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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현대적 아나키즘, 비학문성, 비과학성을 탈피하라
박홍규, <자유, 자치, 자연’ 아나키즘 이야기>서평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는 아나키즘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솔직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인데 아나키즘에 대해서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것과 그 견해를 밝히는 방법론이 솔직하다는 의미이다. 즉 박홍규는 아나키즘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이 한권의 책에 모두 담았다는 느낌이다. 중간 중간 번역상의 오류나, 논의의 밀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아나키스트(본인은 아나키스트라는 자각이 없다고 한다.)의 고뇌가 충분히 느껴지는 책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이 갖는 아나키즘의 정치적, 학문적 한계
‘이러한 문제점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는 생태주의자로서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명백히 주장하는 북친이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책을 옮긴 이에 의해 아나키스트가 아닌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왜곡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북친의 책을 처음으로 소개한 문순홍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북친.1997)’(57)
아나키즘은 사상이다. 인간의 생각이고, 생각의 경향성이다. 아나키즘은 그 근본적인 생각을 포기하지도 않고, 가장 완벽한 포괄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과학화 하지 못한 학문성 성취는 현대에 까지 이르러 엘리트주의, 비학문적,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아나키즘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무관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회이론의 과학화로 인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에코 아나키즘 비판
‘이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론화되어야 한다.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친하고 해서 우리가 별안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이 국가는 악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졸지에 국가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69)
‘특히 나는 아나키즘의 과도한 낭만주의적 치장을 없애고자 한다. 예컨대 일부 아나키즘의 농촌지향성, 자연에 대한 과도한 신비화, 성선설적 인간성론, 상호부조론, 국가의 저면적 부정 따위를 비판한다.(70)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에코 아나키즘을 비판한다면 이러한 논의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논의가 옮겨간 것은 농촌의 많은 비판점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코 아나키즘은 이점을 묵과한다. 이러한 논의는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녹색평론’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녹색평론이 90년대 이룬 업적은 90년대 문학보다 클지 모르지만, 2000년대 이후 녹색평론은 얼마나 발전하였는지 의문이다. 녹색평론은 존재자체로 의미 있지만, 이제 또 다른 매체를 필요로 한다.
사회주의는 아나키즘의 전략적 선택?
‘아나키즘이 사회주의를 국가주의로 비판한 것은 정당했다. 그러나 아무런 전략이 없는 아나키즘을 사회주의가 공상이라고 매도한 것도 정당했다. 이제는 전략을 짜야 한다.(70)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특히 미국 아나키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북친이 생활태도Lifestyle 아나키즘이라고 비판하는 비사회적, 비정치적 아나키즘을 말한다.(116)
아나키스트의 본질은 자유이고 그 출발은 개인이다. 반면 맑스주의는 본질이 평등이고 그 출발은 사회이다. 아나키즘은 자유로운 인간이야말로 평등한 사회를 형성하는 조건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올바른 사회를 형성한다고 본다. 반면 맑스주의는 평등한 사회조건이 자유로운 인간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올바른 사회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을 낳는다고 본다.(221)
박홍규는 맺음말에서 ‘아나키즘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회주의를 수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96)’ 라고 한다. 스스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에 대한 자각이 없다고 밝혔듯 박홍규는 회색인을 자처하고 있다. 결론은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 솔직함에 딴죽을 걸고 싶다. 아나키즘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회주의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튀세, 발리바르 얼마 전 방한한 랑시에르까지 프랑스의 맑스주의자로부터 국가주의에 대한 낯설게 보는 접근이 바로 그러한 흐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문하고 싶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를 얼마나 검토하고 있는가? 아나키즘은 근본적인 하나의 흐름이지 사회주의에 대해서 메타적 개념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어떠한 현실적 대안이나, 과학적방법론을 거부한다면 사회주의와 똑같은 선상에서 비교되고 서로에게 영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박홍규의 아나키즘은 존레논으로 시작해서 사회주의로 끝난다. 아나키적 영향력이 큰 교육과 예술에 대한 부분을 각각 하나씩 챕터로 띄어내어 보다 체계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하였다. 사상적 측면에서도 에콜로지와 아나키즘,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에 대한 연관을 하승우의 책보다 방대하게 설명(개념사 시리즈의 기획 상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겠지만)하고 있다. 심지어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쿠제와 프롬)와의 연관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연관에 대한 논의는 제외되어 있다. 두 사상의 연관이 긴밀하다는 문장과 푸코의 논의정도를 제외하면 두 사상의 직접적인 연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박홍규의 아나키즘이 솔직하다고 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나는 아나키즘의 비과학적, 비학문적, 비정치적, 비사회적 경향성을 개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맑시즘이 행위를 통해 사고를 이끌어낸것은 온당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사고에 앞서 행위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맑시즘은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프롤렐타리아 혁명이후, 프롤렐타리아 독재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나키즘과 맑시즘은 동등한 선상에서 서로 사상적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구체적인 실천에서부터 고민하고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 첫 번째 물음으로 나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생협을 잡았고. 사상적 측면에서 촘스키와 푸코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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