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김지하 시인 인터뷰
대담 : 최종덕
녹취 및 정리 : 이은선
무위당 생명사상의 언저리
최: 지난 가을 지리산에서 서울로 오는 긴 시간동안 생명이 왜 소중하게 이야기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소중한 말씀을 듣고 이제는 구체적으로 원주의 지나온 생명운동의 발자취에 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오늘 같은 소중한 자리를 허락해 주셔서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우선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부터 해 주시죠.
김: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장일순 선생 개인을 영웅으로 숭배하여 그 분을 역사에 부각시키는 기존의 상투적인 시각으로는 이해도 할 수 없고, 그분에 대한 대접도 아닐 거예요. 장 선생님은 민중 속에 살아있는 한사람의 운동가이며 또한 그를 둘러싼 운동 역량들과 또 대중과의 관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잡히지 않는 바람과 같은 것이오. 나아가 원주라는 지역이 갖는 역사적 지리적 지정학적 특수성과 연관짓지 않으면 집히지 않는 주제고, 그 다음에는 1970년대와 80년대의 변화를 겪으면서 장 선생과 근접되어 있던 분들과의 사상 생성 전개과정을 연결짓지 않으면 이해가 잘 안 되는 주제이오. 따라서 지금까지 이런 부분들이 조명되지를 못했기 때문에 장 선생님의 훌륭하고 높은 덕성이 도리어 가리워 지고 그 작업이 시원치 않았던 것 같소, 백범이나 몽양과 같은 방식으로 무위당을 연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오. 영웅으로 다루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분 자신이 그런걸 원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살았고.... 예를 하나 들을게요. 봉산동 다리 건너에 있는 본댁에서 출발하여 시청 앞 찻집까지 가시는데 보통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한시간에서 보통 두시간 반 걸린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오. 가시면서 이런 좌판, 저런 리어카, 바구니 장사 아주머니, 하다 못해 지나가는 나그네에 경찰아저씨까지 만나서 소소한 이야기들 즉. 아버지 잘 계시냐, 조카 결혼생활은 잘하느냐, 요즘 사는 게 어떠냐, 뭐 이런 이야기를 다 나누시고 가시는 것이지요. 삶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도리를 찾아가는 탁월한 삶의 운동정치가지요. 물론 현실 무대 정치가 아니라.. 그런 시각을 세워 놓고 그 분을 보면서 한번 이야기를 해 나가면, 직접 겪지 않은 최 교수까지도 비로소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오. 이 뜻 아시겠소?
최: 예, 저 개인적으로 무위당 선생님을 뵌 적이 없지만, 그 분과 인연이 닿았던 분들을 통해서 이야기만 들어도 어떤 공감이 드는 것 같아요. 제가 원주에서 많이 느낀 것은 무위당을 모셨던 많은 어르신들 사이에 표피적인 갈등과 함께 아주 깊은 사랑이 굉장히 많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쉽게 이해 못 할 부분인 것 같아요. 그리고 발표된 원고 중에서 생각나는 것이 있지요. 고3 학생으로서의 김영일(편집자설명:김지하의 원래 이름)을 말한 과거 역사의 부분입니다. 장 선생님이 당시 김영일을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이든지 스폰지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청년이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벌써 40년 가까이 된 과거의 일이지요. 그만큼 김 시인께서는 오래 전부터 장 선생님을 뵈었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를 쭉 흩어 가면서 직접 넓은 시각의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게 중요한 객관적인 평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 예. 그래요. 얘기를 하지요. 얘기를 하는데, 내 얘기로 충분치 못하니까,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서 장 선생에 대한 관점을 다양하게 이야기를 할 테니까, 그 관점에 따라서 앞으로 이 사람 저 사람들을 여럿 만나세요. 그렇게 해야 장 선생님의 모습과 그때 같이 투신했던 사람들의 집단적인 모습이 들어 나지요. 우선 장 선생님 개인의 측면에서 그 분은 한 마디로 도덕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지요. 마치 조선 시대 조광조가 지치주의至治主義(편집자설명:덕성과 인성 수양이라는 수기치인의 유교정신을 정치인의 덕목으로 해야 한다는 정치철학) 유교 안에서 지치의 지극한 도덕을 실현하려다가 실현시키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이 분도 그것을 실현 못하고 애쓰다 가신 분이라고 생각을 해야 초점이 맞습니다. 단편적으로 도인이니, 교육가니, 이렇게 자꾸 한 면만 보아서는 안돼요. 교육가, 그 다음에 도인 정치가 그리고 그 후의 변화 등, 이런 것들이 하나로 묶이면 하나의 도덕 정치가라는 그 분의 구심점이 나타나지요. 그러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원주 이야기를 합시다. 원주는 나에게 기착지지요. 내 고향은 목포이고 14살 중학교 때 원주로 와 살다가 나중엔 서울로 옮겼으니까. 그러나 장 선생님의 경우는 선대부터 쭉 원주에 사셨던 분이고, 유생이었죠. 유학을 공부해서 유학적인 수양으로 몸을 다지신 분이고, 마치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는 도덕을 실현한 분이죠. 그렇게 봐야 되요. 그래서 유학과의 관계를 밝혀야 그분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어떤 쓰라린 일들이 생겨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도덕을 체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도덕 정치가로 또 하나는 철저한 카톨릭 정신을 실현하신 분이죠. 세 번째가 해월 정신이 드러난 시기입니다. 드러났다기 보다는 나중에 해월과 자기 생각을 일치시킨 분이죠. 그전엔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영향도 컸어요. 이처럼 어떤 도덕적인 정신사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또 철저히 운동정치가입니다. 이걸 내가 강조하는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될 거요. 철저한 정치가가 아니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분의 삶의 과정을 통찰해야지요. 그런데 자꾸 일부분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면 그분의 전체가 잘 안보이고, 원주운동의 실체를 못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실체를 보려는 큰 노력을 우리가 게을리 한 것 같습니다.
최: 네 그렇습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실체를 보기 위한 다양한 관점을 말씀하셨는데, 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물의 사상을 평가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실증주의적인 접근에 그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정서적인 측면에서 보기도 하는 것 같구요. 저는 실증주의적인 접근이나 정서적인 접근도 중요하겠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전체를 보려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그런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선생님이 바로 김 선생님이라고 전 생각을 하고요. 그런 이야기들을 원주뿐만이 아니라 생명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 그렇습니다. 내가 바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여 그동안 잘은 못했지만, 원주 형제들이 저한테 바라는 게 많다는 건 알아요. 장 선생님 때처럼 무엇인가 새롭고 신선한 운동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내가 무엇인가 일조를 했으면 하고 모두들 바라죠. 그러나 제 덕이 장 선생님에 못 미처 또 아는 것도 많지 않고 몸까지 나빠져서, 그 기대를 저버리고... 원주 형제들을 자주 찾아보지도 못하고 해서 미안했지요. 이 기회를 통해서 원주 형제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생명운동의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장 선생님의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과제를 안고, 이제는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을 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원주라는 도시의 특성입니다. 택리지에 보면 원주라는 도시는 항상 서울을 넘보고 반역하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지요. 장 선생님은 원주라는 도시하고 비상하게 맞아떨어지는 양반입니다. 그 분이 몽양 제자로 몽양의 정치적 도덕성을 흡수하여 4.19 혁명 전에 재야 정치가로 발언을 하는데, 굉장히 강성의 발언을 했지요. 그래서 오히려 신익희, 조병옥 계열 사람들이 저 사람 강연 못하게 하라고 말 할 정도로 장 선생님이 강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또 이승만 정권 밑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과의 관련이 있었지요. 그 후 즉 4.19 이후 윤길중씨와 사회 대중당 혁신계로서 민족 통일운동도 하고 복지사회 건설운동도 하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5.16 나고 반혁명 분자로 잡혀가 가지고 옥살이를 하고 3년 만에 출옥했어요. 그러니까 강성 이미지가 강하다는 말입니다. 장 선생님의 부드러운 이미지는 그 다음부터지요. 그리고 그 이전에 교육자로서의 측면이 또 있어요. 정리를 하자면 정치가로서 도덕가로서 그리고 교육가로서 세 가지 측면이 나타납니다. 이 세 가지 측면에 대해서 앞으로 유기적인 검토와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유기적 관계가 있었는지, 대성학교 창립당시 무위당이 20대였는데 당시 그분의 교육사상이 특별한게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그 분이 받아 온 어릴 적의 유교적인 교양과 카톨릭 사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또 몽양과 어떤 관계인지, 그 다음으로 사회 대중당과 몽양의 관계는 무엇인지, 죽산 조봉암 선생과의 관계는? 사상적으로 간디즘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침향되어 있었는데 그 영향력은 무엇으로 나타났는지, 그리고 간디즘과 코뮤니즘하고 관계는 어떤 것인지, 등을 다각도로 검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원주라는 데가 현대 우리나라의 지역운동의 시작이라는 점입니다. 원주에 교두보를 둔 지역자치 운동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는 것이지요. 이 점은 지금까지 중요한 역사적 기여로 남는 것 같소. 그 다음에 통일전선 운동입니다. 통일전선이라는 것은 각계 각층을 망라하여 종교, 사상의 색채들을 다 망라하는 당시 반독재의 연합체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생명운동 그리고 해월 사상이 어떻게 사상가로서의 무위당의 생각 속에 녹아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장 선생을 해석하는데, 해월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장 선생이 상당히 정치성이 강했습니다. 물론 도덕정치가요. 그런데 뭐라고 할까, 암으로 돌아가시기까지 그 짧은 기간 몇 년 안되지만 그 때 이분이 해월을 통해서 거듭난 것 같아요. 장 선생님이 만년에 생명사상가로서의 모습이 뚜렷이 새겨진 것이오. 나에게 대강 얼개를 이야기하라면 그런 거지요. 이 분한테는 또 한가지가 있어요. 예술가로서 그리고 서예가로서의 장 선생님입니다.
최: 지역자치 운동과 생명운동이 연계된 점은 없는지요?
김: 지역에 거점을 둔 운동이 바로 동학이지요. 내가 지역자치에 관심을 두면서 터득한 것이 바로 동학이란 결국 지역의 반란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입니다. 군현제(郡縣制) 국가에서 지역의 반란이라는 것은 봉건제 국가에서의 지역의 반란이라는 것과 다른 측면이 있지요. 그래서 원주운동을 새롭게 봐야 한다는 거지요. 지역의 거점 또는 전국적인 일종의 저항운동으로 그래서 소도시 거점론(편집자설명:작은 지역운동에서 시작하여 넓게 펼쳐간다는 생각을 담은 것) 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오.
최: 정치운동, 신협운동, 교육운동, 생명운동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보는 일관성을 통해서 그분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서 대성학교의 설립정신과 난을 치는 마음이 다 연관이 된다고 생각되지요. 그런 일관성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있다고 보는데, 어떠한지요?
김: 이 점에서 봐야 할 거예요. 도덕정치가라고 내가 전제를 했지요. 그리고 유학에 가장 중요한 뼈대가 있는데, 유학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못 봐요. 그래서 내가 예를 든 것이 조광조의 지치주의라는 것이오. 지치가 도덕정치거든요. 이 지치를 겨냥한 것이 바로 그분의 정치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먹 한번 잡는 것도 누구를 상대한 것도 한번 가만히 앉아서 밥 한그릇 먹는 것도 모두 다 지치입니다. 그 분의 도덕적인 정치의 목표는 처음에는 민중운동을 거치면서 어디로 귀의를 하냐면 후기로 가서 해월 사상으로 가 닿지요. 밥 한 그릇이 만사지다, 여기서 생명운동과 한살림운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마도 해월을 통해서 서서히 그 분의 태생적인 유학을 넘어서게 됩니다.
최: 유학뿐만 아니라 카톨릭도 넘어서는 거네요. 결국은
김: 그렇지 않아요. 카톨릭은. 예를 들면 지치의 관점에서 카톨릭을 넘어선 거지만, 예수를 넘어선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4대 성인은 다 좋아 하니까. 그것은 나도 그렇고... 장 선생님 제자는 다 그래요. 박재일씨도 그렇고. 예수의 카톨릭은 좋아 하셨으나, 바리세적인 카톨릭은 아주 싫어하셨지요. 그것이 장 선생님의 지치의 기준점입니다. 예수를 모시는 것이지, 로만칼라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다 이거지요. 그러니까 장 선생님을 연구한다고 했을 때, 카톨릭이다. 해월이다, 노자다 이렇게 한정하고 좁게 규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종교를 통합하여 사상을 펼치시는 분들은 다 그래요.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이 그렇죠. 장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 관계도 깊어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은 비슷한 생각을 가지셨지요. 예수도 좋은 건 좋은 거고, 공자도 좋은 점은 좋은 점이고, 외형적인 틀에 얽매어 있지 않으셨습니다.
최: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까 카톨릭, 유교, 해월 이러한 것들을 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큰 의미를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고 포월적인 통합성을 누구한테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다시 또 언어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쉽게 말해서 그분의 총체성을 한마디로 말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 장 선생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똑같은 거지만 생명이라는 것은 유불선 삼교와 그리스도교를 다 포함하면서도 접화군생(接化群生) 만물을 다 껴안고 살리는 그러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라면 풍류라고 해도 됩니다. 아마도 그 양반 오래 살았으면 지금쯤 막걸리 한잔 걸치시고 더덩실 춤추고 그 속에 보이지 않는 도덕성을 뿌리시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 분께서 끝에 도달한 것이 바로 풍류도라고 봅니다. 지금 사상 문제를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 사상이 복잡하면서도 뭔가 하나를 지향하는 데 그것이 바로 풍류도 속에 숨겨진 생명이라는 말이 가장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난초에 씌어진 글자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것도 필요해요. <바람 바람 바람, 바람은 서있는 놈이 없으면 바람도 아니야> 무엇인가 저항을 하고 서있고 부딪치면서도, 그 속에서 사람의 주체가 없으면 바람이라는 사상이나 하늘의 뜻이라는 것도 별 소용이 없다는 말이오. 이것이 바로 성서나 유교나 불교가 모두 하나로 통합되는 해월사상이오, 생명사상인 것이오. 밥 한 그릇이 만사지다 여기에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장 선생님이 동학과 만난 것은 40년대부터 오창세(육이오 직후 사망)라는 불알 친구와의 오랜 대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최: 그럼 해월 사상을 품고 계신 것은 굉장히 오래 되었네요.
김: 그러니까 그 씨앗은 아주 오래 되었지요. 그리고 내가 감옥에서 나오면서 새로운 생명사상에로의 공감대를 이루었고 그 후에 무위당 안에 씨앗으로 있던 해월 사상이 꽃 피우게 되지요.
최: 장 선생님 이야기 속에서 종사오도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항상 도에 따르고 기대어 한다는 것인데, 그 도의 의미가 단순히 도덕경 노자의 의미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분의 도를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김: 그 분의 도는 천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서 말한 그 분의 도덕정치의 근본으로서의 도입니다.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모두가 통하는 도이오. 유교에 있어서도 지치주의라는 것은 도덕 정치에 닿아 있고. 사물과 인간모두를 다 사랑하고 그 속에 있는 하늘의 얼굴을 다 존중하는, 그런 것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해월이었죠. 아마 해월 사상은 장일순 선생님이 가장 잘 이해하고 드러내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네 같이 덕 없는 중생들은 해월사상을 흉내내는 것도 힘들어요. 또한 그 분은 해월의 정신대로 사셨지요. 그 분의 해월 사상은 해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 종교까지를 모두 흡수하신 결과로 나타났지요. 그러니까 해월사상의 포용력이 커지면서 무위당 선생님이 직접 그렇게 표현을 안 했지만 마음으로는 유불선 삼교와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들을 포함한 그런 넓은 도를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치주의 도덕정치를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한이 남았어... 애를 썼는데 안타깝게도 이루지 못하고 간 것이라는 말입니다.
최: 도덕정치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통로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하나는 조직을 통한 현실정치겠지요. 또 하나는 앞서 말하셨듯이 봉산동 댁에서 시청 앞까지 걸어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활 속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이루어낸 삶의 정치이지요. 어떻게 보면 진정한 도의 실현이기도 한데요. 장 선생님께서 통합의 도를 어떻게 보여주셨는지요?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어떠세요?
김: 사회, 종교, 교육, 사상의 도가 난초로 나타나지요. 예술을 통해서 그 분 자신이 생각하는 도의 경지를 열어 보였다는 말입니다. 난 그렇게 정리하지요 사상을 복잡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풍류를 말하면서도 이미 접화군생을 다 말한 것이오. 그 안에 다 포함되지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사상가들은 예를 들어 유불선이나 기독교나 또는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겉으로는 서로 모순되고 복잡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단순하고 한없이 단순합니다. 접화군생이라는 한 마디 말로 단순하게 표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티클까지, 나아가 물한방울까지도 살려야 된다는 이야기에, 조한알이라는 한 마디로 다 되는 것이지요. 조한알, 한자로 ‘일속자(一粟子)’ 이것이 그 분의 마지막 자호(自號)입니다만 얼마나 단순해요?
최: 그렇지만 그 안에 세상이 다 들어와 있다는 말 아닌가요?
김: 맞아요. 다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단순하지만 엄청난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나라 사상의 특징입니다. 작다하면 한없이 작지만, 클라치면 한없이 큰데.. 이런 사상은 이미 유불선이 다 들어 있지만, 기독교에도 들어가 있고 사회주의 사상에도 들어가 있으며, 간디즘에도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연결되고 통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위당의 사상 역시 아주 복잡하면서도 거꾸로 한없이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잡해도 그것이 생활 속에서 구현되면 단순해지는 것이고 생활에서 벗어나면 복잡한 이론으로 그냥 남는 것 아니겠오? 무위당에게서는 생활 속의 사상인거죠. 그것이 생명 아니오?밥 한 그릇이 만사지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한살림으로 나타났고, 신협과 생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생활이지요. 장 선생님이 나하고 다른 것은 지식인 냄새를 되도록 멀리 하려고 했다는 점이오. 그래도 그 분은 영원한 지식인이며 예술가이지요.
최: 제가 장 선생님한테서 느끼는 것은 도덕정치에서 말하고 있는 도덕과 정치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은 구체적인 사실로 나타나기보다는 마음 속에 녹아 있는 개념인데 반해서 정치는 모여진 조직을 통해서 구체적인 무엇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도덕은 명분을 분산시키고 사람의 마음속에 녹아있는 반면 정치는 명목에 제한 된 것인데 서로 모순되는 개념은 아닌가요?
김: 잘 지적했어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장 선생님은 뭔가를 굉장히 괴로워하고 애쓰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셨는데, 그게 어떤 의미에서 보면 도덕과 정치사이에서 깊은 아픔을 가지셨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하고 같이 술 드시고 집에 가실 때면 항상 봉천내 둑방길 걸어서 가십니다. 걷다가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앉아서 노래도 흥얼거리고 하시면서, 풍류 속에 세상에 대한 아픔이 숨겨져 있었고 또한 그 아픔을 초월하여 풍류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 뭔가 잘 안 잡히는 것에 대한 아픔이 계신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런 아픔은 아니지요. 도덕과 정치 사이에서 혹은 큰 사상의 세계와 현실적인 정치운동 사이에서 오는 괴로움이며 아픔입니다. 그 아픔은 당연한 아픔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무엇을 이룬 양반은 아니지만 이루려고 애쓰다 가신 그 발걸음 하나 하나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중요한 거지. 그러니까 우리보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마라’고 늘 말씀하셨지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그냥 봉사하다 간다는 것이지요. 그 점이 더 중요한 거지. 권력과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라 그것을 버리고 밑에서 기는 삶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지요. 그것이 바로 空이며 無이며 道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주 쉽지요. 그런데 명성도 얻고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원주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나 장 선생님을 좋아 할 리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런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 선생님을 아무리 따라 다녔어도 그 분의 진정한 제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최: 결국 천도사상이나 범종교적인 통합사상, 해월의 생명사상 등을 말이나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해도 몸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이라고 봅니다.
김: 이렇게 정리하면 되요. 그 분의 사상은 사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녹아 있다는 점입니다. 장 선생님의 사상은 바로 살아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욕심 없는 생활을 하느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 묵의 난으로 남는 것입니다.
최: 그럼 자연스럽게 종교와 사상을 지나서 예술 얘기로 넘어 갔으면 합니다. 장 선생님 후기 들어 생명의 강함과 삶의 섬세함이 난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죠.
김: 그 분의 그림은 문인화입니다. 문인화에 있어서는 그림의 일정한 법칙이라든가 무엇을 그려야 하겠다는 밑그림이나 구도 같은 화의畵意가 없습니다. 문인화는 그냥 붓이 가는 데로 그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림 속에 자기 내부의 심상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인화에는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런 섬세함이 나타나죠. 마찬가지로 그 분의 그림에서도 그런 섬세함이 나타납니다. 장 선생님은 아주 섬세한 분입니다. 섬세해요.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일본의 어떤 소설에 나오는 난릉왕은 내면으로는 매우 강하지만 얼굴만은 미남에다 아주 고왔습니다. 그 왕이 전투에 나서야 하는데 맨 얼굴로 전장에 나가면 적들이 무서워하지 않을까봐 무서운 가면을 쓰고 전장에 나갔다는 난릉왕의 이야기가 있어요. 장 선생님도 강한 모습이 많이 있었지만 자신의 섬세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양반처럼 감정이 섬세한 사람은 드물다고 봅니다. 잘 우시고, 남이 불행한걸 조금도 못 보시는 분이셨죠. 가까이 모셨던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그 분은 그런 섬세함을 가리고 싶어하지 안았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큰 도의 모습이기도 하고 그런 모습이 바로 그 분의 예술세계에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 확실히 잡을 수 없는 것, 이것이라고 딱 잘라 꼬집어 낼 수 없는 것, 뭔가 구름 속으로 들어 가 버린 듯한 것, 뭔가를 가리고 있는 듯 한 것, 바로 그것이 최고의 섬세한 마음의 표현이었고, 난으로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표연란(飄然蘭)’이라고 말하지요. 난이 바람에 흩날리는 데, 그게 얼마나 섬세하게 흩날리는지, 요렇게만 흔들리다가 다시 또 저렇게 흔들리고 하는 난의 자태가 그림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은 보통 섬세한 마음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최: 예술적인 측면에서 섬세함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인 것 같습니다.
김: 그래서 난 장 선생님 작품 중에 표연란을 제일로 칩니다. 대원군의 난도 표연란인데 너무 뻣뻣하고, 골기가 너무 강해요. 다 사람 기질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대원군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알지 않아요. 철권 정치의 마음이 난에 녹아 있는 것이지요. 장 선생님은 절대로 그런 철권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분은 아니고. 상당히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만이 표연란을 제대로 칠 수 있는 것이오. 바람에 흩날리는 난초는 표연기하고 골기(骨氣)가 같이 있지요. 흩날리는 잎과 뻣뻣하게 서려는 힘이 같이 있어요. 흩날림과 뻣뻣함의 두 기운이 어떻게 조화롭게 나오냐에 따라서 난초가 화폭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 선생님의 경우에는 대원군과 다르게 골기보다도 표연기가 더 강하지요. 그분의 골기도 상당히 강했지만 결국은 부드럽고 섬세한 표연기가 더 큰 것 같습니다. 난초를 가만히 바라봐요. 절대로 가만히 안 있고 항상 흔들리지요.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마음이 선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여튼 나는 표연기가 더 강한 그림을 별로 좋아 안 해요. 내가 선생님한테 그런 그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이미 아시는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 이놈이 좋아 안 할 줄 내 이미 알았다.”
그리고 동양 삼국 사군자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난초이고, 문인화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난초예요. 난초의 명인인 옛날 중국의 판교와 소남 이후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세 사람이 있었어요. 석파 대원군, 추사 그리고 한말에 큰 벼슬한 민영익입니다. 그 세 사람 이외엔 동양 삼국에 난초 명인이 없어요. 그런데 동양삼국 표연란에서는 장 선생님의 표연란이 명품이라는 것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표연란이 장일순 선생의 대표적인 난초입니다. 유홍준 교수도 그런 말을 했지요. 그런데 펄렁이고 흔들린다고 해서 다 표연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그리고 그리는 난초는 난초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진짜 난초가 많지를 않아요. 그린 난초는 많아요. 그러나 달달 떨면서 그린 난초는 한 장의 그림이지, 난초는 아닌게요. 한 먹에 휘갈겨 버리는 속에서 난초가 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초를 친다고 하지요. 이런 게 다 한 손으로 나온 것이고, 이렇 게 한 손으로 난이 나온다는 게 무서운 것입니다. 순식간의 마음 아니면 안 되는 것이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이오. 대(나무)보다 더 어려운 게 난초입니다.
최: 사상과 종교, 그리고 예술을 거쳐서 한살림운동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신 게 많을 것 같은데요.
김: 90년도 초까지는 내가 기억을 합니다. 내가 출소 후에 장 선생님 만나고 그리고 박재일씨 만나면서 전면전 형태의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요즘까지도 이런 말에 대하여 젊은 사람들은 불만이 많지만 그때는 더 많았습니다. 지금도 나의 이야기가 설득이 잘 안될 것입니다. 당시에는 싸움을 하자면 그냥 싸우지 것이지 다른 뭐가 있냐는 반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않다고 봅니다. 싸우는 데에는 적어도 병법이 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나의 생각이 밖으로 나가자, 변절자니, 생명교 교주니 말이 많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운동의 틀이 조금씩 전환되면서 원주에서 한살림이 생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한살림이 중산층만을 위한 것이라는 등의 비난이 있었지만 장 선생님이 그런 걱정할 것 없다고 강하게 밀고 나가셨습니다.
최: 그럼 한 살림운동도 당 없는 전선의 일환으로 봐도 돼나요?
김: 그렇진 않았어요. 그땐 이미 그것을 넘어섰으니까. 90년대 들어오면서 전선중심 소도시 중심 교회운동 등을 넘어 섰지요. 나 역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났고. 그러나 반독재 투쟁이 지속되면서 과거의 전술적 여운이 아픔의 나날로 이어졌지요.
최: 그게 저는 장 선생님이나 김 선생님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내적 갈등은 박정권 이후의 불행한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안고 있는 분단의 역사는 그런 불행을 더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정치가 아닌 도덕정치의 틀로서 우리의 불행을 어떻게 풀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은 실천적인 원동력이 상실되지 않을까라는 염려도 있지요.
김: 장 선생님이 자주 한 이야기 중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상이고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세계적인 흐름이 모두 철학의 부재인 것입니다. 혹시 유럽에서 시작하는 철학의 바람이 있어도 여기까지는 안 오는 것 같습니다. 막혀 있지요. 반아셈운동이나 아메리카식 세계화에 대한 반대운동은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우리 나름의 진정한 근본을 찾아야 합니다. 서구의 철학도 좋지만 기껏해야 들뢰즈나 가타리 이런 정도지 진정한 우리 나름으로 동양의 사유를 배경으로 한 그런 근원적인 철학이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이 안차더라도 조금씩 시작을 해야지요. 생명사상도 그런 맥락에서 우리 철학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못 한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감옥에서 나오니까 장 선생님이 주역에서 끌어쓴 글을 표구해서 보냈더라고요. ‘천산돈(天山豚)’ 이라 하늘과 산이 몸을 숨긴다는 뜻입니다. 소인이 악하고 득세하면 군자는 몸을 엄하게 가지되, 우습게 보이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소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가 원주에 있을 때도 그러했지요. 원주가 군사령부가 있어서 그런지 야전군 대령이 와서는 나에게 보이지 않는 압력을 주는 것입니다. 장 선생님한테는 더 말할 것도 없다고요. 군사령관이 날마다 장 선생님한테 찾아오고 그랬지요. 나한테는 참모장급이 찾아오고. 그럼 이게 무슨 뜻입니까? 간단해요. 겉으로 나서서는 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적이 보이고 적은 우리가 안보이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 선생님의 깊은 생각이셨죠. 뜻을 숨기고 먹거리운동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에게 도덕정치가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정치가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정치가이셨죠.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고” 이런 진묵 스님의 시는 바로 이런 숨김의 자세에서 나올 수 있어요.
최: 어쨌든 한살림 운동이 배부른 사람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환경운동까지도 우파운동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 그 당시에는 지금의 환경운동연합 최열 사무총장같은 분도 맨날 욕만 먹을 때니까. 그러니까, 최열씨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내었지요. 사회주의 거리에는 공해가 없는데, 자본주의 길거리에만 공해가 있다는 식으로 해서 환경운동의 당위성을 조금씩 확보해 갔지요. 한살림은 지금까지도 그런 욕을 먹고 있지만 장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더 근본적인 쪽으로 변했을 겁니다. 장 선생님은 행보가 생각보다 느린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빨라요. 그리고 장 선생님의 뜻은 한살림 운동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생명운동으로, 그리고 나아가 유불선사상이나 그리스도교나 막시즘까지도 흡수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문명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통일문제까지도, 그 분의 초기와 다른 방식으로 관심을 두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장 선생님의 뒤를 따른다면 생명사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 문명 창조의 철학적 지향으로 통일을 대비하는 그런 구체적인 방식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안 밖의 문제 전체의 것을 통일에 집약시켜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최: 난 치는 것을 장 선생님께 배우셨다고 하셨는데 난과 관련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장 선생님과 김 선생님에게서 난초의 의미는 단순히 예술의 차원이 아닌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김: 그러자면 자연히 장 선생님이 왜 나한테 난초를 가르쳐 주셨는가라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장 선생님이 3년 동안 옥고를 치룬 후에 본격적으로 난을 다시 치셨습니다. 그런 당신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감옥에서 나오니까 난초를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처음에는 망설이면서 “글쎄요 시간이 있으면요” 라고 말씀드리니까,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라는 거에요. 감옥에 혼자 오래 있다가 나오면 오라는데 없어도 이곳 저곳 가고 싶어지기도 하지요. 마음이 그래요. 좌불안석이 됩니다. 자기가 뭐 세상일에 다 간여를 해야 마음이 편한 것인지, 박노해가 요즘 비슷하지요. 사실은 나도 그렇게 되더라고. 이런 마음을 장 선생님은 이미 알고 계신거지요. 그래서는 못쓴다 하며 난초를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초를 해보니까, 이렇게 그리면 꼭 뱀 같고, 저렇게 그리면 꼭 몽둥이 같고 아니면 부지깽이가 되고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화가 나지요. 그러니까 장 선생님은 절대로 그렇게 ‘그리지 말고 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밤 중이라도 시간을 잊고 치다 보면 뭐하나 비슷하게 나와요. 잎사귀 비슷하게. 그러면 이파리 몇 개에 맛이 붙어, 그 맛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떠돌아 다니는 시간 대신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지요. 만약 내가 난초 안 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시절에 나는 또 다시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 했을 것입니다. 감옥에 또 가던가.. 맞아 죽던가. 아니면 반동분자 되던가...
최: 그렇다면 장 선생님께서 의도적으로 가르치신 것이네요.
김: 그런 셈이지요. 난초를 통해서 나는 많은 걸 배웠습니다. 바람과 풀을 같이 그려야 되거늘, 바람을 그리려면 붓이 날아 가버리고, 붓이 안 붙어요. 바람을 치는 건데, 바람을 그리려고 했으니 붓이 따라 붙겠습니까? 난초를 그리려고 하면, 바람이 안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 둘을 함께 치려면 닿는 듯 떠 있고, 떠 있는 듯 닿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굵음과 가늠이 하나로 연결되는 삼절(三折)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풀과 바람의 움직임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난을 치다 보면 재미가 붙어 가지고 또 하고 또 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다시 이삼년을 견뎌 냅니다.
최: 끝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장 선생님과의 만남에 대하여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김: 장 선생님이 나에게는 큰 스승이오. 그러나 나 같은 나쁜 제자도 별로 없을 겁니다. 잘 찾아뵙지도 못했고 묘소에도 잘 못가고 그랬으니. 그러나 내가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살아 계신 동안에 뜻을 맞춰 가지고 결국 오늘의 나의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신 셈입니다. 그리고 장 선생님이 저 같은 제자를 제자로 보지 않고 동지로 봐줬단 말입니다. 소중한 분이셨지. 그 분과 뜻을 맞춰 일을 해낸 경험이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지요. 나의 아버지, 내 고향 학교 친구들 다 있지만은 그 분과의 만남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제 나만의 관계가 아니라, 장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시켜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최: 오늘 주신 말씀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되새겨 들어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 드립니다.
※ 이 인터뷰는 2000년 10월 27일 살림문화연구소가 기획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2002년 5월 17일 수정 작업을 거쳐서 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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