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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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자의 삶
(3-4반 장동천 학부형 장일순)
옛 말씀에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라는 노자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적절한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이 글을 쓰게 됩니다. 학생 여러분과 직접 만나서 나누는 대화라면 응답의 형식이라도 진지하게 교환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일방적인 이야기가 되니까 답답한 면도 없지 않지만 여러분이 이해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이솝의 이야기에 "어떤 개구리가 소를 보고 자기도 그렇게 크게 되겠다고 배에다 힘을 너무 주다가 배가 터져 죽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문명이 서양이나 동양이나 모두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자본의 확대를 경주하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확대 그리고 확대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경쟁은 더욱 가열되고 상대적으로 인간성은 점점 소모되어 기계적 인간으로 변모됨으로서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의 균형과 조화를 자발적으로 해결 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전체적이며 종합적인 존재이며 상황에 적응하는 자율능력이 있는 것인데 기계적으로 됨으로써 이러한 것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욕망을 확대하여 지구와 같은 것이 만개가 넘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한계를 넘으면 반대현상, 즉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일등만을 해야하고 모두가 출세를 해야 한다는 세상의 흐름이 얼마나 인간 스스로 자허 작용(自虛作用)에 빠져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솝의 이야기에서 또 하나 생각해 봅시다. 사자가 들판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생쥐 한 마리가 깝죽거리고 노는 바람에 사자가 잠을 깨었습니다. 사자가 생쥐를 잡아 입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 생쥐는 "한번만 나를 용서해 주시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조그만 것이 어떻게 은혜를 갚겠다는고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생쥐를 삼켜 보았댔자 목구멍에 넘어갈 피도 안되고 먹어 보았댔자 이 사이에 끼기나 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고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사자는 함정에 빠져 몸이 포망에 묶여 뛰어나올 수가 없게 되어 꼭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비명을 거듭 거듭 올렸습니다. 어디에선가 이 비명을 들은 생쥐는 포망에 묶인 사자를 찾아 와서 포망의 밧줄을 끊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뜻 밖에도 사자는 살게 되었습니다. 노자의 말씀에 "작은 것을 크게 알고 적은 것을 많게 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힘을 자랑하고 세상에 드러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에게는 한번쯤은 꼭 새겨주어야 할 말씀입니다.
학생 여러분은 애굽의 거석문명(巨石文名)과 희랍의 석조전(石造殿), 그리고 로마의 문명이 얼마나 큰 문명이었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제는 그것들은 폐허가 되어 하나의 관광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체의 사물은 생성과 쇠망의 과정을 갖는 것으로서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으며 무한하지 않으며 만능하지 않습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세가 영원하기 바라는 무리들이 언제나 힘 힘하고 외쳐 댑니다. 그 힘이 지식이든 재물이든 권세든 간에 그것은 변하는 것이며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일체 현상은 유기적 공존체(有機的共存體)로서 하나의 관계 속에서 개체(個體)와 전체(全體)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우주적 도전이 내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과학이 근원적인 질서와 하나가 되고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만과 야욕의 수단으로써 경쟁법칙에 이용되는 한 결과는 허망한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삶의 진리가 지식이나 재물이나 권세의 축적에 있지 아니하고 다시 말해서 힘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허심(虛心)하게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태산과 같은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이 글은 1984년 1월 30일에 발행된 원주고등학교의 교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학부형이란 자격으로 무위당 선생님께서 쓰신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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