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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에코페미니즘

로즈마리 류터의 생태여성신학 /??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2.

 

 

 

로즈마리 류터의 생태여성신학

 

 

▨ 목차 ▧

         

            1.들어가는 말

            2.생태학적 신학의 태동

            3.생태여성신학

            1)생태학과 여성학의 만남 - 에코페미니즘

              2)에코페미니즘과 신학의 만남 - 생태여성신학

              3)생태여성신학의 다양한 조류들

            4.로즈마리 류터의 생태여성신학

             1)인물소개

              2)류터의 생태학적 인식

              3)이원론적 세계관 극복으로서의 생태여성신학

              4)하나님의 여성성 회복 - 지구와 인간의 화해의 길 제시의 한 방편

              5)계약적 전통과 성례전적 전통

              6)지구 치유를 위한 생태 여성학적 신학 - 「가이아와 하느님」

            5.로즈마리 류터 생태여성신학에 대한 평가

            6.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현대인은 생태학적 위기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의 유일한 삶의 공간인 지구의 자연 환경이 훼손되어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인 공기, 물, 땅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배기 가스로 공기가 오염되어 대기권에 온실막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해수면이 상승하고 개발 도상국들이 사막화되며 기후의 급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생활 오수와 쓰레기, 산업 폐수와 폐기물, 농약의 남용 등으로 물과 땅이 오염되고 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 자원 고갈, 핵의 공포와 위협 등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상 등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생태계의 파괴는 이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이렇듯 인류 최대 관심사로 등장한 자연 환경의 보존 문제에 대해 기독교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적 대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응답 중 하나가 생태학적 신학 또는 생태학적 윤리이다.1) 이러한 현대적 당면 과제 앞에 맞서 생태적 현실의 근원적 문제를 밝히고 진정한 생태 회복을 위한 자신의 과감한 주장을 제시하였던 한 생태학자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우선 이 글이 다루게 될 생태여성신학에로의 접근을 위해 생태신학을 살펴보고, 에코페미니즘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져 나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생태여성신학자로서 로즈마리 래드포드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의 신학을 생태학적 입장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2. 생태학적 신학의 태동

 

   생태학(ecology)이란 말은 집과 학문을 의미하는 헬라어 oikos와 logos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집에 관한 학문, 삶의 공간에 관한 학문이 생태학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공간인 자연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연구하는 것이 생태학이다. 교회와 신학이 생태학을 신학적 사유와 관심의 대상을 삼았던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교회 협의회(WCC)의 주도 아래 교회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5년 아프리카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생태학적 위기 상황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것을 신학과 교회의 핵심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위기 상황을 성서적인 창조 신앙에 근거한 생태학적 신학으로 극복할 것을 촉구했다. 이것은 생태학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최초로 공식 표명한 것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생태학적 성서 해석이 시도되었다. 1983년 캐나다 뱅쿠버에서 열렸던 제6차 세계 교회 협의회 총회는 자연 보전의 문제가 신학적 토론과 실천 과제임을 천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임을 재확인함으로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개교회와 기독교 운동 단체들이 정의, 평화, 생명을 지키기로 결의한 것은 창조 보전의 문제를 신학적 논의의 문제로 등장하게 하고 창조론이 부흥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세계교회 협의회가 생태계의 파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1990년 3월 서울에서 개최했던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JPIC) 세계 대회는 특히 창조 질서의 보전을 신학적 주제로 새롭게 부각되게 하였다. 이 대회는 정의, 평화, 창조 보전을 분리된 개념이 아닌 내적으로 연관된 문제로 인식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구체적으로 모색했다.2)


3. 생태여성신학

 

1) 생태학과 여성학의 만남 - 에코페미니즘

   1960년대 북미에서 일어난 두 가지 커다란 운동은 환경운동과 페미니즘의 태동이었으며, 이 두가지 운동이 서로 조우하여 연계되면서 1974년 에코페미니즘으로 확장 전개되었다.3) 생태운동은 인간의 생존 문제 때문에 환경의 파괴에 관심 하게 되면서 시작되었고 이러한 생각은 자연 역시 그 스스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으로 확장되었고 인간과 자연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세 단계로 페미니즘 역시 확장, 전개되어 갔다. 처음에는 여성의 위치를 남성과 똑같이 만드는 데에 주력하여 그들의 열등한 위치를 넘어서고자 하였고 이에 나아가서 여성을 제2의 성으로 만드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같은, 한층 깊은 차원의 개혁에 관심 하게 되었으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서구 백인 중산층 여성이 중심이 되어 왔던 페미니즘이 제3세계의 여성들, 유색인종 여성들, 노동하는 여성들과 같이 세계적으로 소외되어 온 여성들의 문제에 관심 하게 되었다. 이렇게 그 운동의 내용이 점점 확장되면서 페미니즘은 자연의 억압과 여성의 억압이 가지고 있는 연관성을 분석하게 되었다.4)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프랑수와 드본느의 저서 「여성해방인가 아니면 죽음인가」(197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위험을 가하는 두 가지 요인으로 인구 과잉과 지구자원의 파괴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남성중심적 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생태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성의 잠재력이라고 그녀는 주장한다.5)

 

   이렇게 생태사상과 페미니즘과의 만남으로 에코페미니즘은 등장했다. 이러한 만남이 일어난 것은 현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페미니즘에서 볼 때,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며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피지배 관계에 놓여 있다는 가치관이 기존 세계관의 핵심이다. 생태론에서 볼 때는 문화가 자연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고 문화가 자연을 지배한다는 가치관이 그것이다. 이론적 차원에서 페미니즘과 생태 사상의 접합이 일어난 것은 여성 해방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대안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대안사회의 이미지는 생태론자들의 공동체 이미지와 많이 닮았다.6)

 

2) 에코페미니즘과 신학의 만남 - 생태여성신학

   여성신학의 시작은 흔히 1960년 세이빙 골드스타인의 논문 “인간의 상황 : 여성적 관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후 여성신학은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해오고 있지만 그 다섯가지 공통된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가부장적이다. 남자들에 의한, 남자들을 위한 산물이다. 둘째, 전통신학은 여성과 여성의 경험을 무시하거나 희화했다. 셋째, 신학의 가부장적 성격은 여성들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 그러므로 여성들도 이제 신학을 해야하며 신학적 과업을 동등한 위치에서 형성하는 형성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페미니스트에 의하여 정의되는 여성들의 경험이 기독교 신학의 근거와 규범이 되어야 한다.7)

 

   이러한 여성신학과 에코페미니즘이 만나 생태여성신학으로 확장 전개되기 시작했다. 에코페미니즘이란 기존의 철학, 과학, 종교 안에서 형성되어 온 문화 비판을 토대로 형성된 운동이자 이론이다. 이들은 서구 유럽의 문화적 유산이 여성과 자연에 대해 이원론적 억압이라는 사고를 만들어 낸 유대-기독교의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다. 비옥한 옥토가 아닌 황량한 사막이라는 자연 환경에서 태동된 유대교는 따라서 자연계를 지배하는 초월적 신의 힘을 더욱더 요청하게 되었고 이런 초월적 신관에 의지한 인간 이해로 후기 기독교는 인간 중심주의적 문화와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이 바로 환경파괴를 낳은 현대 서구 기계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수직적, 군주적, 가부장적인 神觀이 자연의 신성함과 그리고 그 신성한 영역으로부터 지구와 여성을 소외시켜 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패권적, 권위적인 기독교의 기존의 신학적 개념들을 좀더 건설적, 상황적, 페미니스트적 그리고 상호 유기적 신학의 새로운 모형을 창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생태여성신학이 만들어져가고 있다.8)

 

3) 생태여성신학의 다양한 조류들

   로즈마리 류터가 「새여성, 새세계」(1974)에서 처음으로 생태여성주의와 신학의 만남을 시도한 이래, 생태여성신학은 지난 20여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왔다. 아마도 그 다양한 전개 양상들은 대개 다음의 여섯가지 주제들 아래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①문화에 대한 역사적, 비판적 분석 ②조직신학적 재해석 ③성서적 재해석 ④해방신학적 적용 ⑤다신앙적 교류 ⑥영성운동.

 

   이 가운데 생태 여성주의와 신학 사이에 최초의 연결이 이루어진 부분이 바로 서구 유럽 문화적 유산과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작업의 영역이다. 생태여성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유대-기독교 전통이 여성과 자연에 대한 이중 억압을 촉진해왔다고 비판하였다. 여성혐오와 자연지배의 결정적 뿌리를 찾기 위해 철학적, 신학적 개념과 전제들이 연구되었다. 그러나 생태여성주의적 종교 및 문화 분석과 생태여성주의 철학과 사회비판이론에 근거한 제휴 학문적 연구라면, 후자는 그 논의의 범주를 신학 분야에 한정시키고 내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데 치중한다. 류터의 「가이아와 하나님」은 생태여성신학적 관점에서 수행된 가장 방대한 작품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역사 비판적 종교연구와 생태 여성신학적 재해석을 결합시켜, 서구 기독교 문화 유산의 근원인 고대 근동과 히브리, 희랍의 세계관을 추적하고 있다.

 

   두 번째 생태여성신학의 흐름에는 조직신학적 재해석의 작업이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적 전제나 방법론이 오늘날의 생태 위기적 상황에 부적합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신학하는 방법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분석, 그리고 죄, 구원, 창조, 계시 등의 신학적 개념에 대한 분석 등이 다루어진다. 그럼으로서 방법과 맥락과 내용과 초점에 있어서 지배적인 전통과는 전혀 다른 생태여성신학이 출현하게 된다.

 

   세 번째 생태여성신학의 방법으로는 성서적 재해석을 들 수 있다. 성서에 기반한 생태신학이 주로 창세기, 그것도 ‘다스림’(창1:28)에 대한 재해석에 치중하는 반면, 생태여성신학은 혁명에 가까울 정도의 수정작업을 벌인다. 여기에는 창세기를 성령신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프리마베시와, 유대-기독교 계약전통에 주목하는 캐롤 롭(Carol S. Robb), 그리고 지혜문학에서 생태학적 통찰을 얻고자 하는 앤 클리포트(Anne Clifford) 등이 있다.

 

   네 번째 생태여성신학의 조류는 해방신학적 작업이다. 전지구적 생태여성주의 담론은 세계경제구조, 군사주의, 생명공학, 재생산, 농업기술 등을 다루면서 구조적인 지배의 양상에 관심해 왔다. 이러한 생태여성주의의 영역은 이론적 분석과 정치활동을 결합시키는 데 중점을 두며, 일차적으로 남반구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다섯 째로 생태여성신학의 영역에는 多신앙적 상호교류를 도모하는 흐름이 있다. 먼저 다신앙적 작업을 하는 이들은 다양한 종교적 진리들의 상호 나눔을 통해 생태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면서 각종 대화 모임과 출판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들은 인간과 지구의 우호적인 관계를 촉진하려는 목표에 비추어 각 종교 전통의 전제들을 성찰하도록 이끈다.

 

   마지막으로 생태여성신학의 급진적 경향에는 영성운동을 흐르는 부류가 있다. 가이아, 어머니, 지구, 소피아, 크리스타, 영, 여신, 신적 모체, 우주적 알 등의 신적 이미지를 가지고 생태영성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이미 기독교 신학의 경계를 넘어선 분파와 기독교 전통의 틀 안에서 상징의 재해석에 머무는 분파로 나뉘어진다. 후자의 사례로 수잔 스미스(Susan Smith)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어머니 지구의 이미지를 통합자, 구원자, 생명수 여자, 성례전, 최초의 그리스도와 일치시킨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이 신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본질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문제와 사회생태적 위기 상황을 퇴보시키는 문제 그리고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라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흐름들이 생태학과 여성주의 그리고 신학이 만나서 성취한 일이다. 그 중에는 세속적 생태여성주의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다른 영역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정확하게 분류하느냐보다, 어떻게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끌어내며, 가부장적 신학구조와 사회변혁에 도움이 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통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필연적인 요청으로 보인다.9)


4. 로즈마리 류터의 생태여성신학

 

1) 인물소개

   로즈마리 레드포드 류터는 가톨릭 신앙을 배경을 하고 있는 여성 생태학자로서 시카고 지역 에반스톤에 위치한 게렛 감리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여성 생태신학자들 중에는 자연의 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서 기독교 전통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사람도 있으나 류터는 가톨릭 신학자답게 자신의 전통을 중시하고 재해석을 통해 여성생태학적 모티브를 찾고자 한다. 

 

   그녀는 상당히 많은 저술 활동을 했는데, 「종교와 성차별주의」(Religion and Sexism, 1974), 「새 여성, 새 세계」(New Woman, New Earth, 1975, 1995), 「여성들을 위한 안내서 : 여성신학을 위한 읽을 거리들」(Womenguids: Reading toward Feminist Theology, 1985), 「여성교회」(Women Church, 1985), 「가이아와 하느님」(Gaia and God, 1992)등 다수가 있다. 특히 「여성교회」에서는 여성교회에 대해 기술했는데, 여성교회의 예배의식은 가끔 성경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세속적 여권주의자들의 종교의식과 흡사하다. 류터는 여성교회를 새로운 해방공동체, 출애굽 공동체로 정의하고 있고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책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세례식과 성찬식 등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성례들이 과격하게 변형되어 앞에서 기술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술의식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띤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가이아와 하느님」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류터의 생태학적 인식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후반 이루, 선진 산업 국가들에서는 생태학의 문제에 대한 주의가 점증되어 왔다. 산업화와 함께 등장한 산업화의 기초로서의 부족한 자원의 문제, 과잉 인구와 기근의 문제, 공해 문제, 공기와 물, 토양의 오염 등의 문제들은 인간 생활을 위협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모든 형태의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반응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태학적 위기가 사회적 지배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점이라고 류터는 지적한다. 이러한 위기는 그 기원을 산업화와 국가적 계획이 국제적으로 추구되어 왔던 권력과 소유권의 어떤 구조들에 두고 있다. 천연자원의 착취는 조정되지 않는 방법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의 지배를 통하여 발생한다. 그것은 차례로 다른 사람에 의한 어떤 사람의 몸의 지배를 불가피하게 한다. 지구의 자원의 남용은 땅, 사람, 기술의 소유권과 중재권을 확립한 소수 지배 계급이 광범위한 다수 사람들의 노동력을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권리와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는데서 이루어진다. 부유한 계층의 경우 이러한 사회적 지배 체제를 도전하거나 변경하지 않고 그들의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사회적 지배는 자연 지배의 문제에 있어서 계열 완성상 빠져 있는 것이다. 환경의 위기는 사회적 지배 체제가 본래대로 남아있는 한, 기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 체제는 소유권자들과 정책 결정자들이 그 대가를 낮은 임금, 높은 가격, 나쁜 작업 환경, 그리고 추출물의 유독성, 부작용 등의 많은 형태로 전가시킴으로서 몇몇 소수를 위한 높은 이윤을 유지하도록 허용하고 있다.10)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을 지켜볼 때, 결국 류터는 생태적 위기와 사회적 지배 체제의 구조를 연관시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인식이 류터의 생태여성신학의 기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3) 이원론적 세계관 극복으로서의 생태여성신학

   이원론적 세계관의 극복은 류터에게 여성신학이 생태문제를 따르는 데 있어서의 주요한 시각을 결정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주요한 시각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억압의 문제를 고립된 것으로 다루지 않고 이러한 생태 문제가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억압의 문제들, 즉 자연과 이성에 대한 억압과 종족과 계급에 대한 억압 등 네 종류의 억압이 구조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고 보는 점이다. 류터는 ‘상호구조지워짐(interstructuring)으로 이 네 가지의 지배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 네가지 종류의 억압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이념적 근거가 되는 것은 인간의 현실을 이원적으로 분류할 뿐만 아니라 한 쪽을 다른 쪽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계층적 이원론이다. 이러한 가치관에 의하여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편의 열등한 편에 대한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시켜 줌으로 해서 그러한 억압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11) 

 

   류터에 의하면 기독교는 고전적 신플라톤주의와 묵시적 유대주의의 계승자로서 남성이며 전투자이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육체에 대한 지성의 우월성과 결부시키고 있다.12) 그녀는 전통적인 기독교가 영혼과 물질, 영과 육체,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론을 가지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발전시켜 영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과 동일화하여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보고 주체로 삼았고, 육체, 감정, 물질적인 것은 여성적인 것이라 하고 저급하고 타락된 것과 동일시하여, 여성과 자연을 지배와 다스림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이 이원론이 극복될 때 참된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분석했다.13)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보면, 자연에 대한 생태학적 여성신학은 존재의 위계 체계적 연쇄사슬과 명령 계통에 관한 서구의 신학적 전통의 전반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학은, 존재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의 관계로서 인간을 비인격적인 자연보다 상위에 놓는 위계체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존재를 사유재산 및 착취할 수 있는 물질적 부로 취급하려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 도전해야만 한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자연에 대한 이러한 지배를 매개하는 사회의 지배구조들, 즉 여성에 대한 남성,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 등의 구조들을 폭로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존재 연쇄 사슬의 근원으로서의 비물질적 정신에서 출발하여, 그 존재 연쇄사슬의 밑바닥이며 명령계통의 연쇄사슬 속에서 가장 열등하고 무가치하며 가장 지배당하는 지점으로서의 비정신적 ‘물질’로 계속 하향해 가는 위계체제 모델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 류터의 절대적 사상이었다.14)

 

   이러한 그녀의 이원론적 편견을 논박하는 근거로 이러한 논리를 제시하기도 한다. “보다 복잡한 생명 형태가 보다 덜 복잡한 생명 형태에 대한 근원이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동물은 자신의 존재를 기초하고 있는 식물들, 곤충들, 다른 동물들, 물, 공기, 토양 등의 생명 과정의 전체 생태학적 공동체에 의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우리의 존재를 가능케 해 주며 뒷받침해 주는 전체 생태학적 공동체가 없다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는 지배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그와는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존재가 의존하고 있는 전체 생태학적 공동체의 복리를 돌보고 촉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책임성만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비인격적인 자연보다 상위에 있으며 또한 그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는 지능의 엄청난 특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능을 이 대지로 전행시켜야 할 책임성과 필연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15)

 

   이제 더 이상 일방적인 지배와 착취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된다. 사회적 지배와 자연에 대한 지배의 상호관련성을 인식하는 생태학적 정의의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와 우리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요구되어진다. 더 이상 인간의 간섭과 착취로 인해 왜곡되고 훼손된 자연을 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태학적 조화 속에 인간과 비인격적인 자연이 살기 좋고 유지할 만한 우주를 창조해 나가는 가운데 새로운 종합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요구되어진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류터는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부장적이고 지배적인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적이며 생명 사랑적인 유산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유산은 억압적인 유산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과거의 성서적 문화를 모두 부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전제하면서, 류터는 자신의 생태신학을 이러한 성서적 유산을 근거로 전개한다.16)

 

4) 하나님의 여성성 회복 - 지구와 인간의 화해의 길 제시의 한 방편

   기독교를 신플라톤주의와 묵시문학적 유대교의 계승자로 보고 있는 그녀는 「어머니 지구와 거대한 기계」에서 기독교야말로 자신의 남성신의 이미지로 인하여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고취시킨 이원론의 종교하고 비판하고 있다. 즉, 히브리 종교는 근원적으로 가나안 시절부터 대지의 갱신을 노래하는 자연축제를 제거하였고 이로부터 여성의 신적(사제적) 기능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신학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현재의 자연적 갱신이 아니라 역사적 미래에 투영된 자연만을 문제 삼고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인 것이다. 결국 남성신 중심의 종교인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자연 및 여성 지배의 사회심리를 정당화했던 것으로 지배와 경쟁 사회를 기초짓는 내적 동인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안목은 결국 신의 여성성 회복을 통하여, 그리고 인간 이해의 여성적(직관적) 시각의 도움 하에서 전 지구와 더불어 인간(노동)의 화해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17)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 그녀는 하나님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에 관한 언어에 논의를 집중한다. 그녀의 분석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신을 “그녀”라고 부를 때 그렇게 강한 반감을 느끼는 것은 “초월적 자아의 규범적인 이미지가 남성적인 신의 이미지 속에서 유대-기독교적으로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러한 초월적인 남성적 자아의 이면에는 자연에 대한 정복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은 모성(the Mother)에 대한 정복과 그것의 초월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의 이미지 속에 우리의 규범적 자아를 투사한다는 인간의 종교심리의 전제는 교리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대해 깊은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기족교를 둘러싼 다양한 전통들의 “신의 언어”를 탐구하고 나서, 보다 근원적인 전통은 신에 대한 여성적인 이미지와 남성적 이미지가 한 짝이 되어 있는 동등한 양식이라고 하며 여성해방을 위한 신으로 양성신(God/ess)을 내세운다. 양성신은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를 포괄하는 신 개념으로 기존의 위계체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며 동등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열어주는 존재라고 한다. 양성신은 종래의 이원론을 통합하는 존재이자 존재의 기초로서 정신과 물질, 이생과 내세, 자신과 타자 모든 이원적인 것을 통합하는 존재의 평화이다. 그녀는 양성신과의 해방적 만남은 소외로부터 부활한 참된 자아와 만남이며, 양성신 곧 진정한 “나는 곧 나다”에 대한 적당한 이름은 없으며, 그것은 우리가 가부장제적인 명명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신에 대한 여성 신학적 이해는 해방의 발전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전된다는 생각으로 어떠한 특정한 신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더 분명해지는 것은 결국 신과 자아는 하나라는 범신론적 인식으로 향한다는 것이다.18)

 

   그러나, 류터는 하나님이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모두 가지고 있다든지, 아니면 삼위일체 속에 여성적 측면이 들어있다는 식의 ‘양성동체적 개념’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부장적 성별 개념을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여성적 측면은 단지 이차적이고 제한적인 기능만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장제를 초월하는 하나님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언어는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예속을 정당화시키는 판에 박힌 언어가 아니라, 여성의 경험을 포괄하는 것, 인간을 밑바닥부터 해방시키며 새로운 공동체를 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강력한 통치자인 아버지의 힘을 중재하면서 사랑을 베풀고 보살펴 주는 어머니의 이미지로만은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류터는 ‘어머니-아버지 하나님’(Mother-Father God)모델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부모 모델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자기 삶을 책임지지 못하도록, 인간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신학은 부모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영적인 발육부전을 덕으로 추켜세워 고착시키며,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과 자율성을 죄악시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원론에도 기초하지 않는 양성신(God/ess)과 해방 지향적으로 만날 때에만 인간은 ‘피안의 세계를 향한 영적 순례’에 오르지 않고, 자신과 육체, 자신과 타자, 자신과 세계 사이의 조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류터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들에서 하나님을 남성과 여성으로 동등하게 묘사하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즉 자그마한 겨자씨를 땅에 심는 농부나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있는 여자, 또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나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있는 여자는 모두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쌍씩 짝지워진 이미지들은 결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비래 우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남성과 연관되거나 종속된 존재로 묘사되어 있지도 않다. 추측컨대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있는 ‘나이 많은 여자’는 사실상 그녀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한 손에는 빗자루를, 또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서 온 집안을 샅샅이 쓸고 다니다 마침내 그것을 다시 찾자, 이웃마저 불러서 잔치를 연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이 잔치는 잃어버렸던 자녀를 되찾은 하나님의 기쁨의 잔치로 해석되고 있다.19)


5) 계약적 전통과 성례전적 전통

   1992년 출간된 「가이아와 하나님」에서 류터는 자연의 파괴와 다른 관계의 파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 새로운 상징적 문화와 영성이 요청된다고 보면서, 이러한 생태신학과 영성을 위하여 ‘계약적 전통’과 ‘성례전적 전통’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두 전통은 양자 택일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계약 전통은 법과 윤리적 책임의 빛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해 주는 반면, 성례전적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우주로의 성육을 경험하게 하고 또한 교제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전통은 가부장적이고 노예제도가 존속하고 있던 사회에서 형성되었고, 또한 고대의 지구 중심적 우주론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가부장적인 구성으로부터 이러한 두 전통을 자유하게 하고, 이 두 전통이 지닌 개혁적이며 생명사랑의 요소들이 현대의 과학적 지식과 세계적인 현실과의 대화에 개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류터의 생태신학의 핵심이다.

 

   하나님과의 계약에 대한 히브리적 사상은 하나님의 땅의 선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계약적 관계는 안식년의 법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고 희년 사상과 연결된다. 이러한 희년사상은 여러 관계들을 주기적으로 바로잡는다는 비전을 의미하며, 동시에 절대적인 메시야적 미래를 투사하고 있다. 이 미래는 창조의 계약의 종국적인 완성을 가져올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회복하고 자연의 불화를 치유하도록 한다.

 

   성서의 희년법 사상은 “생태정의”의 모델로서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불의한 관계를 갖고 동물들을 혹사하며, 또한 땅을 착취하지만, 이러한 상태는 결코 영속적인 올바른 질서가 아니라, 시정되어야 할 무질서라는 것을 희년사상은 일깨워 준다. 이러한 무질서의 바로잡음을 통하여 인간 사회는 올바른 생태-사회적(eco-social)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희년이 이사야서에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에서 동물들 사이의 갈등까지 극복되는 상태로 나타나 있음을 류터는 주지시키면서, 이 계약적 전통이 가지고 있는 치유하는 힘을 강조한다. 신약에서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이다”는 표현에서 이 땅의 새로운 갱신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류터의 “성례전적 전통”은 새로운 그리스도 이해에서 출발한다. 즉 그리스도는 창조의 내재적 근원이며 동시에 그 창조물들의 궁극적인 구속적 치유로서 하나님의 우주적 현시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재해석의 요청 문제는 생태학적인 영성과 윤리적 근거를 기독교 전통뿐 아니라 원주민 사상이나 도교사상과 같이 과거의 전통에서 찾고자 하는 이들이 언제나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류터는 밝힌다. 즉 생태학적인 위기는 인간 경험에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과거 전통에 생태학적 영성이나 윤리가 그대로 형성되어 있는 경우는 없으며, 따라서 현대 상황에 비춘 재해석이 반드시 요청된다는 것이다.20)

 

6) 지구 치유를 위한 생태 여성학적 신학 - 「가이아와 하느님」

   가이아(Gaia)는 헬라신화에 나오는 지구의 여신으로서,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나 린 마르굴리스(Lynn Margulis)와 같은 생태신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말인데, 전 생태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신적 존재로 보고 그것에 붙여진 말이다.21) 다시 말하면, 가이아 이론이란 곧 전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 그 속의 모든 개체들에게 고유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지구라는 유기체가 존속된다. 이 이론 속에서는 인간 중심주의를 말해온 기독교 특유의 입장이 자리할 수 없게 된다. 인간 역시 다른 새명체와 공존하는 자신의 제한적 역할을 감당하는 지구 생명체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이다.22) 가이아는 본래 심층 생태학자(deep-ecology)들 사이에서 기독교의 하나님과 상반적인 개념으로 제시되었지만 류터는 이 둘을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 연관시킬 수 있는 신학을 세우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23) 

 

   가이아 이론에 의하면 지난 4억만년 이래로 대기중의 산소비율이 21%로 고정될 수 있었던 것은 밀림 지역에 살고 있는 흰개미들의 덕분이라고 한다. 지구 상에 생명체가 생겨난 이래로 지구를 향한 태양열이 30-50% 정도 늘어났으며 그로 인한 지구상의 산소량 역시 증가하게 되었는데, - 산소가 1% 증가하는 경우 화재 발생률이 60% 이상 높아지게 된다. - 이 증가된 산소량을 소비시킨 것이 바로 흰개미들에 의해 방출된 메탄이라고 한다. 이처럼 류터는 전통적 기독교가 자연을 얼마나 대상화하였으며 지배의 논리(자연지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종에 대한 주인의 지배)를 정당화해왔는가를 지적한다.24)

   계약적 전통과 성례전적 전통에서 류터는 자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신성한 소리를 듣는다. 하나는 우리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전해주는 법과 힘의 소리이며, 대부분 약자를 위한 소리인 “하나님의 소리”이다. 또 다른 하나의 소리는 역사 속에서 남성적인 소리에 의해 억눌려 왔지만, 새롭게 들리기 시작하는 소리이며, 법과 지성적인 지식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우리를 새로운 교제로 인도하는 소리, “가이아의 소리”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분류하자면, 계약적 전통에서는 자연과 약한 자를 향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또한 인간만이 아니라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며 구속자로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전통인 성례전적 전통에서는 가이아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건강하고 좋은 사회는 남성과 여성, 종족과 종족, 인간과 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 세대와 세대, 그리고 현재 살아있는 생명들과 앞으로 탄생하게 될 생명들 간의 공평을 추구하는 “공평의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좋은 사회는 과학기술적인 교정만으로는 실현되기 어려우며, 모든 관계에서 지배와 착취의 구조로부터 “생명사랑의 상호성”의 구조로 재구조화하는 것을 요청한다.25)

 

   류터는 지배문화 일체를 남성적 단일신론의 결과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독교 문화와 성서전통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는데 류터의 중요성이 있다. 그가 ‘Gaia’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과학적 세계관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의식, 곧 종교적 비전으로서의 생태학적 영성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기독교 전통에서 강조해온 추월적 남성적 신 개념을 여성적 내재적 신성으로 대치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오히려 류터는 생태학적 여성의 빛에서 기독교 전통을 새롭게 조망하기 시작한다. 종래의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해석의 정당성을 얻지 못했던 본문을 새롭게 읽어보려는 것이다.26)


◑「가이아와 하나님」......서평 : 이인경(영남신학대학교 강사)27) 요약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하는 데 기독교가 주된 역할을 했다는 린 화이트(Lynn White)의 비판 이후, 기독교 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로즈마리 레드퍼드 류터의 「가이아와 하느님 : 지구 치유를 위한 생태 여성학적 신학」은 이러한 신학적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살아 있는 거룩한 지구인 가이아와 성서 전통의 유일신론적 신인 하느님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와 더불어, 지구 치유를 이 책의 목적으로 설정한다. 새로운 생태학적 영성을 하나의 종교적 비전으로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가이아는 인격화된 존재로서 내재적 신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적이며 기독교적인 남성적, 유일신론적 하느님이 지구로부터 소외되어 지구를 소홀히 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적대적인 개념이라고 이해하면서, 예배의 중심인 하느님을 가이아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런 비판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지만, 추월적 남성신을 내재적 여성신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는 ‘신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구를 치유 - 남성과 여성, 계급과 국가, 인간과 지구 사이의 관계를 치유 -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안에 부분적으로 들어 있는 서구 문화가 정당화시켜 온 지배 방식의 인식과 변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개혁주의 여성신학자임을 알 수 있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비록 가부장제적 상황에서 형성되었지만, 성서와 기독교 전통 속에는 가부장성 뿐만 아니라 그 가부장성을 비판할 수 있는 규범적 근거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남성과 여성, 지배 그룹과 종속 그룹 사이의 파괴적 관계, 그리고 인간이 상호 의존적으로 속해 있는 생명 공동체의 파괴를 조장하는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근원들을 평가한다. 또한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지구 사이의 치유 관계를 조성할 수 있는 유용한 개념들을 발견하기 위해 기독교와 서구 문화의 유산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저자가 바빌로니아, 헤브루, 그리고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둔 서구 기독교 전통 주변에 이런 문화적 토론을 구성하는 이유는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이 두가지이다. 첫째는 서구 기독교 전통이 저자의 전통이며 따라서 저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전통은 제국적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를 통하여 특별히 세속적이며 과학적인 형태로 세계를 형성해 왔고 계속 형성해 가고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창조, 파괴, 지배와 허위, 그리고 치유 4부로 구성되었는데 각 부가 창조, 심판, 죄와 타락 그리고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학의 익숙한 범주들에 해당됨을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마지막 장으로서 10장은 자연과의 상호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의 비지배적 관계를 함축하는 치유사회를 그리고 있다. 저자는 풍요로운 서구인이 생산, 소비,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낭비의 패턴들로부터 지속가능한 생태학적 패턴들에게로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 지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러한 전이가 남성과 여성, 부유한 계층과 가난한 계층,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 지배의 패턴들을 새롭게 고치지 않은 채 단지 기술적 해결의 수준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현 사회 지배의 패턴을 죽음의 비타협적인 체제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체제 안에서 세계를 치유하고 새로운 지국적 생명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하려면 ‘축제와 저항의 기초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초 공동체란 우리가 이와 더불어 살고 노동하며 기도하는 직접적인 지역 단체를 의미한다. 저자는 그런 지역 공동체들이 할 수 있는 세 가지 연관된 일을 제시한다. 첫째는, 새로운 지국적 생명의식을 양육하고 상징하는 개인적 치료 요법, 영성, 그리고 집단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둘째는, 어느 정도 조절 가능한 지역 기관, 가정, 학교, 교회, 농장, 그리고 지역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사업을 생태학적 삶으로 안내하는 단체로 활용하는 것이다. 셋째는, 현재의 죽음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 속에서 지역적, 국가적 그리고 세계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조직망을 구성하는 것이다.

  

5. 로즈마리 류터 생태여성신학에 대한 평가

 

   1) 일단 한국적 전통의 토대 위에 신학을 하고, 살아가는 개인적인 견해로 류터의 신학을 짧게 비판해본다면, 그녀가 지구 생태계의 근원적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지배체제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지배 체제적인 hierarchy적 사회는 인간과 자연에 크나 큰 상처를 가져다주고 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인간 대 자연이라는 구도는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인간의 절대적 우월성을 가진 채 인간 아래 있는 자연이라는 의식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자연의 무분별한 훼손까지도 불가피 한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자연의 파괴의 주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제기한 지배구조 전통에 있어서 가부장적 전통을 근원적 원인으로 삼는 것은 아시아적, 특히 한국적 전통 속에서는 타당성을 찾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본다. 지배 방식이 가부장적 체제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적 전통에서 가부장적 전통은 나름의 미덕이고, 사회의 질서를 이루어온 근거였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가부장적이다’라는 말조차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족 중심적 사회를 구성해온 우리 나라 전통 가운데, 가부장적 전통에서 부정적 요소만을 찾을 순 없을 것이라 본다. 그 속에는 분명히 이 민족을 이 민족화 시켜온 전통으로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류터가 제시한 가부장적 체제의 해체를 통한 문제 해결의 방법은 각 민족의 전통이 다른 상황 가운데 보편성을 가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단점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 의해 그녀의 신학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생태학적 신학에 대한 무의식적 삶에 새로운 생각의 기회를 제공하며, 기존 가치관의 틀을 깰 수 있는 나름의 도전을 던저주고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평가해 볼 수 있다.

 

   2) 앞에서 「가이아와 하느님」의 서평의 말미에 보면 그녀의 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를 접하게 된다.28)

     “우리는 「가이아와 하느님」에서 류터의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 성급하게 단정지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저자는 위험에 처한 지구의 생명 시스템의 많은 부분을 구하려면 주요한 변화가 필요한데, 이를 위한 시간이 짧다고 말한다. 저자는 상황의 긴급성 앞에서 변화의 가능성이 낙관적인지 비관적인지를 질문하는 것은 질문자가 이런 위기에 대해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입장 모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낙관적이라면 변화는 불가피하며 이런 변화가 사물의 자연적 과정 안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비관적이라면 변화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주의나 비관주의의 양자 택일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비전과 생명의 구체적 공동체에 계속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심 있는 열정’을 요구하는 이 책은 생태계의 위기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녀의 생태여성신학은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이제까지 의식하지 못하던 분야에 관해 새로운 사고의 틀을 가지게 하였고, 빠르지도 그렇다고 무관심하게 기다리는 것도 아닌, 지속적인 관심과 생태계 파괴 극복을 위한 새로운 노력이라는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는 장점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6. 나가는 말

 

   생태계의 파괴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심각한 위기일 수 있지만, 더불어 그 자연과 함께 공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도 크나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생태계의 파괴를 바라보며, 그 원인 제공자로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재앙과도 같은 생태계 파괴를 그저 지켜보아야만 하는가? 류터는 이와 같은 현실 가운데 침묵으로 있으려 하지 않았다. 신학적 색깔이 어떻든, 그 신학이 급진적이든, 아니면 보수적이든, 마땅히 신학을 하며, 이 땅을 맡은 청지기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그녀의 외침은 우리에게 신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생태여성신학적 견해가 오늘날 우리에게 절대적인 해결방법을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분명한 건 우리에게 마땅히 깨어있어야 할 분야와 시점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의 생태적 위기로 인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땅의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신학 하는 사람이며, 목회 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오늘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