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믿음 ; 도전받는 전통종교
길 희성 교수(서강대학교 종교학)
전통사회는 예외 없이 종교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이것은 전통사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경건한 사람들이었다든가 전통사회에는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근세의 세속화된, 탈종교화된 사회와는 달리 전통사회의 규범들과 가치관은 어떤 절대적 실재의 초월적 힘이나 권위에 기초해 있었다는 것이다. 전통사회는 비교적 동질적인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는 사회였다. 민족과 언어, 종교와 풍습 등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대체로 비슷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사는 사회였던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도 타문화와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대사회에 비하면 전통사회는 지리적-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폐쇄된 사회였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따르는 가치와 규범들이 절대적이고 신성하다고 여겼으며 삶은 확실한 질서 위에 서 있었다. 한 사회에는 하나의 지배적인 종교전통이 있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규정했으며 거기에 초월적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간혹 회의주의자나 이단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현대의 개방 사회와 문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일반화된 상대주의의 도전은 없었다. 선악시비가 분명했고 바람직스러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정한 기준과 양식에 따라 살아야 했고 삶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와도 같이 견고했던 것이다.
근대사회,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 모든 것이 변했다.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문화와 문화 간의 접촉과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지금까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여러 가지 양식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임이 드러났고, 전통적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떠받치고 있던 종교도 역사적, 문화적 상대성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런가 하면 한 국가나 한 사회 내에서도 여러 민족이나 종족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풍습, 종교와 신앙을 가지고 함께 사는 다원사회가 출현했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물론이요 급속히 진행되는 정보화는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시켜 지금은 그야말로 안방에 앉아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하여 정보를 교환하는 문자 그대로 지구촌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이제 현대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다원화된 복잡하고 역동 적인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일정한 삶의 기준과 정향성을 가지고 의미 있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통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폐쇄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며, 다원화된 현대사회라 할지라도 종교전통의 영향이 아직도 다소간 남아 있어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모든 사회는 조만간 다원화된 열린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변화의 속도에 있어서 사회나 문화권 간의 격차는 있을지언정 인간은 이제 어디서나 상대주의의 위험을 안고 새로 운 삶의 방식과 질서를 창출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 개방사회에서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는 몇가지 유형이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첫째는 감각적 삶의 양식으로서, 감각의 만족을 삶의 지배적인 관심이자 행 동 규범으로 삼고 사는 생활이다. 일체의 초월적 가치나 관심--종교이든 철학이 든, 진리이든 선이든 아름다움이든--을 배제하고 철저히 일차원적인 세계에서 유행에 따라 감각적 만족을 찾아 사는 삶이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했지만, 이같은 삶의 양식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극도의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현대사회에서 보편화된 현상이며, 오늘날 전세계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다. 둘째는 이성과 합리성의 바탕 위에서 인간이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삶의 보편적 질서를 찾아 사는 삶이다. 여기서는 행동의 규범이 전통이나 관습에 의해 나의 밖에서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이성적 명령, 양심, 혹은 합리적 판단에 의해 자율적으로 주어진다. 누구나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이나 합의 위에 구축되는 삶이다. 여기서도 이성 자체에 대한 믿음 이외에는 초월에 대한 관심이 모두 배제된다.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이 이러한 삶을 택하고 있으며, 그들은 어떠한 삶의 상황이 닥쳐와도 토론과 합의의 바탕 위에 제도의 개선이나 과학기술의 발전 등을 통해 합리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셋째는 앞의 두 삶의 양식과는 달리 세속주의를 거부하는 삶의 양식으로서, 아직도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초월적 실재와 가치에 근거하여 사는 종교적 삶의 방식을 여러 형태로 고수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세번째 삶의 방식으로서, 종교가 현대사회에서 처한 상황과 위기, 그리고 새로운 활로와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현대의 종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문화적 교류와 정보가 차단된 폐쇄 사회 속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전통 종교들은 오늘날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세속적 삶의 양식으로부터 오는 도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차며, 전통적 종교를 떠받 쳐주고 있던 사회적 기반은 허물어졌다. 현대인의 종교적 삶이 근본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종교가 여전히 행동의 동기를 유발하며 삶을 인도하는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모든 현대 종교가 당면한 근본문제이다. 어떻게 하여야 종교가 현대적 삶에 적실성을 지닌 의미있는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안고서 현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진지한 모색을 계속해 왔다. 현대 종교가 처한 위기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반응을 잠시 고찰해 보자. 하나는 50년대 60년대에 기독교 신학에서 크게 유행했던 이른바 세속화(secularization) 신학이며, 다른 하나는 이른바 근본주의 (fundamentalism) 운동으로서 범세계적, 범종교적 현상이다.
세속화 신학에 의하면 기독교신앙은 삶의 제 영역들이 종교적 관장을 벗어나는 세속화 과정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세속화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이로운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역사적으로 세속화를 촉진하는 힘이었으며 기독교는 오히려 세속화를 더욱 촉진하거나 세속화와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화 신학은 전통 종교의 초세간성과 몰역사성을 비판하고 세속 세계에 대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를 고취하는 데에 얼마만큼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속화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을 보였으며 전통적 종교의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우를 범했다. 세속화가 세속주의 (secularism)와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인의 삶이 보여주듯이 세속화는 결국 세속주의를 조장할 수밖에 없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독 성서적 신앙만이 세속화를 잘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70년대 80년대를 풍미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세속화 신학과는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해방적 관심을 추구하며 일반적으로 전통적 종교성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세속화 신학과는 대조적으로 일체의 세속화나 세속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경전과 전통의 문자적 고수를 주장하는 근본주의가 있다. 근본주의 혹은 이와 유사한 전통주의는 상대주의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확 실성과 안정성을 제공해 주는 심리적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이 야기시킨다. 종교의 무비판적 자기절대화, 이성과 상식을 무시하는 광신주의, 편협성과 배타성으로부터 오는 인류 공동체의 파괴,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의 부정, 변하는 세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대결의식과 파괴 적 대응 등 근본주의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정통 교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앞세워 기독교 복음을 역사적 상대주의로부터 구출하고자 영웅적 노력을 한 칼 바르트의 신학도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현대 다원사회에서 종교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문제를 다시 한번 요약해 보면, 세속화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현대 종교들 이 당면한 최대 문제는 어떻게 하면 각 종교가 경직되고 배타주의적인 교조주의나 자기절대화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삶의 규범과 가치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종교가 열린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신앙은 신앙이되 세속사회와 타종교를 향해 열린 겸손한 신앙이며, 열리기는 열렸으되 범람하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고 상대적인 것을 매개로 하여 절대적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신앙과 삶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의 불가능하고 모순되는 듯한 과제 앞에서 종교는 쉬운 해결책을 택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진지하게 활로를 모색할 때만 비로소 현대 세계의 도전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신앙에 대한 논의는 신학이다. 열린 신앙은 열린 신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열린 신학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열린 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신학은 어떤 형태를 취하여야 할까? 무엇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세계와 타종교에 대하여 닫힌 신앙으로 만드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독교는 예수사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열린 신앙의 길이라는 것이다. 간단한 얘기처럼 들리고 너무나도 당연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다. 2000년 기독교 역사 전체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나는 로스안젤스에서 열리는 한국불교 학회에 참석하는 기회에 최근에 나온 서구 불교학계의 책을 사려고 보리수(Bodhi Tree)라는 이름의 서점에 들린 일이 있었다. 요즈음 서양의 어느 나라를 가든 큰 도시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동양 종교에 관한 서적과 성물들, 기념품 등을 파는 전문 서점이었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나라 절의 법당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윽한 향 냄새가 나를 맞으면서 그 곳이 '특이한' 곳임을 알려 주었다. 불교, 힌두교와 같은 동양 종교의 각종 신상들과 불상들도 진열해 놓았고 온갖 신비사상(occultism)에 관한 서적들, 그리고 동양 종교와 철학에 관한 서적들을 제법 많이 갖추어 놓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얼마 없었으므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집어들다보니 미화 500불 이상을 지불하게 되었다. 서점 주인으로서도 흔히 있는 일이 아닌 데다가, 그것도 한 동양인이 와서 영어로 된 불교 서적을 잔뜩 사는 것을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매우 이상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 60은 되어 보이는 점잖게 생긴 그가 농담조로 나에게 하는 말이, 조금 있으면 우리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한국말로 씌여진 기독교 서적들을 잔뜩 사오게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게 결코 농담이 아니며 실제로 한국에는 기독교가 세계에 유례없이 번창하고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정말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말은 그의 다음 말이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다 망했다. 예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기 전에는 희망이 없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가 뱃속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3,40년 신학이니 철학이니 공부하다가 요즈음에 와서야 비로소 얻게 된 결론을 이 서점 주인은 즉석에서 너무나 당연한 듯이 내뱉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동양 종교를 팔아먹으면서 사는 사람이었기에 기독교는 다 망했다고 말했더라면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고 속으로는 오히려 네가 뭘 아느냐고 코웃음을 쳤을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정신"에 마지막 아쉬움 내지 미련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기에 나를 놀라게 했다. "아, 이 사람이 기독교를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그는 교조화되고 형식화된 기독교에 염증을 느끼고 '동양 종교'에 심취하게 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도 모르게 나는 "당신이 나의 법사(dharma master)요" 라고 그를 치켜세우고는 서점을 나왔다.
그렇다 "예수의 정신"이 문제의 핵심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나는 요즈음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유감스럽게도 예수 망각 내지 은폐의 역사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서점 주인의 말 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기는 "인간 예수의 사상",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 혹은 신앙" 같은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예수라는 존재와 만남으로 인해 삶이 변화되어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그리고 전통적 신학이,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진정한 예수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 자신이 없으니까 아예 그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고 교회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려 한다. 실로 때로는 솔직한 무신론자들이나 혹은 타종교의 사상가들이 예수의 정체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예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진짜 예수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좀 더 극언하자면, 교회에 다니면 진짜 예수는 모르고 교회에서 2000년 동안 포장되어 온 예수만 알게 된다고까지 할 수 있다. 교회에서는 하는 소리마다 예수요 말끝마다 주님을 찾지만, 유감스럽게도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된지 이미 오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예수 장사하는 곳이며 목사와 장로들은 예수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비난마저 꺼리지 않는다. 장사 밑천이 될 수 있는 예수, 팔 수 있는 예수는 더 이상 진짜 예수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 없다. 어쩌다 한국 기독교가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나는 한 마디로 말해 인간 예수의 실종에서 찾고자 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인간 예수의 실종이 비단 한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출발과 더불어 시작된 문제라는 사실이다.
인간 예수는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여러 모양으로 덧칠해지고 포장되기 시작했다. 인간 예수--그의 행적과 말씀, 그의 비극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그의 죽음 이후 얼마 안 가서 퇴색해 버리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매 주일 교회에서 외우는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교회는 한 의로운 자가 억울하게 십자가 상에서 피 흘려야 했던 부조리한 역사에 대한 충격적인 기억보다는 부활의 영광을 찬양하기에 바빴고, 그의 말씀과 가르침의 엄정한 요구에 순종하려는 노력보다는 값싸게 주어지는 그의 대속적 죽음의 은총을 남발하기에 바빴다. 교회는 예수가 전 생명을 걸고 증언했던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투신하기보다는 은총을 독점하여 신도들에게 배급해 주는 교권의 확립과 교세확장에 더 관심을 쏟았으며, 예수가 그토록 사랑하고 죽기까지 충성했던 하나님을 향한 신앙보다는 맹목적인 예수 숭배에 더 열을 올렸다. 한 마디로 말해, 교회는 예수의 말씀과 사상보다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도그마와 교리를 더 숭상하게 된 것이다.
지난 반세기의 개신교 신학을 보아도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다. 도그마화한 삼위일체의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계몽주의 이후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꾸준히 시도되었지만, 자료의 한계상 역사 적 예수(Jesus of History)에 대한 탐구는 불가능하다는 성급한 결론이 내려지면서, 신학은 오직 교회의 전통상 신앙고백의 대상이 되어 온 신앙의 그리스도 (Christ of Faith)만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케리그마적 신학(kerygmatic theology)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예수의 구체적 행적과 말씀이 주는 충격을 대면하게 하기보다는 하늘의 그리스도가 주는 위로와 추상적인 구원 의 은총을 약속하는 일이 교회의 주임무가 되었다. 지상의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은 사라지고 신비화된 하늘의 그리스도가 아무런 위험 부담 없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라는 한 존재와의 해방적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제자들의 삶이 혁명적으로 변화되면서 2000년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예수 혁명의 여파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근세사의 격랑 속에서 우리 한반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사는 이 예수 혁명의 변질의 역사이기도 하다. 혁명 1세대가 사라지고 2세대로 넘어가면서 인간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하늘의 그리스도만이 남게 되었다. 복음서들은 바로 이러한 위기 속에서 씌어지게 된 것이다. 핍박과 고난의 역사가 지나가고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자 그 혁명성은 아예 사라져 버리고 고난받던 교회가 영광받는 교회로, 핍박받던 교회가 핍박하는 교회로, 해 방적 공동체가 억압적 조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현대인에게 기독교가 진정 한 영적 힘을 발휘하고자 한다면 교회는 포장되고 변질된 예수, 추상화되고 신비화된 예수를 거부하고 구체적인 인간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의 해방적 이야기를 생생하게 다시 들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재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재출발이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가능한 것은, 그리고 매순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예수 안에서 세차게 살아 움직였던 하나님의 영, 성령의 활동이 오늘날도 작은 예수가 되고자 노력하는 수많은 인간들 속에서 변함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를 만나 그를 본받는 일은 열린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 철저히 열렸던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열림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 속에 갇힘(incorbitus) 이야말로 죄의 본질이며 사랑은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여는 행위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향해 철저히 열린 존재였다. 그는 아빠(abba)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여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김으로써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춤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굴절 없이 깨닫고 선포했으며 섬기고 실천했다. 그는 아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기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의 활동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고 그의 분노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느꼈으며 소외되고 억압받는 인간을 향한 그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확인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모상이었다(고후 4:4; 골 2:15).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철저히 무력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가 되었고 투명체 가 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사랑이었고 신앙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신앙으로써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존 재였다. 그의 하나됨은 의지의 하나됨(Willenseinheit)이었지 결코 존재의 하나 됨(Seinseinheit)은 아니었다. 유태인 예수는 결코 자신을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마가 10: 18). 예수는 결코 사람들이 자기를 신격화하거나 섬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마태 20: 28). 그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전적으로 섬기기 원했다. 그가 높임을 받은 것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가 부활한 것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그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결코 땅 위에 걸어다시던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을 가지신 분이었고 우리와 같이 고통을 느끼며 유혹을 받으신 분이며 울기도 하고 화도 내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울지 않았고 자신을 위해 분을 내지 않았다. 그의 슬픔과 분노는 전적으로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린 신앙을 가졌던 예수는 인간을 향해 철저히 열려 있는 분이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불가분적이었다(마태 22:34-40). 그의 눈에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어른, 유태인과 이방인(사마리아 사람, 로마의 백부장, 가나안 여인), 의인과 죄인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의 마음은 오히려 차별받으며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를 향해 더 열려 있었다. 그는 소외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주린 자, 갇힌 자, 잃어버린 자, 강도 만난 자, 죄인들과 세리들, 어린아이들과 여인들, 불구자와 병든 자, 약한 자와 억울한 자들의 친구였으며 그들과 철저히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다(마태 25:31-46). 예수는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를 심어주었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의 관심은 의로운 자보다는 죄 많은 자들에게 있었기에(마태 9:13) 죄인을 감싸고 사랑하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는 경직된 율법과 제도, 도덕적 교만과 종교적 독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선포했으며 사람들에게 은총의 자유를 일깨워 주었다. 그는 힘과 억압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독점과 지배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에 근거한 새로운 친교와 공동체의 길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해 보였다(마태 20:24-28).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세상적 수단을 통해 인생의 안전을 꾀하려는 노력의 부질없음을 일깨워 줌으로써 그는 인간을 세상적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은총의 하나님 앞에 인간의 어떠한 변명이나 정당화도 통하지 않으며 필요치 않음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는 인간을 도덕주의적 교만과 위선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와 같이 예수는 세상적 상식과 기준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 은총과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면서 인간의 해방과 복권을 위해 헌신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생명마져 내어주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사심없이 활짝 열린 무아(無我)적 삶을 산 예수의 삶을 오랫동안 망각하고 배반해 왔다. 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해 열리기보다는 신비화되고 형이상학화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고착되어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대신 교회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었다. 열린 신앙은 바로 예수 자신의 신앙과 사랑을 본받아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우리의 마음을 열 때 비로소 가능하며 교회의 재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회의 역사는 예수의 열린 신앙, 열린 삶을 망각하고 외면하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한국 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한국의 기독교는 예수는 없고 그리스도만 있는 기독교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지만 그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정신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예수를 앉혀 놓았다. 이것은 정녕 예수 자신의 뜻이 아니었음을 그리스도인들이 용기있게 확인할 때가 왔다. 예수가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존재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었기 때문이지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떠나서 하나님을 결코 알지 못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려면 예수에 대하여 먼저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가 아니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계시된 것도 아니다. 분명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사건은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적 사건이었으며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이었음에 틀림없으나, 하나님은 결코 예수를 통해서만 자신을 알려주시는 편협하신 분이 아니며, 더군다나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 온 인류를 내시고 역사를 인도하시는 분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찾고 알도록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모든 인간의 아버지로서 모두를 사랑하시고 모두와 친교를 원하시는 분이며 모두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이와 같은 하나님을 향할 때 그것은 온 인류를 향하고 모든 문화와 종교를 향해 열린 신앙이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앙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독점하지 못하며 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든 결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궁극적 신비와 초월성은 언제나 남겨지고 존중되어야 한다.
오늘의 신학과 오늘의 신앙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신학과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의 신앙과 신학으로 과감히 전향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계를 향해 열린 대화적(dialogical) 신앙이 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를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교회는 타종교나 문화와 진지하게 대화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화는 타인의 말에 귀기울이려는 자세,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만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일방적 메시지를 전하며 시혜자로서 군림할지언정 결코 세상의 소리에 진지하게 귀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열린 신학과 열린 신앙은 인간의 모든 활동과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으며, 인간의 모든 희망과 갈구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찾고 있는 선 중의 선, 최고선(the highest good)으로서, 세계의 모든 종교와 문화, 사상과 철학은 하나님을 찾고 부분적으로 만난 경험의 증언들이기 때문이다. 열린 신학은 선방 수좌들의 치열한 구도심에서나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시골 아낙네의 정성에서나, 주자학의 높은 철학적 사변에서나 혹은 죽은 자의 억울한 넋을 달래는 무당의 굿판에서나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인간의 갈망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한다. 하나님은 결코 100년전 - 혹은 200년전 -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낼 때 한국인을 사랑하기로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 것이 아니다. 열린 신학은 한국 종교사를 통해서 한국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경륜 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고대 天神 신앙이나 무교의 신령 신앙으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의 공(空)이나 유심(唯心) 사상, 혹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에 이르기까지 한국 종교사는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구도의 발자취였으며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들로 가득차 있다. 적어도 한국인의 기독교 신학, 한국인을 위한 기독교 신학, 한국인에 의한 기독교 신학이라면 이러한 풍부한 상징들을 해독하여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 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철저한 하나님 중심 신앙이야말로 예수 자신의 신앙이었으며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야말로 예수가 원하는 신학일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 열린 신앙과 신학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을 향해 열린 신앙과 신학이 된다.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하나님을 기독교의 울타리 속에 가두지 않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예수를 올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자리에 교회를 올려놓았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망각하고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잘못을 범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징표요 증인일 뿐이지 그 자체가 섬김의 대상은 아니다. 교회가 섬겨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철저히 세상을 위한 존재이어야 한다. 그런데 흔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은 온데 간데 없고 교회만 남아 있다. 이것은 특히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한국 교회의 최대 문제는 교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아니, 교회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대신 사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같이 되어버린 데에 있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한국은 어찌 보면 온 사회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처럼 보인다. '종교 산업'이라는 말을 써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 간판만 내걸으면 무엇이든 번창하고 '성업중'이다. 이 땅에 발에 차일 정도로 교회가 많은 데도 사회가 여전히 혼탁한 것은 교회가 철저히 교회 중심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 좋은 신자란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대신 교회를 잘 섬기는 사람이다. 교회를 위해 많은 시간과 정열, 재능과 재물을 받치는 사람이 훌륭한 신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풍토에서 신앙생활 따로 사회생활 따로라는 이분법적 현상이 생겨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따라서 신앙은 현실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위선적 교인들을 양산한다. 교회는 번창해도 사회는 여전히 혼탁하다.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라는 예수 자신의 선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교회를 확장하고 교세를 늘리는 교회중심의 선교에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선교로 과감히 전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외와 억압이 있는 곳 어디서나 교회는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 나라의 희망과 구원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구체성과 현실성을 눈으로 보게 하고 그것이 빈 구호나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믿게 해야 한다. 교회는 종종 이 세상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세상임을 망각하고 산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도 이 세상의 현실은 아니다.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미약하게 명맥을 유지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아직도 구원받은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존재 - 그의 말씀과 행적, 그의 죽음과 부활 - 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고 기쁨으로 새 시대의 도래를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종말적 구원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고 마치 구원이 이미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날뛰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구원을 바라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 과 사상들, 단체나 세력들과 연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함께 증거해야 한다. 교회의 눈이 하나님 나라라는 궁극적 가치로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유지 와 확장으로 향하는 순간 교회의 타락은 이미 시작된 것이고 교회는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선을 위해 일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외면 당하고 만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닫혀지고 세상도 교회를 향해 문을 닫을 것이다.
현대의 개방된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은 열린 신앙, 열린 교회를 요구하고 있다. 열린 신앙은 열린 신학을 요구하며, 기독교의 경우 열린 신학은 예수의 신앙과 삶으로 눈을 돌림으로써 가능하다. 열린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열린 교회는 교회 중심의 선교에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선교로 과감히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닫혀진 존재가 될 것이고 세상 또한 교회를 향해 문을 닫을 것이다. 교회는 타종교와 문화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며, 타종교와 문화 또한 기독교를 외면할 것이다. 탈냉전, 탈이데올로기 시대와 더불어 첨예화되어 가는 국가간의 경제적 갈등, 핵전쟁의 위협, 환경 위기, 신앙의 상실로부터 오는 삶의 의미의 상실, 공동체의 해체로부터 오는 개인의 고독, 권위의 해체로부터 오는 지나친 방종 등 현대 세계가 직면한 제반 문제들을 앞에 두고서 현대의 종교들은 열린 신앙으로써 서로의 전통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는 성숙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절대화된 종교도 세속주의도, 근본주의도 상대주의도 현대 인류가 처한 문제에 대한 진정한 처방은 못 된다. 성숙되고 겸손한 열린 신앙만이 새로운 인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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