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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아직도 교회에 다닙니까?(길희성)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1.
 

‘새길교회’에서, 2000년 7월 2일


아직도 교회에 다닙니까?

마태 22:34-40


― 길희성 교수(서강대 종교학과) ―

 

    요즈음 사람들 간에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가?"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교회는 할 일 없는 사람, 일요일이 되어도 갈 곳이 없는 사람이나 가는 곳, 아니면 삶이 너무 비참하거나 절망적이어서 무엇이든 절실하게 매달리지 않고서는 살지 못하는 다급한 사람들이나 나가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정상적인 지성을 가지고 삶을 즐길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주일날 교회를 안 가면 벌을 받는다는 말에, 혹은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 협박에 은근히 겁이 나서 그래도 주일만은 응당 교회에 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늘날 누가 지옥을 믿으며 누가 벌받는 것이 두려워 교회를 가겠습니까? 또 누가 교회를 다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교회 안 가서 벌받는다면,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벌을 받을 것이고, 교회 안 가서 구원 못 받는다면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류의 대다수를 벌을 주고 구원에서 배제시키고 소수만을 구원하는 형벌과 비관용의 하나님을 누가 믿겠습니까? 사실 바로 이러한 배타적 구원관, 인류의 다수를 멸망시키고 선택받은 소수만을 구원하는 차별적 하나님을 말하는 기독교 메시지 자체가 지성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피하도록 하는 한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납니까? 사회의 고통은 외면한 채 자기 몸집 불리기만 열중하는 교회의 모습, 저질 목사들을 양산하는 개신교 교회의 한심한 현상, 목사나 장로들의 독선과 권위주의, 재벌마저도 경영권을 포기하는 마당에 아들에게 대물림하는 일부 대형 교회들의 추태, 최근 권사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신자들의 꼴불견 등 그 이유를 들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근본적 성격 자체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그 메시지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인간의 모습을 닮아 유치하기까지 한 기독교의 신관, 감싸주고 품어주기보다는 단죄하고 군림하는 듯한 엄격한 가부장적․전제군주적 하나님 상, 믿지 못할 기적으로 가득 찬 성경 이야기, 기독교의 핵심 교리라고 하지만 무의미하게만 여겨지는 삼위일체 교리, 인간의 지성과 창의성과 자유는 몽땅 하나님께 양도해 버리고 인간의 죄악을 들먹이면서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협박하는 목사님들의 설교 등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메시지 자체가 도대체 무의미하고 황당하게 들리며 거부감만을 자아내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 기독교를 처음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이며, 오랜 신앙 생활을 했다는 사람조차 이와 같은 신앙 이해를 별로 벗어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습관에 따라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대다수 신자들의 현실입니다. 한 종교의 가르침 자체가 좋다면, 그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비리나 위선은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변명하고 변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종교의 근본 교리와 사상 자체가 문제시될 때 그 종교는 근본적인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요즈음 불교도 급성장을 멈추고 신도들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조계종 종권을 둘러싼 추태가 기독교 대형교회들이 일으킨 추태 못지 않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불교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지성인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한국 불교도 산중 불교, 시골 아낙네들의 불교를 벗어나서 도심에서 활발한 포교활동과 법회를 열어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수만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 강남에서 제일 유명한 어느 포교당의 경우, 통계적으로 볼 때 거기에 오는 신도의 삼분의 일이 새 신자이며 삼분의 일은 기존 불교 신자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개신교나 천주교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들 탈 기독교인들이 또 하나의 기복신앙을 좇아 불교로 갔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기복신앙 하면, 강력한 하나님 백을 내세우고 있는 기독교가 뭐가 부족해서 불교에 기웃거리겠습니까? 그렇다고 교회의 타락이나 목사님들의 추태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불교 역시 이 점에서는 별로 나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시 근본적인 원인은 기독교 교리가 도저히 믿기 어렵고 공허하게만 들리는 반면에 불교는 합리적이면서도 어떤 심오한 철학적 가르침을 담고 있는 듯 보이며, 적어도 마음만은 편하게 해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몇 일 전 저는 어느 종교 모임에서 70세를 좀 넘은 한 전직 교수의 종교 편력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유교, 천도교, 기독교를 전전하다가 결국 불교에 정착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가 말하는 기독교인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처녀의 몸에 탄생해서 우리 죄를 사하려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종교인데, 자기는 죽어도 그런 것을 믿지 못하겠더랍니다. 그래서 결국 불교의 문을 두드렸더니 그렇게 좋을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당신이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아니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말해주고 싶었으나 엄두가 나질 않아 포기하고 침묵을 지켰지만, 그가 이해하는 것이 사실 기독교가 2000년 동안 가르쳐온 일반적인 가르침이며 한국 교회 일반의 신앙 이해라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만약 누가 여러분에게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말씀 드려서 새길 교회가 출범한지 13년이 지났건만 지금 이 시간에도 새길 교회가 지향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과연 얼마만큼 형제 자매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새길 교회의 특성은 결코 목사나 장로가 없는 평신도 교회라든지, 교파가 없고 교회 건물을 소유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어떤 특이한 예배양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 양식은 일반 교회의 것과 별 차이가 없으며, 있다면 목사님의 축도가 없는 정도일 것입니다. 새길 교회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신앙 고백문에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있으며, 그래야만 진정으로 새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외형적 새로움, 제도적 특성 이전에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오리엔테이션을 추구하는 것이 새길 교회의 새길다움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목사 장로가 없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훌륭한 목사님만 계신다면 얼마든지 모셔야지요. 또 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좋은 교단이 있으면 가입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건물도 가져야지요. 이러한 것들은 다 부차적인 문제들이고 본질적인 것은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교회라는 것을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선택에 직면하여 번민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러한 아주 본질적인 문제를 다시 한 번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새겨보고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현대 기독교는 분명히 낡은 교리의 탈을 벗고 새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우리 새길 교회는 이렇게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탄생시키는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무엇이 그토록 문제일까요?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맹목적인 예수 숭배가 가장 큰 문제라고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맹목적인 예수 숭배를 청산하려면 역설적으로 예수 자신의 가르침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예수〈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앙을 제대로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에 대한〉 신앙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떠받들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일을 그만두고 인간 예수 자신의 신앙 세계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의 신앙을 본받아 그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우리도 예수와 조금도 다름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저 높은 곳에 두고 우러러 섬기는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그의 신앙, 그의 삶을 따르는 예수 따름이의 기독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창립된 이래 일관적으로 추구해온 바이고, 특히 최근 몇 달 간 우리 교회의 주요 신앙적 관심사였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점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우리 새길 교회의 새길다움은 어떤 외형적 제도나 예배 의식에 있지 않고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서 예수의 정신으로 살자는 것을 매 주일 다짐하는 데에 있습니다. 때로는 이것이 너무나도 엄청난 변화이기 때문에 두렵기도 하고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요구이기에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나, 아직도 교회를 다니려면, 아직도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되기에 우리는 그 많은 대형 교회들을 제쳐두고 이렇게 궁색한 교회에서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확신이 아니라면, 우리가 구태여 이렇게 궁색한 교회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으며, 우리 형제 자매들 가운데는 기성 교회에 가서 편안하게 대접받고 큰 소리 치면서 신앙생활을 할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예수〈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는 무엇보다도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경건한 유태 청년 예수로서는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교회는 바로 이 점을 망각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 해서 예수의 신성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단 논쟁을 야기시켰고 교회는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편견 없이 복음서를 읽어보면 인간 예수의 신앙은 매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빠로 깊이 믿고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고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운 존재였습니다. 너무나도 철저하게 자신을 비웠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아주 투명하게 보여주는 투명체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너무나도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너무나도 하나님을 닮았다 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비우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고스란히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수라고 하면 하나님을 떠올리게 되었고 하나님이라고 하면 곧 예수를 연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지만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으며,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면서 자기를 선하다고 부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마가 10:18). 예수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던 분입니다.


     예수는 또한 인간을 지극히 귀히 여기고 사랑한 사람입니다. 인간을 얼마나 귀히 여겼던지,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천한 사람, 사회에서 따돌림받고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 불구자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녀로서의 존귀함을 회복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회의 온갖 편견과 비인간적 제도와 맞서 싸우다가 당시의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불운을 겪은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한 존재였으며, 오늘 아침에 봉독한 마태복음의 말씀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제일 큰 계명입니까?" 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는 너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다라고 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현대 세계에 사셨다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외에 자연 사랑의 계명을 추가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이토록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파괴되고 신음하게 될 줄은 예수께서도 미쳐 모르셨을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아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 사랑 없는 인간 사랑이나 혹은 인간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사랑만 외치는 이른바 종교인들의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사랑을 고발했습니다. 예수에게는 또한 하나님 사랑 없이 인간 사랑만을 외치는 휴머니스트들의 공허한 사랑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보는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없이 귀한 존재이며, 하나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은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보는 하나님은 인간을 도외시하고 홀로 영광을 받기 원하는 폭군이나 독재 군주가 아닙니다. 나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끔 "당신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들을 때마다 사실 민망함을 느낍니다. 존귀와 영광을 홀로 차지하는 '나 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혼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전제군주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을 노예 같이 부리고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하나님, 인간의 고통과 피조물의 슬픔을 외면하고 홀로 영광 중에 거하는 하나님은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말로만 외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몸으로 실천하며 사신 분입니다. 그의 사랑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주고 힘없는 자를 대변해 주는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사랑에는 대가가 따랐고 결국 그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죄 아닌 죄로 인해 거짓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짓으로 인간을 위하는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으며, 마침내 종교전통보다 하나님을, 율법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신 그의 진정한 사랑을 너무나도 부담스럽게 생각한 당국자들의 손에 의해 처형당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이와 같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으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신앙 이해와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엄청난 차이와 그 신학적 의미를 오늘 여기서 다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 드리자면,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다가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종교전통과 기득권을 더 사랑하고 인간보다 율법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이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자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기 아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도록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는 계산적 하나님, 대가를 요구하는 야박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주의를 고집하는 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상호주의를 고집하다가 인간 측에서 도저히 그 엄청난 죄 값을 치를 방법이 없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자기 아들로 하여금 대신 형벌을 받게 하고 인류의 죄를 용서했다는 얘기인데, 이거 병 주고 약 주는 식 아닙니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런 하나님이라면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고, 그리고 차라리 영원한 형벌을 받을지라도 나의 죄 값은 끝까지 내가 치르겠습니다 라고 오기를 부리고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죄 없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잡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잔인하게까지 보이는 그런 하나님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하나님은 예수께서 믿고 가르쳐 주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 전부터 그를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다 용서하고 계시던 아버지 하나님, 돌아온 탕자에게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받아주시는 예수의 아빠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결코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할 수 없이 잡혀 죽으셨고, 할 수만 있으면 살려 달라고, 십자가의 쓴잔을 멀리 해달라고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울부짖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비극적 결과였지 처음부터 의도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왜,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고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그야말로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우리도 예수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지, 우리와는 무관하게 2000년 전 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어느 한 사건 때문에 온 인류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섬기던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생명의 뿌리이며 만물의 근원이신 은총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었으며,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던 이기적 존재들이 예수를 만나 진정한 인간 사랑을 깨닫게 됨으로써,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와 함께 부활의 참 생명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이것이 영생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탄생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완전히 실천되고 실현되는 구원의 세계를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던 자가 뉘우치고 돌이켜서―이것이 회개의 의미이다―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사랑의 왕국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넘치는 평화의 세계입니다. 예수는 이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받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온 몸을 불사르다가 간 존재이며,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맹목적으로 예수 찬양, 예수 숭배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예수가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이어나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선명하고 그렇게도 강력하게 시작한, 그러나 못 다 하고 가신 이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그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는 존재가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 분이지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전파하고 돌아다니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신 것이지 교회를 세우고 신도들을 끌어 모으는 선교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파견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당부하셨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러 다니게 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교회를 세우고 확장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후세 교회가 한 짓이며, 그 순간부터 교회는 예수를 배반하고 그의 제자이기를 거부했으며 맹목적인 예수 숭배를 부추기면서 예수를 담보로 하여 교권의 아성을 쌓았으며 심지어 예수를 팔아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틴 루터 당시 교회가 팔아먹은 면죄부는 그 대표적인 예이며, 오늘날도 수많은 목사와 전도사들이 예수 장사를 하며 먹고사는 것입니다. 대형교회의 대물림도 생각해보면 그 목사직이 뭐가 생기는 게 많으니까 기를 쓰고 대물림시키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선교는 모름지기 예수 자신의 행적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사랑, 자비와 평화를 실천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를 맡김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자기 마음속에 실현하고, 나아가서 이 평화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실현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역사를 구현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회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자기 목적적 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라는 초월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하늘의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 새길 교회는 왜 전도를 안 하는가, 왜 선교부 사업을 보면 교회를 세우거나 돕는 일은 하지 않고 양심수나 장기수를 돕는 일을 하며, 왜 해외에 선교사는 파견하지 않고 사회단체나 자선단체를 돕는 일을 하냐고 묻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선교, 말하자면 교회 선교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사건화 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교회로 끌어들이는 일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살도록 촉구하며, 우리 스스로 그러한 삶을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교회는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교회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기독교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초월적 가치는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서도 실현되며, 정의와 평화,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지는 곳 어디에서나 실현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진행하고 계시며, 예수를 통해 이 새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들은 이 새 역사가 세계 어디에서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든 개의치 않고 그 증인이 되고 그 후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교회는 울타리가 있고 배타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울타리가 없이 전적으로 열린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간의 장벽, 인종간의 장벽, 문화적 장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 어디서나 실현되는 놀라운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독점 사업이 아님을 명심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을 향해 크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세계를 볼 때, 아마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가장 뚜렷하게 진행되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일 것입니다. 분단 55년간 우리 민족이 당한 억울하고 수치스러웠던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대립과 갈등이 화해와 협력으로, 증오와 원한이 사랑과 용서의 장으로 변하는 새 역사가 창출될 기미가 역력히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실망 속에서 살아왔고 너무나 오랜 세월을 속고만 살아온 터이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이 새 역사가 아직 믿어지지도 않고 불안하게 느껴지기조차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바야흐로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 순간, 그 카이로스적 순간이 우리 앞에 박두해 온 것입니다. 남북의 화해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인류 역사의 어느 사건 못지 않게 카이로스적 사건이며, 사랑의 왕국인 하나님 나라가 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화해와 평화의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또 다시 실망할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 상처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시련과 좌절도 결코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그렇게도 선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들의 꿈을 접게 만들지는 못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예수의 신앙에 따라서 낡은 역사가 청산되고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의 징표가 드러나는 현장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써 그 징표를 현실화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진정한 하나님 사랑, 진정한 인간 사랑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는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려 오신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어두움의 역사를 빛의 역사로 바꾸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는 단지 자기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 구원받는다는 식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혔던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은총과 구원을 선포하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믿음이며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아직도 교회를 다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좋아서, 지난 2000년간의 교회 역사가 자랑스러워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좋아서, 예수를 잊지 못해 아직도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 예수의 기억을 지울 수 없어 우리는 교회를 찾아 함께 예수의 신앙을 상고하고 그 신앙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고 번성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새길 교회가 가고자 하는 이 새 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다가 가신 갈릴리 예수가 이미 2000년 전에 걸었던 매우 오래된 길입니다.


     이 길은 너무나도 간단 명료하지만 너무나 어렵고 험난하기에 때로는 포기해버릴까 하는 유혹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신앙 생활을 하려면 이렇게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교회를 떠나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처지에서 우리는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어렵더라도 올바른 것을 위해 고민한다면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입을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어느 모임에서 들은 한 신부님의 고백을 본인의 허락 없이 소개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나는 때때로 제도화된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면서, 이 교회가 정말 그리스도교를 표현하고 있는가 회의를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 때도 있다. 그러면서 내 자신 그리스도인으로서 잘못 살고 있고, 내 삶이 위선으로 덮여 있음을 보면서, 교회를 비판하는 내 자신이 오히려 교회를 욕되게 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내가 교회를 떠나는 것이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교를 가능하게 한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럴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를 교회에 묶어둔 그 근본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된다. 어쩌면 그 이유는 내가 교회를 통해 알게된 그리스도, 또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된 삶의 핵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교회인으로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내가 이 핵심에 대해서 말은 하면서도 이를 나의 온몸으로 소화해내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위로가 되고 감동을 주는 한 신부님의 공개적인 '고해성사'였습니다. 오늘 아침 저도 이와 똑 같은 심정으로 말씀 드렸음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