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법보」 574호<2000.08.30>
해외 명 법문
자원을 제공하는 사회의식
-틱낫한 스님-
“함께 호흡하고 늘 깨어 있으라”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우린 더위, 추위, 기아 걱정없이 안전을 느낀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고통과 접하게 되며 그래서 우린 울음을 터트린다. 그날이후 우린 늘 어머니 자궁 안의 보호막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우린 영원을 그리워하는데 모든 것은 변한다. 절대적인 것을 바라는데 “자아”라는 것까지 일시적이다.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곳, 오랫동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을 우린 찾는다.
우리가 땅과 접할 때 대지의 안정성을 느끼고 자신감을 느낀다. 햇빛, 공기, 나무의 항상성을 느끼면 우린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르리라 믿을 수 있고 또 나무와 공기가 내일 도 거기 있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단단한 땅을 골라 짓듯이 다른 사람들을 믿기 위해선 우선 먼저 안정적이고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기대어 쉰다 = 귀의한다”는 것은 맹목적 신앙이나 소원적 기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기대어 쉴 수 있는 진실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 필요하다. 깨어있음에 기대어 쉬는 것,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온 몸과 온 마음을 다 기울일 수 있는 힘인 깨어있음에 귀의하는 것은 안전한 것이고 전혀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가 물 한잔을 마실 때 그러면서 물 한잔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게 바로 깨어있음이다. 우리가 앉거나 걷거나 서거나 숨쉬거나 할 때 우리가 앉아있고, 걷고, 서고,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린 깨어있음의 씨앗과 접한 것이고 이렇게 며칠이 지나면 우리의 깨어있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깨어있음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빛이다. 깨어있음은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살아있는 부처이다. 깨어있음에서 지혜가 나오고 깨달음이 나오고 사랑이 나온다. 우린 모두 안에 깨어있음의 씨앗을 가지고 있고 호흡에 의식을 두는 수행을 함으로서 우린 그것과 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깨어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귀의하는 것이 매일 하는 수행이다. 꼭 어려움이 일어나야 수행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땐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른다. 나쁜 일이 생기면 우린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 당황한다. 매일매일,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의 숨과 깨어있음에 귀의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배양한다면 우린 단단해지고 어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잘 알게 된다.
우리가 분노, 고통, 절망을 느낄 때, 의식을 둔 호흡을 하면서 우리의 느낌을 거부하지 않고인정하면 우리 의식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것이다.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 귀의하는 것이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심오한 수행이다. 우선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귀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안의 부처에 귀의하면서 나는 최상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대승의 길을 실현하기로 서약한다. 내 안의 법에 귀의하면서 나는 대양만큼 넓은 지혜와 이해를 얻을 것을 서약한다. 내 안의 스님께 귀의하면서 나는 장애 없는 지역사회를 건설할 것을 서약한다.
자신에게 귀의하는 것은 자신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안정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단단한 것에 귀의하면 사람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래서 자신을 친구와 자식이 기대어 쉬고 귀의할 수 있도록 발전시킬 수 있다. 자신을 우리 모두가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수행하라. 그것이 매 순간을 충만히 사는 것이며 깨어있음으로 사는 것이다. 걷고 숨쉬고 앉고 먹고 차를 마시는 것을 깨어있음으로 하면 그 모두가 다 귀의하는 방법이 된다.
승단(수행사회)에 귀의하는 것은 함께 깨어있음을 수행하는 도반으로 이루어진 작은 지역사회에 믿음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사회의 도움 없이 깨어있음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매우 어렵다. 수행에 있어 스승과 가르침 자체는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이 더 중요하다. 우리 수행을 지원하고 계속하게 해주는 수행사회가 필요하다.
우리가 가족과 함께 호흡하고 미소짓고 깨어있음으로 산다면 우리 가족이 수행사회가 된다. 집에 종이 있다면 종 또한 수행사회의 일부가 된다. 종이 우리 수행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명상을 할 때 쓰는 방석 또한 수행사회의 일부가 된다. 수행을 도와주는 것은 아주 많다.
친구 하나를 초대하여 함께 차 명상, 좌선, 걸음명상, 계 낭송을 하거나 법을 토론하면 수행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다 집에 수행사회를 이룩하는 노력이 된다. 얼마 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를 원한다면 작은 수행집단이 이루어지고 1주일이나 한 달에 한번씩 모일 수 있다. 언젠가는 한적한 시골에 명상수련센터를 짓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몇 년간이나 고립된 곳에 가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변화, 진정한 깨달음은 우리가 현실과 주변세계와 교류하고 연결되었을 때만 일어난다.
번역: 진우기 (인터넷 불교대학 기획실장, www.buddhistwe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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