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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김종철)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3.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http://www.jangilsoon.co.kr/pds/view.php?forum=book1&st=&sk=&page=2&num=29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오늘날 인류사회에 한가닥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전역에 걸쳐 생명 중심의 새로운 생태적 세계관이 느린 속도로나마 확산되고 있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세계관은 단순히 환경위기를 해소하는데 필요한 보완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이 파국적인 생태적, 사회적 위기를 초래해온 좁게는 산업기술문명, 넓게는 인류문명사 전체의 기본논리를 가장 근원적으로 물어볼 것을 요구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이른바 문명사회를 움직여온 근본동력이었던 국가주의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경쟁과 대결의 논리,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이원론적 구분과 그것을 기초로 한 권력지향적 생존양식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없이는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본인식이 오늘의 생태적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우리 자신을 지배해왔던 보다 크고, 보다 빠르고, 보다 힘있고, 보다 많은 것을 무조걱적으로 탐하는 욕망의 구조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그의 생애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준 가르침은 요컨대 바로 이러한 의미의 해방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생은 생애의 이른 시기부터 일관하여 비폭력주의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그 토대 위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목숨붙이들이 차별없이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는 세상을 위한 오랜 투쟁의 삶에 헌신하였지만, 이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불평든한 위계구조를 불가피하게 불러오는 중앙집중적 권력주의 문화의 철저한 해체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겨냥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생명사상가로서의 장일순 선생께서 남겨주신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의 하나가 바로 `한살림'의 사상으로 표현되었던 것은 투쟁과 경쟁이 아니라 협동과 연대가 새로운 삶과 문화의 기본원칙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 위에서 선생은 우리에게 개인주의적 자아개념에 갇혀 세상으로부터, 타자로부터, 그리고 자기자신으로부터 분열, 고립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선생의 가르침에는 현학적인 데가 전혀 없다. 이것은 선생의 가르침이 관행의 지식과 학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道)와 영성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 자신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스승은 길가의 이름없는 풀 한포기였다. 그러기에 선생의 시선은 언제나 밑바닥 풀뿌리 민중의 삶에 가 닿아 있었고, 그 마음은 보이지 않는 우주자연의 섭리에 늘 떨리는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한 철저한 소박성, 근원적인 겸허함 탓에 오랫동안 우리의 현대사에 잊혀져왔던 해월(海月)선생의 행적과 사상이 장일순 선생에 의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사상가로서 해월 선생을 우리에게 소개한 것만으로도 장일순 선생의 업적은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세상 만물이 먹고 먹히는 순환적인 상호의존의 관계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이치를 "하늘이 하늘을 먹고 산다"라는 지극히 시적인 표현으로 드러낸 해월선생의 `이식천식'이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비할 수 없이 심오한 종교적 감수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경제성장과 개발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와 자연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가 극에 달한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 어떤 무엇보다도 절실한 비폭력주의 논리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월 선생에서 장일순 선생으로 이어지는 비폭력주의 사상의 흐름은, 대부분의 선각자들이 "우리도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자중심의 부국강병론의 틀 속에서 민족과 민중의 운명의 개선을 도모하고자 해왔던... 어쩌면 필역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한국의 근현대의 정신사에서 참으로 희귀한 사상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도피와 잠적의 생활 가운데서도 풀뿌리 민중을 하늘처럼 섬기고, 생명의 존귀함과 평등성을 소박한 말과 행동으로 정성을 다하여 가르쳤던 해월 선생의 삶이나 그 삶 속에서 진정한 사표(師表)를 발견한 장일순 선생의 일성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지극히 겸허하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영혼에 대하여 우리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깊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우리 자신의 구원과 동시에 세계의 앞날이 달려 있다는 것은 길게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001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