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인간, 종교
길 희성(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저서 「환경과 종교」, 「인도철학사」)
소제목
1.티베트의 오줌눗기
2.책에만 매달려야 하는 삶?
티베트의 오줌눗기
티베트의 생태적 삶
얼마 전에 두 주일 동안 티베트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티베트는 지금 중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티벳의 수도인 라사는 거의 중국사람들이 상권과 경제권을 다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중국 사람과 언어도 다르고 워낙 독특한 종교적 문화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권으로 소수 민족을 통합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지금 티베트는 자치국입니다. 몇 차례 독립운동을 통해 유혈진압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가서 달라이 라마(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로 59년 인도로 망명함)를 얘기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저도 사실은 티베트 불교 민족주의 현장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갔습니다만 은 달라이 라마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그 곳에서 인상적인 것은 파텔라 궁이었습니다. 책에서만 보던 사원들을 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원들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끝없이 드넓은 들판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들판이 굉장히 아름답고 인상적이었습니다. 티베트는 평균고도가 4000m입니다.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손끝이 찌릇찌릇 하고 조금만 숨이 가빠도 아주 견디기가 힘듭니다. 또 워낙 높은 데니까 구름들은 산들의 허리를 감고 있습니다. 산이 구름 위로 보입니다. 그 곳 파란 하늘은 티베트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무공해 하늘이지요. 그리고 들판에는 유채꽃과 같은 노오란 꽃이 쫙 펼쳐져 있고, 개울물이 흐릅니다. 그 산비탈 같은 곳에서 양떼들을 몰고 다니는 목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자극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순수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시던 유대 광야를 연상시키는 그런 광야였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의 얼굴은 가난하면서도 그리 어둡지 않습니다. 더운 햇빛에 타 가지고 얼굴은 새까맣지만 친절하고 늘 미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고 사는 그들의 모습과 광야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립니다.
티베트로 들어가기 전 며칠 동안 네팔에 머무를 때의 일입니다. 네팔은 세계 최빈국중 하나입니다. 하루는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갑자기 멈추더라구요. 웬일인가 내려서 얘기를 들어본 즉 그 전날 새벽에 어느 운전사가 마을 사람을 치고 자동차는 내버려 둔 채로 도망을 갔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연좌데모를 하는 것이에요.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길을 점령하니까 열 몇 시간을 차가 통행을 못하는 거예요.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에 내심 감명을 받았습니다.
차가 수백 대나 늘어서 있으니까 불편한 것은 말할 수 없죠. 결국 그 자동차의 주인이 - 운전사 말고 -나타났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보상을 약속 받고서야 해산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가던 중 네팔 농촌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바신(풍요와 다산의 신) 사원 옆에 조그만 농가가 있길래 들렀습니다. 그 집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그 집 꼭대기에 붉은 페인트 같은 걸로 그린 십자가 모양이 있더라구요. 처음엔 그것이 십자가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기독 신자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차에 양떼들 옆에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예수님 사진이 있더라구요. '이건 틀림없이 신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크리스챤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고개를 끄떡거리더라구요. 굉장히 반갑더라구요. 물어보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는데 말이 통하질 않아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주위에 교회가 없는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예수 믿는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구박받지는 않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 내가 여기에 와서 선교사를 하게 되면 이 사람들에게 어떤 그리스도를 전했을까, 그리스도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을 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계속된 물음 끝에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긴 하지만 상당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살고 있는 집이 변소간인지, 집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지만, 그들에게는 농촌 특유의 부함이 있고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이상적이거나 감상적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가난은 나쁜 것이죠. 그들 사회에도 어떤 사회구조적인 억압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문명을 만끽하는 이들의 삶과 너무도 대조적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비하면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에 대해서 아무런 폭력을 가하지 않고 말입니다. 티베트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대소변을 아무 데서나 봅니다. 그래도 리사이클링이 되어 별로 냄새도 안 나고 더러운 지도 모르겠더라구요. 저도 티베트 여행을 하면서 아무 데나 오줌싸는데 도사가 되었어요. (웃음) 여하튼 광야인들의 가난, 한적함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어요.
가난과 광야라는 것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수도자, 성인들은 가난과 광야를 벗삼아 살아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무언가 부족한 것, 텅빈 것, 그것에 그 나름대로의 채워짐이 있고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도시 속에서 보는 도시빈민들의 비참함, 옹색함, 비인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아무리 가난해도 광야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있고 미소가 있습니다. 축제를 즐기는 것을 보면서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난을 퇴치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는 될 수 없지 않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가난하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사는 것이라면 인류역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살았어요. 우리가 가난을 극복한 것이 불과 20년 정도밖에는 더 되겠습니까?
종교와 소비문화
최근에 정부는 IMF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경제가 너무 침체됐다, 산업기반이 붕괴될 것 같다며 소비를 장려하고 돈을 풉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순이죠. 사실 졸라매라고 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잘 졸라맵니다. 일본사람들도 지금 우리와 비슷한 경제 문제를 겪고 있는데 G7 국가들이 일본더러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세금을 감면하고 소비를 늘리라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도 경제 위기가 오면, 근검 절약하는데는 도사예요. 정부에서 걱정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소비를 하되 합리적인 소비를 하라고 합니다. 말장난이에요. 안쓰는게 상책이죠. 합리적 소비를 하라는 건 우리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것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는 세계 경제에 편입되어 있어요. 우리 나라만 안 쓰고 안 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경제체제, 말하자면 성장의 경제학을 극복하고 뭔가 다른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상적인 문제, 우리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절대절명의 과제지요. 그러니 네팔이나 티베트 같은 데로 가서 우리 식으로 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문제는 결국 사상의 문제입니다. 사고방식,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바꿔 가는데 있어서 종교가 일차적으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세계에서 종교가 과연 이 자본주의 시스템 - 온 세계가 지금 편입되어 거의 획일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느냐 하는 것은 수수께끼입니다. 그래도 종교에 기대를 해야지 또 어디서 기대하겠습니까?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팔이나 티베트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소박하게 자연의 한 일부로서, 자연 친화적으로 에너지 소비를 아주 극소화하고 대부분 큰 욕심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발전, 개발, 역사의 진보 때문에 그런 생활양식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젠 그런 세계로 돌아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소박하고 전통적인 삶의 양식을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도록 바꾼 시스템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그것입니다.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액티비즘(activism), 삶의 의욕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삶의 목적을 설정해 놓고 그 목적을 향해 사람을 몰고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진 특징입니다. 자연 속에 묻혀서 소박하게 자연인으로 살던 사람을 의식화해서 역사의식을 고취시킵니다. 사회적 진보, 자유, 해방의 이름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우상을 타파한다며 신령님들을 모셨던 조그만 신전들을 전부 파괴하고 조상들이 살았던 삶의 양식들을 뒤엎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리고 신들이 부정되고 조상들이 부정됩니다. 자연 속에 살던 인간이 역사화 되고 수동적으로 살던 사람들이 능동적인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도 그렇지 않은가요? 끝없는 욕망과 그 욕망을 성취해주는 그리스도, 발전의 그리스도, 목적 지향적인 그리스도, 기독교인들이 삶에 대해 일반인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건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근세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인권을 신장한 데는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이 거대한 역사의 실험은 한계에 이르지 않았나요? 자본주의 가는 곳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본의 논리 앞에서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문화도 자본의 논리가 들어가면 순수한 문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문화는 보이기 위한, 돈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고 관광상품화 됩니다. 티베트 불교를 보고 슬픔을 느끼는 게 그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려 하는데 옛날의 티베트 승려들이 가지고 있던 그런 불교는 아닌 겁니다. 우리 나라도 농촌에 축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디 끈끈한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한 자발적인 민속행사가 있습니까? 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불필요한 물건에 대한 욕망을 자극합니다. 계속 생산하고 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를 돌려야 되니까 상품에 대한 그 욕구를 계속 자극하는 것이죠. 사회주의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완전히 억압의 역사이고, 조상들이 자연의 일부로서 소박하게 살았던 삶의 양식은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산업화에 뿌리를 두고 잘 살고자 하는 점은 똑같아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상의 세 시스템이 온 세계를 전부 휘저어놓은 영향을 받지 않은 그런 사회는 지금 없습니다. 아마존 어디 밀림지역에나 가면 있을까요? 거기도 개발을 한다고 해서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죠? 어찌 보면 세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닦달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인간을 닦달하고, 활동적인 인간, 능동적인 인간들로 만들어가는게 닮은꼴이에요. 기독교만 보더라도 조금 국한해서 말씀드리면 기독교는 인간이 정말 소박하게 자연의 일부로서 살던 삶의 양식을 원하든, 원치 않든, 타의든, 자의든 파괴한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적 체험과 자연의 탈 신성화
인간이 신을 어디에서 만났느냐, 신 체험을 어떻게 하느냐, 어디서 하느님을 만나는가를 보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연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경험일 것입니다. 산과 강과 바다, 물, 불, 태양, 달, 초목, 돌. 이런 자연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성스러운 거룩한 실재, 어떤 힘을 느끼게 되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신을 만나게 하는 그 장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전통입니다. 자연을 매개로 만나게 하는 것은 동양종교입니다.
세 번째는 인간의 내면, 마음, 심성, 혹은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을 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참 자아를 만나고 자기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길입니다. 이것 역시 동양종교의 특징입니다. 힌두교, 불교, 요가가 그렇습니다. 유교에도 인간의 신성 속에서 우주적 진리를 체득하는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이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영혼의 깊이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비주의자들은 대개 이 길을 선택합니다.
이 세 가지 길 가운데 기독교가 취한 길은 역사적 종교, 역사적 신앙, 역사 지향적이고도 전향적인 종교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비교 종교학적으로 보면 그래요. 다른 종교하고 다른 게 뭐냐? 첫째 얘기가 많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제자들의 이야기, 잠언과 같은 철학적이고 깊은 통찰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요. 역사적 갈등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도 있어요. 굉장히 현실감 있는 종교이고 굉장히 역동적인 종교입니다. 성서 자체가 그래요. 젊었을 때는 그게 아주 좋았습니다. 지금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그것 자체를 의심해 보고 있습니다. 인간을 의식화시키는 등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큰 죄를 범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사실 최근 구약 성서의 세계관 자체가 철저히 의문시되고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연을 지배하게 만든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구약성서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창조의 이야기 자체가 어찌 보면 자연을 탈 성화 - 자연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없애 버리고, 자연을 자연으로 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신을 발견하던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요. 자연은 인간이 가지고 놀 수 있는 무대가 돼버렸어요. 자연 안에서 신을 발견해서는 안돼는 줄로 알게 되었지요. 그건 우상숭배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죠. 물론 창조신앙 자체가 인간을 자연의 노예로부터 해방 시켰습니다. 자연의 떳떳한 주인으로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해방적인 사건이었고 사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자연과 하느님을 분리시킨 엄청난 원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신약성서를 보더라도 자연은 억압적인 것이고 인간은 그로부터 벗어나고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이 세계도 타락했고 그렇기 때문에 함께 고통 당하며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약성서 역시 탈 자연적이라 할 것입니다. 신약과 구약이 세계관이 많이 다릅니다만 자연에서 영성을 발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신약도 결코 자연 친화적이지는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자든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연을 사랑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극히 일부예요. 가톨릭의 영성은 지금도 세상 안에, 사물들 속에 거룩한 것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물질세계의 상징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Sacramental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개신교는 사물들 속에서 하느님을 상기시켜주는 모든 상징체계를 다 없애 버렸어요. 우상이라고 파괴해 버렸어요. 건물도 그러니까 아주 그냥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건물들만 지어놓고 성전이라고 해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산업사회의 요구에 부응했습니다.
책에만 매달리는 삶
자연과학적인 세계관과 지배철학
중세 때는 그래도 목적론적 세계관이 있어서 우주와 자연을 보며 하느님의 섭리와 손길을 느꼈어요. 모든 세계가 하느님을 증언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한 전통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어요. 그렇다고 개신교가 전적으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신구약성서를 중심으로 삼아온 개신교가 자연지향적인 영성을 파괴하는데 공헌했다는 것은 부인하긴 어려운 사실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좋은 것,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창조세계이며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영적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연적인, 자연지향적인 영성을 파괴한 것은 근대 철학,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 같은 사람입니다. 그 다음이 자연과학입니다. 자연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이 들어서면서 인간은 사실의 세계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렸습니다. 영적 의미 -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은 그런 사실의 세계로만 인간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객체화시키고, 자연을 완전히 계량화 시켜서 보는 하나의 물체 내지는 대상으로 대하게 만든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철학과 그 사조는 서양 근세 철학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주체이고 거기서 인간은 초월을 경험한다고 봅니다. 반면 인간의 몸은 대상으로 삼습니다. 더불어 자연과 세계도 대상화하였습니다. 신이 떠난 세계에서 인간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실체로서의 "나는 생각한다(cogito)"라는 주체성의 철학을 말하였습니다. 주체성의 철학은 사상사적으로 말하면 인간 주체의 발견입니다. 주체의 발견은 곧 지배의 철학입니다. 지배의 철학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기독교 할 것 없이 다 주체의 철학을 기본으로 하고 '마음대로 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대단히 오만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주체 철학을 뿌리부터 뽑으려고 한 철학자에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인간의 주인이다’, ‘주체적인 존재다’ 하는데 하느님이라는 주인하고 비교할 줄 알아야 해요. 하느님 없이 인간만 남으니까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회체제도 맘대로 바꾸고, 자연도 맘대로 요리하는 것이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 인간을 몸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의 의식 속에서 주체성을 확인하는 철학이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 자본주의, 기독교 그리고 환경위기,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지배의 철학입니다. 그 사상체계를 극복해내는 사상적 대안이 필요합니다. 이 경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생겨야 됩니다. 그런데 그 삶의 양식이 어떻게 생겨나게 하느냐? 이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연지향적인 종교 / 동양적인 종교
원시사회는 - 비록 고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노예제도(계급)가 생기기는 했지만 - 평등사회고 억압이 별로 없습니다. 원시사회에서 사람들은 확실히 자연친화적으로 자연의 일부로 살았습니다. 원시 종교들도 그렇습니다. 자연의 축복을 마음대로 누리면서 그 앞에서 겸손히 순응하며 살게 하는 종교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말입니다. 원시부족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뭘 만들어내고, 자연에 부담을 주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얼마나 재미있게 사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처럼 마냥 일만 하지 않습니다. 화살도 만들고 동물도 사냥하고 고기도 잡고 텐트도 만들고 다 해요.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삶을 아주 풍요롭게 살아요.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해요.
한 공장에서 나사만 돌리면서 사는 그런 공장 노동은 없어요. 저처럼 밤낮 책만 지겹게 봐야 되는 그런 삶도 없어요. 이거 하루라도 빨리 때려 쳐야 되겠는데 생각하다가도… (웃음) 때려 칠 수가 없쟎아요? 현실적으로 말입니다. 그 원시사회는 가만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뭐든지 다 해봐요. 안 해보는 게 없어요. 우리 동양종교 역시 자연 친화적입니다. 동양, 특히 중국 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인식론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식론이란 내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중국 사람들한텐 바보 같은 얘기예요. 그들은 인간을 사물로부터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인간은 원래 사물의 일부인데다가 사물과 끊임없이 에너지를 교류하면서 살기 때문에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지배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예요. 주체하고 객체를 구별해야 주체가 객체를 어떻게 바로 인식하느냐를 비판적인 질문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중국 사람들은 늘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는 그래도 인식론이 조금 있습니다. 어찌 보면 서양과 동양의 중간쯤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동양종교들은 대체로 자연 중심적입니다.
헤겔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자연에 묻혀서 사는 그런 존재들이다' 그렇게 흉을 봤습니다. 지금과 같이 뒤떨어져 있으면 당하기 십상이죠. 서양인들과 게임 하려면 역사화 하긴 해야겠는데 …. 과연 그 방법으로 인간을 구할 수 있을 지는 더 생각해 보아야 해요. 어찌 보면 이미 안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답답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여튼 사상적 대안은 우리 동양적인 종교, 자연지향적인 종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단순한 자연으로, 사실의 세계로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배후에 있는 영적인 힘(Spiritual Power), 영적인 의미, 영적인 메시지를 보게 합니다. 자연을 하나의 기계와 사물로만 대하면, 그것은 폭력의 대상이 되고 지배적 이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연의 신령들을 모시고 살던 농촌의 아주머니들의 생각이 우리의 소중한 종교적인 유산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든, 동양종교든 자연에서 영적인 의미를 읽지 못할 때 그 종교는 물론이고 인간도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 서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사상적 도전은 자연의 영적인 의미를 어떻게 부활시키느냐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자연에서 아무런 영적인 의미도 찾지 못하는, 현재와 같은 종교성이 계속된다면 환경보호 정도는 몰라도 인간 중심적인, 주체 중심적인 사고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다음으로 새로운 신학이 필요합니다. 신과 세계의 단절을 메꾸고, 초월성과 내재성을 한껏 화해시키고 역사와 자연을 함께 아우르고, 동서를 함께 아우르는 그런 신학이 필요합니다. 물론 자연지향적인 종교가 갖는 맹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대체로 자연지향적인 종교는 인간의 자유, 해방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억압적인 질서를 정당화시켜주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 자유, 해방. 이런 것들은 기독교가 이루어놓은 위대성입니다. 아직도 해방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많이 있습니다만, 21세기를 바라보며 기독교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역사와 자연, 동양사상과 서양사상, 동과 서를 화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향으로 기독교신학을 재정립시켜야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합니다. 생산과 소비를 좋은 것으로 칭찬하고 거기에 의존하고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한, 사상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안됩니다. 성장의 경제학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느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새로운 대안적 삶의 양식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커다란 숙제입니다. 코뮨 공동체운동을 해야될지, 새로운 금욕주의가 필요한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환경, 시민운동도 필요할 것입니다. 종교의 잠재력을 동원한 운동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 같아 비관적으로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갈 때까지 가서 자폭할 때까지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기독교가 먼저 새로운 신학을 모색하고, 성서를 보는 신앙의 눈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새롭게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질문과 답변>
문 : 티벳 사람들은 가난함 속에서도 어둡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얘기해 주세요.
답 : 그 사람들은 욕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자연에서 주어지는 대로 목축업을 하고 농사짓고 거기서 수확한 걸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의 새로운 이상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몇 백분의 일밖에 안돼는 에너지를 쓰고 살면서도 우리보다 더 행복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 사람들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할 수 없었어요. 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 물론 나더러 저렇게 살라고 하면 못살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타락한 사람이예요. 여기서 다른 세계를 맛보았기 때문이죠. 그들도 지금의 경제시스템이 파고들면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문 : 기독교가 자연의 종교에서 역사의 종교로 넘어갔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가 일방적으로 자연의 가치를 부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꼭 지배나 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연의 종교, 공간의 종교는 당시 인간 사회의 계급구조를 합리화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해방의 종교, 역사의 종교가 나온 게 아닙니까?
답 : 자연의 종교에 억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제가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자연의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게 된 것은 자연의 질서를 인간 사회에 연결시키면서 잘못된 사회구조를 자연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남녀 차별을 봅시다. 자연 속에 암컷이 수컷보다 열등하다는 증거는 별로 없거든요. 자연의 질서 - 음양 또는 천지에는 위계가 필요 없습니다. 음도 필요하고 양도 필요합니다. 그건 보완적 관계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억압적인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문 : 산업화된 기독교, 제국주의화된 기독교를 기독교 근본정신과 같이 보는 것은 아닙니까?
답 : 제가 기독교, 자본주의, 또 뭐 사회주의를 한 통속이라고 본 것은 근대 기독교를 지칭한 것입니다. 고대나 중세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서가 쓰여진 시대만 해도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성서는 어떻게 보면 그럴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통찰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로운 안목으로 해석한다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기독교의 창조 신학을 너무 도외시하는 것은 아닙니까?
답 : 창조신학을 계속해서 발전시켜야겠죠. 창조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어떻게 보면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세계를 분리시켜 놓기 때문에 그 세계 속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처음부터 차단한 것이라고 비교종교학에서는 봅니다. 저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품위를 높였고, 해방의 논리가 가능한 것이고 인간의 자유를 신장시킨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과 서, 기독교와 동양 종교가 만나고 같이 협력을 해야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좋다 얘기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하여튼 창조신학을 계속 발전시켜야겠습니다. 단지 오늘 제 말씀의 초점이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정배 교수라든지 여러 신학자들이 많이 말씀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새로운 신학의 좌표로 잡아 가느냐하는 문제는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 : 자연의 종교를 정(正)이라고 보고, 역사의 종교를 반(反)이라고 본다면, 이제 자연의 종교가 아니라 합(合)의 종교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요?
답 : 대체로 공감합니다. 공감을 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가 중증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래디칼한 해결책이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기초한 일련의 철학과 사상과 신학이 모든 것이 정말 래디칼하게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반대를 구해도 될까 말까 하는데 합으로 될까요.
문 :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수님이 말씀하신 사상적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원시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현재의 상황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답 : 제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접했던 신학은 역사화된 신학이었습니다. 동양 종교들을 공부하고 환경위기를 접하면서 그러한 신학의 한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나 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그렇다고(기독교가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문화보다는 인간의 욕망만 자극하는 죽음의 문화를 산출해 왔다고 해서)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동양 사상에서 동양 종교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맨 처음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멋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관리하고 가꾸고 책임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튀빙겐에 있을 때 참석한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 신학자가 와서 발표를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자연친화적인 영성을 얘기했죠. 몰트만 교수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일본에는 신도이즘 등에 자연친화적인 영성이 담겨 있는데, 왜 일본인들은 환경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종교가 그렇게 좋은데 왜 서양에 못지 않게 동양에서도 무분별한 자연파괴가 이루어지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자본주의 시스템 앞에서 살아남을 종교가 없거든요. 아무리 종교가 좋아도 개발의 논리에 밀리기 마련입니다. 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사상이 아무리 좋아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합니까? 사상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서양의 경우에도 서양의 신학과 기독교가 나빠서 그토록 환경을 파괴한 것은 아닐 겁니다. 도시화, 산업화, 자연과학, 테크놀로지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다 합쳐져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문 : 기독교에도 풍부한 상징체계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자체도 상징체계를 말소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교리로 만들다보니까 경험을 무시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순수 복음의 전통으로 돌아가면 이 시대의 갈급한 영적인 면을 채울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풍성한 영성적인 면을 계승, 발전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데 교수님 의견은 어떤지요.
답 : 동의합니다. 저는 기독교의 신비가들, 신비주의에 관심을 둡니다. 현실의 종교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가능하면 줄이고, 가난을 생활화하고, 영성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골수 개신교 신자인 저도 그런 영성을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신학교에서도 배운 일이 없어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보여진 것들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학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죠.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전통만 보더라도 그 안에는 광야의 영성이 있어요. 이제라도 신비주의적인 전통을 재조명해보고, 인간의 내면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묵상기도를 하고, 영성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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