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 http://www.withoutwar.org
사회봉사로서 병역의무를 이행하고픈 어느 젊은이의 기록
- 오 태 양 -
2001년 12월 17일 '종교적 신념과 평화·봉사의 인생관'에 따라 입영을 거부한지 꼬박 넉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 싶습니다. 우여곡절 많았지만 틈틈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자비의집과 희망학교 사회봉사는 현재의 삶에 자긍심을 부여해주는 참으로 소중한 하루일과가 되었습니다. 제 마음 한켠의 미안함과 죄스러움은 다른 수많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드러나지 않게 감수하고 있는 고통과 사회적 차별의 상황에 견주어 저의 드러남이 마냥 특혜처럼 느껴질 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차등이 없을진데, 양심에 따른 행위에 대해서는 이렇듯 다른 사회적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 60여년동안 병역거부자들에게 부과되었던 보이지 않는 형벌, 즉 ‘종교적·국가적·사회적 이단자’라는 낙인과 편견의 색안경들을 국민들이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랜 겨울지나 봄은 오는 것이겠지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비폭력적 삶의 지향
병역거부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집총을 비롯한 군사훈련은 추상적인 논리가 아닌 매우 구체적인 현실과 상황으로서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저는 제 군생활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람모양의 사격판을 향해 얼굴과 심장을 정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 ‘찔러 총! 베어 총!’을 외치며 불특정 대상을 향해 총검술을 익힌다는 것,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효율적으로 살상할 수 있도록 수류탄을 조작하고 투척하는 연습하는 저의 모습이 몇날 몇일을 제 머릿속에서 유령처럼 맴돌았습니다. 각종 군사훈련이 직접적인 살상행위는 아닐지언정 살심(殺心)을 유발하는 행위임에는 분명하였습니다. 제가 진정 두려웠던 것은 극박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현되는 폭력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위기상황에서 직·간접적 폭력행위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유발되도록 쉴새없이 주입받고 훈련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매일같이 불특정다수를 대상화하여 총과 칼을 휘둘러야 하는 행위는 그 목적과 방법, 모든 면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군사훈련을 이행할 수 없는 전투불능자이자 군인으로서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제게 군사훈련의 위험성은 그것이 외부의 명령과 강제적 규율에 따라 살상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일상화·내면화·자기정당화’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그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살심(殺心)은 제 의식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음으로 해서, 언젠가는 불특정한 대상과 예측불가능한 상황에서 자기통제력을 넘어서는 행위로 어떻게든 표출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육과 훈련의 기능일테니까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낡은 역사적 명제 앞에서, 제가 선택한 것은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는 새로운 관점과 접근이라고 하겠습니다. 폭력적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행위를 연습하고 준비하는 것보다, 자신은 물론 상대방마저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비폭력의 훈련과 체화’야말로 궁극적 평화를 달성할 수 있으며, ‘폭력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저의 현재적인 종교적 믿음이자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제 삶의 모델인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삶의 방식이었고, 대학시절 인류의 평화문제를 연구하던 끝에 내린 일단의 결론이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을 비롯한 전세계 병역거부자들의 유구한 전통과 존재자체가 일깨워준 소중한 교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있어서 ‘비폭력적 삶과 사회발전’의 실현은 단지 군사훈련 거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채식과 한끼금식, 명상과 사회봉사 등의 일상적 실천을 통해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닦아나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개인으로서든 사회로서든 ‘평화의 실현’은 이론적 체계나 짜임새있는 언변으로써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실천과 교육이 병행되어질 때 비로서 완성되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게 있어 병역거부는 진리와 평화를 추구하는 한 평범한 개인으로서의 이상을 실현해 가는 일련의 실험에 다름 아닙니다.
개인의 자기진정성과 사회적 기준 및 의무
여전히 곤혹스러운 것은 삶을 통해 온전히 검증되지 않은 ‘내면의 소리’-일반적으로 양심이나 신념으로 명명되는 것-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애써 드러내고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양심을 공개하고 사회적으로 판단받는다는 것, 이것은 제게 있어서나 우리사회에 있어서도 매우 낯설은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 따르는 것들을 말입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기독교신앙을, 대학에 들어와서는 사회과학적 지식을, 졸업 후 사회참여활동 과정에서는 불교적 세계관에 영향 받았습니다. 저에게 있어 기독교적 ‘사랑’과 불교적 ‘자비’, 사회적 ‘정의’는 본질적으로 일치합니다. 저에게는 단일한 사유체계와 개념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무수한 병역거부의 동기와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30여년 가까이 축적해 온 세계관과 가치관을 무자르듯이 개념적으로 분석하고, 설명가능한 논리체계로 정리하고, 그것들을 일일이 말과 글로써 설명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저에게 있어 병역거부의 근거가 되는 양심이라고 한다면 종교적 신념임과 동시에 정치적 사상이기도 하며, 아울러 개인적인 인생관과도 부합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기에 저는 병역거부의 결정이 어떤 기준과 종교적 교리에 기초했는가를 밝히기 전에, ‘내면의 자기진정성에 기초한 것인가’ 라고 스스로 끊임없이 반문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폭력을 신봉하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인류에게는 비폭력과 정당폭력의 두 길이 있었으며, 그것은 여전히 각자의 선택에 의해 끊임없이 실험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래왔기에,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고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정의는 다수결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의 진실이 사회적 진실에 합치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저는 그 양자가 일치되도록 노력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불완전한 것들을 입영거부 선언 이후 저는 사회적으로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그것의 진실성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기를 원하며, 한두마디씩 덧붙이기를 원합니다. 그 과정은 때로는 매우 주관적이며, 심지어는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평범한 종교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틀렸으며, 이기적이고 매우 해악적이라고까지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종교를 가장한 ‘거짓양심’이라고도 말합니다. 저는 그럴때면 참과 거짓, 선과 악, 개인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을 가늠하는 사회적 기준과 판단근거 대하여 그들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개인의 양심과 사회적 의무’를 갈라놓고 찬반을 나누어 시비와 우열을 따지고 싸우는게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대립적인 것들로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현상적인 측면일 뿐 세계의 본질은 ‘조화와 공존의 질서’를 따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는 개인적 차원의 지고지순한 정의이며, 국방의 의무는 사회적 차원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 양자가 반드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양자를 ‘시비와 우열의 관계’가 아닌 ‘상생과 조화의 관계’로 재정립할 수는 없는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와 자의에 의한 군복무자의 삶이 모두 존중받을 수 있는 길은 없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양자가 적당한 거리를 존중하며 함께 가는 ‘조화로운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한 쪽 길만 있다면 기차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뿐더러, 어느 한 쪽의 존재이유도 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는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두 개의 축이라 할 것입니다.
자기실현과 사회의무로서의 사회봉사
병역거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행위라 비판합니다. 저는 그것이 현행 실정법의 범주 안에서는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만, 윤리적 차원에서는 스스로 떳떳할 수 있기에 양심적 행위의 대가와 법적 처벌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습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저에게 부과되는 공동체의 책임과 역할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것을 부정했다면 대학시절부터 제 삶의 일부분을 차지했던 사회봉사활동을 설명할 길은 없어집니다.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차례 자의가 아닌 타의적 강제에 의해 살아오지 않았다고 자긍합니다. 제가 대학시절부터 스스로 선택한 사회봉사활동은 국가적, 혹은 사회적 의무 이전에 제 인생의 자발적 선택과 자기실현으로서 이루어진 자연스런 행동입니다. 제가 믿고 따르는 불교적 전통에서는 ‘나의 삶이 타인의 희생과 고통 위에 존재하기에 대가없는 이타행(利他行) 즉, 자발적인 사회봉사’를 불자의 기본도리로 여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존재는 상호의존함으로써 지속가능하기에, ‘타인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에 기초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자비의 실천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불자로서 사회봉사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종교생활일 것입니다.
저는 제 양심상의 이유로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것이지 국방의 의무와 군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회봉사로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고픈 평범한 젊은이로서 저의 개인적 바램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저의 양심에 따른 행위가 어쩔 수 없는 실정법상의 위법행위로 간주되어 형사적 처벌이 불가피하다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야한다면 기꺼이 감옥에 갈 것입니다. 다만 개인적 구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효용성의 측면에서 저를 감옥에 가두어 두는 것보다는 사회봉사의 기회를 주는 것이 훨씬 더 사회적 이익과 공공의 이해에 부합되지 않을까 사려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3년 이상이라도, 군복무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과 조건이래도 개의치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감옥에서 살고 사회봉사는 밖에서 한다해도 개인적으로는 하등 문제될게 없습니다. 저에게 그렇게라도 사회적 의무를 이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그렇게 ‘교화’될 것입니다. 지금껏 1만여명의 양심적 행위자들을 감옥에 가둠으로서 과연 해결된 것이 무엇이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양심과 종교적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였습니까? 군사훈련만이 아니라면 이 사회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그것이 길거리의 청소부여도 좋고, 오지섬마을의 무보수 교직활동이어도 좋고, 홀로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라도 하겠다는 이들이 자신이 고의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였다며 뉘우쳤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내 놓는 한이 있더라도 타인에게 어떠한 형태로든지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이들이 교도소내에서 말썽을 부리거나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적이 있습니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창살아래 매어둔다고 해서 지켜온 신념이 바뀌고, 삶의 방식이 변화될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인류역사의 오랜 전통만을 보더라도 인간의 양심과 종교적 신념은 사회적 격리와 강제적 교화를 통해서는 결코 ‘교도’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고난받고 상처입은 이웃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동참함으로써,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책임감과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병역거부자들의 삶이 과거보다 더욱 성숙해진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도’가 아닐런지요.
개인적 구제를 넘어 사회의 구원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종교적·국가적·사회적 이단행위’로 치부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저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이 넘어야할 제도적·문화적 편견의 장벽은 참으로 높고 견고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법적으로 처벌함으로써 일단의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죄지은 자에게 벌을 준다‘는 관점에 입각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병역거부자 자신들에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들은 현행법으로서는 범죄자이며, 종교적으로는 이단자(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주류기독교단에 의해, 제 개인의 경우 호국불교의 전통에 의해)이며, 국가적·사회적 차원에서는 반애국적인 이기주의자들로 매도당합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법질서와 다수의 가치관 앞에 소수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정상인‘으로서,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서 서기까지는 법과 제도적 변화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일 것입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권리가 인정되고 그들에게 대체복무제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할나위 없는 기쁨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개인의 구제’로서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구원’의 의미를 가지기에 더욱 기쁠 것입니다. 양심적 행위자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열린 법치국가로 나아가는 징표이며, 종교적 관용과 화해의 길이 열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더불어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울려퍼지는 평화의 메시지일 것이며,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인정과 공존의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한국사회는 한 단계 성숙해 가는 것이며, 편견과 차별 속에서 영위되었던 많은 이들의 삶이 그 왜곡된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기에 이는 일단의 사회적 구원과도 같다고 여겨집니다. 저도 그러하였지만 편견과 고정관념의 색안경을 벗음으로써 보다 성숙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정작 ‘편견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로 보게된 이들’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각 개인과 우리사회가 밖으로만 향해있던 시선들을 한번쯤 안으로 돌려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대다수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우리가 당연시 여겨왔던 ‘정당한 전쟁’과 ‘정당한 폭력’에 대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를 원하지만, 그 평화로 가는 과정은 때론 폭력적이기도 하며, 이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기정당성과 합리성을 획득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가 그래왔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옹호하기에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생활화 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대다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자신의 청춘과 존재를 던져 이 사회에 이야기하고픈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은 ‘평화와 폭력’ ‘양심과 인권’이라는 인류의 오랜 화두에 대해 우리사회가 한번쯤 성찰해 보기를 염원하는 조금은 극단적인 ‘대화와 토론’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비폭력적인 방식에 의한 삶과 사회변화’를 꿈꾸는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따라서 강자건 약자건, 가진 자이건 못 가진 자이건, 다수자이건 소수자이건 간에 염원하는 ‘목적으로서의 평화’를 ‘어떤 과정과 방식으로 실현해 갈 것인가’라는 문제야말로 우리 모두가 머리 맞대고 고민하고 해결해 봄직한 인류사적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병역거부자와 군복무자의 공존과 연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존재함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제법무아), 끊임없이 변화함으로 고정된 실체는 없다(제행무상)’는 불교적 세계관을 따르는 저로써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권리가 보장되고 그들에게 대체복무제도의 기회가 주어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이들의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임을 확신합니다. 한국사회에서 병역거부자들이 그토록 극심한 인권유린과 사회적 차별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흔들림없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새겨볼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국적 특수상황이 아니라 일체의 전쟁과 무력행위를 거부하며 참여하지 않았던 비폭력의 인류역사와 ‘자기진정성’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행위양식에 기초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종교적 편견과 경직된 국가주의의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적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느냐의 여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됩니다. 획일적 기준으로 옷이 잘 맞지 않는다고 옷에 사람 몸을 끼워 맞추려 하거나,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람을 폐기처분 해버리는 것은 ‘인간적 방식’이 아니라 ‘기계적 방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곳에 인간의 양심이 설 자리, 존엄한 개인이 설 자리, 종교적·사회적 소수자가 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입영을 거부하였지만, 현재 군복무를 하고 있거나 준비중인 대다수의 대한민국 젊은이들과 연대의식을 공유합니다. 많은 군복무 경험자들과 현역장병들이 저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에게 던지는 신랄한 비판과 매도에 대해서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저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자 노력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병역거부자와 군복무자의 공존이며, 싸움이 아니라 대화이며,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 그들을 이질화시키고 적대시하게 만드는 사회의식과 불합리한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 동기에 의해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청춘과 의지와 능력이 2년이 넘는 군생활에 저당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들으며 안타까웠습니다. 국방부 관계자분들도 밝히고 있듯이 왜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회피하려고 하며, 삶의 억압성을 호소하는 것인지 귀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3백여명의 군복무 사망자중 100여명이 자살자이며, 5천여명에 달하는 정신질환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직도 이들에게 ‘다른 사람은 다 잘하는 데 너는 왜 ...?!’ 라며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윽박지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까? 불가침의 성역이었던 군복무가 우리사회의 젊은이들에 있어 자기실현과 신성한 의무로서 인식되고 있는지, 진지하게 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마치며
언젠가 종교적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로서 한국에 파견되어 해외대체복무를 하고 있다는 독일인 청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볼 때 오랜 기간 군복무를 해야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제게 지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만약 한국에서 태어나 무거운 죄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은 병역거부를 할 것이며, 그 신념은 언제 어디서고 변함없으며 후회없다‘라는 진지하고 당당한 입장과 태도였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국가와 종교, 신념과 사상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인간행위이자 권리임을 그의 모습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한국의 젊은이들도 보다 열악한 국가에 파견되어 인권과 평화를 신장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 날이 올 때까지 저에게 주어진 시간과 역량만큼 사회봉사에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2001.12.17 : 평화운동가/불교신자 오태양씨 병역거부선언.
2002.02.07 : 구속영장실질심사, 최초로 불구속 수사 확정
2002.06.19 : 첫 재판, 헌재 판결 때까지 무기한 재판 연기
2004.03.17 : 1심 재판 재개
2004.08.30 : 1년 6개월 실형 선고 (법정구속),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현재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음
2004.10.27 : 항소심 심리공판
2004.11.17 : 항소심 선고공판
현재, 대법 판결을 기다리는 중..
'세상 이야기 >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역거부 소견서(최진) (0) | 2006.12.16 |
---|---|
최후진술서(오태양) (0) | 2006.12.16 |
해방의 문명사를 위하여(이승렬) (0) | 2006.12.11 |
톨스토이 [Tolstoy, Lev Nikolayevich, Graf] (0) | 2006.12.11 |
[책] 역사용어 바로 쓰기-한정숙(경향신문, 060825) (0) | 2006.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