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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Tolstoy, Lev Nikolayevich, Graf]
Tolstoy는 Tolstoi라고도 씀.

1828. 9. 9(구력 8. 28) 러시아 툴라 야스나야폴랴나~1910. 11. 20(구력 11. 7) 랴잔 아스타포보.

러시아의 작가·개혁가·도덕사상가.

 

개요

 

세계적인 소설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를 남겼다. 자신의 대립되는 성향 때문에 깊이 갈등했던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만년에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개인주의적 성향의 귀족으로서, 감각주의자로 시작해 엄격한 청교도로 삶을 마감했으며 보기 드물게 정력적인 사람이었지만 항상 죽음을 두려워했다. 이와 같은 유별난 이중적 성격으로 그는 중년에 작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과격한 그리스도교도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후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교훈적인 단편소설, 희곡 등을 통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정부, 교회 등의 제도와 재산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초기생애와 결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툴라 현에 있는 톨스토이 가문의 영지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6세 되던 해에 카잔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형식적인 수업에 실망한 나머지 영지를 관리하며 독학할 목적으로 1847년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골의 삶보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떠들썩한 생활을 더 좋아해 이 2가지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인 죄악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이무렵 써내려간 항목들은 자신의 행동을 억압하는 동기를 사실적으로 탐구하는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준다.

 

무절제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톨스토이는 군인이었던 형 니콜라이를 따라 1851년 카프카스로 갔고 이듬해 자신도 군에 입대해 산악부족과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는 여가의 대부분을 글을 쓰면서 보냈는데, 잡지 〈소브레멘니크 Sovremennik〉에 발표한 첫번째 작품 〈유년시절 Detstvo〉은 이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유년시절〉의 소재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다루어졌으며, 이무렵 그 자신이 일부를 번역한 영국의 소설가 로렌스 스턴의 〈센티멘털 저니 Sentimental Journey〉식의 서정성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씌어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자서전적이지만 특히 중요한 세부사항에 대한 신선하고 정확한 묘사와 향수 어린 매력을 자아내며, 잊혀진 어린시절의 추억을 재현하는 데 뛰어나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유년시절〉의 속편인 〈소년시절 Otrochestvo〉·〈청년시절 Yunost〉에서는 이 특별한 매력을 찾아볼 수 없는데, 아마도 청소년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카프카스에서 겪은 경험을 전쟁에 관한 첫번째 단편소설인 〈습격 Nabeg〉·〈산림 채벌 Rubka lesa〉에 투영했다. 이들 작품의 주제는 젊은이 특유의 기백으로 다루어져 있으나 군사적인 행동에 관한 정확한 묘사는 잘못된 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훗날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skiye rasskazy〉(1855~56)의 주요특징으로 나타난다.

 

1854년 도나우 전선으로 배속되어 크림 전쟁중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참여했고, 이때의 경험을 〈세바스토폴 이야기〉에 서술하면서 일반 병사의 진정한 영웅적인 행위와 왜곡되고 과장된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대비시켰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제대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그는 자신의 지지를 구하던 사회적·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경쟁 문학 그룹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던 그는 이들 그룹의 합류 요청을 거절하고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갔다. 1857년 그는 프랑스·스위스·독일을 여행했다. 이때의 여행을 바탕으로 쓴 〈뤼체른 Lyutsern〉 등의 작품에 가해진 혹독한 비평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을 잃었으나 창작활동은 계속했다. 1855~63년에는 도덕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당구점수 기록원의 수기 Zapiski markera〉·〈두 경기병 Dva gusara〉·〈알베르트 Albert〉·〈세 죽음 Tri smerti〉·〈가정의 행복 Semeynoye schastye〉·〈폴리쿠슈카 Polikushka〉·〈홀스토메르 Kholstomer〉(1886 출판) 등 일련의 단편들을 썼다. 이들 작품은 훗날 그의 관심사가 된 유물론적 사회가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에 미치는 해독에 관한 문제를 예시하고 있지만, 초기 작품보다 예술적으로 향상된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주관적인 도덕을 강조한 점이 흠으로 남는다. 오로지 〈두 경기병〉에서만 이같은 주관적 논법을 자제하고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작중인물의 한 사람에게 미치는 사회의 나쁜 영향을 교훈적으로 역설하기보다는 예술적으로 시사하고 있다.또 한 예외인 〈홀스토메르〉는 말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을 풍자했는데, 혈통 있는 말의 자연스러운 삶이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러운 인간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용을 통해 독자를 납득시키고 있다. 복잡해진 사회의 오염된 산물과 자연인의 대립에 큰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카자크인들 Kazaki〉에서 뛰어난 솜씨로 이를 다루었다. 이 작품에서 문명인인 주인공은 자신이 사는 마을의 자유분방한 카자크인들과는 반대로 괴로움에 시달린다. 이 카자크인 중 몇몇은 톨스토이가 창조한 가장 인상적인 인물에 속한다.

 

1850년대 후반 톨스토이는 농민의 열악한 교육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외국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야스나야폴랴나에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을 예견한 그의 독특한 교육방법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점차 교육연구에 빠져들었다. 1860~61년에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나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벨기에를 돌아보며 교육이론과 실상을 연구·탐사했다. 이 문제에 열중한 끝에 자신이 개발한 교육이론을 수록한 교육잡지를 발간하고, 간단하고 참신한 접근방식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교과서들을 펴냈다. 1862년 톨스토이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지닌 중산층 가정의 소냐(소피아의 애칭)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교육활동을 그만두고 15년간 가정생활에만 전념했다. 이 기간은 대체로 바쁘면서도 행복한 나날이었고 13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는 영지를 훌륭히 관리하면서 창작활동을 다시 시작해 자신의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를 탄생시켰다.

 

위대한 소설들

 

톨스토이가 7년에 걸쳐 쓴 대서사시 〈전쟁과 평화〉는 일반적으로 세계문학에서 2~3번째로 꼽히는 대소설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온 정열을 쏟아 이전 작품을 훨씬 능가하는 범주와 기법을 구사했다. 여기에서는 인생의 모든 소재가 짜여져 거대한 직물을 만들어내며, 풍부한 자료와 수많은 인물들이 탁월하게 객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그 어떤 소설도 이 작품처럼 사실적인 세부묘사의 능숙함과 상상을 초월하는 정교함, 그리고 다양한 심리분석으로 인생의 전체적인 인상을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시간적인 배경은 1805~14년으로 설정되어 러시아의 5개 귀족가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들 가문의 구성원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생생한 배경 위에 묘사되고 있다. 이 웅대한 파노라마에는 귀족과 농민, 프랑스 황제, 외교관, 궁중신하, 도시생활, 농촌생활, 사실적인 전쟁의 묘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테마는 가문의 이야기에 부속되며 가족의 이야기는 출생·어린시절·성숙기·사랑·결혼·출산·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자연적 단계에 대한 당시 톨스토이의 긍정적인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두 가문의 모델로 자신의 친족을 채택했는데, 불멸의 여주인공 나타샤의 모델로는 처제인 타냐 베르스를 선정했다. 출판된 타냐의 일기를 읽기만 해도 가히 요술이라 부름직한 톨스토이의 예술이 어떻게 타냐를 생명력 넘치고 시적이며 또 '자연스러운' 여인으로 변형시켰는지 알 수 있다. 무능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한 피에르, 세련되고 지적으로 오만한 안드레이, 이 두 주인공의 도덕적인 갈등은 톨스토이 자신의 갈등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한다는 안드레이의 신념은 타인에 대한 봉사를 궁극적으로 믿는 피에르의 입장과 상반된다. 톨스토이는 묘사된 인간 유형에 따라 등장인물의 특징을 부여하는 사실적인 기술법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천박한 사교계의 미인에게는 유려한 외형 묘사를,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은 듯한 복잡한 정서를 가진 여자에게는 심층적인 심리분석을 사용하며, 러시아 민중의 소박함과 진실함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농부 플라톤 카라타예프에게는 예리한 상징주의 수법을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 비평가들이 자주 이의를 제기한 부분은 톨스토이가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하고 전쟁 및 전쟁 구조를 이론화한 부분이다(→ 역사철학). 톨스토이는 이에 대비해 1868년 한 기사를 통해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행동에는 2가지 유형이 있는데, 인간의 의지로 되는 일이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최소한의 자유의지가 있으며, 이른바 역사를 만드는 이들과 군지휘관들의 행동은 수많은 보통사람의 행동에 종속되어 있고 따라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역사가들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을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에게 돌리고 이를 영웅적인 선행이나 악행으로 규정하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라고 규정되어온 정의의 원칙, 형식적인 법과는 무관한 자연법이 자연 자체의 진행과정과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선택의 여지는 없다. 모든 것은 냉혹한 역사적 결정론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전쟁과 평화〉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예술적으로 흠을 남겼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술기법과 문체에서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예술적인 통일성에서는 훨씬 돋보이는 작품이다. 톨스토이의 인생철학은 이 두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변화했다. 〈전쟁과 평화〉는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인 소설이며 주요등장인물은 도덕적으로 굳건하고 자기 내부의 갈등을 제어하는 데 능숙하다. 반면 1860년대 러시아 사회를 다루고 있는 〈안나 카레니나〉는 비관적이며, 그 주인공들은 흔히 내부갈등을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때로 인간적 파멸에 이른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의 사랑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라는 작품의 제사(題詞)는 전체 줄거리의 라이트 모티프이기도 하다. 안나가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도덕률을 깨뜨렸다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위선적인 상류사회가 불륜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관습적인 예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론스키를 향한 안나의 사랑은 깊고 지속적인 열정이다. 안나는 위선을 취할 수 없었기에 서슴지 않고 진실된 사랑으로 상류사회에 맞서지만, 상류사회의 독선적인 비난은 사건의 비극적인 결말을 의미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행한 로맨스는 톨스토이 자신의 결혼생활을 바탕으로 기술한 키티와 레빈의 행복한 사랑과 결혼에 대비된다. 또한 삶의 의미에 대한 레빈의 고통스러운 의문,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자살 생각, 농부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등은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이 뚜렷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개혁가로서의 만년

 

톨스토이는 행복한 결혼생활과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지만 〈안나 카레니나〉 집필을 마칠 무렵에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삶의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그는 정신적인 위기를 겪기에 이르렀다. 그는 〈참회록 Ispoved〉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추구하며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통과 도덕적인 고통을 통렬하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위기는 1879년에 절정에 올랐고 자살을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그는 체계적으로 섭렵했던 철학·신학·과학 서적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으나 평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던 농부들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농부들은 그에게 인간은 신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마침내 톨스토이는 〈신약성서〉에서 나타났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야말로 삶의 의미에 관한 자신의 질문에 해답을 담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 모두에게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인간은 이 힘을 느끼고 있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이 힘에서 유래하며 지각 있는 삶의 목적은 이 힘의 의지를 실천하는 일, 즉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가 한 말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해 그 말을 정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5계명으로 제시했다. 이는 화내지 말 것, 색정을 품지 말 것, 맹세로써 자신을 구속하지 말 것, 악에 저항하지 말 것, 정의나 불의 모두를 잘 대할 것 등이다. 이 계율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훗날 그 자신의 행동과 가르침의 근간을 이루었다. 톨스토이는 새로운 확신에 기초해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영생설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결과 1901년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또한 강압으로 체제를 유지한다 하여 조직화된 정부 형태에 반대했으며, 소유는 힘에 의해 확보된 것이라고 보고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했다. 그는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가족의 요구에 굴복해 법적으로 자신의 영지를 가족에게 양도했다.

 

정신적인 위기를 거친 톨스토이는 1880년 이후 자신의 종교관·사회관·도덕관·예술관의 여러 측면을 책과 소책자 및 기사로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이들 저술은 〈참회록〉처럼 개인적 경험에 대한 큰 관심이 결여되어 있으나 마찬가지로 명료한 산문체로 씌어 있으며, 많은 부분이 톨스토이 특유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뛰어난 논법을 보여준다. 이처럼 수없이 다양한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러시아 정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교조신학 비판 Issledovaniye dogmaticheskogo bogoslaviya〉, 자신의 종교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쓴 〈나의 신앙 V chyom moya vera〉, 작가 자신의 모스크바 빈민가 체험기이자 빈곤의 원인을 분석한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Tak chto zhe nam delat?〉,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를 종합적으로 기술한 〈신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다 Tsarstvo bozhiye vnutri vas〉를 들 수 있다. 이 마지막 작품에서 그는 악에 대한 무저항 신념을 발전시켰고, 정부는 부유층과 권력층을 위해 존재하며 무력을 사용해 대중을 박해하고 전쟁을 통해 이들을 살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에세이는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관행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왜 인간은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가? Dlya chego lyudi odurmanivayutsya?〉에서는 술과 담배의 사용을, 〈나는 침묵할 수 없다! Ne mogu molchat!〉에서는 혁명가들의 처형을 공박하고 있다. 그밖에 개혁을 요구하는 저술이나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제안한 토지세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헨리 조지에게 보내는 편지 Pisma o genre dzhorzhe〉가 있다. 1897년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Chto takoye iskusstvo?〉의 저술을 끝냈다. 이는 자신의 종교관·도덕관·사회관을 바탕으로 미학체계를 전개하려는 시도였다(→ 예술철학). 그는 한 작품이 예술가의 영혼으로써 독자·청중·관중을 '감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술이라 할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만일 예술가와 청중 사이에 '감화'를 통한 결합이 없다면, 즉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예술로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가 인정한 예술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종교예술'로서, 이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통해 인간을 감화시킨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나 바그너의 몇몇 작품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겸손의 징표만큼 긍지의 표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극단적인 일관된 신념에 따라 톨스토이는 자신의 대작들을 '저급예술'의 범주로 분류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이론의 도덕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 뒤 톨스토이는 수많은 논픽션과는 별도로 도덕적인 목적을 지닌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이전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풍부한 세부묘사 없이 건조한 문체로 씌어졌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Chem lyudi zhivy〉·〈두 노인 Dva starika〉·〈악은 유혹하나 선은 인내한다 Vrazhye lepko, a bozhye krepko〉·〈많은 땅이 인간에게는 필요한가? Mnogo li cheloveku zemli nuzhno?〉·〈3가지 질문 Tri voprosa〉 등은 이같은 새로운 문체로 씌어진 작품들이다. 농부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들은 구성이 훌륭한 작은 걸작으로 '우수한 세계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이들 작품에는 도덕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줄거리의 예술적 통일성까지 침해하지는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쓴 일련의 작품들은 교육받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예전의 소설문체에 훨씬 가깝다. 그중 가장 뛰어난 작품은 삶의 실패에 직면해 좌절한 인간을 신비롭게 치료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광인일기 Zapiski sumasshedshego〉와 상징적인 평범한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내면에 있는 믿음과 사랑의 불빛을 발견한다는 내용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Smert Ivana Ilicha〉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Kreytserova Sonata〉에서는 성(性)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진다. 사회의 청소년 성교육과 질투에 대한 성급한 논쟁을 설득력 있게 예술적으로 연구한 이 작품은 인간의 도덕적 건강은 순결이라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작가의 새로운 믿음을 기반으로 씌어졌다. 성문제는 톨스토이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일화를 소재로 한 〈악마 Dyavol〉의 중심 테마이다. 사랑하는 젊은 아내가 있지만 남자는 아름다운 농부 처녀에 대한 욕정을 억제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욕정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남편의 모습을 특유의 뛰어난 심리묘사로 그려냈다.

 

톨스토이가 71세에 쓴 장편소설 〈부활 Voskreseniye〉은 그가 '개종'한 이후에 나온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한 소녀의 정조를 유린한 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녀가 매춘부가 된 뒤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범인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주인공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따라 시베리아로 간다. 여인은 그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지만 끝내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작품에는 매혹적인 시적 분위기로 묘사되는 첫부분을 비롯해 뛰어난 부분이 많으며 재판장면 또한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부활〉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의 예술적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증오의 형적을 담고 있으며 도덕 설교와 사법 및 수형 제도, 교회의 종교의식에 대한 신랄한 공격으로 작가보다는 논객 톨스토이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개종' 이후 톨스토이는 완벽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일상생활을 새로운 견해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술·담배를 끊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농부처럼 옷을 입었다. 그 누구도 타인의 노동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으면서 직접 자신의 방을 청소하거나 밭일을 하고 자신의 장화를 손수 짓는 등 가능한 한 자급자족하는 삶을 영위하려 했다. 또한 순결이라는 이상에 한층 가까워지고자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육체적인 욕망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또 기아구호조직 같은 박애주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도덕과 종교 저술에서 보여준 능변과 아울러 그의 명성, 생명력 넘치는 인격은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제자들은 그의 계율에 따라 공동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집단거주지를 조성했으나 톨스토이 자신은 그러한 조직적인 노력을 불신했다. 그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진리는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인간들에 의해서만 도달된다고 선언했다. 톨스토이의 명성이 높아져 러시아 전역은 물론 외국으로까지 그의 견해가 알려지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백 명이 야스나야폴랴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아내와 장성한 아들들은 톨스토이의 견해와 변화한 생활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톨스토이의 아내가 '속을 알 수 없는 이들'이라 부른 이 '개종자들'의 끊임없는 방문과 그들 중 한 사람인 V. G. 체르트코프의 집안문제 참견으로 톨스토이 부부는 자주 말다툼을 했다. 그의 희망과는 반대로 아내는 자신의 소유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금욕적인 그의 생활방식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가족의 안락한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남편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1880년 이전에 출판된 작품의 저작권을 얻어냈고, 이들 작품을 직접 출판함으로써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 톨스토이가 말년에 여러 작품의 출판을 보류한 것은 스스로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고, 또 저작권 소유문제로 아내와 다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1911년에 발견된 이러한 작품들은 그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 가운데 길지 않은 장편소설 〈하지 무라트 KhadzhiMurat〉는 러시아군에 투항한 용감한 카프카스 전사가 비밀리에 아들을 만나보려 했다가 죽음을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생생한 서술방법과 서로간의 오해를 심리적으로 파헤친 점은 이 작품을 그의 걸작으로 손꼽게 만들었다. 이보다 짧기는 하나 마찬가지로 뛰어난 작품으로는 욕정과 오만을 극복하고 수도승이 되는 귀족의 이야기인 〈세르게이 신부 Otets Sergy〉, 악을 낳는 악의 힘에 비해 선은 어떻게 선행에 영향을 주는지 가상적인 예를 들어 연구한 〈위조지폐 Falshivy kupon〉, 온갖 불행을 말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한 젊은 농부의 이야기인 〈알료샤 고르쇼크 Alyosha Gorshok〉 등이 있다.

 

톨스토이가 죽은 후 처음 나온 유고집에는 몇 편의 희곡작품도 실려 있다. 톨스토이는 연극을 '아마도 가장 영향력이 큰 예술분야'라고 믿었고 여러 번 희곡 창작에 매달렸다. 그러나 극작가로서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으며, 그의 희곡이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소설에 견주어 예술적으로 뒤떨어진다. 그의 희곡 중 가장 우수한 〈어둠의 힘 Vlast tmy〉은 1888년 처음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발톱만 붙들려도 새는 끝장 난다'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톨스토이가 만년에 즐겨 다루었던 주제인 농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비극이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유혹함으로써 처음 죄를 짓기 시작해 또다른 죄를 짓고 결국에는 살인까지 하고 만다. 이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계몽의 열매 Plody prosveshcheniya〉는 귀족사회의 결함을 유쾌하게 풍자한 희극이다. 미완성의 〈빛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I svet vo tme svetit〉는 주인공이 가족에게 자기 믿음의 현명함을 확신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다룬 점에서 자서전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살아있는 시체 Zhivoy trup〉(1902 집필)는 한 술꾼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해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죽은 체하나 경찰이 그가 살아 있음을 밝히자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희곡에서는 노년기 작품에 나타나는 도덕 설교를 찾아볼 수 없으며, 대신 온화함과 인간의 실수에 대한 동정,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누리는 편안한 삶과 자신이 원하는 삶, 즉 속세의 소유물로부터 해방되고 타인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은둔생활 사이의 괴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느꼈다. 그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자신이 공연한 우스갯거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가정 상황이 악화되자 그는 어느날 밤 몰래 집을 떠났다. 주치의와 막내 딸 알렉산드라만을 데리고 더욱 가까이서 신을 섬기며 조용히 살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나섰으나, 며칠 후인 1910년 11월 20일 랴잔 역의 한 외딴 마을 아스타포보의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평가

 

문학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탁월함이 비평가들에게 진지하게 의심받은 적은 없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세계적 작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톨스토이는 앞세대 러시아 작가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외국 작가들, 이를테면 장 자크 루소, 스턴, 스탕달, 그리고 나중에는 윌리엄 새커리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의 명성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오늘날 그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는 그의 도덕적인 발전과 정신적인 발전의 이중성이 보다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진리를 탐구하면서, 불완전한 지식과 불완전한 인간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결과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려는 강박관념 같은 의무감 때문에 그의 이론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역사·비폭력·교육·예술관을 논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모든 체계적인 연구는 한결같이 그의 사상이 19세기 자유주의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톨스토이는 지난 2,000년 동안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정부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믿었다. 그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억압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했고,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방법은 인간의 도덕적인 성장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계급과 국가가 없는 상태를 향한 진보적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인 경제결정론이나 폭력적 계급투쟁과는 반대로 모든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 도덕적 완성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준수하고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이성주의를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기는 했으나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컸던 19세기 도덕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E.T. Simmon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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