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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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6일 by 김 승엽
바그다드 카페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모습을 잃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만든 페미니즘 성향의 영화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인, 자신을 문츠크테크너 부인이라 소개한 야스민 과 아이들과 무능력하고 가정에 관심이 없는 남편으로 인해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삶을 잊어 가는 브렌다라는 여인이 그 주인공들이다. 바그다드 카페라는 이질적인 이름의 카페는 붉은 모래 빛을 받아 하늘마저 붉게 물든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모텔 겸 주유소 겸 카페지만 이 두 여인과 주변인들에게는 마치 기나긴 인생이란 사막을 건너 만난 오아시스일지도 모른다. 처음 남편과 헤어지고 사막을 걸으며 야스민이 발견한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빛은 이 두 여인을 상징한다. 이 두 개의 빛은 사막의 하늘에 떠서 트럭 운전자들로 대변되는 여행자들의 길을 인도하는 별과 같다. 어쨌든 야스민이 도착한 곳은 막 남편이 떠나 마음에 상처를 입은 브렌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카페였다. 사실 과거 인종차별이 심했던 독일 출신의 여인과 흑인 여인의 만남이 그리 달가울 리 없다. 더구나 지친 일상에 찌들어 뭐든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브렌다에게 야스민이란 여자는 남편과 가방이 바뀌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남자 옷만을 가득 가방에 가지고 다니는 이상한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여인은 어머니로서, 여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아이가 없어서인진 모르나 유난히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야스민과 브렌다가 마음을 열어 가는 모습은 이러한 모성으로서의 두 여인의 교감을 나타내고 있다. 작품 중간 야스민이 보게 되는 푸른빛의 환영(비전)들은 이러한 두 여인의 미래와 상징성을 가진 영화 내에서의 예언과 같다.
주목해야 할 점은 야스민의 내적 외적인 변화인데 남편과 헤어지고 바그다드 카페에 오게 된 야스민의 모습은 뚱뚱하고 못 생긴 아줌마의 모습 그대로 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카페 내 사람들과의 교감 그리고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서 역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게 된다.
루디 콕스 역으로 분한 잭 팰런스의 그림들은 그러한 그녀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차츰 변해 가는 그녀의 모습은 여덟번째로 변하면서 부드러워지고 편안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여성스럽다는 인상을 관객들에게 심어주게 되는데 이게 감독이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외적 아름다움이 아닌 내적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이러한 야스민의 변화를 보며 그녀가 아름다움은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여성스럽다는 사실에 모두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그러한 여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모르지만 바그다드 카페에서 브렌다와 야스민의 여성성으로의 회귀는 내재된 여성스러움이 억압에 의해서가 표출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마술을 배워 카페에서 마술을 공연하며 손님들을 끌어 모으는 야스민은 어쩌면 브렌다와 살라모, 루디등 카페의 사람들에겐 마치 마술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비자가 만기가 되어 돌아가고 난 뒤의 카페의 황량함은 이러한 야스민의 가지고 있는 여성스러움이 가진 힘, 마치 마술과 같았던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바그다드 카페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하얀색 원피스만큼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처음 그녀가 바그다드 카페에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돌아온 야스민을 바라보는 브렌다의 모습과 그 두 사람이 나누는 포옹은 남성들의 감격적이고 벅차오르는 열혈의 느낌이 아닌 여성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정적인 정신적 교류와 심리를 보여주는 감성의 포옹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그 두 여인의 쇼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가진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화려한 바그다드는 두 여인이 함께 살아가며 이룩해낸 마법의 성이다. 지친 여행자를 포옹하고 안아줄 수 있는 것은 여성스러움이다.
브렌다의 경우를 살펴보자 처음 등장했을 때의 브렌다의 모습은 남편과 자식들에 의해 아주 피곤해 보인다. 그러한 그녀가 야스민과 함께 지내며 변해가는 모습은 야스민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무심코 넘어가버릴 것 역시 아니다. 그녀가 야스민과 쇼를 할 때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을 보면 믿지 않는다는 그러한 눈빛이다. 그녀는 자식과 남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와 삶은 찾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찾는다. 아들 살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흐르며 자식을 이해하고 남편에 의지하거나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 야스민이 진정한 여성다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브렌다는 잃어가는 여성다움을 다시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마지막 루디가 야스민에게 청혼할 때 야스민의 대답 "브렌다와 상의해 보고요" 은 두 사람이 여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러한 감독의 논리, 여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의 논리에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영화 내에서 비추어진 남성의 모습이 불필요하게 보여진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남성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두 여인의 아름다운 교류로 진정한 여성스러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촬영 기법적 측면에서 영화는 어둡고 붉은 계열의 필터를 사용해서 직사광선을 배제한 영상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붉은 계열의 필터가 주는 어두움이 화면 상단에 치우침으로 해서 어둡다기 보다는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또 이러한 필터의 사용이 야스민이 비전을 볼 때는 푸른 계통으로 바뀌어서 몽환적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또 재미있는 부분은 작품 초반의 컷 분할로 등장인물의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빠른 화면 전환이 인물들의 감정의 기복이 심함을 보여주면서 색 다른 분위기를 전달한다. 마치 실험 작품에서 보아오던 이러한 컷 분할이 적절하게 사용되어 이질감보다는 작품에 주목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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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까페, '에코페미니즘'과 부활의 노래
사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생각이 정리가 안되더군요. 처음 시작할 때 나오는 음악(재즈인가?)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과 영화의 대부분이 상징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뿐... 이상의 시 '오감도' 읽고 나서 이해가 되던가요? 이런 건 그냥 얌전히 있는게 중간이라도 가는 것인데 그냥 상징적인 것을 나열해보죠.
영화의 시작, 여주인공은 걸어서 옵니다.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외진 도로변 까페 '바그다드'를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도 없이 걸어서(하필이면 '왜' 걸어서?)... 여주인공의 이름은 '자스민'인데 이름과 달리 예쁘지도 않은 중년의 독일 여성입니다. 그녀가 이 곳을 '왜' 그토록 찾으려 하고 이곳에 '왜' 흡족해서 머무려하는지 모릅니다. 단지 그녀는 이 황량하고 피폐해진 밑바닥의 장소, 그리고 이 장소에나 어울릴 듯한 각박해진 밑바닥의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줍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뒤죽박죽 엉켜 버린 가게를 청소하죠? ('왜'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시작했을까?) 묘한 신비로운 영향력을 발휘해서 되바라진 주인집 딸애의 어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받아들이고 점원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해해주고 은퇴한 화가의 마지막 예술혼을 되살려 놓습니다. 그리고 신비한 마술을 통해 이곳을 다시 활기찬 장소로 만들죠(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마술을 배웠는진 모릅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많은 생략과 상징으로써 이런 부활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름대로 해석해봤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처럼 비약이 있지만...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까페 바그다드! 이건 우리의 황량해진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버려진 인간관계가 될 수도, 현대문명의 상태가 될 수도 있고 위기에 처한 지구의 생태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스민은 이런 하나하나를 어루만지고 차근차근 정리하고 가꾸는 존재입니다. 어머니인 지구, 어머니인 대지(가이아), 대지의 여신(테티스?) 암튼 중년의 여성=어머니=재생과 생명의 상징인 이런 공식은 자스민을 통해서 드러나죠. 사실 자스민은 중년의 자식을 서넛 정도 낳은 어머니의 체형(?)을 갖춘 대로입니다.
전 까페가 우주 공간속에 떠 있는 지구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염된 지구를 재생시키는 선지자로서....황량한 사막에 꽃을 피운다 (소설 나무를 심는 사람) 에코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영화를 보았.... 살림(homework)은 살림(revive)이라는 점에서, 가꿈이라는 점에서..
위에서 제가 '왜'라는 걸 여러번 강조마크를 찍어놨는데 일반 사람의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것이기에... 그러나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에도 사실 '왜'라는 걸 붙일 가능성.. '왜' 우린 이 지상에(영화속 까페) 오게 돼나, 우린 '왜' 직업, 생계 등등에 집착하고 몰두하나(자스민이 한 청소와 타인에 대한 애정)? 우리의 지능과 감정과 헌신하는 능력과 사랑하는 능력, 동물에게는 없는 그 위대한 능력은 어디서 왔나(자스민의 마술능력).. 우리가 자스미에게 갖는 의혹을 우리에게 향해도 매일반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 '왜'라고 질문하는 능력을 상실했던지 아니면 자스민이 보인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태도, 아무 대가없이 상대를 돕는 자세 등등 너무도 당연한 것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고 '왜'라고 의심을 품는 상태가 되었던지... 자스민이 어디서 왔는진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왜 태어났는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스민이 왜 대가없이 일을 하듯, 우리 역시 대가없는 어떤일에 의심을 갖는 자세는 피해야 할듯...
(뭔 소린지.... 정말로 낙서장에 끄적이던 원본 그대로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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