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리선녀 이야기/에코페미니즘

페미니즘의 눈으로 본 황우석교수와 과학 /한면희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2.

<웹진 '온울림' webzine> 2005.06.16 13:16:57

http://www.green.ac.kr/xe/?vid=onwoollim&mid=levelup&sort_index=last_update&order_type=desc&listStyle=list&document_srl=113415

 

 

 

 

2005년 5월 사이언스에 실릴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알려지면서,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장차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할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하였다. 특히 “과학은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발언을 하면서 더욱 많은 한국인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도 여느 한국인처럼 황우석교수를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일부러 숨기지는 않겠다. 물론 이때의 감정은 2002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이 4강에 오를 때 느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에 대한 것과 비슷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필자는 또 다른 한편으로 근대과학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아니 그 이상으로 황우석교수의 연구에 대해서 다소간 염려를 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않겠다. 필자가 보는 시각은 페미니즘의 한 입장, 곧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의 접점인 에코페미니즘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한 부류로 분화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몇 가지 특정적인 것만 거론하겠다. 첫 번째 물꼬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열었다. 여건이 조성되면 여성도 남성만큼 합리적이기 때문에, 법과 사회 공적인 영역에서 남녀 차이를 드러내는 제도를 바꾸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물꼬는 급진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의 뿌리로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별(gender) 분류 체계에 따른 가부장제를 지목하고, 이를 바로 잡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이것도 둘로 세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급진 자유지상적 페미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급진 문화적 페미니즘이다. 전자는 대안으로 여성이 가부정적 재생산 수단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고, 후자는 가부장제에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 여성적 가치를 오히려 남성적 가치 위에 두는 여성성 우위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세 번째 흐름으로 등장한 에코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문제가 생태계 위기 문제와 같은 구조에서 형성된 것임을, 즉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이 인간 문화에 의한 자연 수탈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생명공학을 보는 평가가 크게 둘로 나뉜다. 대표적으로 급진 자유지상주의자는 최근의 생명공학 연구 결과에 대해 환호하는 분위기를 보인 바 있다. 그 이유는 재생산 지배권이 여성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조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최근 연구 동향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993년에 조지 워싱턴대의 제리 홀 박사팀은 인간 수정란을 복제하는 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당시 윤리적 논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정자 둘과 난핵 하나가 들어있는 비정상 수정란을 사용하여 복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남녀 생물학적 성 결합의 산물을 다수로 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최근의 연구는 이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1997년 영국 로슬린연구소의 이언 윌머트 박사팀은 체세포 핵이전 기법에 의한 복제로 돌리양을 탄생시켰다. 먼저 한 암양의 신체 일부인 젖샘에서 세포를 추출하여 양의 모든 유전정보가 드러날 수 있는 비활성 상태로 만들고, 이것에 핵이 제거된 또 다른 암 양의 난모 세포와 결합시켜서 증식을 시킨 다음, 대리모 암양의 자궁에 착상시켜서 마침내 어미 유전자를 그대로 지난 돌리양을 탄생시킨 것이다. 급진 자유지상적 페미니스트가 주목하게 된 것은 돌리가 탄생할 때까지 수컷은 개입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 페미니스트 집단이 체세포 핵이전 복제 실험에 환영 논평을 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급진 자유지상적 페미니스트에게 구체적인 수단을 제시한 것은 아무래도 황우석교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2004년 2월 연구에서 체세포 핵이식에 의한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양이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기법을 사용하면 여성에게 무덤(?)과 같은 남성이란 짐승을 만나지 않아도 여성 자신을 그대로 닮은 후손을 맞이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논리적 일관성으로 본다면, 이들은 인공지능 산업의 발달에 따라 슈퍼마켓에서 맞춤형 아이를 사는 세상도 거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05년 5월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가 개가를 올린 것으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하여 난치병 환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여성 환자의 경우, 자기 체세포와 자기 난자를 이용해 배아줄기세포가 만들어졌다. 이런 경우 완전복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세포 치료에 따른 면역 거부반응 문제를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여겨진다. 난치병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면, 응당 환영을 받을 일이다. 정말로 이런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런 유형의 연구가 자칫 다른 길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데 대해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급진 자유지상적 페미니즘은 예외적이고, 대다수 페미니스트는 현재와 같은 생명공학적 접근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에코페미니즘을 필두로 대부분의 현대 과학기술, 특히 생명공학은 남성 가부장적 문화의 유산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급진 문화적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찬양하는 가운데 여성의 모성애적 가치를 중시하므로, 여성의 자연출산을 선호한다. 필자가 선호하는 에코페미니즘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는 처사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생명공학 모두는 아니라고 해도 상당수는 잘못 나가고 있다고 여긴다.

  현대 과학과 과학기술이 억압적이고 지배적임은 과학의 이상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베이컨은 고문을 해서라도 마녀로부터 자백을 받아야 하듯이 자연이란 존재도 거칠고 난폭하기 때문에 기계장치를 들이밀고 압박해서라도 그 비밀을 낱낱이 실토하게 함으로써 인간 제국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을 한 바 있다. 일부 베이컨의 후예 과학자들은 유전자 조작을 일삼고, 그에 따라 안전성이 의심되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체세포 핵이전 기법에 의해 인간복제도 단행하려고 한다.

  에코페미니스트와 생태주의자는 과학과 과학기술 모두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고 본다. 기술 자체가 인간의 도구 사용 방식이어서 가치와 연루되므로 과학기술은 가치 연계적이다. 과학도 과학기술과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또 과학 자체가 실험기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 다만 순수과학일수록 가치 연계성이 극히 미약한 상태에서 과학기술로 이행하면 할수록 가치 연계성은 강해질 것이다. 오늘날 양자물리학은 과학 지식이 순수한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인간적 인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이 가치와 연루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도 가치와 연계되어 있다.

  물론 가치는 단순화 할 경우, 긍정적 가치를 띠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으로 권장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또 그 반대로 부정적 가치를 지닌 것이어서 규범적으로 규제하거나 삼가해야 할 것도 있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는 전자 유형에 속한 것이기를 희망한다. 적어도 고통을 겪고 있을 불치병 환자를 고려한다면, 그렇게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연구 성과는 전용하면 곧바로 후자로 이행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간 복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니, 황우석 교수팀은 이미 생명체로 간주되는 배아를 실험적으로 조작하면서 숱하게 폐기하고 있으므로 윤리적으로 비난 받을 행위에 연루되어 있다. 황우석 교수팀은 사회에 긍정적 가치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윤리적으로 분별 있게 처신하고자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과학자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국가 권력의 필요에 의해 또는 이윤을 도모하는 기업의 금력에 의해 과학자가 좌우될 소지는 없는가? 솔직하게 말하면 연구비를 지원하는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부응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이제 민주주의의 범주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페미니스트나 생태주의자가 과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야수적이고 지배적인 과학을 거부할 뿐이다. 도구적 이성이 판치는 과학과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페미니즘 과학 또는 생태주의 과학을 모색하고자 한다. 즉, 사회 또는 자연에 관계하는 호혜적 이성이 감성 및 영성과 어우러지는 사회와 과학을 추구한다. 이렇게 조망하면,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주로 원자력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폭탄 제조나 발전 과정 중의 사고로 인해 대형 참사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안으로 어렵고 초기에 비용이 많이 들지만, 무한히 재생 가능한 태양 에너지를 사용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난치병을 치료할 때도 반드시 인간복제와 생명체 논란에 휘말릴 배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성체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해서 치료에 응용할 수 있는 좋은 방도도 있다. 이 길은 힘이 더 들지만,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에 골수에서 뽑은 성체 줄기세포를 뇌경색 등 난치병 환자에게 주사해서 증세가 호전되었다는 반가운 의료적 개가가 한국에서 있었던 것으로 소개되었다. 이제 작지만 정작 아름다운 일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이다. 지금은 약자와 함께 또는 약자를 배려하는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의 길에 보다 많은 사람이 동참할 필요가 있고 또 과학자도 그렇게 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