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7호 (1994년 7-8월호)
왜 한살림인가
― 무위당 장 일순 ―
이 글은 故 장일순 선생께서 1991년 4월 11일 서울에서 열렸던 한살림 활동가 제1차 연수회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원래 제목은 없었으나 편집자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묵암선사(黙庵禪師)라고 옛스님의 말씀에 이런 말이 있어요.
爲鼠常留飯
憐蛾不點燈
自從靑草出
便不下?行
쥐를 위해서 밥을 언제나 남겨 놓는다.
모기가 불쌍해서 등에다가 불을 붙이지 않노라.
절로 푸른 풀이 돋아나니
계단을 함부로 딛지 않노라.
이건 옛날의 불가에서 말하는 게송이고, 곧 시인데, 하나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그 도리에 있어서 모기도 남이 아니고 쥐도 남이 아니고 미물 전체도 남이 아니다 그 말이에요. 오늘 여러분들이 이제 이 연수를 하고, 한살림이 왜 필요한가하는 얘기를 하면서 이로우니까 한살림운동을 한다든가, 이러한 먹거리라야 오래 산다고 하니까 그렇게 한다든가, 그런 차원으로 문제를 보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수반되느냐. 경쟁이 수반됩니다.
맹자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양나라의 혜왕(惠王)이 맹자를 보고 싶어서 불렀단 말이야. 그래서〈선생님,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맹자 말씀이,〈임금께서는 왜 하필 이로우냐하는 걸 묻습니까? 그런 얘기로 얘기를 하면 제후들은, 저 지방에 있는 그 곳곳을 다스리는 자들은 기회 있으면 당신을 노릴 것입니다. 또 공경대부들은 제후를 노릴 것이고 또 그 밑의 벼슬아치들은 공경대부를 노릴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나라 안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그런 얘기를 했단 말이야. 이(利)라는 건 원래가 나락 화(禾)자에 이렇게 칼 도(刀)자로 되었단 말이야. 농경문화 이전에도 문화가 있었지마는 중국의 글자 모두가 농사짓는 이치에서 글자가 많이 왔어요.〈이(利)〉라는 건 나락을 베는 것이란 말이야. 그런데〈이〉를 따져서 이렇게 간다고 하면 경쟁이 수반돼. 경쟁이 수반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효율을 따지게 돼.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세상에 일등한 놈만 살고 이등해서는 살 수 없게끔 된다고. 왜? 무시되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이 우리 몸에 아주 배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 가지고는 한살림운동에 척도가 되지 않아요. 경쟁과 효율을 따지게 되었을 때에는 일체가 어떻게 되느냐. 적수가 돼. 그렇게 되지 않아요? 일체가 적수가 된다 이 말이야. 저 사람이 일등을 하면 안될텐데. 내가 일등을 해야지. 이렇게 되지 않느냐 이 말이야. 그러니까 만인이면 만인이 전부 갈가리 나눠지는 거란 말이야. 그러고 지가 제일이고. 이치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산업문명이 고달픈 것이 경쟁과 효율을 가지고 따져 올라가기 때문에 한이 없어요. 그리고 인간도 일체가 이용의 대상인 동시에 자연까지도 이용의 대상이니까. 자연까지도 이용의 대상으로서 무자비하게 해오다 보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사람이 살 수가 없게 되었지.
그러니까 묵암선사의 이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쥐는 사람이 농사짓는 곡식이라든가 또 주부들이 잘 다듬어 놓은 이불이라든가 옷이라든가 이걸 다 쏠아치우고 해를 끼치는 그런 미물이지만 말이야. 그러고 모기는 여름철이면 붕하고 날아와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그런 미물이지만 이 쥐와 모기가 생명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이야.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쥐를 위해서 항시 밥을 남겨놓고 모기를 위해서 나는 등불을 켜지 않노라. 풀이 나면 나는 그 계단을 밟지를 못하겠노라는 말씀이지.
그러면 우리가 한살림운동을 하는 데 중요한 의미내용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는 살 수가 없는 거니까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 그 이치는 뭐냐? 생명은 하나라는 거예요. 둘이 아니야. 하나지. 그런데 이 생명은 볼 수가 없어. 보지를 못하지만 우리가 느끼고 알 수가 있단 말이야. 그런데 한살림운동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가 되자는 운동이란 말이지. 여직까지 산업문명에 있어서는 경쟁과 효율을 따지면서 일체가 이용의 대상이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살 수가 없게 된다 이 말이야. 생명이 존재하기가 어렵게 되고, 생명이 무시된다 이 말이야.
예를 들어서 태양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지 않아요? 지구가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있어요? 어때요. 너무나 어이가 없으니까 대답을 안하시는구만. 이 지상에 풀이나 나무가 없다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르네오나 사라와크 이런 지대에서 베는 나무가 앞으로 11년 후면 사라와크의 나무는 다 잘려 없어진다고 요전번에 신문에 났어요. 매년 나무베는 것 가지고 천만명 이상이 호흡해야 할 대기의 산소가 없어진다고 그러는데 보셨죠?
그러면 나무가 남입니까? 옛날에 어떤 공부하는 중이 선생님보고 말이지〈부처님이 어디 계십니까?〉그러니까〈저기 문앞에 있는 잣나무를 봐라〉그러셨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저 잣나무 한그루도 우주 전체가 없으면 없는 거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 뭐냐하면 우리가 개체 아녜요? 일미진중에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이건 불교의 화엄경에 있는 얘긴데 티끌하나에, 시방이란 우주를 얘기해요, 우주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날파리 하나도 우주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지 않아요? 지구가 없다든가 태양이 없다든가 달이 없다든가 별이 없다든가 어떤 조건 하나만 빠져도 존재할 수 없는 거다 이 말이에요.
왜 내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하느냐하면, 이러한 이치 속에서 우리의 이 운동의 고리가 있는 것이고 그 고리를 연결지어 나갈 때에 우리들의 일이 제자리에 제 모습으로서 전개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다시 얘기해서 신선은 신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모두가 있으니까 신선이 있는 거지. 선과 악, 높은 거와 낮은 거, 귀한 거와 천한 거, 이런 거 등등도 전부 상대적인 개념이야. 낮은 게 있으니까 높은 게 있고, 높은 게 있으니까 낮은 게 있고, 하나의 양측면에 지나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면서 매일같이 엎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한쪽만 보기 때문에 엎어진단 말이야. 우리가 여기 모두 소비자인데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가 이 일 할 수 있어요? 또 소비자가 없으면 농사꾼이 생산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런 관계다 이 말이야. 이게 없으면 저게 없고 이게 있으면 저게 있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사회적인 조건은 그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이야. 그러면 누구를 무시하고 누구를 홀대할 수 있느냐라는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최시형 선생은 좋은 말씀을 백년 전에 벌써 얘기를 했어요. 경천 경인 경물(敬天 敬人 敬物). 여기서〈경천〉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저 하늘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있는 본마음,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닌 타고난 그 본마음, 그걸 크리스찬들이 말하면 하느님 아버지라고 얘기할 수 있죠. 그러고〈경인〉, 모든 사람을 섬기는 거다 이 말이야. 그 다음 번에〈경물〉, 모든 만물을 섬기는 거예요. 아까 저기 쥐에게 밥을 남겨주고 모기 때문에 등불을 켜지 않는다고 하는 그 얘기나 모든 만물을 섬겨야 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죠. 예를 들어서 아씨시의 프란체스꼬가 들에 나가면 새들하고 대화하고 꽃하고 대화하고 벌레하고 대화하고 이런 것은 뭐냐. 그게 생명과의 대화다 이 말이야. 또 요 얼마전에 부활절 지냈지만 그 수난절 동안에 빌라도가 예수님보고〈야, 네가 왕이라지?〉〈당신이 날보고 지금 왕이라고 그러지 않소?〉이게 아주 중요한 얘기에요.〈당신이 날보고 지금 왕이라고 그러지 않소?〉〈너희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냐?〉〈너희들이 얘기하는 나라와 내 나라는 다르다.〉그런 말씀했죠? 그 얘기는 우리 한살림운동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얘기에요. 너희 나라와 내 나라는 다르다하는 것은 내 나라는 생명의 나라라는 얘기야. 생명의 나라. 만물이 공생하고 만인이 공생하고 그러기 때문에 만인은 다 왕이다. 어떤 왕이냐.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은 왕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딸은 왕이다 이 말이지. 하느님 아버지 안계시면, 생명의 근원이 안계시면 우리의 존재가 없다 이 말이야.
이제는 바로 그 얘기가 어디까지 발전을 해야 하냐면 벌레 하나, 나무 하나까지도 왕이고, 불가에서 얘기하는 부처라고 하는 차원까지 가야 된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는 남녀에 대한 불평등이 존재할 수 있어요? 또 그런 차원이 되면 빈부의 차가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러고 학력이 있다 없다가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런 모임에서 잘 예를 듭니다만, 성경에 보면 포도밭의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포도밭이란 뭐냐. 하늘나라예요. 그래서 아침에 일하러 온 사람에게도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저녁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그러니까 아침에 온 사람이 불평을 말해요.〈난 아침서부터 왔는데 왜 다 저녁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시오.〉〈너하고 아침에 약속했잖아. 한 데나리온 준다고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하고도 내가 그렇게 약속했단 말이야.〉포도밭 주인이 이렇게 말하지요. 이게 생명의 나라의 계산법이에요.
여러분들이 농민과 생활을 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농민의 입장이 돼야 한다 이 말이에요. 또 농민은 여러분들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되고. 그런데 이것이 처음부터 쉽게 되느냐? 잘 안되지. 왜? 나쁜 습성 때문에 안된단 말이야. 잇속을 계산보는 습성 때문에 안되는 거라. 문제는 소비자는 생산자를 살게 해줘야 될 거 아니요. 우리 안에 들어온, 하늘나라에 들어온, 생명의 나라에 들어온, 먼저 왔건 나중에 왔건 다 먹고살게 해줘야 되잖아요? 그게 포도밭의 말씀이라. 우리 유가(儒家)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天不生無祿之人. 하늘은 말이죠 인간으로 태어나면 말이지 다 입에 거미줄 슬게 하지 않고 먹고살게 해준다 이거야. 그리고 地不生無名之草라. 땅에 있는 모든 풀은 무시당할 풀이 하나도 없어. 다 이름이 있다 그 얘기야.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어떻게 돼 있느냐. 이 담에 출세하기 위해서 압구정동으로 가야 된다면서요? 난 잘 모르겠지만 웃기는 얘기예요. 난 요새 이렇게 서울 톨게이트로 들어올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면,〈아휴, 여기 사는 사람들 참 불쌍하구나. 또 여기 사는 사람들 자녀들을 낳아서 여기서 키우니 얼마나 걱정이 많겠는가. 이 공기가 이렇게 나쁜 데서 아이들을 키우니까 말이지. 하루 이틀은 몰라도 몇십년 지나서 이 체질이 말이지 얼마나 허약하겠느냐.〉그러니까 생명의 나라, 환경의 나라 이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얘기를 안할 수 없는 거지.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럼 그것은 무슨 얘기냐. 이런 것을 잘 모르는 분들, 또 아직까지도 잇속에 묶여 있는 자기 스스로가 모든 이에게 이렇게 살면 안되고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야 됩니다 하는 것을 펼쳐가야 되는 거다 이런 말입니다. 이게 그렇지를 않고 이 운동이 우리끼리만 요렇게 일이 되어 돌아갈 적에는 어떻게 되느냐. 결국은 그걸로서 우리 운동은 끝이 나요. 운동이란 것은 여러 사람과 더불어서 같이 가는 거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공생하자는 것인데 이제 시대는 공생의 시대예요. 자연과도 공생해야 되지만 제대로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하고도 공생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가서 만나고 안아주고 그렇게 하고 그 사람네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렇게 하는 속에서 연대가 되는 거다 이 말이에요. 다시 얘기하면 우리끼리만 맛있는 것 먹고 우리끼리만 몸에 해롭지 않은 거 먹고 뭐 이런 식으로만 운동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제 우리의 이 일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겠어요?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대기와 물은 이게 생명입니다. 이걸 나눌 수 있습니까? 나눌 수 없는 거예요. 물은 어떻게 됐든 이게 내 몫이니까 컵에 담겨 들어와서 내거다하고 방편적으로는 순식간에 이렇게 생각하지만 내 몸에 들어온 물도 다 나가게 되어 있는 거다 그 말이에요. 하나로 돌아가고 있는 거거든. 또 대기도 하나로서 돌아가고 있다고. 그러니까 오늘 이 운동은 현재 여러분들이 대개 짐작을 하시겠지만 우리나라만 지금 이 운동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일본사람들도 이런 뜻에 맞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미국에도 있고 구라파에도 있고 도처에 있고 오히려 원주민들, 토인들 아이누라든가 산업문명과 접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자연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잘 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원주민들의 사는 모습에서도 이젠 많이 반성하고 배워야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네들 원주민들이 사는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그건 이미 그렇게 해 가지고는 오늘날의 세계인류를 먹여 살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과학을 해야 하는데 어떤 과학이냐? 생명의 과학. 요전번에는 자연을 이용을 해서 인간들이 편리하기만 하면 잇속만 있으면 좋다고 하는 물질과학으로 갔지만 이제는 생명의 과학의 방향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인간에게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해롭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자연을 낭비하게 되면 이렇게 이렇게 돼서 인간은 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가야 된다. 그러한 시각을 달리하고 자연과 인간 다 같이 다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서의 과학이 앞으로 자꾸 태동이 되어서 여직까지 잘못된 것을 후퇴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기술과학이 나와 가지고 전부 망가뜨려 놨다는 생각만 해서도 안된다 이거예요. 여기 앉아계신 여성들 전부, 주부님들 보니까 인텔리들이신데 그런 생각이 드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과학도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얘기가 되어야 하겠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특히 중요한 것은 모든 거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 하나라는 것, 모든 생명체와 모든 유기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여직까지 경쟁의 시대에서, 또 인간의 편리함만 생각하고 있던 그러한 시대에서 온 그러한 습관 때문에 모든 것을 가리게 되고 모든 것을 일일이 따지게 되고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만 생각하게 되고 독선적으로 생각하게도 되고. 인간의 횡포와 독선이 얼마나 이 자연을 망가뜨렸기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까 문제를 널리 보고 넓게 보고 깊이 보고 그렇게 해서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이 한살림운동은 그냥〈그 옛날에 한살림운동이 있었어. 그런데 그 주부들이 좀 모여서 애썼지. 그런데 뭐 좋은 거 있으면 자기들끼리만 해 처먹고 그러고는 도대체 뭐 상대를 안하더라고. 그러더니 결국 그러더니 끝나더구먼.〉얘기가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안된다 이 말이야. 넓게 봐야지. 때로는 기본적인 문헌이 나가게 되거나 할 적에는 그 문장이 좀 어려울 수도 있죠. 가령 지난번에 나왔던〈한살림 선언〉같은 것은 일반적으로는 좀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서 쓰기 시작하면 또 한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건 그거 나름대로 토막토막 연구를 하고 공부들을 하게 되면 다 해결이 되는 문제니까 그렇게들 공부를 하시오. 문장이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덮어놓고 자꾸 차원을 높이는 건 안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살림에 동참하게 해야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유기농을 하는 분만이 아니라 농약을 쓰고 비료를 쓰고 그러는 농사꾼까지도 안고 가야 한다 말이에요. 그렇게 해야 그 사람네들도 그 길이 옳다 하고 그 길로 변화해야 하겠다고 해서 우리와 만남이 있게 되잖아요. 서로 이해가 다 되는 사람끼리 매일같이 만날 필요 있어요? 그러자면 말이지. 농약이 있는 농산물도 좀 먹어줘야 되잖아? 어떻게 생각하시오? 바로 그 얘기예요. 문제는 고고연하면 안된다 이 말이야. 예수님이 그러지 않았어요?〈나는 세상의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왔다.〉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어요. 또〈이년이 샛서방질을 했는데 돌로 때려죽이리까 말리까?〉하니까 말이지〈너희 가운데 죄없는 놈 있거든 돌로 먼저 쳐〉그랬지요? 잘나고 못나고가 어디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런데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의 마음, 생명, 이런 것을 버리지 않고 가면서 기회있을 때마다 얘기하고 나누고 그렇게 해서 변화하고 그 어려움을 함께 이해해주고,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넘어진 사람 일으켜 세워줘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 농사짓는 자가 여직까지 농약뿌리고 비료만 가지고 했던 농사를 이제 저농약으로 하면서 변화해가는 동안에 그 농산물이 말이지 엉망진창이 되었다 했을 때 그걸 어떻게 할거요? 그런 때에 함께 해줘야 되잖아요? 그런 때 함께 해줘야만 그 농사꾼은 신뢰를 가지고 난 죽으나 사나 이 사람들하고 같이 갈 수밖에 없다 하는 마음이 된다는 말이에요.
주가 누가 주예요? 여러분들이 주님이지. 하느님 아버지가 왜 하느님 아버지인지 알아요? 살려주는 분이고 매일 먹고살게끔 해주는 분이기 때문에 아버지야. 이 운동이 그런 차원에서 되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한 시기에 엄청난 자기 승화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자기 승화없이 자기 노력함이 없이 어떻게 이 운동을 해나갈 수 있습니까? 요전번에 어느 분이 저를 보고 우리나라 전국에 유기농업을 하는 사람들이 약 삼백명 있는데 약 백오십명은 골이 안돈다 이거야. 골이 안돈다는 얘기는 뭐냐하면 이병철이네 회사에서 쌀을 무농약으로 한 걸 만석을 금년에 사겠다고 하는데 돈만 많이 준다면 그리 팔아야 되겠다고 하니 이걸 어찌해야 되겠느냐. 그런 얘기였어요. 중요한 얘기예요. 지금 농촌에 가면 대기업들이 다 땅들을 사요. 농사꾼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니까 비싼 값 준다니까 그 땅 팔아치우고 전부 도시로 온다 이 말이에요. 구멍가게라도 해서 그래야 먹고살지. 농사 지어가지고는 먹고살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대기업이 기계농하고 유기농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었을 적에는 농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 영감님, 할머니들이 땅 가지고 있는데 그 땅은 아들한테 물려지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가겠어요? 기업의 차지가 되어버릴 것 아니예요? 그렇게 된 다음에는 농사전체도 대기업이 쥐고 흔들겠지. 그렇게 되었을 적에 이 다수 국민은 어떤 꼬락서니가 돼요? 전부가 머슴살이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게 지금 재벌공화국 아니냐 이 말이에요. 우리 스스로가 전부 메이커 것만 찾고 말이지. 그러셔요 안그러셔요? 겉돌다 가면 안된다는 말이에요.
농사짓는 사람들 진짜 사랑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다 떠나서 도시로 들어오게 돼. 또 하나는 무슨 걱정이 있느냐. 우루과이라운드란 게 타결되면 은행에서부터 학교, 출판까지 안터지는 게 없어. 그러면 그 경쟁에서 졌을 때 어떻게 되겠어요? 적어도 그렇게 되었을 적에는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이고 대기업이고 깨지는 게 있을 것 아니요? 경쟁에서 안되면 깨지는 거지. 그럼 거기에 노동자들이고 뭐고 이 사람들 전부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도시 있던 사람들이에요? 농촌에서 온 사람들이에요? 농촌에서 온 사람들 기술 몇자씩 배워 가지고 벌어먹다가 안되면 다시 농촌으로 가겠어요? 어디에 처지겠어요? 도시 속에 처지지. 밥 굶으면 그 사람들 어떻게 되겠어요?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셔서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남아서 그 농사를 제대로 짓게 하고 자각된 사람들은 농촌에 들어가서 땅을 마련해가지고 유기농을 짓든 자연농을 하든간에 문제를 공동체 속에서 해결해 나가려고 애를 쓰고 또 기왕에 농약으로 농사짓고 있던 농사꾼이라도 껴안고 우리의 살길을 같이 협의해가고, 그렇게 돼야 하잖겠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살 수가 없게끔 분위기가 돌아가는데. 글쎄 제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꼴이 자꾸 그렇게 되어 가니까. 그러면 이 보급이라는 게 뭘 얘기하는 거냐. 많은 사람들하고 만나고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그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단체는 소비자끼리는 소비자끼리의 그런 걸 하고 간다고 하겠지만 그 숫자와 요구가 많아졌을 때 어떻게 되느냐. 농촌도 그거 뒷바라지 해주는 농촌이, 생산자가 많아지게 되는 거지요. 소비자는 많은데 농촌에 생산자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거 지탱해 나갈 수 있습니까? 못하는 거지요. 해나갈 수가 없잖아요? 이치상으로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보급을 하는데 보급과 향상은 맞물려 가요. 처음부터 높은 차원의 얘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에요. 지금 농촌의 대다수가 유기농을 안하고 있어요. 유기농을 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만나서〈우리들이 이렇게 살게끔 해주세요〉그러면〈그래 그러한 것은 뒷바라지를 할게요〉그런 얘기가 되어야 그 사람네들도〈그러면 몇해 농사가 엉망이 되는데요〉〈그러면 저농약으로 하십시오. 저비료로 하고. 저희들이 함께 하겠습니다〉뭐 이렇게 돼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향상해가는 거나 보급해가는 거나 이게 상호 물려 돌아간다 이 말이에요.
그 다음번에 이것도 같이 물려가요. 이렇게 이렇게 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적에는〈아, 필요하구나.〉그런데 필요하다고 하는 데까지는 먼저 해가는 분들이 설득을 해야죠. 자꾸 얘기를 하고. 그러면 그 필요를 알게 되었을 때는 요구가 발생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는 운동이 필요와 요구를 창출하자면 우물안의 개구리식으로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거야.
그리고 유사단체 있잖아요. 우리 한살림 말고 다른 단체가 또 이렇게 해가는 단체가 있을 거란 말이야. 만나라는 말이야. 문제는 공동의 과제를 밀고 나가야지. 어차피 운동에는 다 각각이지만 각각이라도 연대해가야 된다 이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생명세력, 반생명적으로 문제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항해서 우리가 일을 확산해 나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다만 한가지라도 사회를 위해서 밝게 일해가고 있고 좋은 일 해가고 있는 그러한 단체는 연대를 하자고 할 때는 함께 하자는 말이에요. 함께 하지 않았을 때 어떤 문제가 오느냐. 아까 얘기한 대로 보글보글 혼자 우리끼리만 놀다가 끝나게 돼요. 생활이라는 것은 음악가는 음악가로서 화가는 화가로서 조각가는 조각가로서 건축가는 건축가로서 생활이 다양하단 말이에요.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동네일을 보는 사람은 동네일을 보는 사람으로서 다양해요. 먹고사는 먹거리를 가지고 일하는 이런 한살림운동뿐만이 아니라 한살림운동의 시각이 정치에서부터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연대할 능력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운동은 가속화되고 더 깊이 제대로 정착이 되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은 아까도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생명은 하나라는 것, 우리가 아직은 사회가 이윤추구를 제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체제하에 있지만 그것이 가는 종국의 단계가 뭐라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막말로 말이지, 정확한 계산은 모르겠어요. 핵무기를 지금 사용을 하면 지구가 팔십번 파괴하고도 남는다잖아요. 그런데 그게 돈벌이가 되니까 자꾸 핵개발을 한단 말이요. 그러면 이게 미친 거요 안미친 거요? 어떻게 생각하시오? 또 후세인하고 미국하고 싸우는데 사람이 죽어 넘어가는데 그걸 전쟁도 아닌 게임으로 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러그러한 것을 긍정할 수 있느냐 이거야. 그럼 우리는 반핵운동을 해야 된다. 한살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핵, 옳습니다. 우리도 해야지요. 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미친 짓이니까.
우리가 지금 부엌에 병 안들고 옳게 살기 위해서 먹거리를 건전하게 가져오는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도 살아야 하기 때문인데, 그런데 그것은 또한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웃까지도 살아야 되잖아요? 이걸 잘 알아야 돼요.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느냐? 우리의 생활을 밝게 건전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다 이 말이요. 그럼 일체의 모든 운동이 밝게 살기 위해서 하는 운동이라고 할진대 협의하고 토의하고 그 얘기가 옳다고 했을 때 함께 해주는 그 태도가 필요하다 이 말이에요. 그것은 무슨 효과를 가져오느냐. 그 사람네들로 하여금 한살림공동체 소비조합을 하는 분들의 일은 옳게 살고 건전하다고 하는 것을 전해주는 것 아니냐 말이에요. 그렇지 않겠어요? 저것들은 먹거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알아들어. 이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겠어요? 사회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땐 말이지 얘기가 안되는 거지. 먹거리를 제대로 해서 우리가 살자고 해서 이 일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일체의 반생명적인 세력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몸을 함께 하는 태도가 있어야 된다 이거지. 그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의 공동체 소비자 운동이 전부 이해가 될 거예요. 또 하나는 오늘날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고충을 이해해 주었을 때 그들은〈오 주여. 한살림공동체 소비조합에서 일하는 주님들이여.〉이렇게 된다구. 그거 그렇게 안되겠어요? 그렇게 이해를 하고 그런 것이 확대되어 가면 한국농촌 전체도 여러분들이 해결하는 것이 되지 않겠어요? 목표는 거기까지 가야지. 또 나아가서 우리들이 일하는 이것이 건전하고 밝다고 할 것 같으면 전세계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하는 얘기가 나누어질 것 아닙니까.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끼리 손잡고 가야 되고. 이게 손에 손을 잡고 가는 거지, 누가 혼자 가는 거 아니예요. 혼자 어떻게 가요. 혼자 못간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생명운동에 이기주의가 존재할 수 없어요. 사람의 능력은 때로 출중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혼자 가지고는 안돼. 협의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으면 그걸 수행할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야. 요새는 우리 한살림공동체는 그렇지가 않겠지만 시골에서 이십여년 전에 운동을 해보니까 이렇게 모여요.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아무개가 조금 활동적이고 앞서 나서기를 잘 하니까 이 동네에서〈이런 거 이렇게 합시다〉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아무개 어머니가 해〉 그러니까 줄줄이 다〈아무개 어머니가 해〉귀찮은 거니까. 그래서 아무개 어머니가 한다 이 말이에요. 아무개 어머니가 해놓고 난 다음에 일이 제대로 안됐어. 그러면 그 다음번엔 어떻게 되느냐. 전부 그 사람한테 뒤집어 씌운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번엔 그이는 동네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고 욕을 얻어먹게 되니까. 특히 농촌에서는 어떤 현상이 있느냐. 다른 동네 가보니까 농협에서 꿔주는 돈이 나와서 전부 나눠 썼다 하는데 우리 동네는 아무 소식이 없어. 그러니까 옆으로만 돌아가면서 다른 동네는 다 돈이 나왔는데 우리 동네는 돈이 안나왔어. 그러니까 아무개 어머니를 불러서〈다른 동네에서는 돈 나왔다는데 어떻게 됐지?〉하니까 아무개 어머니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그럼 돈이 나왔구려〉나왔는데 다급한 일이 있으니까 썼다 이 말이야. 그렇게 되니까 도둑년 소리가 나오지.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또 도망가게 되는 거지. 이 얘기는 뭘 얘기하느냐. 공공의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공공의 결의에 의해 결정된 걸 수행해야 돼요. 각자는 참여해서 자기 몫에 대해서 당당하게 책임을 져야 되고 그렇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훈련이 안되면 이 한살림공동체운동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암초에 부닥치게 돼요. 혹 능력이 좀 부족되면 도와줘서 시키면 되잖느냐 이 말이에요. 협동이란 게 뭐여. 협동이란 게 서로 도와가면서 한다는 얘기거든. 중뿔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이 말이야. 물론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일러주면 되지. 그건 조합원 자격으로서 일러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각자 책임을 맡아서 일을 해보는 훈련들을 해야 한다 이 말이야. 그 훈련들을 안하고 만날 아무개 어머니가 하시오, 이런 식으로 하면 말이지 이기심이 발동되어가지고 각자 자기 책임을 지질 않아.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는 얘기는 결국 이기심이지. 그러면 단체는 거기서 끝난다 이 말이지. 공공의 합의에 의해서 했으면 각자 책임을 져야 된다 이거야. 일이 경우에 맞느냐 안맞느냐가 중요한 거지, 누가 얘기했으니까 그냥 따라가야 된다, 이건 안돼. 이걸 왜 내가 얘기하느냐. 남성들도 마찬가지지만 여성들도 모여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경우에 맞느냐 안맞느냐를 따져봐라 이거야. 그래야 공평하고 공평하면 곧 포용하게 되는 거야. 넉넉함이 있게 되는 거라고. 그러면 누구든지 포용할 수 있게 되지. 작은 차원에서는 작은 차원대로 얘기가 되겠지마는 큰 차원에서는 큰 차원대로 경우를 따지고 이해를 하고 이렇게 가면 우리는 잣대가 있잖아요. 지금 생명을 모두 제자리에 있게끔 해주는 운동으로서 이것을 한다고 하는 그 잣대 속에서 문제를 풀고 갈 적에 거기에 경우에 맞게끔 맞춰가면 되는 거다 이 말이야. 우리가 이 한살림운동 한다고 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를 살펴서 생명의 제자리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입니다. 다른 거 없어요.
우리 마음은 생각은 됐는데 몸이 빨리 안되는 거 있잖아요. 이 자연도 이미 독으로 오염이 많이 되어 있어서 하루아침에 빨리 안돼요.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을 하루아침에 빨리 어떻게 됩니까? 되어가게끔 해가면서 같이 끌고 가야지. 얘기가 너무 번다스럽게 된 것 같습니다. 그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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