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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민중신학」 5호(1998)


새롭게 떠오르는 생태여성신학 1


구 미정1)



A. 생태여성주의의 배경과 전제



1. 생태학, 근본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생태학 : 희랍어의 '오이코스'(oikos)에 어원을 둔 생태학(ecology)이라는 용어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집(oikos)을 잘 돌보는 일, 곧 '가계 살림'(家事)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많은 저술들에서 '가정경제'와 '화폐증식경제'를 분리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는 가족과 공동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정경제(Oikonomia)가 '자연에 맞는 경제'라고 보았다.2) 이러한 사고에서 생태학은 경제학(economics)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실상 일정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자급경제와는 무관하게 부유층의 사치품과 전쟁용품을 주로 취급하였던 무역시장의 의미는 근대의 산업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성립된 것이다.


한편 학문으로서의 생태학이라는 용어는 1868년에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rnst Hackel)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창조의 자연사>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 에서 생태학을 "살아 있는 존재와 유기적촵비유기적인 그의 환경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로 정의했다.3) 그의 정의는 오늘날 <웹스터 사전>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의 정의―"생태학은 유기체와 그의 환경과의 상호관계에 관심하는 과학 분야이다"4)―와 유사하지만, 당시의 그의 관심은 생태학을 동물학의 한 분야로 한정시키고 있었다. 한편 밀러는 좀더 상세하게 "생태학이란 유기체와 그것이 몸담고 있는 집에 관한 연구로서, 자연 또는 자연 안에서 발견되는 유기체와 유기체 집단들의 구조와 기능 및 그것들의 상호작용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5) 그렇다면 생태학적 원리란 한마디로 '복거(卜居)와 섭생(攝生)의 원리'6)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줄 같이 얽혀 있는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탱해 나가는 관계 또는 양육시키는 관계―그것이 바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유기적 자연의 모습이다.


생태학은 이러한 생태계가 어떻게 건강한 삶의 그물망을 유지하고 있는지 밝힘과 동시에, 또한 생태계가 어떻게 파괴되어 동식물의 삶에 죽음을 초래하는지도 검토한다. 특히 인간의 간섭이야말로 환경파괴의 지름길이라는 생태학적 연구결과에 힘입어, 최근 수세기 동안 생태학은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악용하여 땅과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동식물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왔는지 검증하려는 목적에서 사회경제적, 생물학적 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7)

 

근본생태주의 : 이러한 생태학이 한 차원 더욱 깊은 단계로 진입한 것이 바로 심층생태학 또는 근본생태주의(deep ecology)이다. 여기에는 생태문헌의 고전이 된 <샌드 군(郡)의 연감>을 쓴 앨도 레오폴드(Aldo Leopold)8)를 위시해서, 아르네 네스(Arne Naess), 마이클 짐머만(Michael Zimmerman), 마티 킬(Marti Kheel), 슈마허(E.F. Schumacher) 등이 속한다. 근본생태주의는 1970년대까지 거의 유일한 이론으로 당연시되어 오던 환경관리주의 또는 환경개량주의가 궁극적으로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의거한 '천박한 환경주의'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9) 이들에 따르면 환경개량주의도 단기적으로는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연 안에' 있는 존재로서, 자연 과정에 인위적인 간섭을 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 도리어 자연을 해치지 않는 길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근본생태주의자들은 과학혁명 이후 지속되어 온 기계론적 패러다임과 서구 문명의 바탕이 되는 인간중심주의를 전복하고, 다음과 같은 생태학적 명제에 따라 사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채택한다;



첫째,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자연의 생태계가 개별적인 유기체의 진화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매우 탄력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생태학의 기초적 진리는 만물의 상호연관성인 것이다.


둘째, 모든 것은 틀림없이 어디론가 간다. 그러나 자연계에서 최종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없다. 이것은 열역학의 기본법칙을 표현한 것으로, 물질과 에너지는 상호 변화하면서 순환하지만, 전체 에너지의 총량은 같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말한다.


셋째, 자연이 가장 잘 안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계에 어떤 중대한 변화를 가하면 생태계가 위협받게 된다. 이를테면 50억 년 동안 진화하면서 순환해온 자연계에 인간이 석유화학산업의 산물들을 갑자기 쏟아놓은 결과, 이것이 생태계의 재순환을 방해하고 각종 돌변변이와 암 등 자연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넷째, 무에서 창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자연을 착취하면 그만큼 생태계의 파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열역학 제2 법칙, 곧 엔트로피의 법칙을 의미하는 이 명제는 인간이야말로 생태계 안에서 자신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존재이며, 또한 더 이상 재활용될 수 없는 형태로 에너지를 고갈시켜버리는 '약탈자'인 것을 깨우쳐준다.10)



근본생태주의는 이러한 생태학적 명제들을 수용하기 때문에 현대물리학이나 동양종교, 또는 신비주의 전통과 많은 교류를 나누고 있다.11) 그러한 대화를 통해 얻은 "중심 통찰(central intuition)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절대적인 구분이 없다"는 것12), 곧 생물 중심적 평등주의(biocentric egalitarianism)인 것이다.13)

 

사회생태주의 : 한편 북미의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14)에게서 유래된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는 근본생태주의와 마찬가지로 환경개량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새로운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나온 또 하나의 모형이다. 그러나 주로 산업화된 북반구에서 나온 근본생태주의가 의식의 개혁을 통한 환경문제의 극복을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사회생태주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다수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하여 분명하게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남반구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15) 우루과이의 구디나스(Eduardo Gudynas)는 사회생태주의를 "환경적 제도들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인간적 제도들을 연구하는 것"16)으로 정의하였다. 그러한 총체적 연구의 결과로 사회생태주의자들은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를 상호관통하는 핵심으로서 불평등한 지배관계를 꼬집고 있다. 즉 환경과 사회문제 모두 인간의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관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파괴와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려면 환경운동과 사회운동이 통일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회생태주의의 목표는 지배/피지배 관계에 기초한 사회 모델을 생태주의적 사회 모델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생태주의적 사회란 평등, 만물의 연관성, 다양성 속의 조화 등의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동진화가 가능하도록 지탱해 주는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북친은 기계론적, 숙명론적 자연 개념에 도전하여 자연에 대한 세 가지 생태학적 관점을 제시하였다17); ① 자연은 복잡성과 다양성이 특징이며, 새로운 단계에 이를 때까지 운동을 멈추지 않는 상호의존적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진화의 목적은 다양성의 증대에 있고, 그 과정에서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창조적인 통합의 기초가 된다. ② 자연은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성장과, 대사작용을 통한 원자의 자기조직화 및 자기안정화의 경향에서부터 개인, 사회, 생태계, 생물권 자체의 복잡한 자기실현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유는 존재의 모든 단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외 없이 발견된다."18) ③ 근대문명의 심각한 위기는 자연에 대한 오해와 자연/문화 간의 불화에 기인하므로, 인간과 자연의 재화해가 이루어지는 생태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대의에 근거하여 사회생태주의는 특히 지방분권정치와 참여민주주의, 그리고 '공동체 프로젝트'19)를 통한 사회의 재구성에 공헌하고 있다.



2. 생태여성주의의 출현과 전개



생태여성주의의 대두 : 여성주의(Feminism)도 역시 여러 갈래로 구분되는 복합적인 운동이다.20) 자유주의 여성운동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추구한다. 그런가 하면 마르크스주의 여성운동은 자유주의자들의 '평등' 개념이 사실상 계급구조화된 현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그러한 평등이 생산 및 재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관계의 변혁 없이는 성취될 수가 없다고 본다. 급진주의 여성운동은 좀 더 깊은 쟁점으로 들어가서 성차별주의야말로 모든 억압의 가장 근원이 된다고 지적하고, 남성의 지배와 폭력을 지탱해 주는 문화적, 의식적 양상을 보도록 촉구한다.21)


넓은 의미에서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는 생태학과 여성주의가 만나 생겨난 말이다.22) 스프레트낙(Charlene Spretnak)은 생태여성주의로 들어가는 길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23) 첫째는 정치이론과 문화사 연구를 통해서이다. 60년대에 행해진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지배 이론이 가장 보편적으로 남아 있는 피지배 계급인 여성과 자연을 무시한다고 본 여성주의자들은 곧바로 생태여성주의에 뛰어들었다. 두 번째로는 여성적인 것을 숭배하며 초월보다 내재를 강조하는 자연에 기초한 종교, 이른바 여신종교에 참여함으로써 생태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70년대 중반,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치마를 입은 야훼'에 만족하지 않고서, 역사적, 인류학적 자료를 통해 고대 여신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령한 숲, 자궁처럼 생긴 동굴, 달의 주기와 비슷한 여성의 생리 등에서 대지(大地)의 여신 가이아(Gaia)를 경험하였다. 고대 여신상의 팔에 휘감겨있는 뱀을 기독교의 창조설화에 나오는 인류 타락의 악마적 상징으로 보는 대신에, 허물을 벗는 주기적인 재생과 갱생의 교훈으로, 지혜의 상징으로 재인식하고, 지구의 절기에 맞추어 축제를 벌이는 등 다양한 의식과 영성을 구현해 나갔다. 생태여성주의를 향한 세 번째 길은 환경보호주의에서 유래한다. 다양한 환경운동과 녹색정치에 투신하던 여성들은 그러한 운동의 남성 편향성을 목격하고 생태여성주의로 기울어졌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작업들이 생태여성주의를 꽃피우는 데 풍부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별히 1974년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에서 열렸던 <여성과 환경> 대회와, 1980년 스리마일 섬의 핵재난에 자극받아 메사추세츠 암허스트에서 개최된 <지구에서의 여성과 생명> 회의는 생태여성주의가 자라나게 된 주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에 나온 수잔 그리핀의 <여성과 자연>,24) 캐롤린 머천트의 <자연의 죽음>,25) 이 두 작품은 여성운동을 생태학적 노선으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한 '생태여성주의의 고전'으로 꼽힌다.26)



생태여성주의의 전제 : 결국 생태여성주의는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다. 여성운동이 무르익어 가던 1970년대에, 여성들은 여성에 대해 '타자'(the other)로 규정하는 사회문화적 관습과 질서가 자연 역시도 타자화(他者化), 곧 대상화하고 있음에 주목하고서,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을 '쌍둥이 억압'(twin oppression)27)으로 명명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관심의 지평이 넓어지자,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차별(sexism)과 자연차별(naturism),28) 그리고 인종차별(racism)과 계급차별(classism)이 서로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는(interstructuring) 복합적인 문제임을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이 네 가지 억압의 뿌리에 가부장주의가 놓여 있음을 통찰할 수 있었다. 특히 가부장주의의 다양한 표현들 중에도 인간의 현실을 이원화(二元化)하여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높고 우월하다고 보는 위계체제적 이원론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네 가지 지배구조들은 가부장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연쇄 대들보'(interlocking pillar)29)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여 생태여성주의는 여성만의 해방이 아닌 총체적인 생명의 해방을 목표로 삼는다.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라는 용어 자체는 "지구상에서 인간의 생존을 보장해 줄 생태학적 혁명을 일으킬 만한 여성의 잠재력"을 표현하기 위해 1974년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듀봉(Francoise d'Eaubonne)에 의해 고안되었다.30)


카렌 워렌(Karen Warren)에 따르면, 생태여성주의의 기반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통찰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①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은 깊이 연관되어 있다. ② 이 두 억압을 적절히 이해하려면 양자간의 연관성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③ 여성주의 이론과 실천은 생태학적 관점을 요구한다. ④ 생태학적 문제들은 오직 여성주의적 관점을 포함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31) 요컨대, 생태여성주의는 결국 여성과 자연의 종속성을 밀접하게 동일시하고(①과 ②), 생태학적촵여성주의적 원리에 따라 사회를 변혁시키도록 요구하는(③과 ④) 이론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류터 역시 "지배의 관계가 사회관계의 근본 모형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여성의 해방이 있을 수 없고, 생태위기에 대한 해결도 있을 수 없다"32)고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여성운동의 요구와 생태운동의 요구를 하나로 통합시켜서, 모든 사회적 지배구조를 무너뜨리는 생태 혁명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류터의 주장은 많은 생태여성주의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어, '생태학이 곧 여성운동의 문제'임을 널리 인식시키고 있다.



3.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



여성과 자연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다양한 통찰 : 녹일 녹색당의 창시자인 패트라 켈리(Petra Kelly)는 "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지구가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33)는 말로써 여성억압과 자연억압의 상관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주었다. 이네스트라 킹(Ynestra King)은 여성억압의 주요 원인이 멸시받는 땅과 여성의 연관성 때문이라고 분명히 지적한 반면, 환경운동을 하는 대부분의 남성 생태학자들이 이러한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땅에만 관심갖는 것은 위선이라고 보았다.34)


여성과 땅의 연관성은 비단 생태여성주의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경제학, 자연과학, 고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주장되고 있다. 일찍이 뉴질랜드 의회의 의원을 역임했던 마릴린 웨어링(Marilyn Waring)은 세계 여성의 경제적 상황을 조사한 결과, 세계 경제구조 아래서 여성과 땅이 근본적으로 똑같이 취급당한다고 주장하였다.35) 즉, 눈에 띄지 않는 존재, 무가치한 존재, 남성의 자유로운 이용을 위해 내맡겨진 존재로 평가절하된다는 것이다.


인도의 생태학자 마리아 미즈(Maria Mies)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 즉 자녀출산과 양육이라는 생물학적 기능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생계를 제공하는 여성의 역할이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이중적 역할로 인해 여성은 남성보다도 더 자연과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노동하며, 생명을 낳고 기르는 과정을 통해 '자연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중으로 착취당하는 '최후의 식민지'(last colony)로 전락한다. 미즈는 계속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종속된 사람들을 물, 공기, 땅처럼 마치 생산수단이나 자연자원으로 취급한다고 주장한다. 신식민주의 배후에 놓여있는 경제논리는 여성과 땅을 자본에 의해 생산될 수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동시에, 언제든지 '충당'(appropriation)될 수 있는 자원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여성과 땅에 대한 통제야말로 착취적 체제의 토대이며, 누가 얼마만큼 그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느냐가 체제 유지의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36)


한편 미즈와 마찬가지로, 반다나 쉬바(Vandana Shiva) 역시 여성이 평가절하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여성의 노동이 자연과정에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여성이 주로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며 생계에 주력하는 일을 담당하기 때문이다.37) 쉬바는 1985년에 국제환경연합센터(ELCD)가 주최한 나이로비 포럼에 참가하여 인도 여성들의 '칩코 운동'(Chipko movement)을 소개함으로써, 케냐의 '그린벨트 운동' 지도자인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hai)38)와 함께 남반구의 가난한 여성들을 대변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서구적 개발 모델이 남반구 여성과 민중들의 삶을 황폐화하고 여성의 노동력과 자연자원을 상품화하면서 '빈곤의 세계화'를 초래한다고 보는 쉬바는 칩코 운동의 주역이 바로 여성인 점을 들어, 여성적 원리야말로 대안적인 개발 모델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여성적 원리의 복원을 위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생명을 존중하는 전통적인 지역경제가 되살아나야 한다"고 강조했다.39) 그러나 쉬바의 이론에서 여성적 원리의 회복이라는 문제는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전통적인 생계농업의 부활로 구현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보여진다. 그녀는 인도 사회 내부의 현존하는 카스트 제도나 엄밀한 가부장적 구조를 경시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동경은 단순한 낭만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경제적 관점에서 여성과 땅의 연관성을 지적한 반면,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서구 과학혁명에 의해 '자연의 죽음'이 야기되면서 여성억압이 병행되었다고 주장한다.40) 자연과 여성의 연관성은 고대적 사유에서 자연을 '양육하는 어머니'(nuturing mother)로 간주한 데서부터 찾아질 수 있다. 그러나 서구 과학혁명 이후에 자연의 이미지는 양육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황폐하고 통제할 수 없는 불모지'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이해로부터 자연을 완전히 길들이고 지배하려는 정복의 의지가 자라났던 것이다.


고고학적 측면에서는 수많은 남성학자들이 신석기 시대의 동굴에서 발견된 여성 조각상에서 모신 숭배의 흔적을 찾아내고 또 이로써 가부장제 이전에 모가장제 사회가 선재(先在)했었다고 추측한 이래,41)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활발한 움직임들이 생겨났다. 조각가인 머얼린 스톤(Merlin Stone)은 [신이 여성이었던 시대]라는 논문에서 기원전 25,000년경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부터 기원전 7,000년경의 신석기 시대를 거쳐 초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세계 모든 지역에서 여신숭배가 행해졌다고 강조하였다.42) 인류 발전의 아주 초기, 문자 이전 단계에서는 생명을 낳는 어머니만이 가족의 유일한 어버이로 간주되었으며, 오직 모계만이 조상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의 출산력은 대지의 생산력과 동일시되었고, 따라서 모신 숭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신석기 동굴들에서 발견된,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상들이 원시 인류의 여신숭배를 입증해준다. 짐부타스(Marija Gimbutas)는 특히 고대 유럽문화에 주목하면서 당시의 위대한 여신들이 네 가지 주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① 생명 수여자(life-giver), ② 영원한 어머니 지구(eternal Earth Mother), ③ 죽음의 수여자이자 재생의 모체(death giver-regeneratrix), ④ 에너지.43) 짐부타스에 의하면 여신문화의 특징은 상호평등하고 비폭력적이며 모계 중심적이고 땅 중심적이었다.44) 그런데 이처럼 조화롭던 세계가 기원전 4,500년에서 2,800년 사이의 가부장적 유목민들의 침략으로 정복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고도로 예술적이던 문화는 군사주의적인 폭력 문화로 변질된다. 말을 탄 유목민들은 여성 고유의 식량생산 및 가축통제권을 빼앗아 남성의 지배 아래 두고서 권력을 확장해 나갔고, 이 때부터 일차적인 신적 이미지는 '달'에서 '태양'으로 바뀌게 되었다.45) 고고학적 발굴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점증하고 있는 고대의 여신숭배의 흔적들은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와 어머니 지구(Mother Earth)와의 연관성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원시문화의 실재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러한 점에서 고고학적 연구들이 밝혀주고 있는 모성중심 문화(matricentric culture)는 가부장제로부터의 이탈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상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재강조함으로써 여성우월을 주장하고 여성만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분리주의(separatism)의 대의는 여성주의 안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질주의 대 구성주의 : 다양한 생태여성주의 이론들은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 사이에 중대한 연관성이 있다는 부분에는 다들 동의하지만, 그러한 연관성의 본성과 또한 여성/자연의 연관성이 "잠재적으로 여성의 종속 상황을 해방시킬 것인지, 아니면 단지 여성의 종속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근거로서 기능할 것인지"46)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견해 차이 때문에 생태여성주의는 다시 본질주의(essentialism)와 구성주의(constructionism)로 나뉘게 된다.47)


먼저 본질주의 입장은 역사상 가부장제의 억압 도구였던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여성성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급진적인 문화 여성주의(cultural feminism)48)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그리핀(Susan Griffin), 리치(Adrienne Rich), 데일리(Mary Daly), 크리스트(Carol Christ) 등이 속한다. 수잔 그리핀은 <대지의 회복>에서 주장하기를,49)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으로부터 훨씬 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고 기꺼이 땅(자연)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아드리엔느 리치는 여성과 자연의 가장 밀접한 관계를 모성에서 찾는다. 모성은 여성성의 '우주적 본질'이다. 이 모성이 여성을,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는 자연의 본질적 기능과 연관시켜 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재생산의 역할로만 축소시켜 억압해온 사실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된 모성 너머에 있는 실질적인 잠재력으로서의 모성이 여성 자신과 자연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50)


그런가 하면 데일리는 여성의 영적인 힘을 중시하여, 우주의 자연적 조화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여성만이 주객이 분리되지 않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수립할 수 있다고 본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을 매혹하는 존재"(Be-Witching)로 머물면 안 된다. 그것은 여성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내면화된 '타자'의 모습이다. 오히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주입된 비본래적인 자기의 모습을 버리고 참된 자아를 찾아 영적 순례의 여정에 올라야 한다. 여성과 여성, 그리고 여성과 자연간의 "결속을 방해하는 올가미들을 끊어내면서, 서로 친구가 되는 존재(Be-Friending)로 거듭나도록 함께 천을 짜"자는(weaving) 그녀의 호소는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거미'가 여성의 영적 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51)


크리스트는 데일리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가서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여신숭배로 끌어올린다. 자연의 주기와 유사한 여성의 몸은 여신과 교통할 수 있는 근거이고, 이런 사실이 여성에 대한 전통적 평가절하를 근절시키는 장치가 된다는 것이다;


월경을 하고, 출산을 하고, 전통적으로 아이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살펴 온 여성의 특별한 위치로 인해 몸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여성의 연관성은 명백해졌다. 여성은 문화를 창조하는 남성들보다 더 육감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평가절하되어 왔다 … 전통적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폄하는 월경, 출산, 여성의 갱년기를 둘러싼 문화적, 종교적 터부 속에 표현되고 있다. 여신이라는 상징은 여성의 몸과 몸의 주기 및 과정을 표현하고 재강조하는 데 유용하다. 여신의 창조적 측면 가운데 생명을 부여하는 힘은 물리적인 출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신은 또한 치유와 글쓰기, 정의로운 법률의 제정을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문화의 창조자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52)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재강조하여 "오직 여성만이 지구 위의 생명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53)고 한 본질주의적 입장은 여성의 인식론적, 도덕적, 영적인 우월성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태여성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주의적 전제는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지나치게 미화시키는 왜곡의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54) 여성이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하는 '올가미'로서의 육체 속에 다시 여성을 밀어 넣는 환원론적 오류가 있다고 본다. 여성을 '어머니 자연'(Mother Earth)의 육화(肉化)로 보고 오로지 재생산 능력과 모성만을 찬양하는 것은 여성성의 다양한 측면들을 억압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된다. '현대 여성주의의 어머니'인 보봐르가 바로 이러한 비판의 선봉에 서 있다. 그녀는 여성을 전통적 역할에로 종속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에 의해 "또다시 여성이 '타자'로 규정되고, 다시 한번 '제2의 성'으로 만들어지기"55) 때문이다. 보봐르는 계속해서 반문한다; "왜 여성이 남성들보다 더 평화를 사랑해야 하는가? 나는 당연히 남성과 여성 둘 다의 공동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평화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연을 여성과 동일시하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 둘은 자동적으로 하나가 아니고 결코 동일한 것도 아니다."56)


급진적인 본질주의자들은 이러한 비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주장하려면 그것이 '여성=자연/남성=문화'57)라는 낡은 위계체제적 이원론을 영속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다른 지배-종속 관계로 이어지는 역전주의(reversism)는 결코 진정한 대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태여성주의와 남성생태주의 : 생태여성주의는 추상적, 이원론적, 원자론적, 위계체제적 범주들이 자연 지배를 야기했다고 보는 점에서 근본생태주의와 매우 흡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태여성주의 측에서는 근본생태주의자들이 사실상 자연 지배의 근원에 놓여 있는 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를 은폐한 채, 중립적인 언어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이야기한다고 지적한다.58) 이러한 사정은 심지어 계급적, 인종적 차별과 자연에 대한 지배를 연결시킨 사회생태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가 모든 지배의 뿌리임을 알지 못한다.59) 그리하여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이들 남성 생태주의자들이 의식개혁을 요청하면서도 스스로의 가부장적 편견을 깨닫지 못하는데 대해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여성주의자가 아닌가? … 왜 생태운동은 … 여성 혐오와 자연 혐오간의 연관성에 대하여 그토록 무지한가?"60) 생태여성주의자들은 바로 그와 같은 무지와 편견, 그리고 남성의 여성지배가 제거되지 않고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향상될 수 있다고 보는 순진한 낙관론 때문에 근본생태주의나 사회생태주의가 여전히 개량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에리얼 살레는 근본생태주의의 선두격인 아르네 네스(Arne Naess)와 빌 드발(Bill Devall)의 저서들에서 성차별적 언어를 찾아낸다.61) 그녀는 근본생태주의자들이 사실상 남녀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 의해 제안된 어떠한 해결책도 순진하고 표면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예를 들어 근본생태주의자들은 소규모 지방자치체제를 요청하지만, 가부장적 문화가 언제나 위계체제와 중앙집권화를 선호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가부장적 의식 자체가 포기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레는 근본생태주의자들이 비록 의도에 있어서는 선하나, 어쩔 수 없이 보편적인 남성주의적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 역시도 가부장제로 인해 상처입어 치유가 필요한 남성들이라고 결론내린다. (두번째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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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1998년 8월 24일에 열렸던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월례포럼 때 발표된 구미정의 글을 전재한 것이며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세 부분으로 나누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저자는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했으며,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계명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2) U. 두크로, 손규태 옮김, <성서의 정치경제학.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서울: 도서출판 한울, 1997), p.32.


3) Hans Magnus Enzensbergher, "A Critique of Political Ecology", in Ideology of/in the Natural Science, eds. by Hilary Rose and Steven Rose (Cambridge, Mass.: Schenkman Publishing Co., 1980), p.136.


4) John Carmody, Ecology and Religion: Toward a New Christian Theology of Nature (New York: Paulist Press, 1983), p.12.


5) G. Tylor Miller, Jr., Living in the Environment (Belmont, CA: Wadsworth, 1982), p.44.


6) 구승회, <에코필로소피> (서울: 도서출판 새길, 1995), p.47.


7) Paul R. Ehrlich, et. al, Human Ecology: Problems and Solutions (San Francisco: W. H. Freeman, Co., 1973) 참고.


8) Aldo Leopold, A Sand County Almanac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49).


9) 로드만에 의하면, 환경개량주의가 근본생태주의로 발전하려면 4단계를 거쳐야 한다; ① 자원 보호, ② 자연 보존, ③ 도덕 증진주의, ④ 생태학적 감수성(=근본생태주의). 여기서 '생태학적 감수성'(ecological sensibility)란 환경오염과 종의 멸절, 생물권의 파괴 및 핵의 공포 등 지구가 직면하는 모든 위험이 '인간중심주의의 징후'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John Rodman, "Four Forms of Ecological Consciousness Reconsidered", in Ethics and the Environment, eds. by Donald Scherer and Thomas Attig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83); 마이클 짐머만, [심층생태학과 생태여성주의: 떠오르는 대화], 다이아몬드․오렌스타인 편저, 정현경․황혜숙 옮김, <다시 꾸며보는 세상: 생태여성주의의 대두> (서울: 이화여대 출판부, 1996), pp.218~219 참고.


10) 존 포스터, 조길영 옮김, <환경혁명: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찾아서> (서울: 동쪽나라, 1994), pp.187~189 참고.


11) 그 대표적인 예가 카프라(Fritjof Capra)로서, 그는 현대물리학 이론과 동양종교의 유사성을 포착한 인물로 유명하다.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이성범촵김용정 옮김 (서울: 범양사, 1983).


12) Warwick Fox, "Deep Ecology: Toward a New Philosophy for Our Time?", in The Ecologist 14, 1984, pp.194~204.


13) 마이클 짐머만, [심층생태학과 생태여성주의: 떠오르는 대화] (1996), p.220.


14) Murray Bookchin, Post-scarcity Anarchism (Berkeley: Ramparts Press, 1971); 같은 저자, The Ecology of Freedom: The Emergence and Dissolution of Hierarchy (Palo Alto, CA: Cheshite Books, 1982); 같은 저자, Remaking Society: Pathways to a Green Future (Boston: South End Press, 1990).


15) Tony Brun, "Social Ecology: A Timely Paradigm for Reflection and Praxis for Life in Latin America"; Leonardo Boff, "Social Ecology: Poverty and Misery", in Ecotheology: Voices From South and North, ed. by David G. Hallman(New York: Orbis Books, 1994), pp.82․238.


16) Eduardo Gudynas, Social Ecology: The Latin American Route (Montevideo: CIPFE, 1990); Leonardo Boff, "Social Ecology" (1994), p.238에서 재인용.


17) M. Bookchin, The Ecology of Freedom (1982); 로지 브라이도티 외, 한국여성 NGO 위원회 여성과 환경분과 공역, <여성과 환경, 그리고 지속 가능한 개발> (서울: 나라사랑, 1995), pp.257~258.


18) John Clark, ed., Renewing the Earth: The Promise of Social Ecology. A Celebration of the Work of Murray Bookchin (London: Green Print, 1990), p.6.


19) 뉴욕의 '로이사이다'라고 하는 푸에르토리코인 거주자 지역의 공동체 프로젝트는 사회생태주의적 비전에 의해 수행되었다. 로이사이다의 주민들은 파괴된 채 텅 비어있던 그곳을 정원, 체육관, 공동체 센터로 바꾸어 놓았다. 공동체의 물질적 기반인 땅을 둘러싸고 시에 맞서 대항함으로써, 몇몇 부지에 대해 영원히 부동산 시장에 내놓지 않고 공동체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동체 토지신탁'을 이루어냈다. 이로써 골치거리로 여겨지던 땅은 공동체의 보건과 주변 생태계에 유익한 곳으로 변모되었다. 앞 글, pp.77~78 참고.


20) 강남순, <현대여성신학> (1994), 제2장 [페미니즘 서설] 참고.


21) 1980년대부터 여성운동이 복잡, 다양하게 전개되면서 페미니즘을 분류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우선 대표적인 모델이 본문에서 인용한 엘리슨 재거의 것이다. Allison Jaggar, Feminist Politics and Human Nature (Totowa, NJ.: Rowman & Ackenheld, 1983); 헤스터 아이젠슈타인의 분류에서는, 평등과 자매애를 강조하는 공상적촵유토피아적 페미니즘, 차이를 강조하는 본질주의적 페미니즘, 다양성을 인정하되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에 치중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나뉜다. Hester Eisenstein, Contemporary Feminist Thought (Sydny, Australia: Allen & Unwin, 1984); 그 밖의 다른 범주로는 여성과 자연의 연관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본질주의와 구성주의로 나누는 분류법이 있다. 본문 각주 45) 참고.


22) Eleanor Rae, Women, the Earth, the Divine (New York: Orbis Books, 1994), p.23.


23) 샤를린 스프레트낙, [생태여성주의: 우리의 뿌리와 꽃피우기], <다시 꾸며보는 세상> (1996), pp.30~32.


24) Susan Griffin, Woman and Nature (New York: Harper & Row, 1978).


25) Carolyn Merchant, The Death of Nature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0).


26) 샤를린 스프레트낙, [생태여성주의: 우리의 뿌리와 꽃피우기], <다시 꾸며보는 세상> (1996), p.35.


27) Carolyn Merchant, Radical Ecology: The Search for a Livable World (New York: Routledge, 1992), p.185.


28) 자연차별주의(naturism)라는 용어는 조안 그리스콤이 생각해낸 것으로, 현존하는 네 가지의 억압 형태 가운데 성차별주의(sexism)촵인종차별주의(racism)촵계급차별주의(classism)등의 용어는 있으나, 자연에 대한 인간 지배를 표현하는 마땅한 용어가 없어 제안한 것이다. 이 'naturism'에는 또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종(種)차별주의'(speciesism)가 포함된다고 한다. Joan L. Griscom, on Healing the Natre/History Split in Feminist Thought", in Women's Consciousness, Women's Conscience: A Reader in Feminist Ethics, eds. by Barbara Hilkert Anderson, Christine E. Gudorf, & Mary D. Pallauer (Minneapolis: Winston Press, 1985), p.86.


29) Sheila D. Collins, A Different Heaven and Earth: A Feminist Perspective on Religion (Vally Forge: Judson Press, 1974), p.161.


30) Francoise d'Eaubonne, "Feminism or Death", in New French Feminism: An Anthology, eds. by Elaine Marks and Isabelle de Courtivron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80).


31) Karen J. Warren, "Feminism and Ecology: Making Connections", in Readings in Ecology and Feminist Theology, eds. by Mary Heather MacKinnon and Moni McIntyre (Kansas City, MO: Sheed & Ward, 1995), p.106.


32) R. R. 류터, <새 여성촵새 세계: 성차별주의와 인간의 해방>, 손승희 역 (서울: 현대사상사, 1975), p.275.


33) 페트라 켈리, [여성과 권력], <녹색평론>, 1994, 3~4월호, p.101.


34) Ynestra King, "The Ecology of Feminism and the Feminism of Ecology", in Healing the Wounds: The Promise of Ecofeminism, ed. by Judith Plant (Philadelphia: New Society Publishers, 1980), p.18.


35) Marilyn Waring, If Women Counted: A New Feminist Economics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


36) Maria Mies, Women, The Last Colony(London: Zed Books Ltd., 1988), p.5.


37) Vandana Shiva, "Development, Ecology, and Women", in Healing the Wounds(1989), p.85.


38) Wangari Maathai, The Greenbelt Movement, Sharing the Approach and the Experience(Nairobi, Kenya: Environment Liaison Centre International, 1988). '그린벨트 운동'은 케냐의 여성지도자요 이 운동을 이끈 왕가리 마타이에 의해 1985년 나이로비 회의에서 소개된 이후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주요 환경운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운동의 목적은 공공 그린벨트 지역을 확보하고, 지역주민 특히 여성들에 의한 자립적 땔감 소지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그 지역의 환경회복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지역 여성들의 권한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마타이는 케냐의 일당 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 가담하다가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으나, 국제적인 압력 덕분에 곧 석방되었다.


39) Vandana Shiva, Staying Alive: Women, Ecology and Deveopment (New Delhi, Kali and Zed Books, 1989), p.223.


40) Carolyn Merchant, 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0), pp.xv~xvi & p.2.


41) 이 장(章)의 각주 76번을 참고.


42) Merlin Stone, "When God was a Woman", in Womanspirit Rising: A Feminist Reader in Religion, eds. by Carol P. Christ and Judith Plaskow (New York: Harper & Row, 1979), pp.120~130; 이 글의 우리말 번역은 [신이 여성이었던 시대], <여성들을 위한 신학>, 이우정 편 (1985), pp.17~31을 참고.


43) Marija G;imbutas, The Language of the Goddess: Unearthing the Hidden Symbols in Western Civiliza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9).


44) Marija Gimbutas, The Goddesses and Gods of Old Europe, 6500~3500 B.C.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as, 1982), p.p.xx~xvi. 짐부타스는 고대 여신문화의 세계관이 '생명에 대한 경축'으로 요약된다고 지적한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고대인들은 재생을 기원했다. 심지어 여신문화에서는 도구 제작의 능력이 있는데도 무기나 요새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45) Marija Gimbutas, "Women and Culture", in Weaving the Visions: New Patterns in Feminist Spirituality, eds. by Judith Plaskow and Carol P. Christ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9), pp.63~71.


46) Ynestra King, "Feminism and the Revolt of Nature", in Heresies #13: Feminism and Ecology 4 (1981), p.12.


47) 아이리스 영의 분류에 따르면, '본질주의'는 여성의 경험에 체화되어 있는 여성적 가치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남성적 가치를 거부하는 '여성 중심적 페미니즘'으로 파악된다. 한편 '구성주의'는 성차(性差)란 인간에게 단지 우연적이며 남성과 여성 모두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창조적이고 지적인 활동을 통해 자기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휴머니즘적 페미니즘'과 통한다. Iris Young, "Humanism, Gynocentrism and Feminist Politics", in Women's Studies International Quarterly 8 (1985).


48) '문화 여성주의'는 자연과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어서 '자연 여성주의'(natural feminism)라고 불리기도 한다.


49) Susan Griffin, Reclaim the Earth, Women Speak out for Life on Earth (London: The Women's Press, 1983).


50) Adrienne Rich, Of Woman Born: Motherhood as Experience and Institution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76); 이 글의 우리말 번역은 아드리엔느 리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모성의 신화에 대한 반성>, 김인성 옮김 (서울: 이화여대출판부) 참고.


51) Mary Daly, Pure Lust: Elemental Feminist Philosophy (London: The Women's Press, 1984), pp.394․411; '짜기'(weaving)라는 용어는 1989년에 나온 Judith Plaskow & Carol P. Christ, Weaving the Visions 나 1990년에 나온 Irene Diamond & Gloria Feman Orenstein, Reweaving the World 의 제목에서 보듯이, 생태여성주의적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52) Carol P. Christ, "Why Women need the Goddess: Phenomenological Psychological and Political Reflections", in A Reader in Feminist Knowledge, ed. by Sneja Gunew (London: Routledge, 1991), pp.294~298.


53) Robin Morgan, "Feminism is the Key to our Survival and Transformation", in The Anatomy of Feminism (Oxford: Martin Robertson, 1983), p.283.


54) 강남순, <현대여성신학> (1994), p.180. 여기서 저자는 "여성에게 선천적으로 비폭력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들어있는 "이기성과 폭력적 요소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 안의 폭력성에 대해 논의한 글로는, Bell Hooks, Talking Back: Thinking Feminist/Thinking Black(Boston: South and Press, 1989), pp.94~95 참고; 이러한 맥락에서 레즈비언 여성주의자인 메리 댈리와 흑인 여성주의자 간의 논쟁을 언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미국의 흑인 여성작가인 오드리 로드는 '메리 댈리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인종차별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자매애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차이뿐 아니라, 우리의 공통성까지도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Audre Lorde, Sister Outside (Trumansberg: N.Y.Crossing 1984), p.97.


55) Alice Schwarzer, After the Second Sex: Conversations with Simone de Beauvoir (New York: Pantheon, 1984), p.103.


56) 앞 글, 같은 부분.


57) Sherry B. Ortner, "Is Female to Male as Nature is to Culture?", in Women, Culture and Society, eds. by Michelle Zimbalist Rosaldo and Louise Lamphere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74).


58) Michael E. Zimmerman, "Feminism, Deep Ecology, and Environmental Ethics", in Readings in Ecology and Feminist Theology (1995), p.136.


59) 이네스트라 킹, [상처의 치유: 여성주의, 생태학, 그리고 자연촵문화의 이원론], <다시 꾸며보는 세상> (1996), p.170 참고; 엥겔스 역시 모든 계급관계와 소유관계의 기반이 되는 최초의 억압/피억압 관계가 바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예속이었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해 주었다. F.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김대웅 옮김(서울: 도서출판 아침, 1987), p.76 참고.


60) Sharon Doubiago, "Moma Coyote Talks to the Boys", in Healing the Wounds (1989), p.42.


61) Ariel Kay Sall도, "Deeper than Deep Ecology: The Eco-Feminist Connection", in Environmental Ethics 6 (1984), pp.339~345. 여기서 살레는 아르네 네스의 "The Shallow and the Deep, Long Range Ecology Movement"와 빌 드발의 "The Deep Ecology Movement"를 주로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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