했다. 「나는 법정에 대하여 불평(不平)을 말하지 않는다.」「법정은 법률에 좇아 행동해 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자유에 좇아 행동해 왔다.」 자유를 법률 이상의 것으로 삼고 죽는 것, 그것은 한 사람의 아나키스트의 죽음이다.


  그런데 과격파의 운동에서 도출되었어야 할 아나키스트적 결론을 똑똑히 말하는 것은 공포시대를 살아 남은 봐브레가 할 일로서 보류되어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고 살아 남은 과격파가 그의 죽음을 기뻐한 뒤에 봐르레는 그것에 계속되는 집정정부의 전제를 눈 앞에 보고 격심한 분노 끝에, 우리가 유럽대륙에서의 최초의 아나키즘 선언이라고 봐야 할 것을 발표했다. 적절하게도 그것은 『폭발』(Explosion)이라고 이름붙여졌다. 그 표제를 기록한 페이지에는 불타는 고대건축의 주위를 뭉개 뭉개 치솟는 연기와 화염을 표시하는 조각이 새겨지고 그 조각 위에는 제사(題辭) 「하나의 원리를 멸망시키느니 보다 혁명정부를 멸망시키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혁명의 수년간을 개관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전제는 왕의 궁전에서 위원회 패거리에게로 옮겨 놓였다. 왕을 증오해야할 자로 만드는 것은 왕의 예복도, 홀(笏)도, 왕관도 또한 아니라 야망과 폭정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복장에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는 계속 묻는다. 왜 혁명정부는 이와 같이 왕의 지배와 다름 없는 폭정이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는가. 첫째로는 권력에 취한 인간은 그것을 영구히 그의 수중에 남겨 두려고 바라기 때문이라고 그는 시사한다. 그러나 거기엔 단순한 인간의 약점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치제도 자체 속에 있는 모순이다.

 

  사실 이 혁명정부란 도대체 사회적 괴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마키아벨리즘의 걸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부와 혁명은 양립 못한다. 적어도 민중이, 민중에 대하여 끊임없이 폭력을 휘두를, 권력기관을 설립하려고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것을 바라고 믿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일이다.

 

  여기에 그들의 운동이 바야흐로 끝나려고 하는 데서 과격파의 최후의 사람이 그 주장을 밝혔다. 이들 초기의 <자주인적> 프랑스인이 정부를 공공연히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늦었던가 하는 것을 고찰함은 흥미 깊다. 윈스탄리와 비해서 조차도 그들에게는 발전한 강령이나 철학이 현저히 결여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시기는 짧고―겨우 수개월로 끝난 행동기간―, 그리고 한때는 그들이 지지하고 있던 혁명의 중심에 너무 가까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이 기간에 그들의 사상을 재빨리 결정(結晶)시킬 수가 없었다. 윈스탄리는 제사건에서 떨어져 있어 그의 지식이 허락하는데까지 그의 이론을 정식화하고, 그를 행동으로 몰아세우는 철학과 함께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프랑스혁명은, 혹시 이 설명이 그런 인상을 줬을지도 모를만큼 아나키즘 사상에 대하여 비생산적은 아니었다. 쟌 봐르레가 그의 『폭발』을 발행한 그 해에 윌리암 고드윈은 영국에서 정치의 해악에 관한 최초의 대논문 『정치적 정의』를 출판한 것이다. 사실, 만일 프랑스혁명이 그 때에 일어나지 않았던들 『정치적 정의』가 구성되었을지 어떨지조차 의심스럽다.

 

-------------------------<원문>

 

http://www.ditext.com/woodcock/2.html

 

 

George Woodcock, Anarchism: A History of Libertarian Ideas and Movements, 1962, Postscript 1975

PART onE
THE IDEA

 

2. The Family Tree

Anarchism is a creed inspired and ridden by paradox, and thus, while its advocates theoretically reject tradition, they are nevertheless very much concerned with the ancestry of their doctrine. This concern springs from the belief that anarchism is a manifestation of natural human urges, and that it is the tendency to create authoritarian institutions which is the transient aberration. If one accepts this view, then anarchism cannot merely be a phenomenon of the present; the aspect of it we perceive in history is merely one metamorphosis of an element constant in society. It is to tracing this constant but elusive element that anarchist historians, such as Peter Kropotkin, Max Nettlau, and Rudolf Rocker, have largely devoted themselves.

 

The family tree which these writers have cultivated so carefully is indeed a magnificent growth, and in the shade of its branches one encounters some astonishing forefathers. Kropotkin was perhaps the most extreme of all the anarchist genealogists, for he sought the real origin of his creed not among individual thinkers, but among the anonymous mass of the folk. 'Anarchism,' he declared, 'originated among the people, and it will preserve its vitality and creative force so long only as it remains a movement of the people.'

 

In Modern Science and Anarchism this belief is elaborated in historical terms. 'From all times,' Kropotkin claims in this book, 'two currents of thought and action have been in conflict in the midst of human societies.' These are, on the one hand, the 'mutual aid' tendency, exemplified in tribal custom, village communities, medieval guilds, and, in fact, all institutions 'developed and worked out, not by legislation, but by the creative spirit of the masses', and, on the other hand, the authoritarian current, beginning with the 'magi, shamans, wizards, rain-makers, oracles, and priests' and continuing to include the recorders of laws and the 'chiefs of military bands'. 'It is evident,' Kropotkin concluded dogmatically, 'that anarchy [36] represents the first of these two currents. ... We can therefore say that from all times there have been anarchists and statists.' Elsewhere Kropotkin conjectures that the roots of anarchism, must be found in 'the remotest Stone-age antiquity', and from this highly personal view of prehistory he goes on through all the gamut of rebellious movements to the early English trade unions, reaching the eventual conclusion that 'these are the main popular anarchist currents which we know of in history'.

 

Parallel with Kropotkin's search for an unnamed and inarticulate anarchism of the people runs the search of other historians of the movement for anarchist elements in the thoughts of philosophers and writers in the past. Lao-Tse, Aristippus and Zeno, Etienne de la Boetie, Fenelon and Diderot are recruited in this way, and the delightful chivalric Utopia of the Abbey of Theleme admits Rabelais on the strength of its libertarian motto, 'Do what you will!' Religious movements like the Anabaptists, the Hussites, the Doukhobors, and the Essenes are claimed en masse, and the French Tolstoyan Lechartier has by no means been alone in declaring that 'the true founder of anarchy was Jesus Christ and ... the first anarchist society was that of the apostles'. Two recent historians of anarchism, Alain Sergent and Claude Harmel, have discovered the first anarchist in Jean Meslier, the eighteenth-century cure of Etrepigny, whose resentment against the ecclesiastical and civil authorities of his time festered into a great Testament which he left to his rural parishioners (it was intercepted after his death by the Church authorities and never reached the farmers for whom it was meant) and in which he denounced authority of every kind and advocated a bucolic society based on friendship among peasant communities. And the American professor James A. Preu has just proved to his own satisfaction that the gist of Godwin's Political Justice -- and by implication of all anarchist thought -- is to be found in Book IV of Gulliver's Travels; he is not the first writer to have recognized in the Tory Dean an anarchist forefather in disguise.

 

But the roots of this spreading genealogical tree are far too weak for the crown of branches they are expected to bear. Even a cursory study of the writers claimed shows that what has so often been represented as the prehistory of anarchism is [37] rather a mythology created to give authority to a movement and its theories in much the same way as a primitive clan or tribe creates its totemic myths to give authority to tradition or taboo. It is supported by the failure to realize that, though rebellion and the desire for freedom are both ancient elements in human society, they change their forms in accordance with changing historical situations. If, for example, we consider such great typical rebels of classical antiquity as Brutus and Spartacus, we realize that each of these men strove sincerely for his own idea of liberty, yet neither Brutus, fighting for the interests of a patrician oligarchy against the threat of dictatorship, nor Spartacus, seeking to liberate the slaves so that they could take up again their broken lives in their own countries, would have shared or understood the particular conceptions of economic equality and classless liberty which the nineteenth-century anarchists developed in reaction against an increasingly centralized and mechanized capitalist state.

 

In general, the anarchist historians have confused certain attitudes which lie at the core of anarchism -- faith in the essential decency of man, a desire for individual freedom, an intolerance of domination -- with anarchism as a movement and a creed appearing at a certain time in history and having specific theories, aims, and methods. The core attitudes can certainly be found echoing back through history at least to the ancient Greeks. But anarchism as a developed, articulate, and clearly identifiable trend appears only in the modern era of conscious social and political revolutions.

 

Its peculiar combination of moral visions with a radical criticism of society only begins to emerge in a perceptible form after the collapse of the medieval order. This collapse was to lead on one side to the rise of nationalism and of the modern centralized state, but on the other to the emergence of a revolutionary trend which early began to develop the authoritarian and libertarian currents that matured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in the conflict between Marxism and anarchism.

Just as the great dissolution of medieval society took on ecclesiastical, social, and political forms, which are very difficult to disentangle, so the movements of revolt retained until the end of the seventeenth century a similar triple aspect. The [38] extreme criticisms of society during this period were voiced not by humanists, but by fundamentalist religious dissenters, who attacked both the Church and the current systems of authority and property-owning on the basis of a liter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mplied in their demands was the longing for a return to the natural justice of the Garden of Eden. Whether or not the hedge priest John Ball actually recited it, the famous couplet --

 

 

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 is symptomatic of an urge toward a lost simplicity that still, almost three hundred years later, echoed in the pamphlets of the Commonwealth period.

 

The demands of the peasants who revolted in England in the fourteenth century and in Germany during the early sixteenth century were not in themselves revolutionary. The malcontents wished for an end to impositions by the clergy and the lords; they wished most of all for the final destruction of the moribund institution of serfdom. But few of them went beyond such simple reformist demands, and a naive faith in certain aspects of feudalism was shown by the trust the English peasants placed in the promises of King Richard II even after the slaying of their leader Wat Tyler. one can compare their attitude with that of the illiterate Russians who marched behind Father Gapon to the Winter Palace in 1905, in the tragically foolish hope that they would encounter, not the bullets that wer actually awaiting them, but the understanding compassion of the Tsar, that symbolic Father in their still semi-feudal world.

 

Yet among the leaders of the English and the German peasants there did appear the first signs of the kind of social criticism that was to end in anarchism. The fragment of John Ball's speech which Froissart has preserved -- almost all we know of the opinions of that tempestuous man whose presence only half emerges from the medieval shadows -- attacks both property and authority and implies a link between them that anticipates the arguments developed by the nineteenth-century anarchists. [39]

 

Things cannot go well in England, nor ever will, until all goods are held in common, and until there will be neither serfs nor gentlemen, and we shall be equal. For what reason have they, whom we call lords, got the best of us? How did they deserve it? Why do they keep us in bondage? If we all descended from one father and one mother, Adam and Eve, how can they assert or prove that they are more masters than ourselves? Except perhaps that they make us work and produce for them to spend!

 

The tone of this speech seems authentic, even if the chronicler sharpened the details; it has that peculiar mixture of religious exaltation and social denunciation with which we become familiar as the Reformation develops into its more radical forms. But, though Ball denounces private property and demands equality, he does not appear to make a specific rejection of government as such. And for a long time we see demands for egalitarian communism emerging within what remains an authoritarian framework. The first literary presentation of an ideal egalitarian society, Sir Thomas More's Utopia (1516), is governed by a complicatedly elected authority and imposes extraordinarily stringent rules on individual behaviour. And, though efforts have been made to discover anarchistic elements in the German peasant revolt, led by Thomas Münzer, and in the Anabaptist commune of Minister, the practice of these movements seems in each case to negate the anti-authoritarian attitudes suggested in the statements of some of their leaders. Münzer, for instance, denounced authority, but made no concrete suggestions for a form of society that might do without it, and when he attempted to set up his ideal commonweatlh at Mulhausen, nothing resembling an anarchistic society in fact emerged. Engels has summed up the situation very clearly in The Peasant War in Germany:

 

Communism of all possessions, universal and equal labour duty, and the abolition of all authority were proclaimed. In reality Miihl-hausen remained a republican imperial city with a somewhat democratic constitution, with a senate elected by universal suffrage and under the control of a forum, and with the hastily improvised feeding of the poor. The social change, which so horrified the Protestant middle-class contemporaries, in reality never went beyond a feeble and unconscious attempt prematurely to establish the bourgeois society of a later period. [40]

 

As for the Anabaptists, their denunciations of earthly authority were negated by their theocratic inclinations, and there was little evidence of a genuine libertarian trend in the attempt to impose communism forcibly in Minister, or in the expulsion from the city of those who refused to become Anabaptists, or in the puritanical iconoclasm which led to the destruction of manuscripts and musical instruments. A small group of Anabaptist saints appears to have exercised a rather ruthless authority during most of the stormy history of the Miinster commune, and in the end Jan of Leyden became not only the spiritual leader but also the temporal ruler of the city, claiming to be King of the Earth, destined to usher in the Fifth Monarchy which would prepare the Second Coming of Christ.

 

What seems to have been lacking in these movements, from an anarchist point of view, was the element of individualism that would have balanced their egalitarianism. The shaking free from the medieval tendency to see man as a member of a community ordained by God was a slow process, and perhaps slowest of all among the landworker and artisan classes -- used to a communitarian pattern of guild and village life -- on whom the peasant revolts and the Anabaptist movement were mostly 1 based. Here the anarchist historiographers fall into the error! of assuming that the primitive or medieval folk community,! based on mutual aid and roughly egalitarian by nature, is also! individualistic; most frequently, of course, it is the reverse,! inclined toward a traditional pattern in which conformity is! expected and the exceptional resented.

 

The individualist trend in post-medieval Europe emerges first among the cultured classes of the Italian cities during the Quattrocento; it appears as a cult of personality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ideas of social reform, and it leads as often to the pride of the despot as to the desire for many-sided fulfilment of the humanist scholar. But it creates a new interest in man as an individual rather than as a mere member of the social order; from the time of Dante it permeates the literature of southern Europe, and from Chaucer that of England, until it leads to such individualist literary forms as the Elizabethan drama, the biography and autobiography, and, eventually, the novel, all based on a steadily deepening interest in the [41] emotional and psychological nature of man defined against, rather than in, his social background.

 

Parallel to this secular exaltation of the individual, the later stages of the Reformation culminate in a religious radicalism which goes beyond such chiliastic sects as the Anabaptists and which, particularly among the Quakers, develops a personalistic view of religion, rejecting organized forms, and basing itself on the idea of the 'inner light', or, as George Fox called it, 'that of God in every man', an idea resembling Tolstoy's and not very far from some anarchist conceptions of immanent justice.

 

These secular and religious tendencies all helped to propel the seventeenth century toward a deepening consciousness of the value of individual liberty. And it was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that this trend produced the earliest recognizably anarchistic movement.

 

The men who fought the Civil War were -- on both sides --more thoroughly the heirs of Renaissance individualism than is commonly recognized; there is perhaps no more magnificent example of the Baroque cult of personality than Milton's Satan. In another direction the rise of the Independents in opposition to the Calvinists shows the increasing swing toward an emphasis on the personal conscience as director of religious and moral choice, and here again, in Areopagitica, Milton drew a conclusion that is more libertarian than liberal. Economic and social changes, the rise of early capitalism and the consolidation of the. squirearchy, all pointed in the same direction, and combined to produce the state of extreme political tension that led through rebellion to the first modern revolutionary dictatorship -- Cromwell's prototype of the totalitarian state - but also to its contradiction.

 

For the very individualism that plunged the middle classes into a political and military struggle for the creation of a class oligarchy veiled by democratic pronouncements resulted among the lower classes in the emergence of two radical movements. The larger was that of the Levellers, ancestors of the Chartists and advocates of universal suffrage. Though some of them, like Walwyn, suggested community of property, their general demand was for political rather than economic equality, and for a democratic constitution that would do away with the [42] privileges arrogated to themselves by the higher officers of the New Model Army. In curious anticipation of French Revolutionary invective, one Cromwellian pamphleteer stigmatized the Levellers as 'Switzerizing anarchists'. But it was not the Levellers who represented the really anarchistic wing of the English revolutionary movement in the seventeenth century. Rather, it was the ephemeral group whose peculiar form of social protest earned them the name of Diggers.

 

The Levellers were drawn mainly from the lower ranks of the New Model Army, who wanted their share in governing the country they had fought to liberate from the rule of Divine Right Kings. The Diggers, on the other hand, were mostly poor men, victims of the economic recession that followed the Civil War, and their demands were principally social and economic. They considered they had been robbed by those who remained rich, not only of political rights, but even of the elementa right to the means of survival. Their protest was a cry of hunger, and their leaders, Gerrard Winstanley and William Everard, had both suffered from the troubles of the time. Winstanley was a former Lancashire mercer who had come to London, set himself up in the cloth trade, and been ruined by the recession. 'I was beaten out both of estate and trade, and forced to accept the goodwill of friends crediting to me, to lead a country life.' Everard was an old soldier of the Civil War who had been cashiered for spreading Leveller propaganda.

 

The Diggers began with theory in 1648, and proceeded to action in 1649. Winstanley's early pamphlet, Truth Lifting Up Its Head Above Scandals, established the philosophic basis of the movement as a rationalistic one. God, in Winstanley's view was none other than 'the incomprehensible spirit, Reason'. 'Where does that Reason dwell?' he asks. 'He dwells in ever creature, according to the nature and being of the creature, but supremely in man. Therefore man is called a rational creature. ... This,' he continues in an interesting anticipation of Tolstoy, 'is the Kingdom of God within man.'

 

From this almost pantheistic conception of God as immanent Reason there arises a theory of conduct which suggests that if man acts in accordance with his own rational nature he will fulfil his duty as a social being. Let reason rule the man and he dares not trespass against his fellow creatures, but will do as he would be done unto. For Reason tells him is thy neighbour hungry and naked today, do thou feed him and clothe him, it may be thy case tomorrow and then he will be ready to help thee.

This is near to literal Christianity, but it is just as near to Kropotkin's view of the motivation of mutual aid, and in his most radical pamphlet, The New Law of Righteousness, Winstanley emerges with a series of propositions which reinforce the anarchistic elements in his thought.

 

Equating Christ with 'the universal liberty', he begins with a statement on the corrupting nature of authority, and here he criticizes not only political power, but also the economic power of the master over his servant and the familial power of the father over the child and the husband over the wife.

 

Every one that gets an authority into his hands tyrannizes over others; as many husbands, parents, masters, magistrates, that live after the flesh do carry themselves like oppressing lords over such as are under them, not knowing that their wives, children, servants, subjects are their fellow creatures, and hath an equal privilege to share them in the blessing of liberty.

 

But the 'equal privilege to share in the blessing of liberty' is not an abstract privilege. Its conquest is linked with the attack on property rights, and here Winstanley is emphatic in his insistence on the intimate link between economic and political power.

 

And let all men say what they will, so long as such are rulers as call the land theirs, upholding this particular property of mine and thine, the common people shall never have their liberty, nor the land be freed from troubles, oppressions and complainings; by reason thereof the Creator of all things is continually provoked.

 

If Winstanley's criticism of society as he sees it at this crucial point in his career ends in a libertarian rejection of both authority and property, his vision of the kind of egalitarian society he would like to create embodies many features of the ideal society envisaged by the anarchists two centuries later.

 

 

When this universal law of equity rises up in every man and woman, then none shall lay claim to any creature and say, This [44] is mine, and that is yours. This is my work, that is yours. But every one shall put to their hands to till the earth and bring up cattle, and the blessing of the earth shall be common to all; when a man hath need of any corn or cattle, take from the next store-house he meets with. There shall be no buying and selling, no fairs or markets, but the whole earth shall be a common treasury for every man, for the earth is the Lord's. ... When a man hath eat, and drink, and clothes, he hath enough. And all shall cheerfully put to their hands to make these things that are needful, one helping another. There shall be none lords over others, but everyone shall be a lord of himself, subject to the law of righteousness, reason and equity, which shall dwell and rule in him, which is the Lord.

 

Work done in common and its products shared equally; no rulers, and men living peacefully with each other according to the promptings of their own consciences; commerce abolished and in its place a system of open store-houses: it all reads like a primitive sketch for Kropotkin's anarchist-communist society, and the sketch is given the last touch that turns it into a recognizable likeness when we find Winstanley anticipating the whole line of libertarian thinkers by condemning punishment and contending that crime arises from economic inequality.

 

For surely this particular property of mine and thine hath brought in all misery upon people. For first, it hath occasioned people to steal one from another. Secondly, it hath made laws to hang those that did steal. It tempts people to do an evil action and then kills them for doing of it. Let all judge if this not be a great devil.

 

Winstanley insists that the only way to end social injustice is for the people themselves to act, and he talks with apocalyptic fervour of the role of the poor in regenerating the world. The Father is now raising up a people to himself out of the dust that is out of the lowest and most despised sort of people. . . . In these and from these shall the Law of Righteousness break forth first.' The people should act, Winstanley contends, by seizing and working the land, which represents the principal source of wealth. He does not think it necessary to seize forcibly the estates of rich men. The poor can settle the commons and the waste lands (which he estimates occupy two thirds of the country) and work them together. From their example men can learn the virtues of communal life, and the [45] earth become a 'common treasury' providing plenty in freedom for all. The best pages of The New Law of Righteousness rise to a level of prophetic fervour.

 

And when the Lord doth shew unto me the place and manner, how He will have us that are called common people to manure and work upon the common lands, I will then go forth and declare it in my action, to eat my bread with the sweat of my brows, without either giving or taking hire, looking upon the land as freely mine as anothers.

 

The Lord did not delay, The New Law of Righteousness appeared in January 1649, and early in April Winstanley and his associates initiated their campaign of direct action by proceeding to St George's Hill, near Walton-on-Thames, where they began to dig the waste land and sow it with wheat, parsnips, carrots, and beans. They numbered in all between thirty and forty people, and Winstanley invited the local land-workers to join them, prophesying that very shortly their numbers would increase to five thousand. But the Diggers seem to have aroused little sympathy even among their poor neighbours, and a great deal of hostility among the local clergy and landowners. They were beaten by paid hooligans and fined by magistrates; their cattle were driven away, their seedlings torn up, and their flimsy huts burned down; they were called before General Fairfax, who failed to intimidate them, and troops of soldiers were sent to investigate them, but were withdrawn when a number of them showed evident interest in the Digger doctrine. Through all these difficult months Winstanley and his followers refused to be provoked into the violence which they abhorred. Their pamphlets appeared one after the other during 1649, full of righteous complaint against a world that refused to acknowledge them; they even sent out apostles into the country, who instigated occupations of waste lands at several places in the Home Counties and even as far afield as Gloucestershire.

 

But even Digger endurance was not proof against unrelenting persecution. In March 1650 the settlers left St George's Hill, and abandoned their attempt to win England to agrarian communism by the power of example. The other colonies were even [46] shorter-lived, and as a movement the Diggers had disappeared by the end of 1650.

 

For a little while Winstanley continued to spread his ideas, now entirely by literary means, and in 1652 he aimed at the most unlikely convert of all by addressing to Cromwell his last and longest work -- The Law of Freedom in a Platform, or True Magistracy Restored. The relative moderation of this pamphlet suggests that Winstanley's enthusiasm and his extremity of views had both been sapped by the experience of St. George's Hill. For, though he continues to advocate almost complete communism, he puts forward a political plan little different from that of the extreme Levellers, calling for annual Parliaments and providing for various kinds of officers and overseers, introducing compulsion to work and even admitting the death penalty for certain offences against the community, The Law of Freedom aroused little attention, and after publishing it Winstanley retreated into an obscurity so dense that even the place and date of his death are unknown.

 

The Digger movement left no heritage to later social and political movements, though it may have influenced the Quakers, toward whom some of its supporters were drawn. So completely was it forgotten, indeed, that even William Godwin, writing his History of the Commonwealth, does not appear to have realized how similar the Digger doctrine was to that which he himself developed in Political Justice. only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was Winstanley's importance as a precursor of modern social ideologies recognized, and then, on the strength of his communistic ideas, some of the Marxisi tried to claim him as their ancestor. But there is nothin; Marxian about the peasant paradise that Winstanley envisions in The New Law of Righteousness. Its communism is entirelj libertarian, and the effort of Winstanley and his friends to follow out its principles on St George's Hill stands at the beginning of the anarchist tradition of direct action.

 

No incident or movement in either the American or the French Revolution presented so prophetic a miniature of the anarchist future as the Diggers created in 1648 and 1649.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both the United States and France were to be rich in varieties of anarchist thought and [47] deed, but the manifestations of this tendency in the great eighteenth-century revolutions were impulsive and incomplete. Some writers have seen an anarchistic element in the democracy of Thomas Jefferson, but, while he and many of his followers, notably Joel Barlow, admired Godwin's Political Justice, there is little evidence in his writings that he accepted Godwin's views in their extremity, or that he was ever much more than an opponent of excessive government. When he made his famous statement -- '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governs least' -- he did not reject authority. on the contrary, he thought it might be made harmless if the people participated thoroughly in its operation.

 

The influence over government must be shared among the people. If every individual which composes their mass participates in the ultimate authority, the government will be safe; because the corrupting of the whole mass will exceed any private resources of wealth.

 

Such passages make it clear that Jefferson looked to a system of universal suffrage in which the people would as far as possible be the rulers -- a condition as opposed to anarchist ideas as any other type of authority. And, while he also spoke of 'a little rebellion, now and then' as 'a good thing and as necessary in the political world as storms in the physical', he evidently saw this as a corrective rather than a revolutionary force. 'It prevents the degeneracy of government and nourishes a general attention to the public affairs.'

 

Indeed, all of Jefferson's career, as an expansionist President, as a slave-owning Virginian gentleman, as a political leader adept at compromise, reinforces the authoritarian undertone of his writing, and tells strongly against his claim to a place in the pantheon of anarchist ancestors.

 

A more genuine claim can be put for Thomas Paine, whose life made him a personification of the common ideals that linked the British, American, and French revolutionary movements of the later eighteenth century. Paine's extreme distrust of government undoubtedly influenced Godwin, who associated with him during the crucial years from 1789 to 1792, and his discussions of its demerits actually became, by quotation, part [48] of the fabric of Political Justice. Paine was one of those who thought that government was indeed a necessity, but a most unpleasant one, brought upon us by the corruption of man's original innocence. At the very beginning of the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in the historic pamphlet entitled Common Sense, he made a distinction between society and government that brought him close to the viewpoint later established by Godwin.

 

Some writers have so confounded society with government as to leave little or no distinction between them; whereas they are not only different, but have different origins. Society is produced by our wants, and government by our wickedness; the former promotes our happiness positively by uniting our affections, the latter negatively by restraining our vices. The one encourages intercourse, the other creates distinctions. The first is a patron, the last is a punisher.

 

Society in every state is a blessing, but government even in its best state is but a necessary evil; in its worst state an intolerable one; for when we suffer, or are exposed to the same miseries by a government which we might expect in a country without government our calamity is heightened by reflecting that we furnish the means by which we suffer. Government, like dress, is the badge of lost innocence; the palaces of kings are built on the ruins of the bowers of paradise.

 

Paine's distrust of government was persistent; indeed, it was probably increased by the difficulties into which his honesty led him even with revolutionary governments. Sixteen years later, in The Rights of Man, he set in opposition to the claims of government the beneficial influence of those natural social urges which Kropotkin later made the subject of Mutual Aid.

 

Great part of that order which reigns among mankind is not the effect of government. It has its origin in the principles of society and the natural constitution of men. It existed prior to government and would exist if the formality of government was abolished. The mutual dependence and reciprocal interest which man has upon man, and all the parts of civilized community upon each otiier, create that great chain of connexion which holds it together. The landholder, the farmer, the manufacturer, the merchant, the tradesman, and every occupation, prospers by the aid which each receives from the other, and from the whole. Common interest regulates [49] their concerns and forms their law; and the laws which common usage ordains, have a greater influence than the laws of government.

 

In the same work Paine speaks, like Godwin, of government as a hindrance to 'the natural propensity to society', and asserts that 'the most perfect civilization is, the less occasion has it for government, because the more does it regulate its own affairs and govern itself. Here we have the point of view that we have already seen characterizing the typical anarchist; he stands in an evil, government-dominated present, looking back to a lost paradise of primitive innocence and forward to a future whose civilized simplicity will rebuild the Golden Age of liberty. In temperament and ideals Paine came very near to the anarchists; only his lack of optimism in the immediately foreseeable future prevented him from becoming one of them.

 

The American Revolution's lack of native expressions of anarchism is perhaps due to the masking of the kind of deep social divisions which parted the Diggers from the Grandees in the English Revolution by a common urge toward freedom from foreign oppression; these divisions only became really evident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In the French Revolution, on the other hand, the clash between libertarian and authoritarian trends was evident and at times assumed violent form. Kropotkin devoted one of his most scholarly books, The Great French Revolution, to an interpretation of popular movements during the stormy years from 1789 to the end of the Jacobin rule in 1793. His anarchistic bias led him to overemphasize the libertarian elements, but it also enabled him to see the events of the Revolution stereoscopically, thrown into relief by social and economic causes, rather than as a mere struggle between political parties and personalities.

 

Certainly we can follow Kropotkin in seeing the emergence during this period of some of the ideas that were eventually to crystallize into nineteenth-century anarchism. Condorcet, one of the great seminal minds of the age, who believed in the indefinite progress of man toward a classless liberty, already put forward while he was hiding from the Jacobins the idea of mutualite, which was to be one of the twin pillars of Proudhon's [50] anarchism; he conceived the plan of a great mutual-aid association among all the workers that would save them from the perils of those economic crises during which they were normally forced to sell their labour at starvation prices.

 

The other Proudhonian pillar, federalism, was the subject of much discussion and even experiment during the Revolution. The Girondins conceived it as a political expedient. While the Paris Commune in 1871 was to see in a federal republic the means of saving Paris from a reactionary France, the Girondins imagined that it might save France from a Jacobin Paris. A more genuinely social federalism emerged among the various semi-spontaneous revolutionary institutions of the time, first in the 'districts' or 'sections' into which the capital had been divided for electoral purposes and out of which the Commune of Paris arose, and later in the network of 'Popular Societies and Fraternal Societies, as well as Revolutionary Committees', which tended to take the place of the sections as the latter became subordinate political organs, dominated by the Jacobins. In this connexion Kropotkin quotes an interesting passage from Sigismond Lacroix's Actes de la commune:

 

The state of mind of the districts ... displays itself both by a very strong sentiment of communal unity and by a no less strong tendency toward self-government. Paris did not want to be a federation of sixty republics cut off haphazard each in its territory; the Commune is a unity composed of its united districts.... But side by side with this undisputed principle, another principle is disclosed . . . which is, that the Commune must legislate and administer for itself, directly, as much as possible. Government by representation must be reduced to a minimum; everything that the Commune can do directly must be done by it, without any intermediary, without any delegation, or else it may be done by delegates reduced to the role of special commissioners, acting under the uninterrupted control of those who have commissioned them. ... The final right of legislating and administering for the Commune belongs to the districts -- to the citizens who come together in the general assemblies of the districts.

 

In such an organization Kropotkin sees an early expression of 'the principles of anarchism', and concludes that these principles 'had their origin, not in theoretic speculations, but [51] jn the deeds of the Great French Revolution'. But here again he allows his anxiety to prove the folk origins of anarchism to lead him into exaggeration. What he misses is the fact that the 'right of legislating', even if it is brought down to the level of general assemblies, still exists; the people rule. And so we must regard the revolutionary years as an attempt at direct democracy rather than at anarchy. Yet, even if it was not anarchist in any true sense, the Commune was -- like its successor in 1871 -- federalist, and here it anticipated Proudhon by developing sketchily the kind of practical framework in which he thought an anarchist society might develop.

 

But we have to look beyond Condorcet's mutualism and the federalism of the Commune to find the real proto-anarchists of the French Revolution. Kropotkin was so concerned with tracing popular manifestations that he neglected unduly the individuals who came nearest to expressing an anarchistic attitude toward the events of their times. He paid only scant attention to Jacques Roux, Jean Varlet, and the Enrages who gathered round them; yet if there are any anarchist ancestors in the French Revolution, it is among these courageous intransigents, unsuccessful and historically obscure as they were, that we must find them.

 

The movement of the Enrages appeared during 1793, and ran like a sullen ground bass through the year of the Terror. Like the Digger movement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it emerged at a time of economic recession; to a great extent it was a response to the economic distress of the poor people of Paris and Lyons, but it was also a reaction against the social distinctions which marked the hardening power of the ascendant middle class.

 

The Enrages were not a party in the modern sense. They had no organization, no agreed common policy. They were a loose group of like-minded revolutionaries who cooperated in the most rudimentary manner, yet who were united in rejection of the Jacobin conception of state authority, who advocated that the people act directly, and who saw in communistic economic measures rather than in political action a way to end the sufferings of the poor. The accusation brought against Roux by the Jacobins, that he told the people that 'every kind [52] of government must be proscribed', is in effect true of them all.

 

Jacques Roux, the most celebrated of the Enrages, was one of the priests of the Revolution, a country clergyman who, even before he reached Paris in 1790, had been accused of inciting the peasants of his district to burn and pillage the chateaux of landowners who attempted to enforce their rights to seigneurial dues.

 

'The land belongs to all equally,' he is said to have told his parishioners. He remained a priest after the Revolution, in which he appears to have seen a reflection of the pure spirit of Christianity; he once defined its task as 'making men equal between each other as they are to all eternity before God'. But it is difficult to believe that a man of Roux's temperament and attitude remained an orthodox Roman Catholic; his idea of God was probably not far from Gerrard Winstanley's.

 

Roux's sincerity made him as poor as the strictest of Christian ascetics, and his compassion for the workers of the Gravilliers quarter in which he lived seems to have been one of the causes for the extremity of his radicalism, yet there was a hard fanatical edge to his character which led him into the one action that odiously mars his memory. While Thomas Paine pleaded for the life of Louis XVI, Roux was among those who were charged with witnessing the King's execution. Before leaving the prison, Louis asked if he could confide his will to him as a priest. Roux replied coldly: 'I am here only to lead you to the scaffold.' Yet the man who gloated on the destruction of the King as the living manifestation of authority later protested from his own prison cell against the brutalities which the Terror was inflicting on men and women whose only crime was the rank into which they were born by chance.

 

From the beginning Roux was active in the revolutionary life of Paris. He frequented the Club of the Cordeliers, and in March 1792 hid Marat in his own house, an act which did not save him later from the attacks of the self-styled 'friend of the people'. He ran unsuccessfully as candidate for the Convention, and eventually became a member of the General Council of the Commune.

 

It was not until the end of 1792 that Roux began to show the extremity of views he had evolved while working among [53] the shoemakers and carpenters of Gravilliers, who were his closest associates. The failure of the Revolution to fulfil the demands he had made on it during its first year was weighing on his mind, and he delivered a speech at this time in which he gave a first hint of anarchistic tendencies by declaring that 'senatorial despotism is as terrible as the sceptre of kings because it chains the people without their knowing it and brutalizes and subjugates them by laws they themselves are supposed to have made'. During the unruly weeks that followed, when petitioners appeared at the bar of the Convention with demands for the control of prices, and the poor people of Gravilliers rioted against profiteering shopkeepers, Roux defended them, and may even have played some part in inciting them.

 

During March 1793 Roux was joined by the young revolutionary orator Jean Varlet. Like Roux, Varlet was an educated man. He came of good family, had studied at the College d'Harcourt, and at the time of the Revolution had a modest private income as well as a post in the Civil Service. The Revolution filled him with the kind of enthusiasm that can turn to bitterness when it is frustrated. He became a popular orator, and then, in March 1793, emerged as a leader of the earliest attacks on the Girondins. But, just as behind Roux's agitation over prices lay the idea of common ownership, so behind Varlet's attack on the most conservative group in the Convention lay a general condemnation of the idea of government by representation.

 

Though there is no evidence that Varlet and Roux had collaborated beforehand -- and even some evidence of mutual jealousy between these two popular agitators -- by June 1793 they were together in a new agitation over the cost of living, and Jacques Roux made a series of speeches in which he not only denounced the class structure which the Revolution had allowed to survive -- 'What is liberty, when one class of men starve another?' -- but also suggested that the law protects exploitation, which prospers 'in its shadow'. Because he did not trust legislators, he demanded that the condemnation of profiteering be written into the constitution in such a way as to be safe from meddling governments. [54]

 

Through 1793 the agitation of the Enrages continued. They were joined by Theophile Leclerc from Lyons and by the beautiful and talented actress Claire Lacombe with her organization of women, La Societe des Republicaines Revolutionnaires. At the same time, the hostility of the Jacobins narrowed around them, particularly when their voices were raised against the state-operated Terror. To Robespierre the antigovemmental implications of the Enrages' speeches and of their ephemeral journals (Roux's Le Publiciste and Leclerc's L'Ami du peuple) were as evident as they seem to us today; he had no intention of tolerating their agitation indefinitely. Roux and Varlet were arrested. Claire Lacombe's society was suppressed, despite a protest demonstration of six thousand angry women. Roux, called before the Revolutionary Tribunal and realizing that his death was inevitable, cheated the guillotine by painfully cormmitting suicide. 'I do not complain of the tribunal,' he said before he died. 'It has acted according to the law. But I have acted according to my liberty.' To die placing liberty above law is the death of an anarchist.

 

Yet it was reserved for Varlet, who survived the Terror, to state explicitly the anarchistic conclusions that are to be drawn from the movement of the Enrages. After Robespierre had fallen and the surviving Enrages had rejoiced over his passing, Varlet witnessed the subsequent tyranny of the Directory, and in anger he published what we must regard as the earliest anarchist manifesto in continental Europe. Appropriately, it was entitled Explosion; the title-page bore an engraving showing clouds of smoke and flame billowing around a burning classical structure, and above the engraving an epigraph: 'Let revolutionary government perish, rather than a principle.'

 

Surveying the years of the Revolution, Varlet declares: Despotism has passed from the palace of kings to the circle of a committee. It is neither the royal robes, nor the sceptre, nor the crown that makes kings hated, but ambition and tyranny. In my country there has only been a change in dress.

 

Why, he goes on to ask, should a revolutionary government have in this way become as much a tyranny as the rule of a king? Partly, he suggests, because the intoxication of power makes men wish to see it remain for ever in their own hands. [55] But there is more to the matter than the mere weakness of men; here is a contradiction within the very institution of government.

 

What a social monstrosity, what a masterpiece of Machiavellianism, this revolutionary government is in fact. For any reasoning being, Government and Revolution are incompatible, at least unless the people wishes to constitute the organs of power in permanent insurrection against themselves, which is too absurd to believe.

 

Here, at the very end of their movement, the last of the Enrages makes clear its implications. It is interesting to observe how tardily these early French libertarians brought themselves to the open rejection of government. Even in comparison with Winstanley, their lack of a developed programme or philosophy is remarkable. But their time was short -- a few packed months of action -- and they worked too near the centre of the revolution they had helped to make for their ideas to crystallize sharply in such a period. Winstanley had been able to stand on the edge of events and to formulate his theories as far as his knowledge would allow, and then to proceed to action with a philosophy to inspire him in his deeds.

 

Yet the French Revolution was not so unproductive in anarchist thought as this account may have made it appear. In the same year as Jean Varlet published his Explosion, William Godwin in England published the first great treatise on the evils of government, Political Justice. And it is doubtful indeed if Political Justice would even have been conceived if the French Revolution had not happened when it did.

George Woodcock-Anarchism, A History Of Libertarian Ideas And Movement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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