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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金 (1904 ~ )
작가.
본명은 이요당(李堯堂)이고,字는 비감(芾甘)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파금은 사천성 성도(成都)의 봉건 지주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는 근 20명이나 되는 웃 어른들과 30명 이상의 형제 자매 그리고 40~50명의 남녀 하인들이 있었다. 이 대가정 속에서 웃어른들은 혼전만전 가산을 탕진하여 황음무치한 생활을 하였고 젊은 세대들은 사람을 질식케 하는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나어린 파금은 이런 봉건 대가정 속에서 19년간이나 생활하면서 허위적인 봉건 예교가 어떻게 형제자매들의 행복을 유린하고 청춘의 피와 눈물을 빼앗아 갔는가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또한 하인들과 가마꾼들의 절망적인 하소연 속에서 하층민들의 비참한 운명을 얼마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나어린 파금의 마음과 영혼에 반항의 불씨를 뿌려놓았고 이후의 그의 문학 창작에 생활토대를 다져주었다. 5.4 운동후 파금은 새로운 사상사조의 영향하에서 서방의 자산계급적 민주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소년에게 알림'등을 읽었으며 그 가운데서 민주주의와 과학사상을 받아들엿다. 소년 파금은 크로포트킨이 선양한, '만 사람이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새 사회'를 세우자는 사상에 이끌려 그의 저작을 읽고 번역하였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무정부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파금은 봉건 가정을 떠나 상해, 남경 등지로 가서 공부하였다. 1927년 1월, 파금은 프랑스에 가 유학하였으며 1928년 말에 귀국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각종 사회사조와 접촉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프랑스 대혁명기의 민주주의 사상의 영향이 컸다. 귀국후 그는 무시무시한 백색테러 하에서도 줄곧 번역작업과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1933년 후 노신과 내왕하는 가운데서 그들 간의 우정은 더욱 깊어갔으며 노신의 영향 하에 파금은 줄곧 진보적인 문예활동에 참가하였다.
파금의 창작 생활은 프랑스 유학기부터 시작되었다. 1928년 8월에 첫 중편소설 <멸망(滅亡)>을 내 놓은 뒤 1931년에 <신생(신新生)>을 썼으며 1931년부터 1933년 말 사이에는 <안개(霧)>, <비(雨)>,<번개(電)>을 차례로 발표, <애정3부작(愛情三部曲)>을 완성하였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군벌통치 하에서의 당시 지석청년들의 각종 활동을 묘사하였으며 봉건 군벌당국의 잔악성과 암흑을 심각하게 폭로하였다.
'파금은 정열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작가이며 손꼽아 헤아릴 수 있는 훌륭한 작가들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물론 '아나키스트' 라고 불리지만, 우리의 운동을 반대하기는 커녕 문에일꾼들이 연명한 전투선언에 서명하였다.'
노신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파금을 높이 평가하였다.
파금은 1931년부터 1940년 사이에 <격류3부작(邀類三部曲)>을 내놓았다. 이 3부작에는 1931년에 쓴 <가(家)>, 1938년에 쓴 <봄(春)>, 1940년에 쓴 <가을(秋)>이 포함된다. 그중 <家>는 이 작품들 중에서 가장 잘된 작품으로서 5.4 이래 중국 혀대문학의 우수한 장편소설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파금은 혁명형세의 발전과 좌익 문예운동의 영향하에 1931년 겨울 한때 절강성 장흥탄광에서 생활하였다. 그후 파금은 이 생활체험에 근거하여 광산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소재로 구사회의 암흑과 자본가의 잔혼한 압박 착취를 폭로하는 중편소설 <주석광의 광부>와 <눈>을 썼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파금은 위대한 항일구국 투쟁에 뒤어들었다. 1938년부터 1944년 사이에 그는 <항전3부작(抗戰三部曲)> - <불(火)>을 썼다.
1944년 이후로부터 해방전쟁기 사이에 장편소설 <게원(憩園)>, <제4병실(第四病室)>, <추운 밤(寒夜)>등을 썼다. 파금은 장편소설 외에도 근 100편에 달하는 달편소설을 써내었다. 이작품들은 <복수(復仇集)>, <광명(光明集)>, <장군(英雄的故事)>, <장생탑(長生塔)>, <귀신,도깨비,사람(神鬼人)>, <소인물, 사소한일(小人小事)> 등 단편집에 수록되었다. 이런 단편들은 사회생활을 장편에서보다 더욱 넓게 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예술적 구상과 다양한 표현 수법등으로 그 특색을 과시하고 있다.
파금은 소설 외에도 또 100여 만자에 달하는 산문과 수필을 발표하였다. 이런 산물들의 대부분은 자기의 경력과 사상 및 창작생활을 회상한다. 이런 산문을 통하여 시대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이밖에도 파금은 또 많은 번역작품들을 내놓았으며 <문학총간(文學叢刊)>등 여러가지 간행물들을 편집하면서 중국 현대문학의 벌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파금은 아나키스트인가?
30년대에 어떤 사람이 파금을 아나키스트라고 몰아붙일때, 노신은 '파금은 열정적이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대표적인 중국 현대 작가의 한 사람' 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이에 동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금은 이 아나키스트란 이름아래 이미 수차례의 곤욕을 치렀다. 50년대 말기, 노신연구가로 자처하는 문예평론가 요문원(姚文元)이 제일 먼저 파금을 아나키스트로 몰아붙였으며, 파금의 작품이 청년들의 사상을 부식, 파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1962년 5월에 열린 제 2차 문인대회에서 파금이 <작가의 용기와 임무>란 연제로 요문원을 반박하자 요문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파금이 일본을 방문중일때, 파금의 반언을 대독초로 몰아붙였고, 1958년 출판된 <파금문집(巴金文集)>을 비판, 파금의 작품이 갖는 비관적이며 소극적인 사상은 중국 청년들에게 큰 해독을 주었으며 <家>는 '개인주의', '아나키즘', '애정주의'의 혼합체라고 혹독한 비방을 서심치 않았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문역기간 중 파금은 원래의 '아나키스트'에다 '지주게급의 대변인', '노골적인 반공분자' 란 누명도 뒤집어 썼다.
파금이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파금 자신에 장편,멸망>의 주인공 뚜 따신(杜大心)의 사상은 아나키즘과 니힐리즘에 가깝다고 했던 적이 있고, 자신 역시 '과거 한때 그런 사상을 가진 적이 있다' 고 시인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979년 5월,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젊었을 때 저는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애국주의였다' 라고 솔직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했다고 해서 그를 아나키즘의 실천자이며 대변자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사람들은 파금의 필명이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巴枯寧)과 크로포트킨(克魯泡特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믿어 왔지만 그것은 와전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巴'자는 프랑스 유학 당시 학우였던 파은파(巴恩波)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金' 자는 그저 우연히 생각한 것이라고 한다. 파금은 <'멸망'에 관하여>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파리에서 중국학생 몇 명을 알게 되었는데, 巴씨 성을 가진 친구는 나와 같이 있은 지 한 달만에 이곳을 훌쩍 떠나 버렸다. 이듬해 그가 강물에 투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비록 그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의 마음은 무척 괴로웠다. 나의 필명은 그의 '巴'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파금(巴金)'이란 필명은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당시를 회상하면서 획수가 적어 부담없이 사용하게 된 것인데 그만 많은 오해를 낳고 말았다. ' - 靜子, <巴金소식>, <대공보>, 1979.11
그가 아나키스트인지 아닌지는 지나 온 그의 인생행로를 더듬어 보면 알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족주의, 애국주의의 입장을 견지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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